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문학기행
조 흥 제
2024년 5월30일에 동작문인협회에서 강화도로 문학기행 갔었다. 연미정, 조경희 문학관, 용흥궁, 천주교 성당, 이규보 묘역 등을 탐방했다. 그 중에 연미정에 갔었을 때 인상 깊게 보았다. 몇 번 강화에 갔었지만 연미정은 처음이다. 연미정은 바닷가에 성을 쌓고 중앙에 정자를 지어 주위를 널리 볼 수 있게 했다. 바다 건너에 산이 보인다. 지도를 보니 강화도와 김포가 만나는 위쪽 끝이다. 여기가 한강과 임진강물이 합쳐져 내려와 바다로 흘러드는 곳이다. 이곳 지형이 제비꼬리같이 생겨서 제비연자(燕), 꼬리 미(尾)자를 붙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고 지었다. 이곳은 남북의 경계선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북한이어서 배가 다니지 못한다. 1996년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장마 때 소가 떠내려 오다 가운데 있는 섬에 상륙했다. 하지만 작은 섬에 먹을 것이 없어 소는 나날이 여위어 갔다. 남북 양쪽 초소에선 그걸 보고 안타까워하다가 소를 살려 주기로 합의하고 한국측에서 배로 가서 소를 건져 제주도로 보냈다. 소는 시집 가서 아드-딸 낳고 잘 살았다는 훈훈한 정담도 있다.
다음은 조경희 문학관으로 갔다. 조경희문학관의 이름은 강화문학관이다. 조경희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유족들은 문학관 이름을 조경희 문학관으로 하자고 했지만 강화군에서 반대하여 강화문학관이 됐다는 후문이 있다. 조경희 선생은 1918년 강화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 한국일보 문화부장 재직시인 1971년 서정범 교수등과 함께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돌아가실 때인 2005년까지 수필가협회장을 역임하셨다. 시청 뒤에 수필가협회 사무실에 여러 번 가 뵈었는데 얼굴이 두꺼비 상이어서 예쁘지는 않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조경희선생은 실연의 아픔이 있다. 이화여대재학시절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둘이 꼭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으니 조경희학생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자기의 인물이 못나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 왜 이렇게 못생기게 낳으셨어요.”하고 항의했더니 아버지는 “사람이 인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마음씨가 고와야 한다.”고 위로해 주셨다. 조경희학생은 그 말에 눈이 번쩍 띄어 ‘마음씨 좋게 가지는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 때 장관까지 지내고 한국예총 초대 회장까지 역임하셨다. 강화문학관에는 조경희 선생에 대한 기록이 많고 2층은 전용관이다. 조그만 앉은뱅이 책상에 글 쓰는데 필요한 집기들이 있다. 나도 그런 책상에서 글을 써 정다움을 느꼈다.
그 다음 간 곳이 용흥궁(龍興宮)이다. 조선왕조 25대 철종이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이름을 원범이라 했다. 오막살이 집이었는데 왕이 된 후 크게 개축하고 용흥궁이라는 궁궐의 이름을 붙였다. 철종은 전계대원군 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조부는 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1844년 형님 명(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 비)의 명으로 19세에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벼락감투도 이만하면 최고가 아닐까? 철종이 강화도에서 와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원범이 어느 날 땔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고개를 넘어 오니 자기집 앞 마당에 관원들이 꽉 찼다. 그는 관원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숨었다. 관원들이 동네를 수색해 찾아 내 데려 오니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세요.”하고 그 중 높은 사람에게 싹싹 빌었다.
오래전에 강화도령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신상옥 감독이 1963년에 제작한 영화다. 강화도령은 궁중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귀던 아가씨가 있었다. 이름이 양순이다. 그 아가씨와 사귀던 이야기를 극본으로 만든 영화다. 강화도령 역은 신영균, 아가씨의 역은 사미자였다. 그 영화의 주제곡이 강화도령으로 박재란이 불러 히트쳤다.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 지던
강화도령님, 강화도령님
도련님이 어쩌다가
나랏님이 되셨나요
어허, 말도 마라
사람 팔자 두고 봐야 아느니라
두고 봐야 아느니라
가사가 다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의 노래였다.
