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은 묘지명에서 안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집을 다스림에 근검하였다. 말을 잘 하였지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말을 꾸미지는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히 일하여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선한 것을 보면 그칠 줄 모르고 칭찬하니 그를 기리는 일이 많았고, 악을 보면 그것을 피하고 가까지 하지 않으니 원망이 적었다. 스스로 호를 근재라 지었으니 그 뜻을 알만하리라.”
안축 스스로도 “내 평생에 가히 이렇다 할 것이 없으나 4번 사사(士師)가 되어 무릇 백성 가운데 억울하게 노예가 된 자는 반드시 다스려 양민으로 삼았다.” 고 하였으니 그의 공정한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최해와 이색은 “지금 이 기록을 보니 글 뜻이 정교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모두 무적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또는 “문장 도덕이 한때에 뛰어 났다.” 라 하며 그의 문장력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가족이야기 조 : 안희서(安希諝) 생부 : 안석(安碩) 모 : 흥녕안씨(興寧安氏)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안성기(安成器)의 딸 형제 : 안헌(安軒), 안보(安輔), 안집(安輯) 재향지주에서 새로운 명문가로
순흥안씨는 고려 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안자미(安子美)를 시조로 하여 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안영린(安永麟)·안영화(安永和)를 파조로 하는 3파로 나뉜다. 주자학의 시조로 유명한 안향(安珦)이 안영유의 후손이며, 안축은 안영화의 후손이다.
안축의 증조 할아버지 안득재(安得財), 할아버지 안희서, 아버지 안석(安碩)은 모두 향리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지냈다.
아버지 안석은 현리(縣吏)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고, 후에 밀직부사제학(密直副使提學)에 추증되었다. 이렇듯 안축의 선대는 대대로 순흥의 호장을 지낸 재향지주였으나 안축의 대에 이르러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의 가계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더불어 신유학의 이념을 지닌 신흥사대부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하면서 그의 가세는 더욱 커졌다.
아버지를 대신해 두 아우를 돌보다 안축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두 아우 안보와 안집을 교육시켜 모두 과거에 급제시켰는데, 각각 벼슬이 정당 문학(政堂文學)과 성균 좨주(成均祭主)에 이르렀다. 그 중 안보는 그의 형 안축의 뒤를 이어 1345년(충목왕 1)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였고 요양행중서성조마(遼陽行中書省照磨)로 임명되어 승발가각고(承發架閣庫)를 겸임하였다. 아들과 손자, 출중한 자질로 안축의 뒤를 잇다
안축은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안종기(安宗基)는 별장(別將)을 지냈으며, 2남 안종원(安宗源)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는데 공양왕 때에는 관직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 후에는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올랐고, 안종원의 아들 즉 안축의 손자 안경공(安景恭)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집안 대대로 많은 명신이 배출되었다.
안축의 어머니는 흥녕안씨(興寧安氏)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며, 아내는 감천문씨(甘泉文氏)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문구(文龜)의 딸이다.
학문이야기
| | | | 교유인물 | 이제현(李齊賢), 최해(崔瀣), 조렴(趙廉), 이곡(李穀),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 백문보(白文寶) | | 성리학에 심취한 안축 | 안축은 고려 말 성리학을 학문적 토대로 삼으며 등장한 신흥사대부출신이다. 주자학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안향과도 같은 가문 출신이니 성리학에 대한 그의 소양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제현·이곡·이색 등 그가 교유했던 벗들 역시 성리학자로서 이름난 인물들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안향과 함께 소수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유학자들 사이에서 학문 생활을 인정받았다. | | | 거경과 궁리의 성리학적 삶을 추구하다 | 안축의 성리학적 사유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시문을 통해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인심이 안에 있어 외물과 접촉하지 않으면 허령한 상태로 움직이지 아니하여 근본이 안정되다가 사물이 나와 접척이 있은 연후 안에서 움직여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사물과 접촉하여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목구비와 같은 것들인데 - 중략 - 성인은 사물을 응대함에 도가 있어 올바름을 잃지 아니하나, 중인은 사물로 인하여 옮겨가 이도(異道)로 달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항상 사물에 접촉하는 것을 삼갔는데 - 중략 - 대개 외부를 삼가 내면을 기른 것이다.’
