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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스크랩 중국사 장개석의 7가지 역사적 공헌
Arius 추천 0 조회 969 10.03.27 12:25 댓글 25
게시글 본문내용

작자: 미상

 

필자는 장개석의 공덕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쓴 것을 그저 한 중국인의 양심의 발로이다. 장개석은 잘못한 것이 있으나, 여전히 민족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있다. 장개석이 중국역사상의 위인이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현재 필자는 장개석의 중화민족에 대한 공헌을 하나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최대의 공적은 청나라말기의 군벌할거의 난세에서 두 차례의 북벌을 이끌고, 난세중의 중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중국의 혼란정도는 중국역사상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의 북벌을 사실 모두 아주 성공적이었다. 북벌후의 결과는 바로 군벌의 수가 많이 감소하고, 혼란정도도 아주 잘 통제되었으며, 기본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장개석의 군사적 재능이 모택동에 비하여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군벌을 다루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민족응집력은 아주 강화되었고, 중국의 국제상의 지위도 많이 제고되었다.

 

둘째, 일련의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부국강병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장개석이 계승한 것은 엉망인 나라였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묵은 채무를 하나도 떠앉지 않았지만, 국민정부는 남경에 수도를 정하면서, 북경정부의 누계 6억7천만달러의 채무를 떠안았던 것이다. 당시의 중국은 그저 표면상의 통일이었고, 남경정부가 통제하는 국가자원은 아주 유한했으며, 많은 돈을 투입하여 군벌전쟁을 치러야 했다. 장개석이국민경제건설운동을 하면서 "법정화폐정책"을 추진했다. 1935년말부터 법정화폐를 발행하였고, 공채채권의 권위를 수립했다. 동시에 외채를 적극적으로 상환하였다. 항전전날까지, 이미 90%의 외채를 상환하였다. 중국채권은 런던시장에 상장되었고, 가격은 일본채권보다 높이 인정받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법정화폐는 원래 영, 미, 일화폐가 대공황시기에 가치절하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미국이 고가로 중국백성의 백은을 매입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위가 수립된 후에는 지방화폐를 통용시키던 성들도 속속 법정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8년항전승리를 위한 물질적인 기초를 닦았다. 법정화폐제도는 중일전쟁의 필요충분조건이었고, 신속히 발전한 법정화폐는 중국통일의 기초를 이루었다. 법정화폐가 없었더라면 항전군비는 마련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셋째, 대대적으로 문화교육사업을 추진하였다. 북대, 청화, 서남연합대학등 학술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특히 음미할만한 것은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장개석정부는 먼저 고려한 것이 학교와 교육사업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침략한 도시의 학교들이 남으로 이전하도록 도와주었다. 일본의 공습시에도 당국의 첫번째 임무는 중소학교 교사학생을 대피시키는 일이었다. 일찌기 그는 황포군관학교교장을 맡은 바 있고, 혁명군대를 건립하고 군사핵심역량을 교육시키는데 노력했다.

 

넷째, 내우외환의 곤란한 상황하에서 변경을 안정시키고, 중앙정부의 통치를 공고히 했으며, 국가분열을 방지했다. 당시 동북(만주), 내외몽고, 신강, 티벳은 모두 외국배경이 있었다. 장개석은 몽고, 티벳에 대한 통치를 강화했고, 국민정부는 1929년 몽고/티벳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몽고/티벳의 소수민족지역행정사무를 담당했다. 1938년 9월 24일, 라마환생방법 13조를 반포하여 달라이라마, 판첸라마등이 원적한 후에는 반드시 현지지방의 최고행정기관이 몽고/티벳위원회에 신고하도록 했으며, 환생한 영동(靈童)을 찾은 후, 당해 지방최고행정기관은 몽고/티벳위원회에 보고하여 조사확인받도록 하였다. 1928년, 국민정부는 사천의 서부와 티벳동부를 하나의 새로운 성으로 만들어 서강성(西康省)이라고 하였다. 1928년 9월 국민당중앙정치회의 제153차회의는 영하와 청해를 각각 별도의 행성으로 나누어 설립하는 것으로 하였다. 1929년 1월, 청해는 정식으로 성이 되었고, 시닝(西寧)이 성회가 되었다. 그중 청해성을 건립한 것은 의미가 컸다. 남쪽의 서강성과 함께 티벳의 국면에 영향을 끼치고 서로는 신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소련독일전쟁이 폭발한 후, 장개석은 군대를 보내어 신강으로 들어갔고, 성세재를 통하여 신강은 마침내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다섯째, 중화민족 지도자의 신분으로 중국인민의 일본침략자들과의 목숨을 건 투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40여만의 원정군을 두 번에 걸쳐 버마로 들여보내 작전했고, 버마독립해방과 세계반파시스트전쟁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항일전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모택동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장개석은 민족지도자이고 최고사령관이다. 국민당에는 전후 두 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데 첫번째는 손중산이고, 두번째는 바로 장개석이다라고. 장개석은 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70%의 병력을 막아냈고, 대량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는 중국의 독립에 거대한 공헌이다. 버마에 출병하여, 중국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국제적으로 좋은 명성도 얻었다. 이는 중국이 이차대전후에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좋은 바탕이 되었다.

