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표를 사고 열차타는곳으로 내려간다.
동대구역에서 진천방면 첫열차는 5:29분에 있다.
그놈은 용계역을 5:20분에 출발하는 열차이다.
5:29분이 되자 진천행 열차가 들어온다. 3번째 타보는군..(진천행 첫차 말이다.)
이른아침인지라 타는사람은 거의 없다. 10명도 안될듯..
열차는 곧 출발하고..
신천,칠성,대구역,중앙로,반월당(대구2호선 연계예정역),명덕,영대병원,
현충로,안지랑,대명역을 지나 성당못역에 이른다.
그러나 종점인 진천역까지 오랜만에 가볼겸 해서 내리지 않고
상인,월촌,월배역을 지나 1호선의 서쪽종점역인 진천역까지 갔다.
(5:59분)
열차에서 내려서 건너편에 있는 안심(동쪽방면)방면 열차를 탔다.
그놈은 6:03분에 출발하는 진천행 열차이다.
6:03분이되자 전철은 출발하고 월배,상인역을 지나 6:12분에 성당못역에
도착하여 내렸다.
전철역을 나와서 부근에 있는 서부시외버스정류장(서부정류장)으로 갔다.
5. 대구->합천
서부정류장으로 가서 합천행 버스시간을 알아보니 6:40분에 있군..
아직 30분정도 남았다.. 커헉~~
합천행 직행버스는 20-40분간격으로 운행한다.
합천까지 버스표를 구입하니 3800원이군..
버스표를 구입하고 타는곳으로 나갔다.
타는곳으로 나가니 해인사,경주,진주가는 직행버스가 승객들을 태우고 있군..
6:35분이 되자 합천가는 버스가 들어온다.
이번에 탄 버스는 경전여객소속 합천행 직행버스 am928이다.
6:40분이 되자 승객 10여명을 태우고 서부정류장을 출발한다.
서부정류장을 나와서 본리동을 지나 88고속도로로 진입한다.
화원을 지나 옥포에서 구마고속도로와 갈라지고..
논공을 지나 낙동강을 건넌다.
낙동강은 525km의 긴강이다. 발원지는 강원도태백시에 있는 황지연못이다.
성산에서 88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진입하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고령에 이른다.
고령은 대가야국의 중심지였던 역사적인 곳이다.
쌍림을 지나서 나는 잠이 들고~~ 꾸벅꾸벅...
깨보니 어느덧 합천터미널에 도착했다.
도착한시간은 아침 8:00..! 1:20분걸렸다.
6. 합천읍(陜川邑) (처음 와본 합천)
버스에서 내려서 터미널로 들어갔다.
이른아침인지라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합천은 처음 와본다..
합천은 옛날에 대야성이 있던 곳이다.
요즘 태조왕건에서 많이 나오는곳..
그만큼 합천지역은 중요한 지역이였다.
합천은 현재 경상남도의 주요 군(郡)중 한곳이다.
합천지역의 주요관광지는 가야산국립공원과 해인사이다.
해인사와 가야산은 합천군의 북쪽지역에 위치해있다.
워낙 유명한곳인지라 모르는 이는 없을것이다. (모르면 이건 진짜...)
그외에 관광지는 황강가에 있는 옛대야성터와 함벽루가 있고
합천의 서부지역에는 합천호,영암사터,황계폭포등이 있다.
내가 합천에 온 이유는 대야성터를 보기위해서이다.
물론 안가본지역중 한곳인지라 가보고 싶었구 쩝..
대야성터는 합천읍내 동남쪽 황강가에 있는 산에 있다.
7. 대야성을 찾으러..
나는 터미널을 나와서 4차선대로를 따라 황강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안내판이 있겠지 하고 걸어간것이다.
고개를 넘으니 3거리가 나오는군..
3거리에서 직진하면 황강을 건너 진주방면..
오른쪽으로 가면 합천호로 가는길이다.
그런데 대야성방면 안내문은 없군.. 어찌된일이지??
그런데 고개왼편 산에 무슨 충혼탑같은것이 서있었다.
나는 그쪽인가 싶어 다시오던길로 되돌아가서 산을 오른다.
좀 올라가니 그 탑이 나오는데 그것은 충혼탑이다.
충혼탑은 6.25전쟁때 전사한 영령들을 위해 세운 탑이다.
대야성과는 관련이 없다.
충혼탑옆쪽으로 난길을 따라 계속 산으로 들어갔다.
좀 가니 산의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는 몇가지의 운동기구들이 있군...