외부 환경을 삼가 마음을 수양한다는 이러한 안축의 수양론은 정주(程朱)의 성리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내용으로서,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이라는 성리학의 핵심을 안축도 본받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천하의 물 가운에 무릇 형을 가진 것들은 모두 이(理)를 가지고 있다. - 중략 - 무릇 형이 기이한 것은 드러나 눈이 즐거워하고, 이가 오묘한 것은 은밀하여 마음으로 터득해야 한다. - 중략 - 공자가 말씀하기를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이는 기이한 것을 즐겨 일부만 보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묘한 것을 터득하여 전체를 즐김을 말한 것이다.”하며 궁리(窮理)의 인식을 강조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즉 안축은 거경의 수양과 궁리의 인식 자세를 중시하였던 인물이며, 그러한 성리학적 삶의 자세를 시문에 투영시켜 현실 모순의 극복 의지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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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이야기
|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근재집』 | 『근재집』은 1445년(세종 27) 안축의 현손인 안숭선(安崇善)에 의해 처음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수정·보완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첫머리에는 이황(李滉)이「죽계지(竹溪誌)」권면에 쓴 것을 옮긴 세계도와 총목록이 실려 있다.
권 1에는 1330년 5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강릉도 존무사로 재직할 때에 지은 시문인「관동와주」가 실려 있다.「관동와주」는 사위 정양생(鄭良生)이 1364년 청주에서 처음 간행하였던 것이다. 첫머리에 이제현의 서(序)가 있으며 시 180수와 기(記) 4편이 실려 있다. 시는 칠언율시ㆍ칠언절구ㆍ오언배율ㆍ오언율시 등이 창작 시기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간혹 창작 배경이 소개되고 있는 작품도 있다. 끝에는 1331년 10월 최해가 지은 발(跋)과 1364년 초간할 때 적은 사위 정양생의 발이 있다.
권2는 현손 안숭선이 보유한 시 28수와 가사 2편·표(表) 1편·기 2편으로 되어 있다. 이 중「관동별곡」과「죽계별곡」2편은 경기체가로서 가사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이다. 끝에 안숭선의 발이 있다.
권3은 후손 안경운(安慶運)이 증보한 것으로 시 3수와 책(策) 1편·기 1편·묘지명 1편이 실려 있으며 끝에 안경운의 발이 있다.
권4는 부록으로서 이제현이 지은 송서(送序)와 만(輓)을 비롯하여 사전(史傳)의 기록, 이곡이 지은 묘지명, 서원봉향문 및 여러 문헌에 실려 있는 안축 관련 기록들이 채집되어 있다. 책의 끝에는 정재규(鄭載圭)·정정규(趙貞奎)·후손 안유상(安有商)이 지은 3편의 발이 실려 있다.
| | | 백성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시문 -「관동와주」 | 안축이 관료생활을 하던 고려 말기는 원의 간섭 등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원의 비호 아래 성장하고 있던 권문세족은 왕권을 능가할 정도의 세력을 바탕으로 갖가지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 때 새롭게 떠오르던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신흥사대부는 성리학을 학문적인 기반으로 하여 당시의 부정적인 현실을 과감히 비판하거나 개혁하고자 한 지식계급이었다.
안축 역시 신흥사대부의 한 사람으로서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그가 남긴 글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강원도 존무사 시절 강원도를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내용을 시에 담은「관동와주」가 대표적이다.
총석정(叢石亭)·천도(穿島) 등 관동의 별경을 묘사하고 있는「관동와주」는 기행문학의 틀을 띠고 있지만 경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황폐한 농촌의 모습을 통해 지배층의 백성에 대한 횡포와 수탈상을 고발하는 한편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그리고 있다. 고려 말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관료로서의 역할에 대한 안축의 고민이 묻어나는 시집라고 할 수 있다.
| | | 자연 경관을 보며 노래하다 -「관동별곡」과 「죽계별곡」 | 현존하는 3편의 고려시대 경기체가 중「관동별곡」과「죽계별곡」2편이 안축의 글이다. 「관동별곡」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관동별곡」전체를 아우르는 성격의 글로서 노래하는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2장은 학성 동쪽에 있는 원수대·천도·국도의 기이한 경치를, 3장은 총석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4장은 삼일포 주위의 풍경을, 5장은 승경의 찬양과 뱃놀이의 체험을, 6장은 양양의 경치를, 7장은 강릉에서의 유람과 일출을, 8장은 귀한 손님을 배웅하는 모습을, 9장은 피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렇듯「관동별곡」은 관동지방의 경치에 대한 안축의 감탄을 표현한 글이나 그것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경치 속에 담긴 세상의 이치를 체득함으로서 관동 지방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평안해질 것을 바라는 관리의 바람이 묻어난다.
「죽계별곡」은 안축이 자고 나란 고향인 풍기 죽계의 경치를 읊은 노래로서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을, 2장은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을, 3장은 향교에서 공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현을 뜯는 모습을, 4장은 천리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을, 5장은 성대(聖代)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을 각각 노래함으로써 고려 신흥 사대부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근재 안축(安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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