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관련 보도에 대한 제작진의 입장
월간조선은 역사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 월간조선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관련 보도에 대하여
월간조선은 2002년 9월호 ‘집중취재-MBC는 지금’ 기사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대해 근거 없는 비난을 시도했다. 기사 곳곳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언론 자유를 유린한 독재 정권 검열관의 시각이 스며 있다. 도저히 그 자신 언론 자유의 영역을 지키려는 일말의 염원을 가진 언론사의 기사로 보기 힘든 언어 폭력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제목이 말해주듯 과거의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한국현대사의 이면의 진실을 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며, 그 진실을 고발하지 못한 방송의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정권의 강력한 통제 아래 나팔수 역할을 강요당해 온 방송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게된 밑바탕에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민주세력의 희생과, 그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방송인들의 몸부림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민주세력이 온 몸을 던져 독재로부터 구해낸 자유민주주의가 발현된 프로그램이며, 그 자유민주주의를 독재의 상흔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이 땅에 깊이 착근시키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사용해온 방법은 한국현대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승자와 강자에 의해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 진실을 규명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작업은 역사의 복원이라는 차원을 넘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사회 변화의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다.
월간조선이 검열관의 잣대로 비난한 ‘여수 14연대의 반란’(99년 10월 17일 방영)도 이러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한국사의 비극 ‘여순 사건’은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의 남로당 세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반란군이 여수와 순천지역을 장악하면서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고, 이후 진압군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
49년 1월 10일까지 정부가 파악한 피해자만 사망 3,392명 중상 2,056명으로 여수, 순천지역의 주민 중 상당수가 희생됐고, 그 중 대다수가 진압 군경에 의한 희생이었지만 이후 50년이 넘도록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다.
여수, 순천지역 대다수 주민들이 공포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 사건으로 지역공동체는 산산조각 났고, 이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가 표명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감할 수 없는 희생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억울한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죽음과 아픔의 비밀을 말할 수 없는 사회에 자유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편 당시 진압군의 행위를 ‘국가 전복을 기도한 세력을 진압한 정당한 작전’이라고만 주장하고, 피해주민들의 입을 틀어막는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인가.
월간조선의 자유민주주의는 피해자들의 억눌린 신음소리 속에서도 꽃 피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입막음 상태에서는 진정한 자유와 민주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극적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호소를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 사회 발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시각이 프로그램 곳곳에 녹아 있음에도 월간조선은 자신들의 비뚤어진 잣대로 우리의 노력을 검열했다.
우리가 월간조선의 기사를 검열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기사 속에 ‘사실’은 없고 ‘이데올로기’만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수개월의 취재 동안 만난 수많은 여순 사건 관련자들로부터의 증언과 여러 자료를 통해 제시한 ‘여수 14연대의 반란’에 대해 월간조선은 너무나 간단한 방법으로 사실상 ‘친북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월간조선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대해 ‘친북적’이라는 규정을 하기 위해 이용한 근거 자료는 단 두 가지에 불과하다. 그 첫 번째는 소위 ‘친북좌익세력 명단공개 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 등 MBC를 비방해온 단체들의 주장이고, 두 번째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여순사건에 대한 성격규정이다. 월간조선은 마음만 먹으면 시도해볼 수 있었을 역사학자나 사건 관련자 등에 대한 취재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사건 당사자의 지위를 가진 세력의 주장만 인용함으로써 스스로 객관적일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참으로 놀라운 나태요, 놀라운 오만이다.
월간조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 좌우익간, 남북간 이념문제를 다룬 것이 36%다.
월간조선은 소위 ‘친북좌익세력 명단공개 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를 ‘우익애국세력’이라고 규정한 뒤 그들의 ‘일방적으로 국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비방해온 MBC’ ‘애국심과 언론윤리가 결여된 반역적 보도’라는 MBC에 대한 비방내용을 소개했다. 이후 월간조선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대해 보도하면서 ‘좌우익간, 남북간 이념문제를 다룬 것이 36%’라고 적시했다.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월간조선이 ‘우익애국세력’이라고 규정한 ‘추진본부’의 주장대로 다수의 프로그램이 국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비방하며 언론윤리가 결여된 반역적 보도를 해왔다는 인식을 주려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사를 쓴 월간조선 기자가 과연 무엇을 근거로 21편이니, 36%니 하는 기준을 제시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자신도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고백했지만 무리하게 ‘좌우익간 이념대립’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빨간색을 칠한 것에 다름 아니다.