그런데 여기가 아닌가보다.. 도대체 어딜까..
산의 앞쪽에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황강은 낙동강의 지류중 하나이다.
정상의 왼편에는 또하나의 산이 능선으로 연결되있다.
그래서 옆에 산으로 갔다.
아침시간인지라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몇명 보이는군..
좀 가니 길이 여러갈래 갈라지는군..
나는 아랫쪽길로 내려갔다.
계속 내려가니 묘몇기가 보이고 울창한 소나무숲을 지나
어느 채소밭에 이른다.
여기는 민가들이 있고 읍내방면으로 가는 길이 있군..
여기가 아닌거 같아 다시 산으로 올라갈려고 하는데
저쪽에 무슨 비각같은것이 보인다.
음 그것이 뭘까 궁금해서 그쪽으로 갔다.
8. 신라충신죽죽의 비(新羅忠臣 竹竹之碑)
좀 내려가니 비각쪽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인다.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신라충신 죽죽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은 비각안에 보존되있다.
비각왼편에는 3.1운동기념탑이 서있다.
신라충신 죽죽은 신라선덕여왕(재위632-647)때 화랑으로 642년
백제의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자 끝까지 저항하여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
이 비석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시대때 세운 것으로
높이는 1.4m, 폭은 54cm이다.
비각에는 '신라충신죽죽의 비(新羅忠臣 竹竹之碑)'란 현판이 있고
비문에는 '용집을유 10월상 간진양 강대수기(龍集乙酉 十月上 幹晋陽 姜對遂記)'
라고 쓰여있다.
이 비석은 경남지방유형문화재 128호이다.
죽죽비를 보고 옆에 있는 3.1운동기념탑으로 갔다.
3.1운동이란 1919년에 일어난 비폭력,비투쟁형식의 평화적인 만세운동으로
1910년 8월29일 쪽발이들에게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당한 이후
쪽발이들에게 온갖 서러움을 받은 우리2000만동포는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쉽게 말하면->그민족은
그민족이 알아서 해라..)의 감명을 받아 1919년 3월1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참여한 인원은 200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의 쪽발이들.. 그냥 보고 넘길리 없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마자 경찰,군대를 투입하여 마구잡이로
무력진압을 하는데..
7600여명이 살해되고 46000여명이 부상,중상을 당했다..
서방언론들이 이 무자비한 진압을 사진에 담아 서방에 보내 쪽발이들을
비난했으나 쪽발이들은 그냥 씹었다고..
3.1운동기념탑을 지나 좀 가니 무슨 안내판이 나온다.
가서 보니 대야성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9. 대야성(大倻城) (백제와 신라의 처절한 전쟁터)
대야성은 황강변에 있는 산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든 성이다.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아있을뿐이다.
대야성은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곳중 하나였다.
지금부터 1300여년전인 641년에 백제의 30대왕 무왕이 붕어하자
그의 아들이 백제31대왕으로 즉위한다. 이가 곧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아주 총명하고 영리한 군주였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신라를 공격하여 한수유역(한강)의 40여성을 점령하고
대야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때 대야성도독(都督)은 김춘추(후에 무열왕)의 사위인 김품석이였다.
그는 주색에 빠져 놀기에 바빴던 위인이였다.
어느날 그의 부하중 한명은 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엽기적인 일을 당하게
되자 복수를 결심하고 백제군과 내통을 하게 된다.
그래서 642년에 백제의 장수인 윤충은 대군을 이끌고 대야성을 공격하는데
안에서 반(反)김품석파가 성문을 열고 호응을 하여 결국 대야성은
백제군에게 점령되고 만다.
대야성도독인 김품석과 그의 아내는 살해되고 많은 신라군이 죽거나 투항했다.
이때 대야성을 지키던 화랑출신 죽죽과 그의 부하 용석은 백제군과
치열하게 맞짱을 떴으나 결국 전사하고 만다.
대야성이 백제에게 넘어가자 신라국은 벌집이 뒤집히듯 난리가 나는데
김춘추는 선덕여왕(재위632-647)의 칙명을 받아 고구려와 왜국으로
가서 외교활동을 폈으나 잘되기는 커녕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한채
줄행랑을 쳤다.
결국은 바다건너에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왕 이세민(태종)을 설득시켜 신라편으로
만든다...
그리고 200여년뒤인 9세기말(경문왕,진성여왕代)..
신라왕궁을 지키는 장수중 뛰어난 자가 하나 있었으니 이가 곧 견훤이다.
