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이조 창건을 주도한 개국공신은 삼봉 정도전.
한 나라의 기틀을 잡는 과업을 수행한 정도전.
정치가이며 역사가이고 철학가이며 법률가이다.
정도전은 성리학 바탕으로 민본 덕치주의를 주창
고려사를 편찬하는 등 역사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은 '경국대전'의 기틀.
이성계는 이조 창건과정에서 문인의 도움이 절실했다.
국가창건에 힘이 된 무력이 통치에는 속수무책인 때문.
그때 이조의 기틀과 질서를 확립했던 개국공신이 정도전.
'정도전...그는 누구인가?'
1337∼1398 (충숙왕 복위 6∼태조 7) 살다 간 인물이다.
이조를 창건한 개국공신이자, 이조 유림의 대표적 인물.
정도전은 왕실 정치보다는 대신 정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늘날 정치제도에 비유하면 내각 중심제를 주장.
무학대사와는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
유교사상 한반도 정착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도안 도읍'에 동조.
그 이후 무학대사의 한양 천도설에 밀린다.
그러나, 경복궁 궁궐터 설'로 무학을 제압.
불교의 비합리성 폐단을 지적해
유교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인물.
결국, 이조는 불교 배척, 탄압정책
이조 후기에는 유교사상이 지배한다.
지리산의 수많은 사찰이 사라진 이조 후기
이조의 유교장려 및 불교탄압 정책의 결과.
가락국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불교.
'이조시대 유교가 성행하며 쇠퇴한 불교.'
.......'정도전은 어떻게 살다 간 인물일까?'.........
고려 말 이조 초 문신·학자·개국공신.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化). 충청북도 단양 삼봉 출생.
'이색(李檣) 문하에서 수학.'
1362년(공민왕 11) 진사가 되고 전교주부 태상박사.
1375년(우왕 1) 친원 배명정책 반대로 회진현에 귀양.
1377년 풀려나 학자들에게 경학(經學)을 강의
1383년 이성계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1384년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 사신.
1385년 성균관 대사성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에 토지개혁을 건의
1389년 창왕 폐위 후 공양왕 옹립.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한 이조 개국공신
새 제도와 국책 대부분을 결정하고 요직을 겸임.
1393년(태조 2) 문덕곡 몽금척 수보록 노래를 지어 이성계 창업을 찬송
1394년 판의흥삼군부사가 되어 재정 및 지방병권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
1396년 라오둥 정벌계획 및 군량미 확보
1398년 진법훈련 중에 이방원에게 죽는다.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1395> <경제문감별집>.
경세론을 제시하고 <불씨잡변(1398> 등을 저술.
불교의 비합리성과 폐단을 지적 비판.
성리학을 정립해 유학을 발전시켰고,
유교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정동방곡(靖東方曲) 납씨곡(納氏曲)
신도가(新都歌) 등의 노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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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 - 가령 권근의 기록
"戊寅年 가을 8월에 태상왕(=태조)께서 병이 드시니
간신 정도전이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여
적손(嫡孫)의 왕자들을 제거, 어린 서얼(庶孼)을 세우려고
붕당을 조성하므로 화란(禍亂)이 긴박하게 되었다" <陽寸集>......(권37)
'이 기록은 태종(방원)을 대변하는 입장.'
그 객관성에 문제점이 있고,
태종을 옹호한 편파성도 있다.
하여, 정도전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방원의 권력욕 탓에 정도전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정도전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었을까?'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계권력 구도에 깊이 관여
정실을 배제후 '후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천거
권력을 염두에 두고 11살 왕자 방석의 왕위계승을 주장.
정도전은 방원 방간 사병조직을 해산시키고 지방으로 분산.
방원은 전라도로, 방번은 동북면으로
왕자들을 내보내 병권을 뺏으려 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늙은 이성계 판단이 흐려진 탓.
건국공신 주역 이방원을 젖혀두고,
11살 방석을 세자 책봉한 점은 실수.
결코, 무사할 수 없는 후계구도였다.
결국, '이성계의 실책'이 빚은 '왕자의 난'.
정도전은 오만하고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
한때 자신을 가르친 스승 이색을 탄핵했고
동문수학을 했던 이숭인을 죽이기까지 했다.
비록 정치노선이 달라도 죽일 필요가 없는
한때의 스승인 이색을 죽이자고 주장한 점.
정도전의 경륜보다는 야망이 앞섰던 야비함.
분명, 정도전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오만과 교만은 감당할 수 없는 결점.
불교탄압후 불교권 국가들과 문화교류가 단절된 이조.
결국, 이조는 유교정착 만큼 국제정세에서 뒤떨어진다.
정감록.
이조의 혼란기마다 민심을 사로잡은 예언서.
