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신부·장로·수녀 170여 명 학살당해, 교황 사절·구세군 사령관 등 외국인도 희생
鄭 晉 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일본 천리大 교환교수. 재단법인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서재필 기념회 이사.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 언론사」, 「인물 한국 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과 한국 현대사」 등 펴냄.
6·25 전쟁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피살당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4명이 확인되었고, 납북당한 교직자도 184명으로 피살과 납북 피해자는 모두 358명에 이른다. 정부와 적십자사가 조사한 자료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부터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을 학살하거나 조직적으로 北으로 끌고 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조사·작성한 「피살자명부」, 「피납치자명부」,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에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자진 등록을 받은 명부에 개신교의 「목사」, 「장로」, 천주교의 「신부」 등으로 교직이 명확히 밝혀진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여러 조사자료를 종합한 수이다. 그러나 피살 또는 납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교직자도 적지 않을 것이고, 직업에 「종교인」으로 표시되지 않은 일반신도를 포함하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6월25일자 「한국기독교신문」은 400명의 牧者(목자)가 희생되었다고 보도하였으며, 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명, 감리교 46명이 순교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기독교연감」 1957판, 대한기독교서회).
납북자와 피살자에 관한 공식 자료는 5 종류가 있다. 정부가 조사한 피살자 또는 납북자 가운데 직업이 기독교인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독교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피살 또는 납치당한 개신교 교역자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이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가톨릭에서는 남북한을 합쳐 한국인 52명(교구장 1, 신부 40, 수녀 7, 신학생 4)의 희생자가 있었고 외국인 98명을 포함하면 150명이 희생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1992, p.911).
天主敎, 제2의 박해기
그러나 기독교계의 연구 자료와 정부가 전국에 걸쳐 작성한 피살자와 피납북자의 명부를 조사한 결과 기독교 교역자의 피해는 그보다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쟁 전부터 북한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 또는 투옥하다가 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별적으로 검거하여 처형하거나 北으로 끌고 갔다. 기독교인들을 수십 명씩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도 여러 곳에 있었다.
북한에서의 종교 탄압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한 정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청산하고 종교를 말살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의 종교 탄압과 기독교의 수난에 대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는 「침묵의 교회 형성기」 또는 「제2의 박해기, 순교자들의 시대」로 규정한다.
천주교의 경우 한 연구에 의하면 제일 먼저 탄압을 받았던 덕원 면속구와 함흥교구에서는 1949년 5월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3명의 신부들이 체포된 이래 6·25 전쟁 직전까지 73명이 체포 또는 피살되었다. 독일인 성직자 22명, 수사 25명, 수녀 20명, 한국인 신부 5명, 수녀 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31명이 희생(외국인 25명, 한국인 6명)되었고, 42명은 후에 생환하였다.
덕원에서 시작된 교회 탄압은 평양교구와 황해도 교회로 이어졌다. 평양교구에서는 1949년 5월14일 교구장 洪龍浩(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가 납치된 이래 6·25 직전까지 14명이 체포·구금되어 모두가 행방 불명되었다. 가장 늦게까지 성직자·수도자들이 활동했던 황해도 지역에서 1949년 5월20일에 체포된 韓允勝(한윤승, 필립보) 신부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행방 불명되었다(차기진, 「6·25 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994.10).
이는 전쟁 이전에 북한 정권이 북한에서 자행한 천주교 박해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개신교에 대한 탄압도 이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金日成은 전쟁을 일으킨 후 남한에 진주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 공산당은 남한의 몇 개 지역에서는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기독교도를 집단학살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50년 9월, 전남 靈巖(영암)읍 교회에서 신도 24명을 집단학살하였고, 沃溝(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당했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荏子島(임자도)에서도 100명, 혹은 150명씩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을 학살했다. 10월5일 새벽 이판일 장로의 일가족 13명이 학살당했으며, 집단 학살당한 교인은 43명이었다.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박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제6권, 선문출판사, 1973).
정부는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되기 전의 긴박한 상황이었던 1950년 12월 서울에서 납북 또는 피살된 사람들의 실태를 조사하였고, 그 후 두 차례 전국에 걸친 피해상황을 조사하였으며 피살자의 명단을 따로 만들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56년에 납북자들의 가족으로부터 등록을 접수하여 송환을 위한 교섭자료로 활용하였다.
