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보석이 있다. 한때는 번영, 또 한때는 쇠락의 상징이었던 원도심이 보석일 줄이야. 원도심이 왜 보석인가? 우연히 읽은 보석에 관한 책을 보니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의 정의와 원도심의 가치가 비슷하다. 보석은 희소성, 아름다움, 견고성, 전통성, 수요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원도심도 그에 딱 맞다. 먼저 희소성이다. 수백 년 이어오던 대청동 일대 왜관(倭館)은 중세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대였다. 어느 도시에도 없는 희소성이다. 또한 중세시대 주 교환수단이던 은(銀)의 수출중계기지였다.
왜관 연구에 청춘을 바친 재야연구가 최차호 선생은 왜관을 동아시아 '실버로드(silver road)의 거점'으로 부른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수출되는 은의 무역중계기지였다는 얘기다. 대청로 광일초등학교의 연향대청 일원에는 그 당시 흔적으로 추정되는 석축들이 남아있다. 그 외 원도심에도 희소성 있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개항기에 지어진 보수동의 초기 기상대 건물(1904년), 복병산 기상관측소(1934년),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1926년), 대청로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 성당(1924년) 등은 건축적 아름다움이 남다르다.
게다가 그 견고함은 100여 년의 풍상 속에서도 버티고 있다. 남포동 뒷골목의 청풍장(1941년) 소화장(1944)은 부산 최초의 아파트로 현존하는 지역 최고령 아파트다. 디자인과 마감의 견고함은 지금의 남루함 뒤에 빛난다. 전통성의 가치는 어느 곳보다 앞선다. 특히 1950년대 한국전쟁기에 활용된 많은 시설은 우리나라를 수호한 소중한 자산이다. 전쟁 당시 정부청사로 쓰인 지금의 동아대박물관은 국가적 정통성의 상징이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의 최후 보루로써 그 건축적·장소적 의미는 매우 크다. 더욱이 당시 산복도로에 지어진 건축물은 서민건축의 전통성을 면면히 대변하고 있다. 곤궁함 속에서도 배려의 미학을 보여주고, 절박함 속에서도 생태적 고려라는 전통성을 현현하고 있다. 부산만의 전통적인 서민자산이다. 수요성의 요건 또한 이미 넘쳐난다. 지금 원도심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이처럼 원도심은 보석의 요건을 두루 갖췄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 건축자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너무 부족했다. 그저 남루한 건물로만, 개발하기 좋은 재료로만, 낡아서 철거해야 할 애물단지로만 취급했다. 그러나 청자빌딩(1920년대) 매입, 한국은행 부산본부건물(1963년) 매입협상 등 최근의 결정은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개별 건축자산의 건축적 가치를 발견해 매입·보존·활용하는 것은 일차적 출발이다. 그것에다가 역사적 이야기를 발굴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공간(space)을 장소(place)로 전환시켜야 한다. 대구 근대골목의 거점이었던 이상화 고택과 계산성당은 그 자체로는 흔한 공간일 뿐이지만, 시인 이상화의 서정과 계산성당의 초기 선교 얘기를 풍부하게 덧씌우니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골목이라는 장소로 거듭났다. 한 해 수백만 명이 방문하는 명물이 된 것이다.
원도심의 자산은 개별 건축물의 점(点)적인 관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인근 건축자산 간의 선(線)적인 연계가 이뤄져야 감동이 일어난다. 흔히 얘기하는 '맥락의 공감'이다. 의미 있는 한 역사적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이 편리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욕심을 부리자면 이동과정에 유비쿼터스와 사물인터넷, 증강현실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적인 연계가 숙성될 때에 궁극적으로 면(面)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역사문화지구, 지구단위계획, 유네스코 문화유산지구 등이 그러한 수단이 될 것이다.
선적인 연계는 재발견이다. 시간의 켜(layer)라는 종(從)적인 연계를 통해 역사의 재발견이 일어난다. 인근 자산과의 횡(橫)적인 연계를 통해야 이야기로 승화된다. 말 그대로 종횡하는 길의 재발견이다. 동아시아 교류사를 말해주는 왜관, 통신사의 역사가 그 켜의 맨 밑에 있다. '친굿길'이다. 그 위에 조선 최초 개항의 역사적 흔적들이 얹혀진다. '개항길'이다. 나아가 식민지 시기 건축자산도 그냥 왜색 풍 적산가옥으로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들 자산도 일본식 건축사조와 서구의 신고전주의 건축사조가 융합해 이곳 원도심에서 독특하게 발현하였다는 시각도 있다. 힘든 역사도 우리의 아픈 자산으로 품어야 한다는 뜻일게다. 그 수탈의 역사는 정확히 기록되어야겠지만.
많은 도시는 아픈 역사적 자산을 역사체험과 관광의 자산으로 적극 활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른바 동서양 건축의 '융합길'이다. 여기에다 한국전쟁의 피란역사의 켜가 얹혀진다. 세계 어느 도시에도 없는 피란수도의 역사·문화·건축 자산은 희소성과 전통성에서 압도적이다. 전쟁기에 형성된 보수동 책방골목도 단순히 헌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전쟁기에 형성된 아날로그형 지식정보거점이다.
국제시장과 부평시장의 골목은 전쟁형 컨벤션센터다. 말 그대로 '피란길'이다. 그 이후에도 원도심은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을 이끌던 수출지원 배후상업지역의 역사적 흔적을 담고 있다. 남포·광복·중앙동은 단순히 부산의 도심이 아니라 그 시절 대한민국 수출의 역동적 스토리를 품고 있다. 명실상부한 '영광길'이다. 그뿐인가? 민주화 시기에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분노한 서민들의 함성의 역사를 품고 있다. 가톨릭센터, 동광교회, 미문화원 등의 벽돌에 새겨진 열정의 '함성길'이다. 최근 블로그 시대에 전국의 청춘남녀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또 다른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역사를 느끼고, 먹고, 마시고, 보는 모든 감각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이른바 '오감길'이다.
이처럼 원도심은 부산의 역사적 시기마다 시대정신을 표출하며 이끌어온 그야말로 보석길이다. 정겨운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역사·문화·경제적으로 부산을 선도한 큰 길이다. 언필칭 '빅(BIC·Busan Initiative Culture) 로드'다. 원도심을 빅 로드라는 큰 틀에서 서로 연결해보자. 도심에서 보석을 주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