그는 사벌주(경북 상주)의 우두머리 아자개의 장자로 태어났다.(태어난동네는
가은)
장성한 이후 서라벌로 가서 장군이 된다.
그는 서남해에 반란군을 평정하라는 칙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서남해
(전라남도지역)를 평정하고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무진주(광주광역시)
를 점령하고 왕을 칭했다. (892년)
그 이후 900년에 완산주(전북 전주)로 천도하면서 나라이름을 백제로 한다.
(우리는 이를 후백제(後百濟)라고 한다.)
견훤은 신라를 먹기 위해 2차례나 대야성을 공격하나 결국 실패하고..
920년에 대야성3차공격에서 애술장군의 활약으로 대야성을 점령한다.
927년 고려의 왕건은 용주성(경북예천)과 대야성을 공격하는데
고려의 장수 김락,신숭겸이 이끄는 고려군대는 신라군과 연합해
대야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맹장 추허조를 죽인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936년) 대야성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데..
대야성은 백제와 신라가 쳐절하게 맞짱을 뜨던 역사적인 곳이다.
지금 '태조왕건'에서 많이 나오는 곳..
이 대야성터에 내가 와 있는것이다.
이곳 대야성터는 경남지방기념물 133호이다.
지금은 성이 있던 산만 남아있다.
대야성지역에는 죽죽비와 함벽루,연호사등의 명소가 있으며
황강가에 위치해있어 경치가 졀라 좋다.
10. 황강가를 거닐다..
대야성안내판을 보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길옆에는 논이 펼쳐져있다.
좀 걸어가니 황강이 나오고 강변도로가 나온다.
황강은 합천의 젖줄이라 할수 있는 강이다. 낙동강의 지류중 하나이다.
강건너에는 창녕방면으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강변도로로 계속가니 활터가 나오고 무슨 조그만 운동장과 식당들이 나온다.
운동장을 지나 계속 올라가니 오른편 산쪽으로 비석들이 보인다.
이 비석들은 옛날 고을수령(지금의 군수)의 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송덕비들이다. 비석 수십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군..
비석군을 지나니 대나무에 둘러싸인 집이 보이고..
계속가니 왼편에 황강이 바로옆에 흐르고 있다.
공중화장실을 지나니 무슨 안내판이 있다.
그 안내판은 함벽루에 관한 안내판이다.
안내판을 보고 계단을 따라서 함벽루로 내려간다.
11. 함벽루(涵碧樓)와 연호사(烟湖寺)
함벽루는 정면3간,측면2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누각이다.
이 누각은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1860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누각의 현판은 우암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우암송시열은 송자(宋子)라고 일컬을 만큼 유학계에서
아주 대단한 거목이였다. 1689년에 정읍에서 사사(사약먹고 죽음)된
인물이다.
함벽루는 경남지방문화재자료 59호이다.
누각은 황강가 바위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경치가 졀라 좋다.
누각뒤에 있는 바위에는 옛날사람들이 새겨놓은 각자들이 어지럽게 쓰여있다.
누각바로앞에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황강은 오늘도 열심히 흐르는구나..
누각오른편에는 연호사란 절이 있다.
나는 함벽루로 올라가서 부근 경관을 감상했다.
경치는 졀라 좋다..
강가 바위에는 어떤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군..
누각위에서 10분동안 앉아있다가 다시 내려왔다. (아쉽군..)
함벽루를 뒤로 하고 옆에 있는 연호사로 갔다.
연호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와운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지금의 절은 1904년에 재건한 것이며 현재는 대웅전과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함벽루도 이 절경내에 속해있다.
절앞에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합천읍내에서 이곳에 올려면 택시를 타거나 아니면 20분정도 걸어야된다.
합천터미널에서 황강방면대로로 가다보면 죽죽로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죽죽비가 나오며 좀 더가면 황강변이 나오고
함벽루,연호사가 나온다.
12. 합천->의령
연호사를 대충 둘러보고 다시 나온다.
함벽루입구와 운동장,황강변을 지나 대야성안내판,죽죽비와 논밭들을
지나니 주거지역이 나오고 합천초교를 지나 합천터미널에 이른다.
(9:10)
터미널로 들어가서 의령가는 버스시간을 알아보니
9:40분에 있군..
합천터미널에서 운행하는 직행노선은 대구,고령,해인사,성주,서울,
진주,의령,거창,부산,마산등이다.
의령까지 버스표를 구입하니 2900원이군..
표를 사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과자 하나를 사먹었다.
시간이 되자 타는곳으로 나왔으나 아직 차가 안왔다.