휴전 후 정부는 납북자의 송환을 명시한 휴전협정 제59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송환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북한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서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들 종교인들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를 외면하고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와 적십자사가 수집한 피살 또는 납북당한 사람들의 수는 별표와 같다.
위의 5종류 자료 가운데 치안국 정보과가 1954년에 조사한 「피납치자명부」는 프린트 인쇄가 조악하여 글자가 보이지 않거나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료로 활용하기에 애로가 있다.
납북된 종교인은 치안국 자료를 제외한 4종류 명부를 조사하여 종합한 것이다.
이 자료들에 수록된 명단에는 중복 포함된 사람도 있고, 3개나 2개 자료 또는 하나의 자료에만 들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이 5개 자료 가운데 4개 자료를 토대로 피살 또는 납북된 종교인을 찾아내어 종합하고 교회사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아래에 상술하는 피살 또는 납북 종교인들을 밝힐 수 있었다. 정부 기록 외에도 여러 기독교 자료를 참고로 하여 정부가 조사한 명단에 없는 이름을 추가하였다. 피살·납북 연도는 1950년이다.
피살 종교인들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仁善(김인선)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피살.
劉鍾鶴(유종학·63) 명동교회(감리교) 목사. 공산군이 납치 살해하였다.
이종도 제주도 제1대 목사.
임인재 전남 해제 중앙교회 목사.
전병무 경북과 울릉도에서 활동한 목사.
[신부(24)]
미사 집전 중 납치, 피살
◇ 한국인(7)
姜晩秀(강만수·27) 세례명 요셉. 대전교구 洪城(홍성) 주임. 7월에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8월1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대전 감옥에 수감 중 9월26일 피살.
朴昌大(박창대·62) 8월18일 강원도 마지기 광산에서 피살.
徐起昌(서기창·62)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울교구 황해도 송화본당 주임. 10월6일 연행되어 10월13일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10월16일 피살 기록.
劉載玉(유재옥·53)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울대교구 겸이포 주임. 6월24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어 海州(해주) 형무소에 수감된 후 10월5일 동해주 백사장에 생매장당했다.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6월 중 서울 종로구에서 납치된 것으로 기록.
全德杓(전덕표·31) 세례명 안드레아. 서울교구 황해도 사리원본당 보좌신부. 10월13일 연행되어 10월16일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구)에는 10월12일 미사를 접전하던 중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되어 며칠 후 사리원 성당에서 1km 정도 떨어진 정치보위부 방공호에서 피살.
수도원에서 피살
◇ 외국인(17)
듸포리(48) 천안 천주교회 신부(프랑스인). 9월25일 충남 천안군 성황동에서 피살.
안토니 코리아 주교(프랑스인) 7월30일 춘천시 소양동에서 피살.
吳必道(오필도·56) 프랑스 신부. 8월16일 온양 천주교당에서 피살.
요셉 모리말(J.Molimard, 牟·49 또는 51)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부여 주임. 9월25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A.Collier(高)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소양로 본당 주임. 6월27일 피살.
Brennan, Patrick(패트릭 브렌난, 安·50) 세례명은 파트리치오. 미국 몬시뇰 골롬반회 소속 한국 선교사. 광주 지목구장. 8월 연행되어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목포 본당 주임신부 쿠삭, 보좌신부 오브라이언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Cordess, Marius(마리우스 코르데스, 孔·42)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당진 주임. 8월14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Desideratus Polly(폴리, 沈應榮)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천안 주임. 8월2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Colin(高)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서산 주임. 7월10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Molimard(牟)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부여 주임신부. 8월20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O’brian(오브라이언, 吳) 아일랜드 신부. 광주교구 목포 주임. 8월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Maginn, James(제임스 매긴, 陳·40) 세례명 야고보.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춘천교구 삼척 주임. 7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7일 삼척읍 紫芝里(자지리)에서 피살.
P.Leleu(를뢰, 盧) 아일랜드 신부. 대전교구 온양 주임. 8월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P.Perrin(페렝, 白文弼)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합덕 주임. 8월14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P.Reiller(羅)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묵호 주임. 7월12일 연행되어 7월 말 피살.