정감록에서 유교사상의 한계를 드러낸 대목들.
정감록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쓴 책인지 살펴보자.
정감록 내용은 이조 국가존망에 관한 예언서
이조 혼란기마다 민심을 사로잡은 예언서이다.
도교 사상이 담겨있는 책이지만
저자와 저술 연대는 아직도 베일.
정도령의 출현, 새로운 도읍지,
환란과 십승지에 관한 내용의 책.
아직까지도 민심을 사로잡는 예언서.
'오늘날까지도 민족사상의 한 줄기.'
신라 말 고승 도선국사가 지은 것이라 전해온다.
권력변천과 난세의 피난처에 집중된 정감록 내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후에 작성된 예언서라는 설.
정감록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지식인이 유포한듯.
아직도 '정체불명의 말세론 예언서'로서 존재한다.
정감록의 사상배경은 고대중국의 자연철학적 우주론
정치적 역성혁명 이론, 중국의 음양오행 철학 우주관.
여기에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설이 합쳐진 내용이 줄거리.
정감록이 우리나라에 정착된 시기는 이조후기
정감록의 출발점은 정도전에서 비롯된 듯 싶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11살 왕자를 앞세워
정감록을 유포해 대신 정치를 열려한듯.
그 뜻이 실패하자 죽음이 두려웠던 정도전.
가문의 멸망을 막기위해 정감록을 은폐한듯.
정도전 사후 정감록 예언설은은 한동안 잠잠.
그러나, 그 추종세력들이 정감록을 보완해 온듯.
정도전의 '사상과 야심'이 담긴듯한 정감록.
정씨가 나라를 구한다는 내용이 단적인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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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저서로 추정되는... 정감록의 3대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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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이는 것은 누구인가(殺我者誰),
나를 살리는 것은 무엇일까(活我者誰)
미래와 영원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한 대목.
예언마다 반복되는 그 문구는 정도전이 심경.
죽음을 두려워하는 솔직한 심경 토로인 듯 싶다..
....................첫번째 예언 -<임진왜란>........................
살아자수(殺我者誰) 여인대화(女人戴禾) 인부지(人不知).
활아자수(活我者誰)이요, 십팔가공(十八加公)이라...예언 대목.
계집(女) 사람(人)이 벼(禾)를 인 것이 사람인 줄을 모른다(人不知).
이는 왜(倭)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임진왜란을 미리 예언한 대목.
이조 국란에 도움 줄 사람은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라 뜻 풀이.
<임진왜란> 왜적이 출병할 때 일본 공주는 전쟁결과를 예견.
전쟁에 이기지 못할 것으로 판단,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였는데,
이를 묵살하고 떠나자 '솔 송(松)'자 가진 사람을 조심하라...예언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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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정감록의 예언 풀이가 맞는 것일까?' 아니다.
정도전의 숨은 뜻..솔 송(松)은 곧은 절개를 지닌 선비를 의미한다.
음지에서 곧게 자라는 잣나무 栢과 합친 송백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
난해한 한문책 정감록을 해석할지 모를, 선비에 대한 두려운 심경.
훗날 이조의 유림들이 정도전을 높이 칭송하게 만들려는 계략인 듯.
정도전 후손들이 정감록 원문에 토를 달아 임진왜란을 예언한 듯 왜곡.
................두번 째 예언 -< 병자호란> ..........................
살아자수(殺我者誰) 우하횡산(雨下橫山) 천부지(天不知).
활아자수(活我者誰) 부토(浮土) 온토(溫土) 종토(從土)하라.
<병자호란>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엄동설한 혹한에 침공.
1636. 12. 9. 압록강을 건너 피난 가 산에 숨으면 얼어죽을 것을 예언.
비우(雨) 字 아래 뫼산(山)자를 옆으로 눕혀 써서 합치면.. 눈설(雪) 字.
그 의미는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모른다(天不知)는 뜻의...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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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비결은 '허공에 뜬 흙...(浮土)'= 따뜻한 흙(溫土) = 따를 흙(從土).
이는 온돌방 구들을 뜻한 것으로 방안에 가만히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정도전의 숨은 뜻은.. '1396년 라오둥 정벌 계획' 무산 후 자신의 죽음을 예견.
라오둥 정벌은 이성계의 아들 방언 방간 두 아들을 변방으로 축출하려는 계략.
그후, 이성계의 11살 어린 왕자에게 대통을 이으려다가 실패한 심경이 담긴 듯.
온돌방 구들이 있는 지리산 칠불암을 은신처로 생각한 대목으로도 풀이 된다.
......................세번째 예언 - <후천개벽.>............................
살아자수(殺我者誰) 소두무족(小頭無足) 신부지(神不知) 이라.
