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영암 구림마을은 삼한시대부터 남도의 문화를 주도해왔다. 조선시대의 토담과 청동기시대의 옹관묘가 발견된 이곳의 역사는 2200년에 이른다. 2200년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터를 유지해온 구림마을은 선사시대의 유물과 조선시대의 마을길, 500년 전통의 대동계가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니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구림마을은 서구림에서 동구림리의 왕인박사 유적지 입구까지 고택들 사이로 황토담이 단장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월출산 천황봉 위로 달이 뜨면 가장 밝은 자리에 모여 앉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구림마을이 배출한 위인들 이야기도 어마어마하다. 백제학자로 일본에 우리의 문물을 전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왕인박사, 풍수도참사상과 불교 중흥에 힘쓴 도선국사,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 최지몽, 가야금산조 창시자인 김창조, 형미 선각대사와 경보 동진대사, 광주 목사 임구령이 모두 구림마을 출신.
뿐만 아니라 서예가 한석봉을 비롯해 최경창, 박이화, 박순우 등 이름난 문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수많은 위인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어온 구림마을, 그래서인지 마을을 대표하는 산, 바다, 숲, 정자, 하다못해 장터에 이르기까지 위인들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구림마을에는 1565년 함양박씨 박규정과 선산임씨 임호가 중심이 되어 창설한 향촌조직으로 1609~1613년과 1646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쳐 현재까지 440여년을 이어온 구림대동계는 구림 마을의 핵심으로 현재까지도 이어 져 오고 있으며 그 계사를 가졌던 회사정은 아직도 마을 한 가운데 남아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구림마을은 1540년 나주목사를 지낸 임구령(林九齡, 1501~1562)이 지남제를 막아 1,000여 두락의 농토를 만들고, 1944년에는 호남의 제일 갑부 현준호가 서호강을 막아 1,000정보의 학파농장을 만들어 농지가 넓어져 주변에 여러 마을 이 생겼다. 이에 따라 구림의 정착 인구가 증가하여 1960년대 초에는 630여 호에 인구가 3,400여명에 이르렀으나, 농촌 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현재는 677호에 1,649명으로 호수는 많아졌으나 인구는 줄어들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는 신라 때부터 낭주 최씨의 본토였고, 그 후 난포 박씨(1400년 전후), 함양 박씨(1418년 전 후), 연주 현씨(1500년), 선산 임씨(1504년), 창녕 조씨(1556년), 해주 최씨(1601년) 순으로 정착하여 구림의 주류 성씨를 이루고 살고 있다.
구림마을의 이름은 통일신라시대 때 지어졌다고 한다. ‘비둘기 구’(鳩)와 ‘수풀림’(林)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곳은,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로 유명하다. 최씨 성을 가진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푸른 오이가 떠내려 온 것을 먹고 아이를 가졌다. 처녀는 깜짝 놀라 바위에 아이를 버렸는데 며칠 후 그곳에 가보니 비둘기 떼가 날개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풍수도참사상의 시조로 고려 건국을 예언하고 불교중흥을 일으킨 승려 도선국사다.
이후 이 바위는 ‘국사암’, 바위가 있던 숲은 ‘구림’이라 지어졌다고 한다. 지명 외에도 도선국사는 도갑사라는 규모가 큰 절을 월출산 자락에 남겼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화재를 입었다가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담긴 구림천과 마주한 고죽관과 한석봉이 글씨를 배웠다는 죽림정사, 현재 낙지골목으로 유명하고 한석봉의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한 곳으로 유명한 독천시장 등은 명물이다.
한편 구림마을의 역사를 한눈에 보려면 회사정 인근의 영암도기문화센터를 찾아야 한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옹관과 구림도기, 그리고 구림도기 가마터 등이 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기제작 체험도 가능하다. 인근엔 10여개의 가마터가 1㎞에 걸쳐 널려 있어 발끝에 채는 도자기 파편에서 옛 도공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구림마을 여행의 매력이다. 구림마을은 곳곳에 시공을 초월한 많은 위인들의 설화가 얽혀 숨 쉬고 있기에 2000년 남짓한 세월의 방대한 역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역사체험지라 할 수 있다. |
첫댓글 임구령의 형 임억령(1496~1568) 후손말씀에 의하면 임구령은 광주,나주목사를 동시에 하셨다고 한다...
임구령은 선산임씨로 구림리에서 4km 떨어진 남서쪽 서호면 청룡리에 선산임씨 세거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