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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이 대대적인 보수를 한 지 100년이 된다. 이 중 현재 국보 제 46호로 지정된 조사당벽화는 여러모로 할 이야기가 많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똑 부러진 결론이 없는 보물이다. 그렇다고 연구가 많이 된 유물도 아니다. 기껏해야 개론적인 안내서 정도의 연구가 전부일 것이다.
조사당 및 벽화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조사당 도리하단 묵서(祖師堂 道里下端 墨書)에 승안(承安 6년[1201]) 三月에 보수를 하였고 이후 홍치(弘治 6년[1493]) 4월에 다시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사당 장설 상단 묵서(祖師堂 長舌 上端 墨書) 등에는 선광 7년(宣光七年[1377]) 원응(圓應) 국사의 주도로 보수가 있었으며, 1490년과 1573년에도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인 국보 제46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
이후 조사당을 직접언급한 중수기 등의 자료는 없지만 조선후기까지 기와를 교체하거나 단청을 보수하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876년 대승사목각탱 사건과 관련하여 이 일을 마무리하면서 조사당 수리비용으로 대승사로부터 250냥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이즈음에 일련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한다.
1916년 11월부터 1918년 5월까지 무량수전과 조사당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조사당벽화가 완전히 분리되어 무량수전으로 옮겨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1926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조사당의 고벽화(古壁畵)는 고려시대의 작품’인데 1925년 5월 동경(東京) 문부성 기사가 이 벽화를 목제함 속에 넣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까지는 조사당에 원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기사에서는 벽화가 목제함에 들어간 후 1년도 안 되어 조각조각 썩어버렸다고 하여 1925년 5월의 벽화 분리보관 작업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당벽화의 원래 배열 상황을 보면 표와 같다.
그러나 벽화의 도상 명칭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범천과 제석천, 북방다문천왕의 도상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지만 나머지, 동방과 서방의 천왕들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범천과 제석천은 특별한 지물(持物)이 없이 복부에 양손을 모으거나 합장을 한 채 서 있다. 사천왕의 경우 각 도상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벽화 좌측 상단에 ‘남방천왕(南方天王)’이라는 화제(畵題) 남아 있는 ‘증장천왕’ 뿐이다.
연구자에 따라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사천왕을 동방 혹은 서방천왕으로 보고 있으며, 왼손으로 칼을 쥐고 있는 도상을 서방 혹은 동방천왕으로 보고 있다.
또한 조사당 내 사천왕의 배치와 관련하여 석굴암의 경우 동방과 북방이, 남방과 서방이 각각 한조를 이루고 있지만 조사당벽화는 동방과 남방, 서방과 북방이 한 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도상의 배치는 고려불화의 경우 석굴암의 배치를 따르는 예가 많지만 조사당 벽화의 경우 다소 이례적인 표현이다.
사천왕상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쓴 무장형(武將形)으로 모두 악귀를 발로 밟고 서 있는 모습이다.
많이 퇴색되고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듯한 눈매와 얼굴의 세부적인 표현 등이 남아 있어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적외선 사진으로 촬영한 제석천과 사천왕상의 얼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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