활아자수(活我者誰)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 부금(浮金)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 엄택곡부(奄宅曲阜) 삼인일석(三人一夕) 이재전전(利在田田) 도하지(道下止).
인간 모두를 죽이는 것은 작은 머리에 다리가 없는 소두무족(小頭無足).
이것이 바로 천상 영계의 신명인 것을 모른다(神不知)고 뜻 풀이가 된다.
'귀신 귀(鬼)'에서 작은 머리에 ' (점) 하나가 없고 다리를 떼어내면.. 밭 田.
이는 천상 군대(神軍)의 총지휘자인 신장(神將)을 암시하는 은밀한 단어이다.
그러면 나를 살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이다.
'절의 논 칠두락'이 있는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상으로도 추정.
지리산 '49일 온돌방 아자방' 큰바위에 '7불상이 새겨진 칠불암으로도 추정
부금, 냉금, 종금의 뜻은 밑없는 시루(浮金)위에 서 계신 미륵불(冷金).
사람으로 태어나니 그분을 잘 믿고 따르라는(從金)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 오시는 장소는 문득 곡부에 집을 정하게 되며(奄宅曲阜)
새로운 진리를 주실 것이니, 이를 잘 수도(修=三人一夕)하고,
이재전전(利在田田)은 환란이 매듭 지어지는 피난처가 대전(大田).
그곳 신도안이 환란의 피난처로 적당하다는(道下止)로 풀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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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러한 뜻의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다.
정도전의 숨은 뜻은..신도안 도읍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
아울러, 그가 죽게되면 후손 삼족이 멸할 재앙에 대한 대책과 은신처.
'작은 머리에 다리가 없는 소두무족(小頭無足) = 세치 혀'
정감록을 후손에게 죽어도 발설하지 말라는 정도전의 비장한 심경 토로.
하여, 이조시대 후기까지도 그의 후손들이 책의 저자를 숨긴 것으로 추정.
정도전의 유교사상 기본 초석은 그가 비합리성과 폐단을 지적한 불교이다.
'<유교사상의 지침서> 정감록을 불교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모순.'
죽음이 임박한 그는 불교에 의지하려 한 심경 고백일까?
아니면, 무학대사 도움 없이는, 살 길 없다고 판단한 걸까?
정감록은 학문의 깊이로 보아.. 그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책.
'하여, 세 가지 예언에 숨은 뜻을 보아 정감록 저자는.. 정도전.'
<정감록>에는 진주 서쪽 100리에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본 고려시대의 이인로,
조선시대 김종직 .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신라가 패망할 무렵부터 천년 동안 청학동의 위치는 신비의 베일에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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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유사한 지형은 현재 지리산의 청학동 위치.
불일 폭포 뒤 무학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도 유사.
인근의 칠불암이 있는 화개골도 정도전의 이상향인 듯.
고려 말기 이인로가 청학동을 찾아나섰다는 정감록 기록.
정감록 원저자는, 지리산과 깊은 인연 있는 인물인 듯 하다.
그러나, 역사속 시점과 시대적 배경을 보면 정도전이 쓴 듯.
정도전은 법술가이고 사상가이자 박학다식한 학자.
노래와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뒤흔들던 권모술수.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성격.
'이조창업 과정에서 유언비어 날조의 달인.'
그가 대권을 장악하려 했던 집요한 야망이 섬뜩하기만 하다.
정도전은 이조창건 당시 이성계 지지파 최대세력 유림 대표.
정도전은 이조에 유교사상을 세우기 위해 불교를 탄압한 인물.
무학대사를 몰아내고 이조에 유교사상의 초석을 심어놓은 인물.
위대한 인물이지만, 인격적인 결함이 많았던 점이 매우 아쉽다.
흑백논리로 정적을 제거하고, 가치관의 차이를 포용하지 못한 점.
불교를 탄압하고 사상논쟁을 벌려 민심과 국력을 낭비하게 한 점.
이조창업의 정당성을 위해 타 왕조의 역사까지 왜곡하려 했던 점.
오늘 날, 우리나라의 비정한 권력욕 정치판을 보면, 그를 보는 듯.
눈앞 권력과 야망에 눈이 어두웠던 그는 역사에 큰 교훈을 남긴다.
'재주가 인격을 앞선 인재를 중용하면, 나라의 먼 장래를 망친다.'
정감록 세번째 마지막 예언에 담긴, 숨은 뜻..후천개벽.
그것은 대전 신도안을 단지 피난처로 상징하는 말일까?
정도전이 이조 정권을 장악하려 한 속셈이 담겨있는 듯.
대전은 옛부터 유림의 본고장, 정도전의 지지세력 기반.
정권장악에 실패할 경우 숨을 곳이 청학동이었던 듯 싶다.
정도전은 이방원을 궁지로 몰다가 그에게 목숨을 잃고만다.
