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로 간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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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로 간  시간여행

오늘 공주로 가는 여행은 설래임의 연속이었다. 그곳에 가면 혹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만날 수도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줄곧 했기 때문이다. 1945년 충남 서천 출신인 그는 오랫동안 공주에서 살며 공주를 무척 사랑한 시인이다. 그의 시 중에는, ‘공주가 참 아름다운 고장임을, 공주 사람들만 모르고 산다고 말하면, 말이 될른지 모르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의 간결한 시 가운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풀꽃’은 가히 압권(壓卷)이다.

설래임은 그뿐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오늘, 한때 찬란한 문화를 떨쳤던 백제라는 나라의 슬픈 역사 흔적을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강 위례성 부근에서 도읍을 정한 ‘한성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남쪽 웅진으로 내려가는 천도를 단행, 공산성을 근거로 ‘웅진 백제’ 시대를 연 다음, 다시 사비성으로 옮기어 ‘사비 백제’ 낙화암에서 마감함으로써, 온조가 품었던 제국의 꿈은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물거품이 되었다.

금강이 내려 보이는 공산성 성곽길을 둘러보다가 ‘취리산 회맹(會盟)’이란 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취리산은 현재 공주생명과학고 뒷산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맹세의 내용은 이러하다. 백제가 멸망한 지 5년이 되는 665년 신라 문무왕, 웅진 도독 부여 융, 당나라 사신 유인원 세 사람이 공주 취리산에 함께 모여, 앞으로 서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며 맹세한 약속으로, 세 나라가 언제나 형제처럼 사랑하고 고난이 닥쳤을 때 서로 돕고 함께 극복하자는, 지켜질 수 없는 낭만적인 외교 수사를 서로 태연하게 나누었다는 것이다. 물론 각자의 속마음은 달랐다.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가졌고, 신라는 백제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당나라도 몰아내어 진정한 삼국통일을 원했고, 백제는 멸망한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 허망한 회합에서의 외교적 수사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당시의 국제정세환경과 비슷한 지금의 중국과 북한, 한국 중 어느 나라가 백제의 운명이 될 것인가? 평화를 앞세우는 지금의 이 나라 집권자들이 벌이는 외교안보정책이, 혹 또 다른 ‘취리산 회맹(會盟)’이 되지 않을까? 이런 불안감이 오늘 여행이 설래임만이 아니라는 현실의 위기의식을 잠시 불러왔다.

그러나, 언제나 여행은 즐거운 것이다. 우리 반창회의 여행은 더욱 그러하다. 아직 산과 들은 만추의 단풍 색깔은 아니지만, 10월의 끝자락 가을풍경은 여유롭게 아름답다. 오늘 여행의 동반자는 모두 열 명이다. 참가하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나, 열(十)이란 숫자는 많다는 뜻도 있지만, 완전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완전한 여행을 한 것이다. 공주에 20년 이상을 거주한 이규승 교수의 헌신적인 기획과 물과 떡과 음료에 더하여, 계룡산 장군봉 자락에서 산채정식을 즐기도록 배려한 넘치는 사랑이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곁들여 나온 동동주는 마치 사막여행에서의 시원한 냉수와 같았다. 더러는 취흥이 도는 친구도 있어, 그 술이 진짜임을 확인하였다.

이 교수가 안내한 첫 번째 장소는 ‘석장리 박물관’이다. 그곳은 이 땅에서 최초 구석기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유적발굴로 확인하여, 각종 유물을 통해 우리 조상의 그 시대의 삶을 밝혔을 뿐 아니라 교과서에 구석기시대가 게재되는 큰 역할을 해낸 곳이다. 1964년 5월 연세대의 미국인 앨버트 모어 (Albert Mohr) 교수 부부가 뗀 석기를 발견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해 11월 같은 대학 손보기 교수가 이끄는 팀이 발굴을 시작한 후 30년간 체계적으로 조사 분석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역사를 천년 단위에서 만년 단위로 끌어올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조금 씁쓸한 것은, 이 땅에서의 중요한 사건과 일이 흔히 외국인의 손으로 시작되거나 거쳐 갔다는 사실이다.

즐거운 중식 후 공산성에 올랐다. 산성 앞 성곽 아래, 이 늦은 가을날에 마치 눈발이라도 내린 듯, 허드러지게 마구 핀 하얀 구절초군락이 우리를 마중하였다.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선 공덕비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려고 세웠는지 씁쓸했다. 그 비(碑)가 세워질 때마다 민초(民草)들의 고난이 더 했을 것이다. 공산성은 도읍지로 보아 그리 크지 않았다. 성안에는 수많은 비(碑)와 누각이 있다. 그중 임진왜란 때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된 영은사(靈隱寺), 정유재란 때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명나라 장수 세 사람을 기리는 송덕비인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그리고 조선 시대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亂)을 피해 일시 파천하여 5박6일을 묵었다는 쌍수정(雙樹亭)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에서도 고난의 역사를 피할 수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인상적인 것은, 성곽 아래 길 위에서 다섯 명의 중년 아줌마들이 오카리나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모습이다. 우리를 위해서도 쾌히 몇 곡을 들려주었다. 흥이 오른 우리 중 그가 연주자들과 같이 어울려 장단을 맞추는 몸짓 풍경도 연출했다. 여행은 그리하여 기억이 남는다.

