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3. 10:50 문장 오타 수정
단종의 유배생활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하여 2009년에 건립하였다. ~를 ~2000년에 건립하였다. ~로 수정
[제2강] 조선국 역사의 현장 청령포 탐방자료집
대상 : 산솔지역 아동센터
일시 : 2019년 2월 8일. 13시~15시
장소 : 노산군 유배지 청냉포•단종 유지 청령포
인원 : 초중 17명, 인솔선생님 3명 합 20명
청령포 개요
국가지정 명승 제50호 영월청령포
고생대 국가지질공원 영월명소 청령포
청냉포(淸冷浦)•청령포(淸泠浦), 땅 이름의 변화과정
청냉포(淸冷浦) : 옛날부터 ~ 1726년까지.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냇가’
청령포(淸泠浦) : 1726년 10월 이후부터 현재까지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는 배움이 있으니 깨달음을 얻게 된다.’
1457년 음력 6월 21일, 조선국의 조정은 상왕 노산이 1456년 6월의 사육신 역모사건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으로 상왕의 신분을 노산군으로 낮추고 유배지는 영월로 결정하다.
1457년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한 노산군은 광나루에서 나룻배에 올라 여주까지 이동하고, 여주에서부터는 육로로 원주, 신림, 주천, 영월 청냉포까지, 7일만인 6월 28일 늦은 저녁에 도착하다.
1457년 7월,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은 상왕이 영월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에 영남지방의 유생들과 군졸들을 규합하여 조정과 맞서 싸울 것을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기획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관노가 한양으로 올라가 고변하다.
1457년 8월에 서강이 굽이돌아 흐르는 냇가에 있기에 큰 홍수가 나면 잠길 우려가 있어 영월관아 담장 안에 있는 관풍헌으로 이동하다.
1457년 10월 21일 임금이 명하여 이유(李瑜)는 사사(賜死)하고, 송현수(宋玹壽·단종의 장인. 단종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는 교형(絞刑)에 처하라.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1457년 10월 24일 공생의 손에 활 끈으로 목이 졸려 명을 달리하다.
이후 잊혀진 땅 청냉포가 되다.
1457년 10월 27일 조정은 의금부 도사 최계남(崔季男)을 박천(博川·평안북도 박천군)으로 보내어, 이보흠(李甫欽)을 교살(絞殺)하였다.
1698년 9월 30일 전 현감 신규가 영월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노산군을 임금으로 복위시켜달라는 상소문을 숙종임금에게 올리다.
1698년 11월 6일 숙종은 노산대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노산묘는 장릉으로 복릉시키다.
1726년 10월 영월도호부사 윤양래는 청냉포를 둘러보고는 선왕(단종)이 머물렀던 곳인데 강 건너 백성들이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가고 밭을 일궈 농사를 짓게되니 마구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자신의 녹봉(월급)으로 어느 누구도 출입을 금한다는 금표를 세우다.
땅의 이름이 청냉포(淸冷浦)이었기에 청냉포금표(淸冷浦禁標)로 새겨 세웠는데 냉(冷)자는 합당치 않다는 깨달음에 한 획을 추가하여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로 땅의 이름을 변경하다. *1457년 이후 버려진 땅에 세운 금표 한점으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역사의 현장이다.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
앞면에는「淸泠浦禁標(청령포금표)」,
뒷면에는「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금,
동쪽과 서쪽으로는 300척(90.9m)이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490척(148.47m)인데,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관음송(觀音松)
나무의 나이(수령) 600년, 높이 30m. 둘레 5m
옛날부터 나무의 나이는 600년이다 고 말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천년은 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별난 소문 한 가지 : 신령스런 소나무를 중심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돌면서 바라고 원하는 것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소문이 있다.
이는 천년동안 간직하고 있던 나무만의 천년정기를 천천히 돌면서 호흡하는 동안에 가슴으로 전달해 주는 ‘기(기운)’를 받아 모든 일이 잘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단종어소와 초가집
단종의 유배생활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하여 2000년에 건립하였다.
단묘재본부시유지 비석과 비각
앞면에는「端廟 在本府 時 遺址(단묘 재본부 시 유지)」
‘단종이 본 부(영월부)에 계실 때의 옛 터이다.’
뒷면에는 「皇明崇禎戊辰紀元後 三癸未季秋。抆涕敬書。
(황명숭정무진기원후 삼계미계추。문체경서。
令 原營竪石 地名 淸泠浦」
령 원영수석 지명 청령포)
‘영조 39년 계미년(1763년) 가을에 임금께서 눈물을 훔치면서 받들어 쓰셨고,
어명에 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웠으며 땅의 이름은 청령포이다.’
비각은 정조 15년(1791) 영월도호부사 박기정이
어명을 받아 건립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