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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諱(휘) 신달(莘達)
용연(龍淵)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로리 350-1번지에 있는 우리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이신 태사공(太師公) 휘 신달(諱 莘達)께서 탄강(誕降)하신 연못으로 파주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시조 태사공의 탄강 설화(始祖 太師公의 誕降 說話)
이 연못은 태고적부터 형성되어 지하수가 솟아나는 큰 연못으로 용연이라 부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용연에는 용인(龍人)이 살고 있었는데 상서로운 일이 있을 때는 뇌성벽력을 치며 폭풍우가 몰아쳤다고 한다.
예로부터 종중(宗中)에 내려오는 보첩(譜牒)과 그 밖의 문헌에 의하면 신라 진성왕 7년(서기 893년) 8월 15일 용연 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옥함(玉函)이 떠오르자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고을 太守에게 알리자 태수가 용연에 가보니 옥함이 떠올랐다가 용연 가운데로 말려 들어가서 손길이 닿지 않아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날이 저물 무렵 용연가에서 빨래를 하던 한 노파가 옥함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오색의 깃털에 싸인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황홀한 서기(瑞氣)를 발산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사내아이는 온 몸에서 광채가 솟아나 눈을 부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 분이 바로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始祖)이신 태사공(太師公) 휘 신달( 諱 莘達)이시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이곳 용연(龍淵)에서 이렇게 탄강(誕降)하시게 되었던 것이며, 그 이후부터 세인(世人)들은 이곳을 “윤씨 연못”이라 일컬어 오고 있다.
윤씨(尹氏)의 성(姓)을 갖게 된 연유는 옥함에 윤자(尹字)가 새겨져 있었다는 설(說)과 나오실 때 손바닥에 윤(尹)이라는 글자가 뚜렸했다는 설(說) 등이 있다.
이후 노파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받고 성장하셨는데 타고난 인품과 탁월한 재능으로 학문과 무예를 익히시어 고려(高麗)왕조에서 출중한 인재가 되셨다.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諱(휘) 신달(莘達)
우리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붕괴(崩壞)되고 후삼국(後三國)의 혼란기(混亂期)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再統一)되는 역사적(歷史的)인 일대 변역기에 탄강(誕降)하시어 마침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위인(偉人)이시다.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 동료(同僚)들과 협력(協力)하여 궁예(弓裔)를 무찌르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推戴)하여 백성(百姓)의 호응(呼應)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新羅)는 귀족사회(貴族社會)의 부패(腐敗)와 국왕(國王)의 난정(亂政)으로 도처(到處)에 도적(盜賊)이 횡행(橫行)하여 각지(各地)에서 토호(土豪)들이 반란(反亂)을 일으키는 등 동난기의 와중에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新羅)는 국력(國力)이 극도로 쇠퇴하고 각처에서 군벌(軍閥)이 봉기하여 궁예(弓裔)가 송도<개성>(松都<開城>)에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建國)하고 강원도(江原道), 항해도(黃海道) 및 평안도(平安道)까지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弓裔)는 그 후 철원(鐵原)으로 국도(國都)를 옮기고 있었는데 왕건(王建)은 그 휘하에서 대장(大將)으로 있었고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왕건(王建)의 동료(同僚)이셨다.
궁예(弓裔)는 천성이 잔인 횡포하여 폭정과 학살을 자행하여 민심이 완전히 이탈되었기 때문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제장(諸將)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물리치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때 궁예(弓裔)는 궁중(宮中)에서 주색(酒色)에 잠겨 있다가 왕건(王建)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건(王建)과 윤신달(尹莘達)이 쳐들어온다니 나는 이제 끝났다』하면서 궁중(宮中)을 빠져나가 도망치다가 강원도(江原道) 평강(平康) 산골에서 백성(百姓)들에게 피살(被殺)되었다.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등극(登極)과 동시에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고치고 송도<개성>(松都(開城)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그 뒤에 신라(新羅)를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수차 정벌한 사실이 있었는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때마다 왕건(王建) 태조(太祖)와 같이 출정하셨던 것이다.