그다음 방문지는 국립 공주박물관이었다. ‘웅진백제실’에는 한성백제 말기 충남지역 토착세력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과, 웅진 백제기에 조성된 공산성 등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진묘수, 묘지석과 장신구 등을 전시하였고, 한성백제기부터 사비 백제까지의 백제 토기를 전시하였다. 이처럼 백제문화가 찬란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정약용의 말에서 나온다. 정약용이 유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했다(三韓之中 百濟最强最文)‘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충남의 역사문화실‘에는 선사 문화, 고대문화와 중 근세 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물품이 전시되었다. 이 지역을 설명하는 문서가 조선 영조 4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데, 이렇게 요약되었다. ’옛날 백제 지역인 충청도는 실로 한 나라의 요충지이다. 산하(山河)는 왕도(王都)의 경계를 접하고 있어, 그 땅은 중국의 형주와 양주에 비견되며, 토속은 詩와 禮를 숭상하는 기품이 넉넉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추로(鄒魯)’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그 유물 가운데 인상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鎭墓獸)였고, 깨달음의 소리인 범음구(梵音具)였다. 범음(梵音)은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소리인데, 부처의 진리가 퍼지도록 웅장한 소리를 내는 범종(梵鐘), 공양(供養) 시간을 알리는 쇠 북으로, 밀교에서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금강령(金剛鈴)과 불경을 읽을 때 나 부처 앞에 예불을 드릴 때 흔드는 작은 종인 경자(磬子)등이 있다. 진리는 세상으로 퍼져야 하고, 그 진리의 전달 방법은 운율이 있는 은은한 소리였음을 산사(山寺)에 가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는 해태와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주인을 하늘로 모셔야기 때문에 머리에 조그만 날개를 달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즉 고대의 인간과 가축에게 꼭 필요한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 해지(解池)이며, 이를 해씨(解氏)가 장악하고 있고, 해지를 지켜주는 것이 해치(獬豸) 곧 해태이다. 이 해시의 후손이 고구려 건국사(建國史)에 나오는 해모수(解慕漱), 해부루(解夫婁)이고, 온조와 비류는 해모수의 후손이기 때문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진묘수도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과연 이러한 상상의 동물이 무덤을 지켜줄 수 있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인간은 죽음 후에도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그래서 진시황과 같은 제왕의 묻힌 장소는 영원한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신을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시신(屍身)만을 지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영혼도 지키려 하는지 죽은 자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박물관을 나오니 벌써 오후 4시가 되었다. 가까운 부여로 가자는 의견이 있어, 부리나케 부소산으로 달려가 낙화암과 고란사를 주마간산으로 본 뒤, 다시 공주 시내의 저녁 식사 장소로 왔다. 오늘 여행은 너무 함포고복(含哺鼓腹)의 풍류놀이였다. 더러는 이로 인해 만보 이상을 걸어도 뱃살이 줄지 않는다는 푸념을 사치스럽게 했다. 어찌하던, 즐거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더욱이 차 안에서 휴대 전화와 블루투스 스피커가 한 조가 된 음악감상은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는 보너스였다. 조석희 회장과 이광주 교수의 팀워크로 구성된, 차 안의 DJ는 주문을 선곡하고, 들려주어, 흘러간 노래로 가을 저녁 한때의 정취를 마음껏 뿜었다.

오늘을 준비한 김학철 반장과 물심양면을 아끼지 않은 이규승 형, 기념촬영으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분주히 애쓴 사진작가와 DJ 역할의 두 형, 두주불사를 절제하며 분위기를 만드느라 수고한 윤지영, 이준하 형, 불편한 몸으로 고군분투하며 완주를 끝낸 박종신 형, 선문답하듯 항상 점잖은 모습으로 믿음직스러운 김재욱, 이상원 형,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오늘 보니 비록 우리가 망팔(望八)의 중간 길에 접어들었어도 아직 할 일이 많고, 육체도 그리 쇠하지 않고 여태 쓸모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나태주 시인이 오늘 어느 언론과 인터뷰한 말을 우리가 참고하면 어떨까?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건 노년기라는 것을 노인들이 알아야 한다.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생산하고 끝까지 정신 차리고 끝까지 깨끗하게 닦으며 살아야 한다. 서툴지만 자수도 놓고 그림도 그리고 조그만 텃밭을 가꿔서 아이들 주고 이웃도 주고, 그런 소소한 생산을 해야 한다. 내가 일흔이 넘은 이 나이에도 이렇게 열심히 시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다. 노년은 공짜가 아니다. 노년은 인생을 완성하는 노년이어야 한다.‘

쓰다 보니 어언 새벽이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