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엽서 속 지중해의 풍경처럼 하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무대는 심플하지만 관객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그리스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배우들은 아바의 노래로 대화한다. 시대를 타지 않는 히트곡들을 다시 듣는 것도 즐겁지만 거의 원곡 그대로 손대지 않은 가사가 극중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신통하다.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주크박스 뮤지컬이며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도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린 [맘마미아]의 두 가지 키워드는 아바, 그리고 추억이다.
뮤지컬 [맘마미아]의 두가지 키워드는 아바, 그리고 추억이다. – 제공: 신시컴퍼니
비틀스처럼 신앙에 가까운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아바는 실로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은 팝그룹이었다. 이 4인조 혼성 그룹은 스웨덴의 싱어 송 라이터 듀오 비요른과 베니가 69년에 레코딩한 앨범의 백 보컬이자 약혼녀인 아그네사, 프리다를 멤버로 맞아들인 1972년 완성되었다. 아바는 네 멤버의 이니셜을 모아서 만든 이름이었고, 2년 후 런던 근교의 휴양지 브라이튼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워털루’로 우승을 차지한 순간부터 전설이 시작되었다.
75년에 발표한 'S.O.S'가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후 82년 마지막 싱글 ‘언더 어택’으로 해체를 공식 선언하기까지 ‘댄싱 퀸’, ‘치키티타’, ‘김미 김미 김미’, ‘수퍼 트루퍼’ 등 수없이 많은 넘버원 히트곡을 남겼다. 대중들에게 아바가 받은 사랑은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였고, 해체 이후에도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살아있었다. 결정적으로 아바의 존재감이 전성기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복고 바람과 함께 발매된 92년의 베스트앨범이 현역 시절을 뛰어넘은 판매고를 올리는 메가 히트를 기록하면서였다. 퀸의 베스트앨범,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이어 영국에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아바의 베스트앨범일 정도로 이 음반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뮤지컬 [맘마미아]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세상에 태어났다.
두 쌍의 부부였던 아바의 멤버들이 해체와 이혼으로 갈라선 후에도 원래 듀오였던 비요른과 베니는 함께 작업을 해왔다. 그들이 뮤지컬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손을 잡고 [체스]에 작곡가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소련과 미국 대표로 세계 체스 대회에 참가한 주인공들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냉전 시대를 그려낸 이 뮤지컬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오페라의 유령] 초연과 맞물려 흥행에서는 고만고만한 성적을 얻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만난 프로듀서 쥬디 크레이머와의 인연은 [맘마미아]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쥬디 크레이머가 비요른과 베니 콤비에게 아바의 음악을 엮어 뮤지컬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것은 1989년이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함께 많은 작업을 해왔던 쥬디 크레이머, 영국의 극작가 캐서린 존슨, 그리고 오페라와 연극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있던 필리다 로이드가 각각 프로듀서, 각본가, 연출가로 [맘마미아]에 참여했다. 마치 작품 속 도나, 타냐, 로지 삼총사처럼 여성 3인방으로 이뤄진 [맘마미아]의 크리에이티브 팀은 이 작품이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기 위해서 무엇인 필요한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