Robert Richard(리샤르·李)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예산 주임. 8월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T.Cusak(高) 아일랜드 신부. 광주교구 목포 주임. 8월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수녀(5)]
수녀원 원장도 피살
김정숙 세례명 마리안나. 샬트르 성 바오로회. 10월15일 연행되어 10월17일 피살.
김정자 세례명 안젤라. 샬트르 성 바오로회. 10월15일 연행되어 10월17일 피살.
朴(박) 세례명 루시아. 성 베네딕도 수녀회. 9월25일 연행되어 10월11일 피살. 차기진의 연구에 의하면 원산에서 9월24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10월8일경에 피살.
張(장) 세례명 아가다. 성 베네딕도 수녀회. 6월24일 연행되어 10월14일 피살.
M.Beatrix 프랑스 수녀. 샬트르 수녀회 원장. 7월15일 연행되어 11월3일 피살.
[성공회(5)]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
◇ 한국인(2)
尹達鏞(윤달용·61) 세례명 모세. 성공회 서울대성전 관할 사제 겸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18일 저녁 무렵 서울 중구 정동 3번지 대한성공회 구내에서 세실 쿠퍼 주교와 함께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연행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한국가톨릭대사전」, 「대한성공회 백년사」에는 순교.
趙鏞昊(조용호·53) 세례명 디모데. 성공회 인천교회 신부. 7월24일 저녁 11시경 인천시 송학동 3가 4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5명에게 연행되어 인천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8월1일 서울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소식 두절.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7일 인천에서 납북.
◇ 외국인(3)
Albertm, W(이도암 李道岩) 영국인 신부. 7월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북한 각지로 끌려 다니는 「죽음의 행진」 중에 행방불명.
Mary Clare(마리아 클라라·71) 아일랜드인 수녀. 聖架(성가)수녀회 초대원장. 7월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6일 중강진에서 사망.
Charles Hunt(헌트·홍갈로) 신부.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18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20일 해창리에서 사망.
※「대한성공회 백년사」(1990)에 클라라 수녀는 7월31일, 헌트 신부는 7월3일, 이도암 신부는 7월25일에 각각 공산군에게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세군(2)]
姜基模(강기모·24) 구세군 참위. 9월26일 북한군에 붙잡혀 충남 예산군 손지리 뒷산에서 피살.
盧永守(노영수·46) 구세군 고등참령으로 9월5일 지리산 기슭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세계 구세군 100년 사상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22일 경남 함양군 개평리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崔泳旭(최영욱·60) 기독교인. 광주 제중병원장. 美 군정 시기에 한국인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7년 「호남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돌산면 군내교회 집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피살 일자 및 장소가 확실치 않은 집사]
고웅두 충남 오량교회 집사.
金東信(김동신)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김두환 경북 기계제일교회 집사.
김춘동(61)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문봉순(43)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박상문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朴仁在(박인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안수집사.
박일규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방후용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서상철 충북 청산교회 영수.
서석근(52)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申相翊(신상익·44) 전북 이리 제일교회 집사. 광주형무소에서 피살.
심만길 경북 육통교회 집사.
안인호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집사.
오죽현(77)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윤성전(7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윤임례 전북 정읍 두암교회 집사.
李一(이일·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이민우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임유삼(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任子壬(임자임·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교회 집사.
鄭壽一(정수일) 충남 논산 병촌교회 집사. 같은 교회 교인 65명과 함께 피살.
조인심(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蔡水原(채수원)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한창교 경남 거창군 덕산교회 집사.
납북 종교인들
납북된 교직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수는 개신교 목사 74명, 가톨릭 신부가 26명이었고, 장로 5명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었다. 납북된 주요 교직자 가운데는 종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사(77)]
새문안교회 金英珠 목사의 운명
具滋玉(구자옥) YMCA 총무 역임.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경기도 지사 역임. 서울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타고 끌려가다가 龍淵(용연)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權泰羲(권태희·45) 경북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위원장 피선. 납북된 후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동원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10월까지는 평양에 거주.
奇世福(기세복)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庚鍾(김경종·56) 서울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인 6월28일 오전 7시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金東哲(김동철·52) 서울 서소문교회(감리교) 목사. 7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자택에서 공산당원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斗錫(김두석·61) 파주 봉일천교회(장로교) 목사. 9월18일 오후 9시경 서울 용산구 동자동 153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3명에게 연행되어 동자동 내무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峠(김상·61) 종군목사. 9월12일 서울 서대문구 의주동 자택에서 납북.
