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가 어제였고 보름 후 경칩이 온다. 한 때 남북적십자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열렸다. 이삼월에 열렸던 회의면 남북대표는 한강과 대동강의 녹은 얼음 얘기를 꺼내며 적십자회담도 잘 풀리길 기대했다. 해가 갈수록 한강의 결빙기간이 더 짧아지고 있을 것이다. 지역 차가 있긴 해도 경칩에 겨울잠 깨고 나온다는 개구리도 창원에선 우수 절기 며칠 전 알을 슬어 놓았다.
일기예보에 오후부터 남쪽으로 기압골이 지나면서 비가 올 것이라 했다. 어제그제 좀 많이 걸어 무릎에 무리가 갈까 봐 오전은 집에서 책장을 넘기며 보냈다. 점심 식후 몸이 근질근질해서 등산화를 신고 우산을 지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빗방울이 들어 우산을 펼쳐 썼다. 남산교회 옆을 지나 퇴촌삼거리로 갔다. 사림동 주택 골목을 빠져나가 창원대학 앞으로 갔다.
사림동 단독주택 볕바른 정원 매실나무는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간 강수량이 부족해 만물이 갈증을 느꼈을 텐데 비가 흡족하게 내렸으면 했다. 울타리 너머 조경수로 자라는 다른 나무들도 빗물이 뿌리까지 스며들어야 수액을 빨아올리지 싶다. 눈이든 비든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면 자연의 은총이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뿌연 황사는 예외다.
창원대학은 도청소재지에 위치한 국립대학이다. 지성의 전당이며 인재 양성기관으로 자부할만하다. 수도권과 지방을 가리지 않는 취업난으로 산업예비군이 늘고 있다. 올해 대학 문을 나선 젊은이들이 당당하게 가슴 펴고 살날이 왔으면 했다. 새내기를 환영하는 격문이 정문 주변 더러 붙어 있었다. 대학가기보다 취업하기가 더 어려운 현실 앞에 캠퍼스 낭만도 사라진지 오래다.
대학구내가 나한테는 좋은 산책코스가 되어 가끔 이용한다. 숲이 잘 조성되어 있고 방학이나 공휴일이면 사람들이 적어 거닐기 알맞다. 거기다 비마져 살짝 흩뿌리면 인적이 더 드물다.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대학본부를 돌아 인문대학을 지났다. 사회과학대학에서 학생군사교육단 쪽으로 올라갔다. 학군단 뒤쪽으로 정병산 허리는 경전선 복선과 대체 국도 터널을 뚫고 있었다.
학군단 건물 곁에 떠났던 원주민이 이태 전 세운 ‘내고향 상촌땅’이라는 비가 있었다. 창원이 계획도시로 개발 될 때 뿔뿔이 흩어졌다. 대학부지에 편입된 땅이 무려 십만 평이나 된다고 했다. 대학이 자리한 마을은 상촌, 상림, 두랑곡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찾아와 빗돌에다 당시의 산과 들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수리덤, 잿곡, 넉바잇등, 삼밭골, 죽도가리, 참새미, 매바구, 너들강….
상촌 마을은 사백 년 전 김해김씨 집성촌으로 시작하여 타성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 빗돌에 새겨진 오십여 세대 원주민 명부가 특이했다. 바깥양반 성씨와 이름이 아니라 안주인 택호를 하나하나 새겨두었다. 그러니까 호주의 성명이 아니라 부인을 지칭한 이름이었다. 택호는 대개 여자가 시집오기 전 친정동네 이름에서 따왔다. 남촌댁, 진동댁, 고산택, 진영댁, 원동댁, 등등.
나는 빗돌에서 새긴 애향의 글을 꼼꼼하게 살펴 읽고 대학 뒤 숲으로 난 길로 들었다. 숲 속에 생계형으로 가꾸는 텃밭이 나왔다. 소목고개까지 오르는데 오던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아마 높은 산 나뭇가지엔 상고대 눈꽃으로 아름답게 결빙하지 싶었다. 소목고개에 닿자 눈송이로 펄펄 날렸다만 땅 위에선 금방 녹고 말았다. 나는 이미 나선 걸음이라 봉림사지 방향으로 들었다.
비록 눈발이 성성하게 날리긴 해도 오는 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오리나무를 비롯한 낙엽활엽수들도 새봄을 맞을 채비를 할 것이다. 응달이라 진달래가 군데군데 보였다. 잎눈보다 꽃눈이 봄을 먼저 감지할 것이다. 나는 버섯재배농장 묵은 하우스를 지나면서 웅덩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맘때면 늘 내가 신경 써서 보는 곳이다. 수정 끝난 개구리 알에서 분열한 핵이 자라고 있었다. 0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