월간조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터뷰 28건 중 좌익적 시각이 19건, 우익적 시각은 9건에 불과하다
월간조선은 자신의 시각을 증명할 대표적인 예로 ‘여수 14연대 반란’을 들면서 ‘학살장면이나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인터뷰 28건 중 좌익적 시각의 증언이 19건인 반면, 우익적 시각의 증언은 9건이었다’고 보도했다.
월간조선이 어떤 기준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출연자 32명 중 당시 좌익에 가담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단 2명에 불과하고, 그 인물들의 전력은 자막과 해설을 통해 분명히 밝혔다. 반면 명백히 우익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출연자는 진압군 측 장군, 장교, 경찰, 우익단체 대표 등 10명에 이른다. 나머지 20명은 14연대 소속이었으나 반란에서 이탈한 군인 3명을 비롯해 대부분 여수, 순천지역 주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간조선은 좌익적 시각이 우익적 시각보다 2배 이상 많다는 결론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이 프로그램이 좌익의 시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저변을 지배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도로 비춰볼 때 제작자와 프로그램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며 위협이다.
월간조선은 진압군의 양민학살 문제를 증언하면 좌익적 시각으로, 반군의 우익인사 학살을 증언하면 우익적 시각으로 재단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는 사실과 진실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월간조선의 시각은 이 사건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입을 틀어막고 연좌제의 그물로 묶어 버린 독재정권의 논리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바로 그런 폭력적 논리에 의해 총살되고, 수장되고, 참수되고, 타살되고, 척살된 수 천명 죽음의 진실이 50년 이상 묻혀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각에 의해 인권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 가치가 훼손되어 온 것이다.
월간조선은 이처럼 자신들만 해독할 수 있는 숫자 놀음으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좌익에 가깝다고 강변한 뒤 드디어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비평을 시도한다.
월간조선: 그렇다면 ‘여수 14연대 반란’ 프로그램의 보도내용중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국방부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규정한 이 사건의 성격을 기준으로 프로그램의 해설원고(프로그램 제작진의 시각이 반영된) 내용을 분석하여 역사적 사실과 다르거나, 시청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할 우려가 있는 부분을 간추려 본다.
월간조선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여순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삼았다. 전사편찬위원회가 서술해 놓은 대로이면 옳고, 아니면 그르다는 태도다. 마치 전사편찬위원회의 서술이 일 점, 일 획도 틀리지 않은 무오류의 경전인 듯 대접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월간조선이 인용한 전사편찬위원회의 서술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지하 남로당의 지령으로 여수 14연대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제 14연대의 1개 대대가 마침 제주도에 증원부대로 출동하게 된 기밀을 탐지한 지하 남로당에서는 동연대의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에게 출동 직전의 기회를 포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령하였고.... (월간조선 인용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기록)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여러 연구에서 부정되었고 현재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 견해다. 여순사건이 남로당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서술은 심지어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李在福, 崔楠根, 金鍾碩, 吳一均, 朴正熙 등 5명은 남로당 군사부 조직 도상의 핵심인물이었으나 이들 5명이 여순반란 사건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고 있다. 여순 반란사건은 14연대의 남로당 세포가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지 李在福이 이를 지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남로당 고위간부 朴甲東씨도 『여순 반란 사건이 났을 때 당 지도부는 대단히 당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남로당과 박정희 소령 연구, 월간조선 89년 12월)
전쟁기념사업회가 낸 ‘한국전쟁사’도 남로당 지령설을 부정하고 있다.