 

여섯째, 청나라가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폐지하였다. 동북, 대만 및 팽호열도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약소국에서 세계제2차세계대전의 4대지도자국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1946년 유엔이 설립된 후 오개상임이사국중 하나가 되었다. 카이로선언으로 주권과 영토를 회복하게 된 것은 장개석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적극 노력한 결과였다.

 

일곱째, 장개석은 일생동안 중국영토의 통일과 완정을 굳건히 유지보호했다. 나중에 대만으로 물러나기는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대만을 중국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비록 대만을 반공대륙의 기지로 삼았지만, 이등휘, 천수이벤과는 달랐다. 월남, 인도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할 때 책상을 치며 "대륙이 파병하지 않으면 내가 군대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장개석이 대만과 대륙은 불가분이고 전체 중국의 일부를 이룬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는 대만에서 중화민족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오랫동안 대만인들이 중국의 일부분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것은 이후 중국통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역사를 회고하면 장개석이 잘못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가에 부끄럽지 않았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중화민족에 대한 걸출한 공헌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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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3.27 12:30

    첫댓글 대만인들은 장개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마오같이 공칠과삼 정도로 관대하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본토 중국인들의 생각도 궁금하군요...

  • 작성자 10.03.27 12:34

    아마 이번의 중국에서 국가선전용으로 나온 건국대업이란 영화를 보시면 그생각을 아실듯합니다. 거기에선 장개석의 이미지는 냉혹하고 인정없고 차가운데반해 모택동은 인자하고 후덕하며 재채있게나오죠

  • 10.03.27 15:37

    인자하고 후덕하며 재치있는 인간백정 + 아동성애자.... 공산당의 힘이군요

  • 10.03.28 18:48

    아동성애자는 좀 아닙니다. 모택동이 좋아했던 여자는 20세가 채 안 된 10대 중후반의 미소녀들이었으니까요. -_-; 지금 성인들과 원조교제하는 여중생이나 여고생 정도니까, 미소녀 매니아라고 하면 적합할 듯합니다.

  • 10.03.27 16:58

    장개석이 만약 중국통일하고 -_- 공산당이 대만으로 쫒겨갔으면 상당히 재밌었겠네요 ㅎㅎ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듯.
    공산당 대만은 쿠바랑 비슷한 처지? ㅋ

  • 10.03.27 18:36

    그리고 이어졌을 중화민국의 경제성장을 생각하면... 세계자원의 난과 중국의 부상시기는 ㅎㄷㄷㄷ

  • 10.03.27 20:01

    모택동한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만 그 ㅎㄷㄷ한 성장을 보면.. 그가 대륙을 통치했다면 중국은 진즉에 상임이사국에 올랐고 미국과 손잡고 소련을 압박하며 미국과 함께 자유세계의 강력한 한축이됬겠죠.. 그러면 한국의 가치는 당연히 별볼일 없을테구요.. 뭐 현실은 세계최대 공산당이 통치하는 국가지만요..ㅎㅎ

  • 10.03.27 20:20

    어? 근데 지금도 중국은 UN 상임이사국 아닌가요? 2차대전때 승리했던 5개연합국이 제가 알기로는 상임이사국인 걸로 아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현 러시아), 국민당중국(현 공산당 중국) 이렇게 거부권을 가진 5개국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

  • 10.03.28 13:07

    대만이 상임이사국 자리를 계속 보전했을거라는 의미신듯

  • 10.03.27 20:24

    장개석이 공산당에 이겼다면 우리나라는 통일 한국이 됐을것이고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대륙횡단의 기회가 있었을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이데올로기의 자산앞에 남북 좌우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지 않을테죠. 일본은 지금보다 발전하지 못했을것이지요. 여러분들은 부정적으로만 보네요...

  • 작성자 10.03.27 20:28

    맞습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했다면 일단 우리가 더 이익입니다. 일본은 지금처럼 경제대국이 되지 못했을겁니다 왜냐면 국공내전에서 밀려서 국부군이 일본에서 철수했거든요. 당시 장개석의 마인드는 월남 조선 다 독립시키고 그다음에 몽골을 먹는거였죠. 더욱이 일본은 아예 다시는 그따위 깡패짓못하게 할려고 했구요.

  • 작성자 10.03.27 20:30

    더욱이 새롭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강대국과 건국부터 우호관계이면서 더군다나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중도파가 정권을 잡아 통일한국을 이루고 일본이 식민지통치를 위해 만든 공장들 접수하고 농지개혁하고 친일파 숙청했다면 이모양 이꼴은 안됫을겁니다.

  • 10.03.28 05:56

    Arius님/ 글쎄요... 국민당 치하의 중국이 한국에 끼칠 영향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시는게 아닌가 싶습니다만은.