金尙七(김상칠·53) 제7안식일교회 총무(목사). 7월27일 오후 5시경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90-9번지 자택 앞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4일 동안 억류된 후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옮겨졌다가 납북.
金聖元(김성원·68) 장로교 목사. 9월25일 전남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金誠源(김성원·78)이 완주군 일대에서 교역하던 중 납북.
金英珠(김영주·57) 서울 새문안교회(장로교) 목사.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때 총회의 정죄를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목사. 광복 후에는 새문안교회를 개방하여 교파 통일을 위한 장로·감리교의 협의회와 초교파 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도 제공했다.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3 자택에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
金元圭(김원규·49) 개성 감화원(소년원) 원장. 감리교 목사. 1946년부터 개성지방 감리사로 시무. 경기 개성시 관훈동 604-2. 7월6일 11시경 개성에 있는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납북. 1951년 5월 熙川(희천)까지 끌려갔을 때에는 다리를 삐어 굴신을 못 하는 상태였다.
金裕淳(김유순·69)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9대 총리원 전도국 감독. 서울 북아현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전 8시50분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의 140 자택에 기독교민주동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 납북.
내무서원에 연행된 후 납북
金有淵(김유연·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 성결교회 목사. 성결교단 잡지 「活天(활천)」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京西(경서)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 교회(現 신덕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8월10일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
金熙雲(김희운·38) 서울 중앙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후 3시경 시내 노상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서울 지방의 목사 여러 명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납북.
南宮爀(남궁혁·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 8월24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간부 朴允模(박윤모), 崔鐸(최탁)에게 연행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朴萬春(박만춘·42) 대한 감리회총리원 전도국 총무. 감리교 목사. 6·25 전쟁 후 총리원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던 총리원 감독 김유순 목사 등과 함께 납북.
朴相建(박상건·54) 서대문형무소(장로교) 목사. 정부가 6·25 전쟁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 확실하다. 7월13일 오전 11시경 서울 한강로 1가 183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새벽 공산군에 의해 납북 기록.
朴璇齊(박선제·67) 경동교회(감리교) 목사. 태평양 무역(주), 국제 손해보험(주) 사장 역임. 공산군이 납북.
朴炫明(박현명·48)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교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 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 8월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 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납북 기록.
朴亨圭(박형규·51)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사감.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이건 목사 등과 함께 8월10일 납북 기록.
方薰(방훈·58) 자교교회 목사. 감리교 총리원 이사. 8월23일 창성동에서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白學信(백학신·52) 강화읍교회(감리교) 목사. 9월26일 밤 12시경 강화읍 신문리 549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12명에게 연행 납북.
徐斗成(서두성·3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교회(성결교) 목사. 백암중학교 교장. 7월28일 10시경 경기도 용인군 백암교회에서 보안서원 2명에게 연행되어 용인 보안서를 거쳐 수원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徐太源(서태원·46)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목사. 협성감리교 신학교 교수. 8월23일 오후 3시경 기독교민주당원에게 연행 납북.
宋昌根(송창근·53) 한국신학대학장. 8월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으로 되어 있다.
宋台用(송태용·43)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34년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을 맡았으며 1935년 1월 창간된 「성화」의 편집 주임으로 창간에 참여. 8월27일 서울 중구 주교동 자택에서 납북.
沈明燮(심명섭·50) 감리교 목사.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8월23일 오후 9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0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연행 납북.
安吉善(안길선·60) 서울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 8월24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동구 신당동 333-8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납북.
梁柱三(양주삼·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8월23일 기독교연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울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
吳澤寬(오택관·63) 장로교 목사.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9월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문공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장남이다.
兪世根(유세근·41)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
劉在獻(유재헌·46) 장로교 목사. 임마누엘수도원 부흥사.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223 기독교 사업체인 修禱園(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이 연행 납북.
柳禎喆(유정철·46)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
尹聖浩(윤성호·32) 장사동교회(감리교) 목사. 9월19일 오후 3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내무서원 수명에게 트럭에 실려 연행된 후 소식 두절.