여수반란사건은.... 따라서 중앙당은 물론 그들의 직속상위 부서인 전남도당이나 여수지방당과도 아무런 사전 협의없이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한국전쟁사 제2권 268쪽)
아마도 월간조선은 67년에 나온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자료를 인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자료를 기준 삼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검열하겠다는 것은 스스로 여순사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최소한의 성의도 없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는 한국군의 역사를 가장 방대하게 서술한 책임에는 틀림없으나, 해방 직후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에 대해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선입관으로 사실관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여러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여수 14연대의 반란’ 역시 사건의 성격 규정에 매우 중요한 반란의 계기에 대해 보도했다. ‘반란이 14연대의 남로당 세포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계기는 14연대의 남로당 소속 군인들을 압박해 가던 숙군 수사였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러나 월간조선은 보도의 내용보다 당시 14연대 반란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던 비전향 장기수의 인터뷰를 사용한 데 대해 이해하기 힘든 해석을 했다.
▲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운동을 지지하고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제주도로 동지를 잡으러 가라고 하니, 누가 가겠어요?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자연적이고 폭발적인 것이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순반란 사건 당시 14연대원이었고 비전향 장기수인 김영만씨의 인터뷰 내용)
월간조선: 제주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폭도들을 「동지」라고 했다. 공산주의자인 김씨의 이 발언을 종합 해 볼 때, 14연대 반란사건과 제주도 무장 폭동은 공산 폭도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叛軍 중 한 명이었던 김씨의 발언을 여과 없이 보도함으로써 반군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김영만씨의 인터뷰는 반란의 계기를 규명하기 위해 제작진이 소개한 여러 증언(숙군 수사 책임자였던 육군 첩보과장, 학자 브루스 커밍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중 하나였다.
반란의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반란을 일으킨 당사자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또한 반대자의 입장이었던 또 다른 당사자의 시각도 알아봐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양측 당사자들의 주장의 격돌을 여러 가지 자료를 취합해 분석한 중립적 입장의 학자의 판단도 들어야 한다. 제작진의 이러한 접근은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당연한 방법이며, 김영만씨의 진술은 필수적인 요소다. 김영만씨가 어떤 신분인가를 자막과 나레이션으로 분명히 밝혔으므로 시청자들이 그의 주장을 객관화시켜 들을 수 있는 정보도 충분히 제공했다.
월간조선의 주장은 김영만씨의 진술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인데 진실을 추적하는 것이 기본 임무인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월간조선은 자신이 설정해놓은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의 궤적에서 한 치라도 어긋나면 곧 ‘모욕’이라는 식의 강변을 계속한다. 좌익 폭도들이 경찰 간부를 학살한 사건에 대한 증언 장면조차 문제삼는다.
▲ 그때만 해도 각 경찰서에 통신계라는 것이 있거든. 그러니까 그 통신계장이라는 놈이 나이가 40먹었어. 그런데 그 사람을 어떻게 했냐면 껍데기를 벗겼어. 요런 벽에다가 못을 박아서... 짐승들 해놓듯이(‘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순반란 사건 당시 순천 한국청년단장이었던 황모씨의 인터뷰 내용)
월간조선: 순천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한 뒤 반란군들이 대한민국의 경찰관을 색출해 보복했던 당시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다. 무장폭도가 경찰관을 붙잡아 처참하게 살해했던 당시 상황의 증언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무장폭도가 경찰관을 죽였던 상황을 떠올리며 경찰관에게 「놈」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그대로 방영한 것은 대한민국 공권력 전체를 모욕하는 행위가 아닌가.
이 대목은 반란군 치하에 들어간 순천에서 지방 폭도들이 경찰 간부를 학살한 장면을 묘사한 4개 인터뷰 중 하나다. 증언자인 황모씨는 순천의 우익단체 단원이었다. ‘놈’이라는 말은 그가 자기와 비슷한 입장을 가졌던 당시 통신계장에 대해 '놈'이라고 표현한 것을 방송한 것이지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비하한 것이 아니다. 왜 황모씨가 통신계장을 ‘놈’이라고 표현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익 입장이던 황모씨가 돌아간 분에 대해 악감정을 가질 리는 없고, 단지 그가 대화 중에 자주 쓰는 말투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게 우리의 추측이다.