왕건(王建) 태조(太祖)가 고려(高麗) 건국(建國)한 뒤 18년이 지난 서기 935년에 신라(新羅)의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傳)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태자(太子) 이하 신하(臣下)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려(高麗) 왕건(王建) 태조(太祖)에게 나라를 바치고 투항(投降)하였다.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투항(投降)하여 온 경순왕(敬順王)에게 왕녀(王女)를 하가(下嫁)시켜 별궁(別宮)에 거주(居住)케 하면서 백관(百官)의 상위(上位)로 우대하였다. 그때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서라벌에 동경<경주>대도독부(東京<慶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대도독(大都督)으로 하여금 신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 다음해에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끝까지 반항(反抗)하는 후백제(後百濟) 신검(神劍)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 드디어 삼국(三國)을 다시 통일(統一)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고려(高麗) 태조(太祖) 19년(936)의 일이었다.
왕건(王建) 태조(太祖)가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하기까지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항상 왕건(王建)에 대하여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백성을 다스려 천하(天下)를 이롭게 해야 합니다』라고 충간(忠諫)하였는데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그 충간(忠諫)을 감명 깊게 받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조회석상(朝會席上)에서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중신(衆臣)들에 대하여 『이 대업(大業)을 이룬 데는 윤신달(尹莘達)의 공(功)이 크다』고 유시(諭示)하였던 것이다.
그 때 공신(功臣)으로 1등이 5명, 2등이 12명, 3등이 10명, 4등이 2명으로 모두 29명이 책훈되었는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2등공신(二等功臣)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官爵)을 받으셨다. 태사(太師)라는 관작(官爵)은 태부(太傳) 태보(太保)와 더불어 3공(三公)의 예후(禮遇)를 받는 직위(職位)였다. 이때 같이 공신(功臣)으로 책훈(策勳)된 인물 중(人物 中)에는 신숭겸<평산신씨시조>(申崇謙<平山申氏始祖>) 배현경<경주배씨시조>(裵玄慶<慶州裵氏始祖>) 홍유<의성홍씨시조><洪儒<義城洪氏始祖>) 복지겸<면천복씨시조>(卜智謙<沔川卜氏始祖>) 김선평<신안동김씨시조>(金宣平<新安東金氏始祖>) 류차달<문화류씨시조>(柳車達<文化柳氏始祖>) 이도<전주이씨시조>(李棹<全義李氏始祖>) 장길<안동장씨시조>(張吉<安東張氏始祖>) 등이 있다.
공(公)의 휘(諱)는 신달(莘達)이요 일휘(一諱)는 화신이시며 시호(諡號)는 소양(昭襄)이시다.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癸丑) 음력(陰曆) 8월15일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 아래 용연(龍淵)에서 탄강(誕降)하시었다.
공(公)께서 파평산(坡平山)과 용연(龍淵) 부근에서 성장하심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니시게 되고 재기(才器)가 뛰어나시어 날로 영특한 자품(姿品)을 갖추시게 되었다. 공(公)께서는 자라나시면서 학문(學問)을 익히시고 또 파평산(坡平山)에 올라가 무술(武術)을 연마하신 후 성년(成年)이 되시면서 어느 재상댁(宰相宅)에 문객(門客)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 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國王)으로부터 그 재상(宰相)에게 제문(祭文)을 지으라는 왕명(王命)이 내려졌다. 그 재상(宰相)이 자택(自宅)에 돌아와서 제문(祭文)을 지으려 하였으나 머리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태사공(太師公)께서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하시면서 의군신지유죄감수재앙(宜君臣之有罪甘受災殃) 해초목지무지등몽초열(奚草木之無知等蒙焦熱)이라고 써서 재상(宰相)에게 제시하시자 재상(宰相)은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名文)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제문(祭文)을 지어 국왕(國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글 뜻은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다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 무지한 초목까지 타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었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 재상(宰相)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官職)에 오르시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文獻)은 없다.