출처 : www.systemclub.co.kr
공산당의 6·25 당시 기독교 성직자 학살&납치
- 피살·납북된 목사·신부 등 358명 명단 발굴
- 목사·신부·장로·수녀 170여 명 학살당해, 교황 사절·구세군 사령관 등 외국인도 희생
鄭 晉 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일본 천리大 교환교수. 재단법인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서재필 기념회 이사.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 언론사」, 「인물 한국 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과 한국 현대사」 등 펴냄.
6·25 전쟁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피살당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4명이 확인되었고, 납북당한 교직자도 184명으로 피살과 납북 피해자는 모두 358명에 이른다. 정부와 적십자사가 조사한 자료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부터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을 학살하거나 조직적으로 北으로 끌고 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조사·작성한 「피살자명부」, 「피납치자명부」,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에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자진 등록을 받은 명부에 개신교의 「목사」, 「장로」, 천주교의 「신부」 등으로 교직이 명확히 밝혀진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여러 조사자료를 종합한 수이다. 그러나 피살 또는 납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교직자도 적지 않을 것이고, 직업에 「종교인」으로 표시되지 않은 일반신도를 포함하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6월25일자 「한국기독교신문」은 400명의 牧者(목자)가 희생되었다고 보도하였으며, 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명, 감리교 46명이 순교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기독교연감」 1957판, 대한기독교서회).
납북자와 피살자에 관한 공식 자료는 5 종류가 있다. 정부가 조사한 피살자 또는 납북자 가운데 직업이 기독교인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독교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피살 또는 납치당한 개신교 교역자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이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가톨릭에서는 남북한을 합쳐 한국인 52명(교구장 1, 신부 40, 수녀 7, 신학생 4)의 희생자가 있었고 외국인 98명을 포함하면 150명이 희생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1992, p.911).
天主敎, 제2의 박해기
그러나 기독교계의 연구 자료와 정부가 전국에 걸쳐 작성한 피살자와 피납북자의 명부를 조사한 결과 기독교 교역자의 피해는 그보다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쟁 전부터 북한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 또는 투옥하다가 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별적으로 검거하여 처형하거나 北으로 끌고 갔다. 기독교인들을 수십 명씩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도 여러 곳에 있었다.
북한에서의 종교 탄압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한 정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청산하고 종교를 말살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의 종교 탄압과 기독교의 수난에 대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는 「침묵의 교회 형성기」 또는 「제2의 박해기, 순교자들의 시대」로 규정한다.
천주교의 경우 한 연구에 의하면 제일 먼저 탄압을 받았던 덕원 면속구와 함흥교구에서는 1949년 5월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3명의 신부들이 체포된 이래 6·25 전쟁 직전까지 73명이 체포 또는 피살되었다. 독일인 성직자 22명, 수사 25명, 수녀 20명, 한국인 신부 5명, 수녀 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31명이 희생(외국인 25명, 한국인 6명)되었고, 42명은 후에 생환하였다.
덕원에서 시작된 교회 탄압은 평양교구와 황해도 교회로 이어졌다. 평양교구에서는 1949년 5월14일 교구장 洪龍浩(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가 납치된 이래 6·25 직전까지 14명이 체포·구금되어 모두가 행방 불명되었다. 가장 늦게까지 성직자·수도자들이 활동했던 황해도 지역에서 1949년 5월20일에 체포된 韓允勝(한윤승, 필립보) 신부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행방 불명되었다(차기진, 「6·25 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994.10).
이는 전쟁 이전에 북한 정권이 북한에서 자행한 천주교 박해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개신교에 대한 탄압도 이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金日成은 전쟁을 일으킨 후 남한에 진주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 공산당은 남한의 몇 개 지역에서는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기독교도를 집단학살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50년 9월, 전남 靈巖(영암)읍 교회에서 신도 24명을 집단학살하였고, 沃溝(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당했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荏子島(임자도)에서도 100명, 혹은 150명씩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을 학살했다. 10월5일 새벽 이판일 장로의 일가족 13명이 학살당했으며, 집단 학살당한 교인은 43명이었다.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박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제6권, 선문출판사, 1973).
정부는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되기 전의 긴박한 상황이었던 1950년 12월 서울에서 납북 또는 피살된 사람들의 실태를 조사하였고, 그 후 두 차례 전국에 걸친 피해상황을 조사하였으며 피살자의 명단을 따로 만들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56년에 납북자들의 가족으로부터 등록을 접수하여 송환을 위한 교섭자료로 활용하였다.