권신세력의 중심 정도전은 왕실과의 세력다툼에서 진 것이다.
정도전은 죽음을 각오하고 권력에 도전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십승지.
이조 22대 정조 왕과 학문이 깊었던 규장각 학사 운항임
서로가 틈날 때마다 정사를 논하며 나누었던.. '4자 단구'.
경기도는 경중미인, 충청도는 청풍명월, 강원도민 암하고불,
함경도는 이전투구, 평안도는 맹호출림, 황해도민 석전경우,
전라도는 풍정세유, 경상도민 설중고독 이란 말이 전해왔다.
이조 때 도민을 평가한 이 말이 이후에도 계속 내려왔다.
그중에서도 옛부터 충청도 청풍명월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단양은 풍수지리설 명당터가 많았기에 더욱 청풍명월의 고장
그중에서도 이름난 명당터로는 이대 천자지지 비봉귀소형
매화낙지혈 금계모란형 균어종옹형 옥녀직금형 오녀산발형
그 옛날 고려 때 정감록 감결에 의하면 십승지가 있는데
이심과 이연 형제가 정감과 팔도유람하며 잡았던 명당터.
정감록은 이조왕조 운명과 흥망을 예언한 3인의 대화형식.
'정감은 제갈공명 보다 더 용하다는 촉나라 도사.'
천자에 불과한 짧은 비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
금서로 판명되어 조정에서 단속하고 처형했던 것이다.
① 풍기예천 금계바위 ② 안동화곡 ③ 개령용궁 ④ 가야
⑤ 단춘 ⑥ 공주마곡 ⑦진천목천 ⑧ 봉화 ⑨ 운동 ⑩ 태백
60여 감결비서 중 ⑤번인 단춘은 변하지 않고 있다.
단춘은 그만큼 살기 좋고 소박한 고장이란 증거이다.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말'
이십년 병화(싸움)에도 구인종어 양백하고
구년가음에도 구곡종어 삼풍하니 라는 단말.
이곳이 바로 단양과 영춘 지방이기 때문이다.
양백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의 중앙을 말하며
<3풍지간>은 옛날 의풍이 3풍이기 때문이다.
'즉, 산고미경 토질비옥 인신온후 = 3풍.'
이곳을 찾아온 정감록파들이 소백산맥을 지붕 삼아
평안도 황해도민들은 1970년대까지 화전을 일구었다.
동학혁명과 각종 의병전투 6.25전쟁을 피해갔던 십승지
동학교주 최시형이 의풍장건지에 처가를 두고 살았고
그는 가산에서 3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학을 공부
한일합방때에는 십승지를 중심으로 의병항쟁이 심했고
십승지 소백산 허리는 일본 정규군과 치열한 격전장
의병장 김상태 장군, 의사 김용재, 의사 김두배 등등
정감록 십승지를 이용해 민심을 규합해 항쟁했던 고장.
이 십승지는 현대 과학의 발달로 점점 쇠퇴해가고
그 맥을 잃어가지만 십승지와 비결은 살아있는 듯.
'십승지'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곳일까?'
정감록에서 일컫는 십승지는 백두대간이 낳은 명당들.
백두대간 허다한 산자락 가운데서 소백산을 가장 중시.
풍기 금계촌, 예천 금당, 봉화, 단양 등지의.. 십승지.
소백산의 어깨에 해당하는 영주분지에서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의 나뉨이 시작.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무사히 보전할 땅”
정감이 이심과 이연 형제와 더불어 방방곡곡을 유람
이조 국운을 예언한 대화체 예언서가 바로 정감록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 사람이 금강산에서 유람을 시작,
삼각산 거쳐 다시 금강산으로 갔다가 가야산에서 끝.
서북쪽에도 묘향산, 구월산 같은 명산이 많은데
정감록은 서북 지방을 버려진 땅으로 보았던 듯.
그와는 대조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을 몹시 중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도읍지에 관한 정감록 예언.
도읍지가 평양, 송도, 한양, 계룡산, 가야산이라는 점.
십승지 으뜸, 풍기 금계촌과 예천 금당동
풍기(豊基)는 '토정가장결'에 피난처로 손꼽는다.
태백·소백 두 산의 그늘이 남쪽으로 드리워진 풍기
풍기의 길지는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
금계촌은 마을 북쪽에 소백산이 있고
산 아래 두 개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
풍기 못지 않은 곳이 예천(醴泉) 금당동(金堂洞) 북쪽
전란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평안을 누릴 만한 곳
다만 임금이 이쪽으로 피난을 올 경우엔 화가 미친다는 곳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봉화까지 피난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정감록의 예언으로서 풀이된다.
십승지를 선정하는 1차적인 판단기준은 풍수지리설.