9:40분이 되자 내가 탈 버스가 들어왔군..
이번에 탄 버스는 천일여객소속 부산행 직행버스이다.
탄사람은 서너명정도..
승객을 태우자마자 합천터미널을 출발..
읍내를 벗어나서 황강을 건넌다.
합천고려병원,대양,장전,삼가,대의,칠곡을 지나 10:40분경에
의령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린다.
13. 의령(宜寧) (처음와본 의령군)
의령은 경상남도 중간에 위치한 고을이다.
진주,마산과 지리적으로 가깝다.
의령은 임진왜란(1592년 쪽발이들이 난리를 쳤다고 해서 임진왜란이라고 함)
때 처음 의병이 일어난곳이다.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망우당 곽재우이다.
의령터미널에서 내려서 의령읍내로 걸어갔다.
터미널은 읍내외곽에 위치해있다.
읍내로 좀 걸어가니 오래된 고목 한그루가 길가에 서있군..
고목을 지나 계속 읍내로 들어가니 도로 왼편에 보호책에 둘러싸인
검은색의 바위가 있군. 그것이 뭘까?
14. 빗자국의 흔적..
그것은 신라통중(新羅統中)의 빗자국이라 불리는 빗자국화석이다.
의령읍 서동 길가에 121평의 지면이 보존대상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화석(化石)된 빗자국이 보존되 있는 지층의 노출면은 길이 약 2m,
폭 30cm의 넓이 뿐이다.
이것이 보존되고 있는 부근의 지층은 백악기에 속하는 신라역암이다.
빗자국은 세립사암 혹은 사질점판암의 얇은 층이며, 빗방울 자국의
밀도는 1제곱cm당 1.5개정도이다. 자국의 형태는 대체로 원형이며
직경은 8~15mm, 깊이는 1mm내외이다.
이와 같은 빗자국화석은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으며 지질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은 천연기념물 196호이다.
빗자국은 아무 희미하기때문에 잘 안보인다.
아주 먼옛날에 쏟아진 비의 흔적이다.
15. 의령읍내를 가로질러..
빗물자국을 보고 의령읍내로 들어간다.
의령읍내로 들어간 이유는 충익사에 가기 위해서..
좀 가니 읍내 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아랫쪽으로 좀 내려가니 4거리가 나온다.
4거리에서 정면으로 가면 남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고 산이 나온다.
왼편으로 가면 마산방면 오른편은 진주방면이다.
정면에 난 다리를 건너면 충익사가 나온다.
4거리는 지나 남산천위에 세워진 다리를 건너니 충익사공원이다.
이곳은 의령읍내에 위치한 공원으로 군민들과 관광객들이 맣이 찾아오는
공원이다.
바로 정면에는 거대한 탑이 하나 서있는데
이것은 의병탑(義兵塔)이다. 이것은 곽재우장군과 17장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민성금으로 만든 탑이다.
높이는 27m이다. 탑위에 18개의 고리는 18인의 장수를 나타낸것이다.
의병탑뒤에는 산이 가로막고 있다.
의병탑을 보고 왼편에 충익사로 갔다.
그런데 어느 여고에서 소풍을 나왔는지 교복입은 여학생들이 졀라 많다.
그들은 경상도방언으로 열심히 떠들면서 충익사경내를 구경하고 있군..
충익사정문에 이르니 안내판이 있다.
그것을 보고 충익사(忠翼祠) 경내로 들어간다.
충익사는 무료이다. 입장료 없다..
16. 충익사(忠翼祠)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충익사는 망우당 곽재우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의령군민들이 곽재우장군과 의병들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의병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성금을 모아서 4월22일에 의병탑을
건립했다.
1976년에는 이곳이 국난극복의 역사 교육장으로 지정되면서
대대적인 사적지 정화사업을 벌이게 되어 1977년 12월 22일에 완성했다.
총면적 7140평에 의병탑,충의각,외삼문,기념관등 건물이 들어섰으며
250평의 연못을 꾸미고 3000여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17.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紅衣張軍 忘憂堂 郭再祐)
망우당 곽재우(1552~1617)는 홍의장군이라고도 부른다.
곽재우는 의령출신의 선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1세의 나이로
조선팔도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다.
1592년 4월 24일 그는 그의 집앞에 있는 느티나무에 큰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면서 전 재산을 털어서 무기를 사고 의병을 모았다.
그는 붉은 전포에 붉은 기를 나부끼며 적진을 종횡으로 누벼 쪽발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홍의장군의 첫전승지는 거름강 전투였다.
