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이자 문인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혼외정사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질곡 많은 삶을 살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속에 행려병자로 일생을 마친 ‘정월 나혜석’을 기념하는 거리가 그녀의 출생지 수원시에 조성돼 있다.올해로 탄생 113주년이 된 여류화가 나혜석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 한 것은 불과 10년 남짓 된 일이다. 그동안 불륜의 신여성 이미지만 부각되어 왜곡된 시선이 주를 이뤘다면 새롭게 알려진 나혜석의 모습은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고 재능있는 예술가였다. 지난 1999년 ‘제1회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이 열린 이후 이듬해 2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며 그동안 가려졌던 진면목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그녀를 다시 돌아보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출생지 수원시에서는 팔달구 인계동 효원공원부터 서쪽 600m 거리를 ‘나혜석거리’로 조성했고 거리에 우뚝선 그녀의 동상은 수원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
신여성 ‘나혜석’
나혜석 동상 거리 초입에 동쪽을 보고 있는 나혜석 동상이 있다. 그림도구를 들고 있는 나혜석 동상은 지난 2000년 나혜석 거리 조성사업 때 만들어진 것이다. 수원시는 장안구 신풍동에서 출생한 나혜석을 기리기 위해 ‘나혜석 거리’를 조성했다. 거리에는 그녀의 작품과 함께 그녀의 일생을 설명한 안내문이 마련되어있다. (이다일기자)
1896년 수원에서 출생한 나혜석은 5남매 중 넷째였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 졸업하고 일본 동영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한다.
유학시절 「경희」, 「정순」등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고 1919년 ‘3·1운동’에 이어 벌어진 ‘3·25 이화학당 학생 만세사건’때는 이를 주동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친오빠의 소개로 만난 김우영과 1920년 4월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이듬해에는 조선여성최초로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을 연다. 1926년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떠난 유럽여행도중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혼외정사가 결국 그녀의 이혼으로 이어졌다. 미술을 공부하러 떠난 인생 최고의 시간이 그녀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으로 특선에 입상하지만 이후 그녀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로 생활을 이어가지만 병환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지고 형편도 넉넉치않아 결국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에서 일생을 마칠 때 까지 불행한 말년을 겪는다.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거리
거리의 시작 나혜석거리 입구에는 ‘정월 나혜석’의 안내와 함께 그녀의 작품을 설치해놨다. 수원 성곽의 모습을 본떠만든 분수대와 색색의 가로등은 나혜석거리의 시작을 알린다. 거리의 양쪽편은 여느 번화가의 모습과 같이 다양한 가게가 들어섰다. 이따금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혜석 거리’에 온 것을 기념하려는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이다일기자)
수원 사람들에게 ‘나혜석 거리’는 생활의 일부다. 거리 양쪽에는 즐비하게 음식점들이 늘어섰고 거리 끝에 맞닿은 효원공원 너머에는 아파트 단지가 몰려있다. 길 건너편엔 대형마트, 영화관이 들어서 이 거리가 수원에서 가장 북적거리는 거리 가운데 한곳임을 증명한다. 가을밤에 찾아간 나혜석 거리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가득했다. 거리 양쪽에 늘어선 음식점에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좀 더 길을 걷자 작은 무대가 마련돼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이 이어진다. ‘나혜석 거리’로 명명된 이곳은 음식과 노래가 어우러진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 다시 찾은 거리는 또 다른 모습이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어젯밤 북적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 술과 음식을 팔던 가게들은 거리를 채웠던 간이 테이블을 곱게 접어놓은 채 문이 닫혀 있다. 주위가 조용해지니 곳곳의 시설물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 중앙에 자리잡은 나혜석 동상은 맞은편 커다란 벽 조형물 ‘잠들지 않는 길’을 마주보고 있다. 나혜석이 생전에 부딪혔던 보수적 사회를 상징한다는 벽이다. 뒷편으로는 수원성의 모양을 본떠 만든 분수대가 놓여있고 그 옆에는 ‘나혜석거리’라는 안내석이 놓여있다. 한글, 영어, 일어로 쓰인 안내문에는 그녀의 작품과 소개가 되어있다.
‘여자도 사람입니다’
‘잠들지 않는 길’이란 조형물에 나혜석의 글이 새겨 있다. (이다일기자)
나혜석의 후기를 옥죄던 것은 혼외정사로 부터 이어진 그녀의 이혼사건 이었다. 그녀는 「이혼고백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 그녀가 주장했던 것은 여성의 권리다. ‘나혜석 거리’ 탄생에 일조한 ‘나혜석 기념사업회’ 유동준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천재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혜석 선생을 행려병자로 죽게 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완전히 사라져야 이 시대의 여성들도 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보수적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녀가 남긴 생각과 그림과 말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의 삶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향닷컴 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가는 길/
수원역에서 인계동방향
버스 2-1번 혹은 9번을 타고 동수원 우체국에서 하차한다. 동수원 뉴코아 앞에서 동수원 CGV방향으로 걷다보면 왼쪽에 ‘나혜석 거리’라는 표지석이 있다.
거리 전경 나혜석거리는 길이 600미터로 수원의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다. 백화점과 마트, 영화관이 있는 대로변에서 시작되는 나혜석거리는 양쪽에 즐비하게 음식점들이 있어 ‘음식문화의 거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른 시간에도 차와 사람들이 힘차고 부지런하게 오간다. 마치 정열적이고 진취적이던 그녀의 일생처럼 말이다.(이다일기자)
거리음악제 수원시가 9월 한달동안 거리음악회를 열었다. 시민들의 장기자랑은 물론 클래식을 비롯해 가요까지 다양한 음악들이 이자리에서 선보였다. 술집만 즐비한 나혜석 거리를 탈피하기 위한 문화공연이라 시민들의 호응도 좋았다.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러온 주민들이 많아 가족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다일기자)
나혜석 동상 옆에 아이들이 앉아 사진을 찍고 있다. (이다일기자)
음식문화거리 나혜석거리 주변의 음식점들은 ‘수원 음식문화거리 지정업소’로 지정됐다. 자체 상조회를 통해 ‘나혜석거리 맛기행 가이드북’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곳곳에 지정업소 표지판이 붙은 가게를 찾을 수 있다. (이다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