    1. 일단 국민당 치하의 중국이 일본의 성장을 막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사실 그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중국이 아무리 일본에 이를 갈아도 레알 실세인 미국이 일본 키우기로 작정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많은 분들은 중국 공산화가 미국의 일본지원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시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본은 어떻게든 컸을 것입니다. 애초부터 일본과 같은 국토가 협소한 나라를 목축국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목표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 10.03.28 05:58

    미국은 모겐다우 플랜을 통해 독일도 목축국으로 만들을려다가 독일인 2천만명이 굶어 죽어야 그게 가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슬쩍 포기했지요.

    2. 일본이 승낭이라면, 중국은 호랑이입니다. 강한 중국이 한국에 이득이 될리는 없습니다. 그런 중국과의 '우호'관계는 사실상의 군신관계이지요. 특히 국민당은 훨씬 더 제국주의스러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만은 아직도 형식상으로 몽골 전체와 아무르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놈들이 정말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국을 곱게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지요.

  • 10.03.28 05:59

    3. 국민당 치하의 중국이라면 통일한국이 과연 보장되어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장개석과 스탈린의 관계는 모택동과 스탈린의 관계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국민당 중국이던 공산당 중국이던 친미국가와 국경을 맞대는것을 좋아할 리도 없고요. 국민당 중국이라면 북한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전면전을 하지 않았을런지는 몰라도, 북한 수립에 반대하지도 않았을것이며 오히려 은밀한 찬성을 했을 겁니다.

    4. 통일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친일청산을 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못하면 못하는 겁니다. 이랬을면 어떨까 하면서 가상역사를 펼치는 것은 당시 한국민의 무능에 대한 변명일 뿐이지요..

  • 10.03.28 05:55

    5.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만일 중국이 모택동의 삽질로 근 30년을 해매지 않았으면 당연히 한국의 경제발전도 없습니다. 자본의 이동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게 아니라 그냥 일본에 잠깐 들른 다음에 중국으로 건너뛰어갔을 것입니다. 현재 중국보다 몇배나 더 잘살면서도 중국 앞에서 쩔쩔매는게 한국인데, 만일 중국보다 그렇게 더 잘살지도 못한다고 생각해 보면... 한국은 정말 약체중의 약체였을 겁니다.

  • 작성자 10.03.28 17:06

    어쨋든 국민당의 중국이 이루어졌어도는 가정일뿐이니 말입니다.

  • 10.03.28 20:29

    장개석은 한국을 좋게 생각했다고 하네요.. 한국이 일제로 부터 해방되게 된 부분에서 상임이사국 지도자로서 한국의 해방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당시엔 조선이란게 그냥 원래부터 일본속국인지 속국이어도 괜찮은 곳인지 아리송하던 때라서..여튼 중요한건 중국을 국민당이 통일하게 되면 사실상 한국은 냉전시절의 꿀같은 지원따윈 못받았을 부분이 크고 그로인해 중농학파가 득세해서 지금도 농업국 크리 타고있을듯 하단 생각도 드네요.

  • 10.03.29 09:00

    Arius/ 뭐 그렇지요. 역사에 만약이라는것은 없다니 아무도 모르는 일...

  • 10.03.28 01:25

    장개석 인물됨은 괜찮은데... 국민당 공무원,장교들이 병맛 =ㅁ=... 부정부패가 그리 심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됬을까요 ㅎㅎ

  • 10.03.28 16:12

    비록 동북공정 나오면서 뻘소리가 되기는 했지만, 1960년대에 주은래는 북한 학자들에게 "만약 중국이 제국주의에 도취되어 이웃나라를 위협하려 한다면, 다른 나라들은 연합해서 중국의 야욕에 맞서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 10.03.28 18:10

    글쎄요.;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깨진 이유 중 가장 큰 건 당시 국민당 정권이 부패 천국이었던데다 장씨, 송씨 등을 비롯한 이른바 4대 가족이 경제권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던 양상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산당이 들어선 후 아편 중독자나 치안 부재 상황을 때려잡느라 공산당 정권이 고생했다는 얘기는 유명하죠;;

    저도 별로 공산당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모택동의 문화혁명 덕분에 중국의 발전이 수십 년 늦춰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장개석이 계속 집권했어도 중국이 크게 발전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오히려 부패와 벌족 지배, 아직 청산되지 않고 있던 옌시산 등의 군벌 등을 생각하면 남미처럼 정정불안 가능성이 더 높죠.

  • 10.03.29 14:51

    -_-a 저기 낱말 몇개만 치환하면 그대로 '박정희에 대한 찬가'가 된다는 것을...

  • 10.03.30 00:21

    뜨헙!!역시 총통은 항상 날카롭군요.

  • 10.03.30 00:22

    장개석이 대만으로 배타고 갈때 불량배랑 인간버러지들 수천명 바다에 넣었다던데 몇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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