월간조선은 ‘경찰관에게 놈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그대로 방영한 것은 대한민국 공권력 전체를 모욕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했는데 이 인터뷰를 삭제하는 것이 우익적 시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지 답답할 뿐이다. 증언자는 폭도들이 경찰 간부를 짐승 가죽 벗기듯 껍데기를 벗겼다고 했다. 그리고 벽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이 인터뷰는 제작진이 채록한 반란군 측의 학살에 대한 증언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렇듯 월간조선은 여순사건에 대해 우리가 제시한 사실이나 표현에 대해 사사건건 못마땅한 태도를 취했다. 제목에서 ‘여수 14연대 반란’이라고 했고, 반군 반란군 등의 표현을 여러 번 썼는데도 ‘왜 이 대목에서는 반란군이라고 하지 않고 군인이라고 했나’라든지, 반어적 표현의 ‘반란군의 거사’라는 구절에 대해 ‘거사는 긍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반란군의 폭동’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폭동이라는 단어는 내란 상태에 이르지 않은 폭력 사태를 말하는 용어이고, ‘반란군’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데도 월간조선의 과잉 친절은 그치지 않았다.
▲ 여순사건에 학생들이 가담했다는 설에 따라 학도호국단이 창설되고 현대사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그리고 숙군.... 여순사건을 빌미로 李承晩 정권은 반공체제를 확립하고 政敵(정적) 제거와 집권 명분으로 삼았다.(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월간조선: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肅軍(숙군)작업을 한 것을,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욕 차원에서 이뤄진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가 여순 사건을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어떻게 이용했나하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 드러나 있다. 14연대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이 최초로 보인 반응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극우 정객이 이승만의 정적 김구를 뜻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반대세력이었던 김구와 체제 반대적인 좌익세력을 동일시하여 탄압을 시도했고, 이 방식은 이후 이어진 독재정권에 유산으로 물려졌다. 체제수호와 관련한 문제를 정치적 이해득실로 재단해 이용하는 행위는 체제 자체에 대한 반발을 낳을 수밖에 없다. 체제유지를 위해 동원된 수단이 오히려 국가 권력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의 시발점이 바로 ‘여순 사건’이었다는 점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월간조선: 이 「여수 14연대 반란」프로그램의 전체 흐름은 반란군보다 진압군에 더 비판적이었다. 진압국군이 다소 무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성격이 반란군의 만행에 대한 自衛조치(또는 응징)였음을 애써 축소시켰다.....
‘진압국군이 다소 무리를 했더라도 그 성격은 반란군의 만행에 대한 자위조치 또는 응징이었다’는 월간조선의 해석은 이 사건의 진실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여순 사건 피해는 상당부분 진압군의 진압과정과 이후 수개월 동안 계속된 부역자 색출, 처단과정에서 발생했다.
진압군이 반란군이 장악하던 지역들을 탈환했을 때 반란군과 적극적 좌익 동조세력은 대부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진압군의 작전은 정규 반란군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 공격이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다. 여수 탈환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방임하면 자멸이니 좌익용의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도 철저히 조사하라’는 담화를 한 것은 당시 정부가 보호 대상이어야 할 시민들을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당시 국방경비대 정보처장이었으며 진압작전에 참여한 백선엽씨도 진압 작전의 무리함을 증언했다.
여수 탈환전은 이승만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성화 속에 이루어졌다. 이미 여수에 잔류해 있던 반란군 주력이 앞서 순천을 빠져나간 김지회 홍순석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24일 밤부터 이동하기 시작했고 민간인들도 전화를 피해 피란을 서둘던 마당에 이뤄진 조급한 작전은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다(실록 지리산, 186쪽)
이것이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장교의 솔직한 증언이다. 백선엽씨는 또 당시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부역자 색출에도 회의적인 심경을 토로했다.
나는 지금도 당시 그렇게 많은 ‘빨갱이’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가담자의 대부분은 핵심 좌익계 인물들의 선전과 현실적인 신변의 위협 속에서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 나섰던 것으로 보고 있다.(실록 지리산, 192쪽)
그러나 군경은 좌익 색출 명목으로 여수나 순천의 주민들 수만 명을 인근 학교들에 분산, 수용한 후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이 지목한 사람들을 부역자로 즉결 총살했다. 정식 재판이 아닌 외모나 고발, 혹은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처형했기 때문에 무고한 양민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여순 사건 기간 중 집에 숨어 있던 현직 검사 박찬길이 ‘인민재판에서 재판장을 지냈다’는 조작된 혐의로 즉결 처분된 것이나 송욱 여수여중 교장이 ‘여순 사건의 총지휘자’라는 근거 없는 올가미에 걸려 처형된 것은 당시 상황을 잘 말해준다.