고려(高麗) 건국(建國) 후 25년만인 서기 943년에 왕건(王建) 태조(太祖)가 승하하고 제2대의 혜종(惠宗)이 등극하였다. 원래 동경<경주>대도독부(東京<慶州>大都督府)와 서경<평양>대도독부(西京<平壤>大都督府)에는 가장 신망(信望)이 높은 중신(重臣)을 보냈던 것인데 혜종(惠宗)은 등극과 동시에 안심(安心)이 되지 않았던지 서경대도독부사(西京大都督府使)에는 가까운 왕족(王族)을 보냈고 동경대도독부(東京大都督府)에는 태사공(太師公)을 보냈다. 그때 태사공(太師公)의 보령(寶齡)은 52세였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동경(東京)으로 부임하시었으나 한편 아드님이신 功臣公(諱先之)께서는 종신(終身)토록 송경(松京)을 떠나지 못하셨다.
그 이유는 중국(中國)에서 천자(天子)가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제후공(諸侯王)(오늘의 총독<總督>)을 봉하는 때에는 아무리 신임(信任)하는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제후왕(諸侯王)의 장자(長子)를 볼모로 왕경(王京)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일에 근거한다. 따라서 혜종(惠宗)도 그렇게 신임(信任)하는 분을 보내면서도 신라(新羅)의 유민(遺民)이 많았기 때문에 만일(萬一)을 염려하여 공신공(功臣公)을 송경(松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태사공(太師公)께서 동경(東京)으로 부임하셔서 30년간 재임하시다가 81세에 서거하셨는데 그간에 부자(父子)분께서는 한번도 상면(相面)하실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고려(高麗)에 바칠때 태자<마의태자>(太子<麻衣太子>)와 중신(重臣)들이 크게 반대하였던 것이므로 신라(新羅) 백성(百姓) 中에도 원래가 적대시 하였던 고려에 대하여 불복(不服)하고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기타 어느 문헌(文獻)에도 신라(新羅) 유민(遺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기(史記)가 전혀 없다 그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태사공(太師公)께서 대도독(大都督)으로 부임하셔서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통치함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왕도정치(王道政治) 즉 도의정치(道義政治)를 베푸셨는지 그 선정(善政)의 정도를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조정(朝廷)에서도 30년이나 유임시킨 것도 태사공(太師公)의 통치가 목민(牧民) 위주의 정치였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태사공(太師公)의 묘소(墓所)가 실전되었다가 여러 百年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地方民)들로부터 그곳은 윤능골(尹陵谷)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新羅) 유민(遺民)들이 태사공(太師公)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東京)에 머무시어 30년 동안이나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에 충성된 백성(百姓)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公)이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는 폐지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맡기고 경주(慶州) 일개군(一個郡)만 다스리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공(公)이 고려(高麗) 광종(光宗) 24년 계유(癸酉973>)에 주소(任所)에서 서거(逝去)하시니 향년(享年) 81세이셨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경주(慶州) 기계현(杞溪懸) 벌치동(伐治洞)(현 포항시 기계면 봉계동<現 浦項市 杞溪面 鳳溪洞>) 운주산(雲柱山) 구봉산(九峯山) 아래 서원(西原)에 모시었는데 중간(中間)에 실전(失傳)되었다가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1737)에 후손(後孫) 봉정공(鳳廷公)이 본부영장(本府營將)이 되어 대부윤(大夫尹)이라는 비(碑)돌조각을 얻었으나 확정을 짓지 못하다가 영조(英祖) 15년 기미(己未)(1739)에 익헌공<휘 양래>(翼獻公<諱 陽來>)께서 본도(本道)에 부임하시어 더욱 확증을 얻어서 심묘(尋墓)하여 개봉축(改封築)하고 영조(英祖) 16년에 입비(立碑)하였다. 배위(配位) 묘소(墓所)에 관해서는 봉강재(鳳岡齊) 소장(所藏)의 태사공(太師公) 심묘기(尋墓記)에 경주(慶州) 남면(南面) 봉동산(鳳洞山) 아래 박달리(朴達里) 감용자좌오향득수진파(坎龍子坐午向得水辰破) 동서분(東西墳)으로 모시고 비석을 묘 아래에 묻었다고 전(傳)하나 태사공(太師公) 묘표기(墓表記) 및 묘지(墓誌)에는 합장(合葬)되시었다는 기록이 있어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시조 태사공 묘표
