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그 이름이 다가 아니다
하회마을의 탈박물관에 들러보면 하회마을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하회탈 및 병산탈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우리가 아끼고 보존해야 할 전통문화라는 걸 전 국민에게 알렸다. 하회마을 또한 마을 전체가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하회마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고택은 몇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에 보물, 더 나아가서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다. 서적 중에도 국보 1점, 보물 2점이 있는데, 이는 하회마을이 낳은 위대한 정승인 서애 유성룡 (柳成龍, 1542-1607)과 관련된 책들이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이 다시는 이런 사고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징비록」은 조선이 일본과 결투를 벌여 형편없이 패한 내력도 샅샅이 기록하였다. 유성룡의 이런 바람과 달리 광해군을 이어 왕이 된 인조는 조선의 국력을 과신하고 대의명분이라는 하찮은 이유로 망국이 될 명나라 편을 들다가 다시 한번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백성들을 죽게 만들었다. 유성룡은 당시 유학 사상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찌든 사대부와 달리 실리를 중요시하고 오로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하회마을이 자랑할 만한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성룡의 후손인 풍산 류 씨는 하회마을을 수백 년 동안 살아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한옥을 지었다.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과 충효당은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9개의 한옥 건물 또한 지도를 따라 걸으며 방문해 볼 만하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한옥이 실제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라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북촌댁을 비롯한 몇몇 한옥은 숙박도 가능해, 문화재로 지정된 수백 년 된 가옥에서 하루를 보내며 하회마을을 만끽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24 - 서애 유성룡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로 의성 출생이다. 유자온(柳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작(柳公綽)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 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 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 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蘋)으로 하여금 파주 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하회마을 고택 탐방
하회마을 중 반드시 살펴봐야 할 한옥은 양진당이다. 또 다른 보물인 충효당은 한옥스테이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숙박객 외에는 내부로 들어가기 어렵다. 양진당은 유성룡의 형인 겸암 유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류 씨 종가이다. 입암 유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유중영은 유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유운룡의 6대손 유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 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양진당을 보고 나면 개방되어 있는 국가 민속문화재를 차례로 관람하면 된다. 원지정사는 서애 유성룡 선생(1542∼1607)이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것으로, 자신이 병이 났을 때 요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선조 6년(1573)에 지었다고 하며 북촌의 북쪽에 강을 향해 정사와 누정이 자리 잡고 있다.
정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왼쪽 끝 칸에 대청을 두고 나머지 2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앞쪽으로는 반칸짜리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누정인 ‘연좌루’는 앞면·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사방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강가의 소나무 숲과 강 건너편 부용대, 옥연정사(국가 민속문화재) 일대가 보인다.
빈연정사는 퇴계 선생의 제자로 원주목사를 지낸 겸암 유운룡 선생(1539∼1601)이 서재로 사용하던 집이다. 조선 선조 16년(1583) 경에 지었다고 하며 하회마을 북촌의 서북편 경암정과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이름은 부용대 절벽 아래 깊은 곳을 ‘빈연’이라 부른 데서 따왔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왼쪽에 앞면 1칸·옆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 2칸은 문을 달지 않았으며 옆면과 뒷면에 골판문을 달았다.
겸암정사는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명종 22년(1567)에 지었다고 하며 부용대 서쪽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사(사랑채)는 하회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남쪽 절벽 위 편에 안채는 정사 뒤쪽에 배치하였다. 정사는 2층 누각 형식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다. 가운데에 대청 4칸을 두고 좌우로는 방을 두었다. 방 앞쪽으로 좁은 퇴를 마련하였으며 ‘겸암정’이라고 쓴 현판은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 2칸과 안방 2칸, 오른쪽에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마련해 놓았다. 짚을 이어 올린 헛간채는 안채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촌댁이라 불리는 염행당 고택은 형조좌랑 유기영이 조선 정조 21년(1797)에 지었는데 대문채, 몸채, 사당채, 별당채, 정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3년 화재로 몸채와 정자가 타버려 지금은 별당채를 주생활 공간으로 쓰고 있고 정자는 복원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앞쪽에 몸채가 있던 터가 있다. 왼쪽으로 복원한 정자가 있으며 몸채 터 뒤쪽으로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사당채가 있다. 별당채는 사당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앞면 7칸·옆면 1칸 크기의 대문채는 가운데 문을 중심으로 좌우 6칸을 광으로 쓰고 있고, 사당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주위에 담장을 둘렀다. 별당채는 앞면 4칸·옆면 1칸 크기로 부엌이 1칸, 방이 2칸, 마루방이 1칸씩 차지하고 있다. 별당 앞마당에는 작은 연못과 화초를 심어 꾸미고 있어 운치를 느끼게 한다.
양오당 고택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손자 유만하 공이 충효당(보물)에서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뒤에 유만하 공의 아들 주일재 유후장 공이 늘려지었다고 하는데, 집 이름도 선생의 호에서 따 온 것이다.
하회마을 남촌 충효당 뒤편 골목에 있으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 광채,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골목으로 이어진 담장 중간 끊어진 곳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고 안마당을 들어서 왼쪽에 광채, 앞쪽에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문과 담장이 어우러져 대체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담장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사랑채인 주일재는 앞면 4칸·옆면 1칸 크기로 사랑방 2칸과 대청 2칸을 마련해 놓았고 문간채는 사랑채 옆으로 연이어 있다. 앞면 4칸·옆면 1칸 크기의 문간채는 문 1칸, 작은 사랑 1칸, 아궁이 1칸으로 꾸몄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2칸 크기이며 왼쪽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넌방은 다시 위·아래 2칸으로 나누어 윗 상방과 아랫 상방으로 구별하였는데 상하 공간 개념을 명확하게 한 것으로 짐작한다. 광채는 앞면 3칸·옆면 1칸이고 따로 마련된 사당은 1칸 크기이다.
하회마을의 다른 문화재인 화경당 (북촌댁), 작천고택, 옥연정사, 하동고택은 아쉽게도 개방되어 있지 않다. 몇몇 건물은 한옥 스테이를 통해 숙박객들에게만 개방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하회마을에서 하루를 보내며 한옥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 된다.
하회마을의 한옥을 하나씩 보는 것과 함께 꼭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가 건너편에 있는 언덕인 부용대에 올라가는 것이다. (현재는 섶다리를 통해 부용대로 갈 수 있다) 하회마을에서 강 쪽을 바라보면 멋진 절벽이 강 건너편에 있는데, 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 언덕이 바로 부용대다. 부용대에 올라가는 길에 겸암정사가 있으니 잠깐 들러 하회마을의 풍취를 즐기고자 한 유운룡 선생의 뜻을 헤아려 보는 것이 좋다.
부용대에 올라서면 하회마을의 풍수지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강을 앞에 두고 북악산과 인왕산을 뒤에 두어 풍수지리에 완벽함을 갖춘 도성인 한양과 같이 하회마을 또한 낙동강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산들을 병풍으로 삼아 형성된 마을이다. 천천히 굽이지어 흐르는 낙동강 뒤로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집이 조화를 이룬 하회마을은 대한민국 아니 조선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만하다. 외국에서 귀빈이 오면 가장 한국적인 전통 마을로 하회마을을 소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회마을을 비롯해 안동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9월에 열리는 세계유산축전과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도 가 보는 것이 좋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선유 줄불놀이를 비롯해 대한민국 각 지역의 탈춤,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의 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