휴전 후 정부는 납북자의 송환을 명시한 휴전협정 제59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송환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북한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서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들 종교인들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를 외면하고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와 적십자사가 수집한 피살 또는 납북당한 사람들의 수는 별표와 같다.
위의 5종류 자료 가운데 치안국 정보과가 1954년에 조사한 「피납치자명부」는 프린트 인쇄가 조악하여 글자가 보이지 않거나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료로 활용하기에 애로가 있다.
납북된 종교인은 치안국 자료를 제외한 4종류 명부를 조사하여 종합한 것이다.
이 자료들에 수록된 명단에는 중복 포함된 사람도 있고, 3개나 2개 자료 또는 하나의 자료에만 들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이 5개 자료 가운데 4개 자료를 토대로 피살 또는 납북된 종교인을 찾아내어 종합하고 교회사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아래에 상술하는 피살 또는 납북 종교인들을 밝힐 수 있었다. 정부 기록 외에도 여러 기독교 자료를 참고로 하여 정부가 조사한 명단에 없는 이름을 추가하였다. 피살·납북 연도는 1950년이다.
피살 종교인들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仁善(김인선)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피살.
劉鍾鶴(유종학·63) 명동교회(감리교) 목사. 공산군이 납치 살해하였다.
이종도 제주도 제1대 목사.
임인재 전남 해제 중앙교회 목사.
전병무 경북과 울릉도에서 활동한 목사.
[신부(24)]
미사 집전 중 납치, 피살
◇ 한국인(7)
姜晩秀(강만수·27) 세례명 요셉. 대전교구 洪城(홍성) 주임. 7월에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8월1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대전 감옥에 수감 중 9월26일 피살.
朴昌大(박창대·62) 8월18일 강원도 마지기 광산에서 피살.
徐起昌(서기창·62)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울교구 황해도 송화본당 주임. 10월6일 연행되어 10월13일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10월16일 피살 기록.
劉載玉(유재옥·53)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울대교구 겸이포 주임. 6월24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어 海州(해주) 형무소에 수감된 후 10월5일 동해주 백사장에 생매장당했다.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6월 중 서울 종로구에서 납치된 것으로 기록.
全德杓(전덕표·31) 세례명 안드레아. 서울교구 황해도 사리원본당 보좌신부. 10월13일 연행되어 10월16일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구)에는 10월12일 미사를 접전하던 중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되어 며칠 후 사리원 성당에서 1km 정도 떨어진 정치보위부 방공호에서 피살.
수도원에서 피살
◇ 외국인(17)
듸포리(48) 천안 천주교회 신부(프랑스인). 9월25일 충남 천안군 성황동에서 피살.
안토니 코리아 주교(프랑스인) 7월30일 춘천시 소양동에서 피살.
吳必道(오필도·56) 프랑스 신부. 8월16일 온양 천주교당에서 피살.
요셉 모리말(J.Molimard, 牟·49 또는 51)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부여 주임. 9월25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A.Collier(高)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소양로 본당 주임. 6월27일 피살.
Brennan, Patrick(패트릭 브렌난, 安·50) 세례명은 파트리치오. 미국 몬시뇰 골롬반회 소속 한국 선교사. 광주 지목구장. 8월 연행되어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목포 본당 주임신부 쿠삭, 보좌신부 오브라이언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Cordess, Marius(마리우스 코르데스, 孔·42)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당진 주임. 8월14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Desideratus Polly(폴리, 沈應榮)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천안 주임. 8월2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Colin(高)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서산 주임. 7월10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Molimard(牟)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부여 주임신부. 8월20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O’brian(오브라이언, 吳) 아일랜드 신부. 광주교구 목포 주임. 8월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Maginn, James(제임스 매긴, 陳·40) 세례명 야고보.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춘천교구 삼척 주임. 7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7일 삼척읍 紫芝里(자지리)에서 피살.
P.Leleu(를뢰, 盧) 아일랜드 신부. 대전교구 온양 주임. 8월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P.Perrin(페렝, 白文弼)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합덕 주임. 8월14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P.Reiller(羅)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묵호 주임. 7월12일 연행되어 7월 말 피살.