아아! 여기는 파평윤씨의 시조 고려의 태사 휘 신달(莘達)의 묘소이다. 태사공께서 처음에 파평에서 탄강하셔서 고려의 태조대왕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여 공신이 되시고 벼슬은 태사삼중대광이시다. 돌아가신 뒤 여기에 장례를 모시니 곧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구봉산 아래 유좌(정동향)의 언덕이다. 무덤 앞에는 옛날의 표석이 있었는데 투장한 사람들이 부수고 흩쳐서 숨겼기 때문에 자손들이 급기야 그 무덤 있는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간혹 전기와 전하는 말들이 족보에 실리기는 했으나 그 또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24세손으로 태위공파의 이(理)公이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에 찾아다니다가 얻지 못하였고, 영조(英祖) 13년(丁巳)에 봉정(鳳廷)이 영장(營將)이 되어 부임하고 보니,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일컬어 윤태사의 무덤이라는 말이 들리기에 바로 묘하에 가서 근처의 흙을 파헤치며 확인한 결과 “대부윤(大夫尹)”이라고 크게 세 글자가 새겨진 부서진 빗돌 한 조각을 얻게 되었다.
이에 종중 사람들이 모두 뛸 듯이 기뻐하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찾아낸 석자(大夫尹)만 가지고는 만족히 확증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염려하였다. 그러다가 이(理)公의 아들인 판서 양래(陽來)公이 본도(경상도)에 부임하였고 관하 병사를 더 내어 무덤의 좌우를 두루 7일 동안을 파헤치며 수색한 결과 급기야는 선지, 금강(先之, 金剛)이라고 네 글자가 새겨진 작은 조각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곧 태사공의 아드님이신 삼한공신과 좌복야 양세의 휘자이시다. 빗돌의 자획이 먼저 발견된 것과 비교하여 크고 작기는 하나 실은 서로 같은 자획으로써 큰 글자는 전면의 표기이고 보다 작은 글자는 후면의 음기임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으니 모든 정황으로 살펴 볼 때 이곳이 태사공이 묻혀 계시는 곳임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모든 우리 윤씨 성을 가진 자가 기이하고 다행하게 생각지 않는 이가 없고 기쁨으로 서로가 경사스럽게 여기었다. 이에 혜교(惠敎)公이 양래(陽來)公과 부사 東卨公, 승지 휘정(彙貞)公, 현령 사도(師道)公, 참판 용(容)公과 더불어 이르기를 『우리 시조의 성하신 덕과 위대한 공으로 해서 대대로 계승하여 이제까지 거의 천년에 이르고 이조시대에 들어와서 네 분 국모가 탄생하셨으니 더욱 성하였다. 그런 즉 산소에 대한 일을 마땅히 삼가고 지켜서 틀리지 않도록 해야 하거늘 중간에 잃었고, 한번 잃은 것은 다시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데도 이제 또 찾았으니 이 어찌 때때로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수가 있고, 또한 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빠지고 없어진 것을 이어서 보충하고 마련해서 오래도록 영구하게 전할 것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달려 있다』고 하고선 팔도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에게 두루 알려 각각 힘을 모아 도우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휘정(彙貞)公이 이 고장으로 부임하게 되매 이 일을 도맡아 보게 되었고 돌을 깎아서 이 산소의 모든 것을 표하게 되기에 혜교(惠敎)公이 간략하게 그 사적만을 기록한다. 공의 언행과 사업같은 문헌이 증거할 수가 없다. 후손들은 번성해서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어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25대손이조판서혜교근기(二十五代孫吏曹判書惠敎謹記)
24대손경주부윤휘정근서(二十四代孫慶州府尹彙貞謹書)
[출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諱(휘) 신달(莘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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