강화에서 맘대로 뛰어 놀다 궁중에 들어가 보위에 앉은 강화도령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행복은 물질적인 풍족과 평안한 마음이어야 한다. 헌데 강화도령은 무거운 왕관을 쓰고 왕위에 앉아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운동도 안하여 소화도 안 되었다. 먹는 것도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죽을 먹고 아침-점심-저녁은 전국에서 올라온 제일 좋은 것으로 먹고 자기 전에 밤참도 간단히 먹었다. 운동도 안 하고 먹는 것은 제일 좋은 것으로 먹으니 몸이 당해냈겠는가? 지금 말로 하면 고혈압에 당뇨에 걸려 몸은 뚱뚱해졌다. 양순이하고 강화에서 뛰어다니던 생각이 주마등같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왕관을 벗어버리고 강화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궁녀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다. 이튿날 조회 때 대신들이 난리가 났다. 왕이 달밤에 궁중에서 궁녀들과 뛰어 놀면서 술래잡기를 하였으니 점잔을 빼는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소화가 안돼서 그랬다”고 했더니 “소화가 안 되면 약을 잡수셔야지 궁녀들과 뛰어 놀면 상감마마의 체면에 안 되옵니다.”했다. 술래잡기도 못하게 했으니 다른 운동이야 하게 했겠는가?
왕이 할 수 있는 운동은 뚝섬에 가서 사냥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 군주들이 150여 회 사냥한 걸로 기록됐다. 사냥을 나가려면 사람을 많이 동원해야 했으니 경비도 많이 들고 얼마나 번거로웠겠는가. 그래서 역대 왕들은 사냥터에 가지 않았다. 여자들과 잠자리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궁중에 있는 수많은 상궁과 나인들 중 예쁜 여자와 잠자리를 해도 제약이 없었다. 여자들도 성은을 입으면 위상이 달라지니 성은을 입고자 했으리라. 왕은 왕후 외에 여러 명의 후비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하면 명재촉하는 일만 해 온 것이 조선왕조의 군주들의 행태다. 그래서 30대에 죽은 왕들도 있고 40대에 죽은 군왕들이 대부분이다.
영조가 82세에 승하하여 조선조 군왕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어머니가 훌륭한 사람으로 어렸을 때 가정교육을 잘 받어서이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비인 인현왕후의 몸종으로 궁중에 들어왔다.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아산군수로 발령받아 갈 때 길 가에서 어린 여자애가 울고 있었다. 가마를 세우고 연유를 알아보니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부모가 돌아가셔서 자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는 데리고 가서 자기 딸과 같이 한 방에서 살게 했다. 딸이 4살 많아 언니-동생으로 사이좋게 자랐다. 언니가 왕비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가자 동생은 몸종으로 따라 갔다. 인현왕후는 아들을 못낳았다. 왕은 궁녀중 예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언제 왕의 마음이 정비에게로 돌아갈지 몰라 왕후를 쫓아내고자 했다. 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가자 그의 몸종은 자기 방에서 매일 밤 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왕후의 복권을 빌었다. 그것이 순행하던 왕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숙빈 최씨가 되었다. 장희빈은 숙빈 최씨의 아들을 죽이려고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였지만 어머니의 보호망을 뚫지 못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숙빈 최씨는 장희빈의 아들도 자기 아들과 같이 정성을 다해 길렀다. 그래서 그들은 친 형제와 같이 사이가 좋았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올라 경종이 되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이 그 다음 왕이 된 영조다. 영조는 자랄 때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 음식 조절을 잘하고 여자 관계도 멀리해서 오래 살았으리라 추측된다.
이런 환경이 왕실이니 철종인들 오래 살았겠는가? 재위 15년 만인 30대 초에 승하했다. 용흥궁은 철종이 등극한 후 넓게 다시 지은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