1592년 5월4일부터 6일까지 벌어진 이 전투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의령군 지정면 거름강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 14척을
맞아 싸운 끝에 전멸시킨다.
1592년 6월에말에 왜장 안국사가 이끄는 적군이 남강을 건너 함안,의령
으로 침공하자 정암진에서 복병으로 이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적장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암진전투이다.
이런 활약으로 곽재우는 쪽발이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쪽발이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머리를 싸매고 줄행랑을 쳤다.
그뒤 1597년에 정유재란(정유년에 쪽발이들이 다시 쳐들어와 난리를
쳤다고 해서 정유재란이라 함..)이 일어나자 그는 현풍에 있다가
창녕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가등청정의 왜군을 격퇴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곽재우는 화왕산성으로 들어가서 우시수승,가등청정이 이끄는 왜적과
싸울준비를 했다.
곽재우는 왜적들이 공격하리라 생각하고 성 곳곳에 새끼줄을 치고
거기다가 물먹인 베를 걸어놓은 뒤에 그 안에서 수십기의 기병을
배회케 했다.
왜장이 이 모습을 보자 많은 복병이 있는 것으로 착각, 산을 돌아
뒤를 공격했다.
과연 산의 배후에는 방비가 허술했는데 이상한 상자가 널려 있는것이
아닌가.
왜장은 그것이 곽재우의병군의 식량상자로 생각하여 병사들을 시켜
모조리 뚜껑을 뜯어냈다.
그러자 상자안에는 식량이 아닌 벌떼가 아귀같이 날아올라 쪽발이진영은
삽시간에 말그대로 벌집을 쑤셔놓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곽장군은 이때를 놓칠세라 매복병을 풀어 쪽발이의 부대를 모조리 때려잡는다.
보기 좋게 패한 왜장은 그날 밤 이를 갈며 후퇴했다가 새벽에 다시
화왕산성으로 공격해왔다.
곽장군은 언제나처럼 홍단령에 홍전립을 쓰고 백마에 올라 왜군들이
산중턱까지 오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서 여러장수
들에게 자기와 똑같은 전투복을 입히게 한후 산성 이곳저곳에 매복시켰다.
드디어 왜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했다.
곽장군은 왜군이 몰려들자 벌떼상자를 왜군들 요소마다 하나씩 던졌다.
그러자 쪽발이들은 간밤에 당한 벌떼 상자가 또 왔으므로
열어보질 않았다. 왜장은 이를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하여
상자마다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르자 상자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폭발해 터져
왜놈들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에 빠졌다.
곽장군은 이때를 놓칠새라 공격령을 내리니.
곽장군과 같은 복장을 한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니 혼비백산한 쪽발이들은 단번에 전멸하고 말았다.
쪽발이의 난이 끝난이후 곽재우는 잠깐 관직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의령에 내려와서 살다가 1617년에 병사한다.
18. 충익사 관람
홍익사의 정문인 홍의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간다.
경내에는 수백명의 여고생들이 진을 치며 구경하고 있었다.
좀 들어가니 충의각이란 한옥건물이 나온다.
이것은 곽재우장군을 비롯하여 17명의 명판을 게시한 곳이다.
충의각뒤에는 대나무숲이 있다.
충의각을 지나니 좀 오래된 나무가 있군..
그 나무는 충익사모과나무이다.
이 나무는 높이 8.5m, 둘레 3m, 수령 500여년된 나무이다.
나무위에는 모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여학생들은 이 모과를 딸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군..
충익사모과나무는 경남지방기념물 83호이다.
모과나무를 보고 기념관으로 들어간다.
기념관안에는 홍의장군의 전적도 5폭과,보물671호로 지정된
곽재우장군의 유물이 전시되있다.
전적도는 곽장군이 느티나무에 큰북을 매달고 의병을 모집하던 광경과
정암진전투등 5폭의 큰 그림들이다.
곽재우장군의 유물은 사자철인(도장의 종류),장검,마구,돌벼루,각끈,
수저,화초문백자팔각대접등의 유물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보물671호이다.
장검은 망우당이 실재로 쓰던 검이다.
저 검에 맞아 죽은 쪽발이의 수는 수백,수천에 이를것이다.
수저(숟가락,젓가락)는 곽장군의 후손들이 기증한것이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온다.
충익사경내 한쪽에는 넓은 연못이 있다.
연못안에는 잉어를 비롯한 여러종류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군..
연못을 지나 모감나무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홍의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19. 의령->마산
충익사를 나와서 의병탑을 뒤로 한채 남산천을 건너 다시
의령읍내로 들어갔다. 이제는 마산으로 가야지..