Robert Richard(리샤르·李)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예산 주임. 8월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T.Cusak(高) 아일랜드 신부. 광주교구 목포 주임. 8월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수녀(5)]
수녀원 원장도 피살
김정숙 세례명 마리안나. 샬트르 성 바오로회. 10월15일 연행되어 10월17일 피살.
김정자 세례명 안젤라. 샬트르 성 바오로회. 10월15일 연행되어 10월17일 피살.
朴(박) 세례명 루시아. 성 베네딕도 수녀회. 9월25일 연행되어 10월11일 피살. 차기진의 연구에 의하면 원산에서 9월24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10월8일경에 피살.
張(장) 세례명 아가다. 성 베네딕도 수녀회. 6월24일 연행되어 10월14일 피살.
M.Beatrix 프랑스 수녀. 샬트르 수녀회 원장. 7월15일 연행되어 11월3일 피살.
[성공회(5)]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
◇ 한국인(2)
尹達鏞(윤달용·61) 세례명 모세. 성공회 서울대성전 관할 사제 겸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18일 저녁 무렵 서울 중구 정동 3번지 대한성공회 구내에서 세실 쿠퍼 주교와 함께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연행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한국가톨릭대사전」, 「대한성공회 백년사」에는 순교.
趙鏞昊(조용호·53) 세례명 디모데. 성공회 인천교회 신부. 7월24일 저녁 11시경 인천시 송학동 3가 4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5명에게 연행되어 인천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8월1일 서울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소식 두절.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7일 인천에서 납북.
◇ 외국인(3)
Albertm, W(이도암 李道岩) 영국인 신부. 7월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북한 각지로 끌려 다니는 「죽음의 행진」 중에 행방불명.
Mary Clare(마리아 클라라·71) 아일랜드인 수녀. 聖架(성가)수녀회 초대원장. 7월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6일 중강진에서 사망.
Charles Hunt(헌트·홍갈로) 신부.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18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20일 해창리에서 사망.
※「대한성공회 백년사」(1990)에 클라라 수녀는 7월31일, 헌트 신부는 7월3일, 이도암 신부는 7월25일에 각각 공산군에게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세군(2)]
姜基模(강기모·24) 구세군 참위. 9월26일 북한군에 붙잡혀 충남 예산군 손지리 뒷산에서 피살.
盧永守(노영수·46) 구세군 고등참령으로 9월5일 지리산 기슭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세계 구세군 100년 사상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22일 경남 함양군 개평리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崔泳旭(최영욱·60) 기독교인. 광주 제중병원장. 美 군정 시기에 한국인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7년 「호남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돌산면 군내교회 집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피살 일자 및 장소가 확실치 않은 집사]
고웅두 충남 오량교회 집사.
金東信(김동신)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김두환 경북 기계제일교회 집사.
김춘동(61)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문봉순(43)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박상문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朴仁在(박인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안수집사.
박일규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방후용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서상철 충북 청산교회 영수.
서석근(52)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申相翊(신상익·44) 전북 이리 제일교회 집사. 광주형무소에서 피살.
심만길 경북 육통교회 집사.
안인호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집사.
오죽현(77)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윤성전(7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윤임례 전북 정읍 두암교회 집사.
李一(이일·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이민우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임유삼(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任子壬(임자임·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교회 집사.
鄭壽一(정수일) 충남 논산 병촌교회 집사. 같은 교회 교인 65명과 함께 피살.
조인심(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蔡水原(채수원)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한창교 경남 거창군 덕산교회 집사.
납북 종교인들
납북된 교직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수는 개신교 목사 74명, 가톨릭 신부가 26명이었고, 장로 5명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었다. 납북된 주요 교직자 가운데는 종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사(77)]
새문안교회 金英珠 목사의 운명
具滋玉(구자옥) YMCA 총무 역임.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경기도 지사 역임. 서울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타고 끌려가다가 龍淵(용연)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權泰羲(권태희·45) 경북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위원장 피선. 납북된 후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동원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10월까지는 평양에 거주.
奇世福(기세복)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庚鍾(김경종·56) 서울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인 6월28일 오전 7시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金東哲(김동철·52) 서울 서소문교회(감리교) 목사. 7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자택에서 공산당원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斗錫(김두석·61) 파주 봉일천교회(장로교) 목사. 9월18일 오후 9시경 서울 용산구 동자동 153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3명에게 연행되어 동자동 내무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峠(김상·61) 종군목사. 9월12일 서울 서대문구 의주동 자택에서 납북.