당시 반란군과 좌익세력에 의한 희생과 진압군 및 경찰, 우익세력에 의한 희생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통계는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최근 7년에 걸쳐 계속하고 있는 조사 사업의 중간 집계 결과 '호별 방문을 통해 확인한 희생자 4천여명 중 90% 정도는 진압군 및 경찰 등에 의한 것이었다' 고 밝히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이 흐른 시점에 이루어진 조사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이 조사 결과는 이 비극적 사건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가장 많은 희생이 발생한 진압 후의 부역자 색출과정에서의 즉결처분 행위는 법적 근거가 없이 이루어진 것 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그 계엄령의 근거가 돼야 할 계엄법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자신들이 통과시키지도 않은 법을 근거로 계엄령을 선포한 정부에 대해 국회의원들은 ‘계엄법이 없는 계엄령 선포는 위헌’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진압군이 여수 순천지역을 장악했을 때 진압군이 자위를 위해 무력을 행사할 만한 강력한 반란세력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이나 경찰은 광범위하게 무력을 행사해 희생자를 속출시켰으며, 그러한 행위는 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행위였다 는 판단이 성립한다.
그렇다면 이 행위는 월간조선의 표현처럼 ‘자위조치’가 아닐 뿐더러 ‘응징’으로 평가될 수도 없다. ‘응징’이란 ‘잘못을 뉘우치도록 징계하는 것’이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응징할 때는 반드시 그 무력을 승인해준 국민의 의사인 법에 기초해야 한다. 법에 기초하지 않은 무력 행사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응징’이 될 수는 절대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진압군의 법을 뛰어넘은 무력 행사에 대해 ‘보복’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사건 이후 반란군이나 좌익 세력의 불법행위는 법과 법을 뛰어넘는 국가권력의 행사에 의해 처단됐다. 그러나 국가는 단 한번도 그가 보호해야 할 구성원에 자행된 정당성 없는 무력 행사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
백 번 양보해 당시의 비극이 신생 국가의 보위를 위해 위급한 상황에서 저질러진, 보호해야 할 다수를 위해 행사된 생존 차원의 무력 행사였다고 하더라도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5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까지 진실 규명과 희생자 위로를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비극적 사건은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 ‘여수 순천 10.19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여순 반란 사건’으로 명명되던 이 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역사학계의 오랜 연구와, 소수의 희생도 외면하지 않을 만한 폭을 갖추게 된 우리 사회 자유민주주의의 성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당시 우리 정부의 대응 과정을 비판한 것은 반란군이나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의 언론으로서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역사적 성찰과 반성을 통해 우리 사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나와 상대방이 있을 때 나를 먼저 성찰하는 것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상대방이 반성하지 않는데 왜 내가 잘못을 인정해야 하느냐’는 논리는 한국 현대사의 굴절을 오로지 남한 정부와 미국의 책임으로 돌려온 북한 정권의 논리나 윤리의식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월간조선은 직시하기 바란다.
우리는 월간조선의 이번 보도를 겪으면서 그들의 보도 행위 배경에 자리잡은 역사관, 철학, 심지어 성실성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가에 대해서 마저 의문을 가진다. 다른 모든 것을 두고라도 무고한 생명이 죽어간 문제에 대해 너무나 간단하게 ‘반공 이데올로기’ 하나로 무시해버리려는 가공할 폭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느끼고 있다.
생명이란 한번 사라지면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을 국가가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없앨 때 그 국가 사회는 필연적으로 폭력의 논리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그 업보는 국가가 보호 대상으로 삼은 나머지 국민들에게도 당연히 미치는 것이고, 사회 구성원 간의 평화는 요원해 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 국가가 행한 행위에 대한 반성은 곧 미래의 사회를 평화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의 기반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월간조선이 언론기관으로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는 인정하지만, 그 자유는 사실과 사실에 기반한 타당한 해석에 의지할 때 인정되는 것이다. 문화방송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비방해온 집단의 견해를 ‘애국적’이라고 규정한 뒤 그들의 잣대로 검열을 시도하는 월간조선의 행위는 역사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