읍내를 가로질러 빗자국을 지나서 의령터미널에 이른다.
의령터미널에서 운행하는 시외노선은
마산,합천,진주,대구,마산,창원,부산,동서울,순천등이다.
여기서 마산가는 직행버스는 10-20분간격으로 굴러다닌다.
완행버스는 1:00-2:00간격으로 다닌다. (중리경유)
마산까지 학생버스요금으로 표를 구입하고(1900원)
버스타는곳으로 나가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군..
이번에 탄놈은 신흥여객소속 마산행 직행버스이다.
12:00가 되자 버스는 출발한다..
의령읍내를 지나 충익사앞을 지나서 정암에 이른다.
정암은 망우당이 쪽발이의 대군을 전멸시킨 역사적인 곳이다.
정암에는 정암루란 누각이 있으며 남강이 흐르고 있다.
남강을 건너 월촌을 지나 남해고속도로로 진입...
함안,중리를 지나 동마산I.C에서 나와서 12:40분경에
마산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린다.
20. 마산시(馬山市)
마산은 5개월여만에 와본다. 감회가 새롭군..
마산시의 인구는 50여만명에 이른다.
경상남도의 최대도시이자 공업도시,수출자유지역이다.
마산시 옆에는 창원시가 있으며 동남에는 진해시가 있다.
마,창,진의 3도시는 거의 1지역이다.
마산터미널에서 내려서 마산역으로 걸어갔다.
마산역에는 왜 갔을까? 혹시 대구가는 열차가 있을까 해서..(그냥
간것에 가깝다..)
대로를 건너서 마산역사로 간다.
역사에 들어가서 대구가는 열차시간을 알아보니 14:00이후에 있군..
열차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나왔다.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배가 고프군...
점심을 먹기 위해 마산역부근에 모중국집에 들어갔다.
이 집은 방송에도 나왔다고 하는데.. 짜장면이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짜장밥을 먹고 다시 마산터미널로 갔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계획대로 영산에 가기로 했다.
영산까지는 2200원이군..
21. 마산->영산
표를 구입하고 타는곳으로 나간다.
마산터미널에서 운행하는 시외노선은 창원,진해,김해,부산사상,부산노포동,
울산,경주,포항,대구,영산,창녕,부곡,밀양,의령,함안,고성,통영,거제,
장승포,사천,진주,하동,순천,광양,여수,보성,진도,목포,광주,구례,남원,
합천,거창,함양,남원,김천,구미,부천,안양,수원등이다.
마산에서 영산가는 버스는 30-40분간격으로 굴러댕긴다.
20분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들어오는군..
이번에 탄놈은 고려여객소속 영산경유 부곡온천행 직행버스이다.
나를 포함하여 10여명의 승객들이 탔군..
그런데 왠 행상인들이 타더니 물건을 선전하면서 무슨 경품추첨한다고
난리를 치는군..
버스는 출발시간이 되자 시동을 걸고 출발..
마산터미널을 나와서 동마산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졀라게 달린다.
중리를 지나 구마고속도로(대구-마산)로 진입하여 졀라게 달리고..
남강을 건너 30여분만에 영산에 도착하여 내린다.
22. 영산(靈山)
영산은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지역이다.
이곳에는 영지라는 못과 만년교,식빙고,남산공원,영산지구전적비등의
관광지가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좀 들어가면 부곡온천이 나온다.
영산터미널에서 내려서 좀 걸어가니 넓은 지(池)가 나온다.
그것은 연지(硯池)이다.
이 연지는 동그란형태의 연못으로 못안에는 5개의 축산(섬)이 떠있다.
섬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섬중에서 북쪽섬에는 향미정이란 정자가 있다.
1893년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만년교 중건시 이 정자를 세우고 못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못주위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못을 호위한채 서있다.
가뭄이라 그런지 못안에 물은 별로 없다.
연지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연지주위에는 집 몇채가 들어서 있고 배타는곳도 있군..
연지를 한바퀴 돌고 시내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볼게 있는관계로..
좀 걸어가니 하천이 나오는군..
23. 만년교(萬年橋)와 물레방아간
하천에는 현대식 다리가 있고 그옆에는 오래된 석교가 있다.
그 석교가 바로 만년교이다.
이 석교는 장방형의 암석을 서로 엇대어 둥근 아치형을 이룬 위에 모양이
일정치 않은 돌을 쌓고 그 틈을 흙으로 메운 특이한 다리이다.