특히 백두대간 가운데서도 태백산 이남에서의 길지
십승지 으뜸으로 손꼽히는 풍기와 예천은 경상도.
둘째, 셋째, 넷째 그리고 여덟째 십승지도 경상도.
십승지의 둘째는 안동(安東) 화곡(華谷).
내성현(奈城縣) 동쪽, 태백산 양지바른 곳
셋째 십승지는 개령(開寧)의 용궁(龍宮),
네째는 가야산 밑 남쪽에 만수동(萬壽洞)
여덟째 십승지 봉화(奉化)
태백산과 소백산 가까운 곳.
아홉 번째 십승지는 지리산
충청도에는 모두 세 곳의 십승지가 있다.
세곳 다 소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자락.
다섯째 십승지는 단양군 영춘에 있는 단춘(丹春)
춘양면 땅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단양 가차촌을 거론
기이하고 경치 좋은 곳이라지만 어딘지 정확하지 않다.
여섯째 십승지는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
일곱째 십승지는 백두대간 진천(鎭川)의 목천(木川)
전라도 땅에 있는 십승지는 하나 뿐.
아홉째 십승지 두류산 운봉은 (雲峰)
장차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들을 배출.
전라도 운봉은 궁기(弓其)만은 못해도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곳이다.
궁기란 남해 백두대간 줄기가 끝나는 곳.
지리산을 백두대간의 종착점으로 인식한 이중환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난세에 지리산으로 은신.
지리산 남쪽 화개동과 악양동 역시 난세의 피난처.
신라말 최치원 = 가야산과 지리산을 왕래하는 신선
선조 때 스님이 지리산에서 주은 종이에 쓰인 글귀
"동쪽나라 화개동은 병속의 별천지
신선이 옥 베개를 밀고 일어나 보니
이 몸이 이 세상에서 벌써 천년을 지냈구나"
이중환이 지리산 최고의 복지로 꼽은 만수동과 청학동
만수동은 이조 후기에 구품대(九品臺)로 알려진 곳이고,
청학동은 18세기부터 조금씩 사람들이 출입했던 곳이다.
경상도 함양 영원동(靈源洞·지리산 반야봉 북쪽),
군자사(양군 마천면 군자동), 유점촌(鍮店村)도 복지
용화교.
미륵불 또는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
상생(上生)과 하생(下生) 신앙으로 구분.
수행을 통해 미륵보살이 살고있다는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다는 상생신앙.
석가모니가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
미륵이 환생 후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
3회 법회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하생신앙
미륵불이 출현할 때, 세상은 낙원으로 변하고,
온갖 재난이 사라진 세상으로 뒤바뀐다는 믿음.
미륵신앙은 미래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희망.
1 세기 이 후 시작된 미륵신앙은 2 세기 성행
9 세기 경에는 무착(無着)에 의해 사상체계 확립
중국 북위시대에 수용되고, 수당 이후 유포.
중국에서는 미륵이 현세에 하생
이상향을 열망하는 민중의 신앙
하여, 미륵의 이름 아래 종교반란
천재지변, 학정으로 곤궁했던 민중
미륵신앙은 반란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미륵신앙을 사교라 하여 탄압.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초기부터 현재까지 계속된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하길
발원하며 미륵상을 조성했고 신라 백제도 마찬가지.
백제는 6세기 경부터 미륵신앙이 두루 유포
634년(무왕 35)에 낙성된 미륵사
삼국에서는 가장 큰 가람이었고,
미륵하생신앙을 기반으로 창건.
신라의 미륵신앙은 화랑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륵선화(彌勒仙花)설화, 죽지랑(竹旨郞)탄생설화,
용화향도(龍華香徒) 등이 이 사실을 대변하는 사례.
진평왕 때 흥륜사 승려 진자는 미륵불상 앞에서 염원.
“미륵불이 화랑으로 화신(化身), 세상에 출현해 주길.."
용화향도란 화랑 김유신이 거느린 낭도를 지칭하는 것.
통일신라 시대 미륵신앙 소의경전에 대한 연구
원효, 경흥, 의적, 태현 등에 의한 저서 12 종.
경덕왕 때 월명(月明)이 지은 향가 <도솔가>
충담은 매년 두 차례 미륵삼존에게 차를 공양
719년 김지성은 감산사 창건후 미륵석상을 봉안
경덕왕 때 진표는 가장 열렬한 미륵신봉자.
수행을 통해 도솔천에 태어날 인물로 예견.
그가 중창했던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근거지
후삼국시대 혼란기에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고 했으며,
미륵불 행세로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1109년 고려 예종은 미륵사에서 법회.
충렬왕 때 광명사에서 용화회(龍華會)
1301년(충렬왕 27) 9월과 1302년 2월
이 무렵에 왕사 무외(無畏)가 주관하는 용화회
조계산에서 7일 동안 열렸던 미륵신앙의 사례들.