金尙七(김상칠·53) 제7안식일교회 총무(목사). 7월27일 오후 5시경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90-9번지 자택 앞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4일 동안 억류된 후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옮겨졌다가 납북.
金聖元(김성원·68) 장로교 목사. 9월25일 전남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金誠源(김성원·78)이 완주군 일대에서 교역하던 중 납북.
金英珠(김영주·57) 서울 새문안교회(장로교) 목사.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때 총회의 정죄를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목사. 광복 후에는 새문안교회를 개방하여 교파 통일을 위한 장로·감리교의 협의회와 초교파 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도 제공했다.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3 자택에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
金元圭(김원규·49) 개성 감화원(소년원) 원장. 감리교 목사. 1946년부터 개성지방 감리사로 시무. 경기 개성시 관훈동 604-2. 7월6일 11시경 개성에 있는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납북. 1951년 5월 熙川(희천)까지 끌려갔을 때에는 다리를 삐어 굴신을 못 하는 상태였다.
金裕淳(김유순·69)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9대 총리원 전도국 감독. 서울 북아현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전 8시50분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의 140 자택에 기독교민주동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 납북.
내무서원에 연행된 후 납북
金有淵(김유연·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 성결교회 목사. 성결교단 잡지 「活天(활천)」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京西(경서)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 교회(現 신덕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8월10일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
金熙雲(김희운·38) 서울 중앙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후 3시경 시내 노상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서울 지방의 목사 여러 명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납북.
南宮爀(남궁혁·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 8월24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간부 朴允模(박윤모), 崔鐸(최탁)에게 연행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朴萬春(박만춘·42) 대한 감리회총리원 전도국 총무. 감리교 목사. 6·25 전쟁 후 총리원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던 총리원 감독 김유순 목사 등과 함께 납북.
朴相建(박상건·54) 서대문형무소(장로교) 목사. 정부가 6·25 전쟁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 확실하다. 7월13일 오전 11시경 서울 한강로 1가 183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새벽 공산군에 의해 납북 기록.
朴璇齊(박선제·67) 경동교회(감리교) 목사. 태평양 무역(주), 국제 손해보험(주) 사장 역임. 공산군이 납북.
朴炫明(박현명·48)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교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 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 8월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 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납북 기록.
朴亨圭(박형규·51)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사감.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이건 목사 등과 함께 8월10일 납북 기록.
方薰(방훈·58) 자교교회 목사. 감리교 총리원 이사. 8월23일 창성동에서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白學信(백학신·52) 강화읍교회(감리교) 목사. 9월26일 밤 12시경 강화읍 신문리 549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12명에게 연행 납북.
徐斗成(서두성·3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교회(성결교) 목사. 백암중학교 교장. 7월28일 10시경 경기도 용인군 백암교회에서 보안서원 2명에게 연행되어 용인 보안서를 거쳐 수원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徐太源(서태원·46)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목사. 협성감리교 신학교 교수. 8월23일 오후 3시경 기독교민주당원에게 연행 납북.
宋昌根(송창근·53) 한국신학대학장. 8월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으로 되어 있다.
宋台用(송태용·43)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34년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을 맡았으며 1935년 1월 창간된 「성화」의 편집 주임으로 창간에 참여. 8월27일 서울 중구 주교동 자택에서 납북.
沈明燮(심명섭·50) 감리교 목사.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8월23일 오후 9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0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연행 납북.
安吉善(안길선·60) 서울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 8월24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동구 신당동 333-8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납북.
梁柱三(양주삼·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8월23일 기독교연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울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
吳澤寬(오택관·63) 장로교 목사.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9월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문공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장남이다.
兪世根(유세근·41)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
劉在獻(유재헌·46) 장로교 목사. 임마누엘수도원 부흥사.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223 기독교 사업체인 修禱園(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이 연행 납북.
柳禎喆(유정철·46)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
尹聖浩(윤성호·32) 장사동교회(감리교) 목사. 9월19일 오후 3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내무서원 수명에게 트럭에 실려 연행된 후 소식 두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