길이는 약 13.5m, 폭은 양 3m의 이 돌다리는 200-300여년전에
백진기란 석수가 가설했고 1893년4월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인
김내경에서 명하여 중수했다.
다리옆에는 1780년에 세운 교비(橋碑)와 만년교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 글씨는 13세의 어린 소년이 썼다고 전해진다.
만년교는 보물564호이다.
만년교앞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화물차 2대가 만년교 앞을 가로막고
운전사들이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다.
나는 그런것은 신경안쓰고 영산교를 건넌다.
영산교는 특이하게 생긴 다리이다. 다리의 가운데는 높게 솟아있다.
다리아래로는 내가 흐른다.
다리양쪽벽에는 덩굴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다리를 건너니 비석이 나온다. 그 비석은 앞에 언급했다.
비석을 지나니 공원이 펼쳐져있고 무슨 안내문이 있군...
안내문에는 영산교와 영산교뒤에 있는 남산과 근처 석빙고지역을
안내하는 안내문이다.
공원을 지나 하천을 따라 좀 올라가니 물레방아간이 있다.
이 물레방아간은 저번에 평창봉평에서 봤던 물레방아간과 비슷하다.
여기에 있는 물레방아는 전기로 돌아간다. 하루종일 돌아가는것이 아니고
낮시간대만 돌아간다.
물레방아를 지나 석빙고를 보기 위해 계속 올라갔다.
하천건너는 주차장과 주거지역이 형성되 있고 내가 걸어가는쪽은 거의
자연상태이다. 왼편에 내가 흐르고 오른편에 산이 있으며 길에는 많은
풀들이 자라고 잠자리등의 곤충이 돌아다닌다.
나는 오랜만에 잠자리나 잠을까 하고 잠자리 사냥에 나섰으나
잘 안잡히는군.. 잠자리가 오히려 나를 잡는거 같군 홍홍^^;
결국 잠자리는 한놈도 잡지 못했다.
24. 영산->창녕
석빙고를 보고자 했으나 시간도 그렇구 좀 피곤한 관계로
그냥 철수하기로 했다.
오던길로 다시 돌아가서 물레방아간을 지나 만년교를 건너서
다시 영산터미널로 갔다.
영산터미널에서 운행하는 노선은 부곡,밀양,마산,남지,창녕,대구,부산이다.
나는 창녕에 가야된다.
창녕까지 학생버스요금(500원)으로 표를 구입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영산에서 창녕가는 버스는 20-40분간격으로 굴러댕긴다.
목도 마르고 해서 음료수를 하나 사먹으니 600원이라고 커헉~~
다른데서는 500원인데 이런..
20여분뒤 창녕가는 버스가 왔다.
이번에 탄것은 천일여객소속 창녕행 직행버스이다.
버스는 영산을 지나서 계성,토천을 지나 창녕읍내에 진입하고
영산을 출발한지 20여분뒤 창녕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린다.
25. 창녕(昌寧)읍내 (처음와본 창녕땅)
창녕은 경상남도 북단에 위치한 고을이다.
북쪽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맞대고 있다.
창녕지역에서 볼만한 관광지는 화왕산성,관룡사,술정리3층석탑,
진흥왕척경비,교동고분군,송현동고분군,목마산성,부곡온천등이 있다.
터미널에서 내려서 읍내로 들어간다.
여기서도 볼것이 많이 있으나 시간관계상 몇개만 보기로 했다.
좀 걸어가니 4거리가 나온다.
4거리에서 오른쪽길로 계속 가니 무슨 고분이 하나 있군.
그것은 창녕석빙고(石氷庫)이다.
석빙고는 말그대로 옛날의 냉장고이다.
이 석빙고의 높이는 5.4m, 길이 13m의 석실이 있다.
석빙고앞에 있는 비석에 의하면 1742년에 당시 창녕현감 신서가
건조한것으로 기록되 있다. 이 석빙고는 경주,안동에 있는거와 동일한
구조이다.
삼국시대부터 이미 얼음을 저장했던 제도가 있었음을 미루어보아서
이곳도 영산의 석빙고와 함께 가야국의 비자화(比自火)시대에 창건되어
당시 귀족들이 사용하던 것을 조선영조(1724-1776)때 중수한것으로 보인다.
보물310호로 지정되있다.
이 석빙고는 창녕읍내 한복판에 있다.
석빙고를 보고 계속 올라가니 교동고분군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오는군..
나는 그 안내판을 따라 계속 갔다.
좀 가니 밭이 펼쳐진 시골풍경이 펼쳐지고.