민간에서도 미륵신앙은 그 뿌리가 깊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사원으로는 관촉사
금장사(金藏寺) 도솔사(도率寺) 등이 있다.
고려 말 민간에서는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훗날 용화회에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풍속이 성행했었다.
1309년에 세운 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
동해안 9곳에 1,500조 향나무를 묻었다고 기록.
사천(泗川)매향비는 1,000 여명이 1387년 세운 것.
영암, 목포, 서산 등지에서도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사천 매향비....................
지정번호 : 제 288 호
소재지 : 향촌동 산 46-1번지
지정일자 : 1993년 1월 8일
규모 : 300㎡
국가지정보물 제614호인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매향비
그것과 같은 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
매향비에 나타난 발원 형태는 모두 미륵하생신앙과 연결.
이조 초 태종 18년(1418) 승려와 신도들이 이곳에 매향
당시 왜구에 의해 격심한 침탈을 받던 해안 지방 백성들
왜구의 창궐은 큰 불안이요, 현실적 위기감이었다고 생각.
백성들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에서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종교의식으로서 매향을 선택했던 듯.
처녀바위의 매향비에 새겨진 ‘수륙무차대회(水陸無遮大會)’
수륙회(水陸會)라 일컫는 수륙제나 오늘날의 풍어제
바다와 육지에 있는 고혼과 아귀를 위한 제(祭)인듯.
정유 2월 15일, 무술 2월 15일 수륙무차대회
포락에 향목을 침향한 후 여러 비구와 더불어
십방시주(十方施主)의 명단을 적은 것이며
30여 승려가 공동으로 행한 대중적 불사.
....와룡산 사랑 문조리님 자료 제공....
우왕 때 이금(伊金)은 스스로 미륵불.
“나는 나무에 곡식이 열리게 할 수 있고,
한번 씨뿌려 두번 수확하게 할 수도 있다”
조정에서는 이금과 그 무리를 잡아 죽였다.
이조시대 민중을 중심으로 성행한 용화교.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이 일으킨 사건.
여환은 아내 원향(遠香)과 무녀인 계화(戒化),
아전이던 정원태, 그리고 황회(黃繪) 등을 규합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전파.
그를 따르는 무리는 황해도·강원도 등지까지 퍼졌다.
“이제부터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여환은 자신의 아내를 용녀부인이라 불렀고
그녀의 신통변화는 측량할 수 없다고 선전했다.
무당 계화는 정성인으로 탈바꿈해 민중들을 현혹,
“7월에 큰 비가 와서 도성이 무너질 것이다.”
미륵신봉자들에게 장검과 군복을 준비시켰다.
이들은 무장한 신도들을 양주 대전리로 집결
여환 등 10명은 상경해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하늘은 맑기만 하자 양주로 되돌아갔다.
이 사실이 드러나 여환과 주모자는 처형되었다.
여환은 용화교와 민간의 용 신앙을 교묘하게 관련
무녀들이 이에 적극 합력해 이상사회를 구현을 시도.
이들에게 호응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주로 하층 민중
흉년과 질병으로 시달리던 암울한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미륵 하생신앙
그들의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을 자극한 것.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종교 중
증산교 계통과 용화교(龍華敎)
증산은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하리라 예언.
따라서 증산의 제자들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재하려고 노력했다.
증산의 제자 김형렬(金亨烈)은
한때 금산사에 미륵불교라는 교파
증산의 영체(靈體)로 신봉하기도 했다.
................증산교....................
1902년 강일순(1871~1909)이 개창한 종교.
증산 교조 사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는데,
분파된 종단들도 창시자 호를 따서 증산교.
일제 강점기에 흠치교라고도 했다.
증산교는 한말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 종교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 무속과 선도(仙道)를 계승·
민중의 신앙의식을 민간중심 공동체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창시자 강일순은 몰락한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윤택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후 처남집에서 훈장
갑오전쟁 때 실패를 예언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다음 3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사회 실상과 민중생활을 살핀 후 민심을 수습
1901년 전주 모악산에 들어가 도를 닦기 시작
그해 7월 5일 성도(成道)한후부터 훈화활동.
1902년부터는 고통 속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땅·인간의 삼계대권(三界大權)을 가지고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했다며 천지개벽설을 주장
세상의 혼란을 괴질로 비유하고
자신이 세상의 모든 병을 대속했으나
오직 괴질병 만은 남겨두었다고 했는데,
예언과 병자를 고치는 의통이 구원의 수단
당시 추종 무리는 천지개벽이 속히 도래되길 염원.
