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wilwil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에 당한 부상자를 매트리스를 들고 다니며 옮기거나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옮겼던 광주 시민들
5월 21일 그날도 광주기독병원 앞은
혈액이 부족하다는 방송을 듣고 나온 시민들로 줄이 길게 늘어졌는데
헌혈을 마치고 나온 학생 한 명이 몇십 분 만에 다시 병원에 가게 됨
사망한 채로.
"분명 병원을 나설 땐 환히 웃는 모습이었는데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죽은 채 병원으로 되돌아왔는데 안 놀랄 사람이 있었을까요. 당시 모든 의료진이 충격에 휩싸였어요."
(당시 광주기독병원에서 간호감독으로 근무했던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관장,
22.05.13 5·18 재조명 세미나 中)
당시 부상자를 위해 헌혈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 박금희 열사는 이때 고작 고등학교 3학년이었음
"정말 용모단정하고 바르고 예쁜 아이였다. 학우들, 선생님들과도 잘 지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민주주의 단어 조차도 뱉기 힘들었던, 총소리가 당연하게 들렸던 그 시절 그 때에 어떻게 헌혈할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면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http://naver.me/x0aqH1oV
당시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에 근무했던 강정자 교사 인터뷰 中)
박금희 열사의 부모님은 딸을 잃은 후부터 매일 술에 의존하시다가 결국 두분 다 다른 해 5월 21일에 돌아가시면서
박금희 열사의 유가족에게 5월 21일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날이 되고 말았음
"진실은 밝혀진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가해자의 태도가 가소롭다.
항쟁 당시 직접 가담했던 상급 명령자들의 증언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당시 가해자들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부정하며 잊으려 하지만,
광주는 아직도 생생하게 그날을 기억한다
박금희 열사의 모교인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는
교내 행사뿐만 아니라 매년 5월 5·18 국립 민주 묘지를 찾아 참배와 함께 민주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ㄱㅆ 오월의청춘 보고 빡쳐서 썼던 글 수정해서 재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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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는 클릭
첫댓글 시발롬들..
잊지말고 꼭 기억하자
기억하자
꼬꼬물에서 당시 계엄군이었던 사람이 증언한 거 봤었는데...지금이라도 가해자들은 증언해주길 바람..ㅜ 남은 유가족들 살아있을 때 한도 풀어드리고 용서도 빌었으면 좋겠어...ㅜ
도와주러갔다가ㅜㅜ 꽃다운 청춘이...하
ㅜㅜ 진짜 나쁜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