뒤쪽 언덕에는 고분들이 보인다.
계속 가니 창녕박물관이 나오는군.
이 박물관은 이지역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시간관계상 다음에 가기로 하고..
박물관을 지나 교동고분군에 이른다.
26. 교동고분군 (쪽발이들에게 수난당한 가야시대 고분)
교동고분군은 교동뒤편에 있는 언덕에 위치한 것으로
왕릉이라고 불리는 큰고분을 중심으로 70여기의 고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8기만 남아있다.
교동고분군의 5,6,7,8,10,11호분이 1918년에 발굴되어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그러나 발굴관련 보고서도 나오지 않았고 유물의 행방도
묘연하다. (쪽발이들이 모두 먹었다.)
그러나 교동고분군 21,31호분 발굴결과는 1918년에 고적조사보고서에
발표된바 있는데 이것이 창녕고분에 대한 유일한 조사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교통12호분은 경주에 있는 신라고분과 같은 적석목곽분
인것 외에는 창녕고분들은 모두 가야식 장방형의 횡구식석곽분인 듯하다.
부장품도 풍부했는데 쪽발이들이 마구잡이로 훔쳐가고 강탈하고
도굴하여 지금은 모두 일본에 있다.(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다.)
음 통탄할일이다..
고분군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기왕 온거 고분군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고분중 제일 큼직한 고분위에 올라갔다.
고분정상에 오르니 창녕읍내가 한눈에 보인다.
교동고분군7기도 모두 다 보인다.
그런데 오른쪽고분정상에는 까치한마리가 앉아서 나처럼 창녕읍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나??
고분을 내려와서 다른고분들도 둘러보았다.
그냥 평범한 고분들이다. 겉보기에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교동고분군은 사적80호이다.
27. 창녕->대구
교동고분군을 보고 다시 창녕읍내로 왔다.
이제는 가야할 시간이다..
1km를 걸어서 창녕터미널에 도착했다.
창녕에서 운행하는 시외노선은 대구,현풍,남지,영산,부곡,밀양,경산,
마산,부산,진주,합천,서울등이다.
대구가는 노선은 직통과 직행(대합,구지,현풍경유)2노선이 있다.
물론 직통이 빠르고 요금도 직통이 싸다.
시간을 알아보니 직행은 5:00, 직통은 5:10분에 있다.
당연히 직통을 타야지!! 학생버스요금(2200원)으로 표를 구입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5:00가 되자 대구행 직행이 와서 승객을 승하차 시킨후 출발했다.
5:10이 되자 대구행 직통버스가 들어온다.
이번에 탄놈은 고려여객소속 대구서부행 직통버스이다.
(고려여객(고속)=천일여객(고속)
승객은 20여명정도 탔다.
승차가 끝나자 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한다.
창녕읍내를 나와서 창녕I.C에서 구마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졀라게 달린다.
현풍,논공을 지나 88고속도로와 합류하고 화원을 지나
5:50분에 대구서부정류장에 도착하여 내린다.
28. 대구역까지
서부정류장에 도착하여 부근 시내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대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대구역에서 19:14분 서울행 무궁화호를 타야됨)
여기서 대구역가는 노선은 650,618번등이 있다.
그리고 대구지하철1호선도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10여분정도 기다리니 대구650번버스가 온다.
이번에 탄노선은 동명교통?소속 대구650번(화원유원지-대구역-칠성시장)이다.
600원을 내고 탑승..
두류공원입구,계대4거리,반고개,반월당,중앙로를 지나 대구역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대구역으로 갔다.
대구역에 도착하자 예약한 철도표를 구입하고 세수좀 한다음
모패스트푸드점에서 먹을것좀 사고 열차를 기다린다.
19:00가되자 개표를 받구 타는곳으로 나간다.
29. come back home
타는곳으로 나가서 먹을것좀 먹고 열차를 기다린다.
19:12분이 되자 내가 탈열차가 들어온다.
이번에 타는 열차는 부산발 서울행(23:09) 무궁화호 제248열차
일반실 6-55이다. 운임은 10500원이다.
열차에 올라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19:14분이 되자 열차는 출발하고..
왜관역을 지날쯤해서 김밥을 사먹었다.
피곤한지라 잠을 청했으지만 잠이 졀라 안온다.
구미,김천,영동,대전,천안,평택,수원,영등포를 지나
23:07분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2분일찍 도착..)
열차표는 기념품으로 가져오고
부근 시내버스정류장으로 가서 한성버스소속 서울20번(노원역-서울역)
을 타고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