1909년 그의 허망한 죽음후 장례식도 참석않고 해산
2년 뒤 그 아내였던 고부인(高夫人)이 갑자기 졸도 후
강일순같은 언행을 하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다.
강일순의 영이 강림했다하여 선도교(仙道敎:太乙敎) 형성
교단의 교세가 확장되자 강일순의 추종자
고부인의 이종사촌 동생인 차경석(車京石)
고부인과 신자들의 접촉을 차단하고 교권을 장악
교명을 보천교로 바꾸자 고부인의 태을교로 분파.
김형렬(金亨烈)은 미륵불교, 안내성은 증산대도교
이러한 분열 가운데 급성장한 차경석의 보천교.
1919년 전국에 60 방주(方主) 교구 및 수백만 신도
1921년 함양군 황석산에서 천자등극을 위한 천제(天祭)
조선총독부에서는 보천교 신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
일제 탄압이 계속되자 차경석은 친일행각을 시작.
교단 내에서 심한 반발이 일어나 보천교 혁신운동
이때 일부 간부들이 이탈해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서울대법사(大法社)·삼성교(三聖敎) 등.
한편 강일순 추종자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
순천교(順天敎)·태극도(太極道) 등 100 여 개
1938년 조선총독부는 증산교 및 유사종교 해체령
증산교 교단이 소멸되거나 지하로 잠적.
1945년 8.15 해방후 새로이 흥기하기 시작.
1950년 후반 말세론이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1960년대 자체 정비와 도태과정을 겪는 한편,
이상호·이정립 형제에 의해 경전 발행 작업
1970년대 이후 한국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정신 문화유산을 간직했다하여 학계의 주목
1975년부터 〈증산사상연구〉를 발간하기 시작,
1974년 증산도장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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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혼란기의 정감록, 갑오경장 등 격변기
미륵신앙은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선동
희망 잃은 민초에게 새 세상을 열어준다고 현혹했다.
하지만, 미륵사상을 표방하는 정통 종파는 없었다.
불교에서의 미륵신앙은 스스로가 미륵이 되는 수행.
전생에 죄업까지 참회하여 도솔천으로 간다는 믿음.
1966년 교주 서백일이 피살된 뒤 교세가 쇠퇴.
지금도 금산사 용화동은 용화교 신봉자의 마을.
장길산(張吉山) 소설 저변에 깔려있는 미륵사상
................장길산......................
이조 효종 때,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난 장길산
광대 장충의 구원으로 재인(才人) 마을에서 성장.
같은 마을 역사(力士) 이갑송, 송도 상단 행수 박대근,
구월산 화적인 마감동 등과 사귀다가 창기 묘옥과 정분
길산은 해주 간상배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붙잡혀 사형수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후 양부모의 뜻을 어길 수가 없어
누이 동생 봉순과 결혼후 금강산 입산.
운부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백성'에 대한 의식이 눈뜬다.
숙종 10년, 대기근이 발생하자
관아와 부호를 털어 기민을 구출
구월산에서 의적떼 활빈도를 결성
운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巫系),
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과 결속해 반란.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해 용화(龍華)세계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
이때 고달근이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달아난 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응징하고 최형기를 처단.
그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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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북부능선' 삼정산에 있는 도솔봉.
연하천과 벽소령 사이 삼각고지 인근 도솔봉.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지리산으로 숨어든 화전민들.
결국, 1950년대 '반란의 역사'에 휘말려 온갖 고초.
소각령에 의해 그들이 꿈꾼 이상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상향 도솔천에서 도솔봉까지 빨치산 격전지.'
결국, 도솔천 이상향은 아비규환 지옥이 된 셈.
연하천에서 형제봉까지는 일명 '숲속 요정의 거리'.
죄없이 죽임을 당한 산골 처녀들 영혼이 떠도는 곳.
함양 삼정마을 일대에서 아직도 불리우는 '산동애가'
'연하천 요정의 실제 주인공들이 아닐까?'
미륵산(461m)
통영은 남해 최고의 미항으로 소문난 '동양의 나폴리'
미륵도 미륵산이 없었다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명성.
미륵도와 통영 해협의 사이를 잇는 충무교와 통영대교
임진왜란의 전승지로 수많은 유적지가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기후, 청정 해역
풍부한 해산물 먹거리가 인파를 붐비게 한다.
통영해협을 가운데 두고 시가지와 남쪽으로 마주 보며
그 가운데에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미륵산(461m).
경남 통영시 봉평동, 미수동과 산양읍을 가르며 솟아있다.
산정에 서면 대마도까지 바라보이는 조망
그래서 산림청이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
한려수도 사이로 솟는 일출은 황홀경을 연출.
미륵산은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여기 사바세계에 출현
용화수 아래에서 삼회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곳.
미륵산 속칭 용화산은 유서깊은 용화사 이름을 딴 지명
미륵, 용화 등 불교용어가 암시하듯 산기슭에는
용화사, 관음암, 도솔암, 미래사 등의 사찰이 있어
이곳이 불교문화 요람인 동시에 영산임을 알 수 있다.
산정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옛 천제단을 비롯해
제2봉에 봉수대 터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용화사는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화상이 초창해 정수사라 명명
고려 원종 원년(1260)에 큰 비가 내려 산사태로 소멸.
3년 뒤 자윤, 성화 두 화상이 옮겨 짓고, 천택사라 명명
인조 6년(1628) 소실된후 벽담선사가 중창 용화사로 개칭
관음암을 벗어난 오르막길 따라 10분이면 도솔암.
고려 태조 26년(943)에 도솔선사가 창건했다.
암자 뒤 동굴은 도솔선사와 호랑이 전설의 고향.
효봉선사가 6.25 당시 이 암자로 피난 와 머물면서
통영땅에 선종 불교의 뿌리를 내리고 미래사를 창건
제자 법정, 일초 스님이 문파를 형성한, 선종의 산실
미륵도는 연륙교로 인해 오래 전부터 섬이 아니다.
그래서 통영 시민들은 이 산을 찾고 또 아끼고 있다.
서울에 북한산이 있고, 부산에 금정산이 있다면
통영에는 미륵산이 있어 시민 안식처로 자리매김
북쪽 내륙에는 통영의 조산인 벽방산이 솟아 있고,
발아래 통영 동으로 거제도와 한산도, 남쪽의 욕지도,
서쪽 자란만 사량도까지 삼면의 바다에 100 개의 섬들
.....................찾아가는 길.....................
1) 용화사 광장(버스종점)~용화사~관음사~도솔암~미륵치~
띠밭등 안부 갈림길~정상~미륵치~작은망~현금산~303m봉~
산양중학교~산양 삼거리(4시간 소요)
2)용화사 광장~용화사~디밭등~정상~미륵치~작은망~
헬기장~도솔암~관음암~용화사 광장(2시간30분 소요)
3) 용화사 광장~관음암~도솔암~헬기장~작은망~미륵치~
정상~미래사~띠밭등~용화사~용화사 광장(3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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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화산(龍華山)
...................
화천군민의 정신적 명산이며
해마다 용화축전 산신제 명소.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의 지네와 뱀이 서로 싸우다
이긴 쪽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용화산
득남바위, 층계바위, 하늘벽, 만장봉,
주전자바위, 작은 비선대 등 기암괴석
용화산 북쪽에 성불령고개에 있는 성불사 터.
성불사 저녁 종소리와 용화산의 안개와 구름,
기괴한 돌, 원천리계곡 맑은 물, 부용산 달빛,
죽엽산의 단풍, 구운소의 물고기 등이 화천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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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에 유불무산(693m)·매봉산(615m)·장군봉(315m)
산을 끼고 북동쪽에 파로호, 서남쪽에 춘천 댐이 있다.
산 정상에서 3갈래의 능선이 이어진다.
동남쪽 고탄령 서야령에 이르는 주능선
북쪽 성불령능선, 서남쪽 큰(부다리)고개
정상에서 발원하여 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양통개울
사북면 고성리에서 사북면 고탄리 거쳐 춘천호로 유입
북동쪽 계류들은 간동면 유촌리 용호리에서 파로호로 유입
정상부에는 부족국가 시대의 용화산성과 참나무숲
산록에는 용화사 절터를 비롯한 용흥사·용암사 등
백운대 은선암 현선암 기암괴석과, 용마굴 장수굴 등
....................찾아가는 길...........................
춘천에서 화천가는 국도를 달리다 춘천댐 입구에서
오른쪽 도로로 15분을 더 가면 춘천 고탄리 양통마을.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 화천군 하남면 삼화리 포장도로
정상 1km 아래에 주차장까지 생겨 드라이브 코스로 훌륭.
등산코스
1) 삼화리 - 용화산 정상 - 파로호전망대 (5시간소요)
2) 용화산입구 - 용화산 정상 - 말골낚시터 (4시간 20분소요)
3) 용화산입구 - 용화산정상 - 용호리
4) 용화산입구 - 용화산 정상 - 유촌리 (3시간 40분소요)
현지교통
화천읍 → 삼화리 (8km, 일4회 운행, 15분소요)
동서울,상봉동터미널 → 청평 → 가평 → 춘천
→ 화천(2시간50분 소요, 일29회 운행)
도로안내
서울에서 46번 국도로 청평 → 가평 → 강촌 →의암호 서편
→ 403호 지방도→ 춘천댐 건너 춘천방향 500m 진행후 좌회전
→ 407번 지방도 → 고탄리 → 고성리 → 용화산 아래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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