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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도 청년 '박달'과 충청도 처녀 '금봉이'의 사랑 이야기 울고 넘는 박달재 |
- 여강 최재효 作 |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에 얽힌 사연을 중편 소설로 다루었습니다. 본 작품은 제천 신문에 연재되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 경상도 총각 박달(朴達)과 충청도 제천 처녀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비련(悲戀)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울고 넘는 박달재-12
아침식사를 마친 박달과 금봉은 집을 나섰다. 금봉은 마을 사람을 의식해 마을 뒤편으로 난 길로 박달을 안내하였다. 곧 산길로 통하는 좁은 길이 나왔다. 산길을 조금 더 들어가니 늦가을이 곱게 수놓아진 울긋불긋한 숲이 나왔다. 참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푸르고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로 산속은 화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산했다. 금봉은 박달을 이등령 방향으로 안내하였다. “어디 가는 것인 지 말해주면 안 되오?” “도령님, 맞춰보세요.”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기대가 되는데…….” 두 사람은 방금 나눈 사랑 때문에 그런지 더욱 정답게 보였다. 박달이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금봉의 손을 잡아 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제는 낯선 산골 처녀가 아니라 앞으로 평생을 같이할 여인이었다. ‘참으로 예쁘고 따뜻한 손이로다. 세상에 이렇게 고운 섬섬옥수가 다 있다니?’ 박달은 백설처럼 고운 금봉의 손을 잡고 신기해하였다. 금봉이 신이 난 듯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걸을 때 마다 금봉이 댕기머리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박달은 멍하니 서서 앞서 가는 금봉이를 바라 보았다. “도령님,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이 산속에서 누가 본다고요?” “혹시 알아요. 호랑이나 늑대가 보고 질투할지요?” 금봉이 웃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 그럴 수도 있겠구먼.” “저기에요. 저기 보이시죠?” 금봉이 가리킨 곳은 성황당이었다. 천년 쯤 묵은 느티나무가 기골이 장대한 거한(巨漢)처럼 떡 버티고 서있고 그 옆에 고색창연한 빛깔의 성황당이 있었다. 성황당의 외양으로 보아 수백 년은 된 듯 했다. 그제야 박달은 금봉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서낭당이구나. 나를 위하여 서낭신에게 빌러 왔나보구나.’ “도령님, 저 돌 무덤에 돌을 몇 개 올려놓으세요.” 금봉이 길 옆에 있는 돌 세 개를 느티나무 아래 돌무덤 위에 얹어 놓고 합장한 뒤에 세 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 행동이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박달은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았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을 서낭당 또는 성황당이라고 한다. 대개는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있거나 작은 전각을 안치하기도 한다. 곁에는 오래된 신목(神木)이나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서낭신에게 소원이나 무사안일을 빌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神域)으로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앙의 장소이기도 하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돌, 나무, 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다녔다. 이등령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서낭당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한 쌍의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도령님, 제가 속으로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박달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기만 했다. “성황신에게 도령님 과거에 장원급제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도령님도 돌 세 개를 올려놓고 빌어 보세요.” 박달도 금봉이 집어준 돌 세 개를 정성스레 돌무덤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으고 세 번 허리를 깊이 숙이며 속으로 빌었다. ‘성황신님, 장원급제를 하여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제가 떠나가고 없는 동안에 마음씨 여린 금봉이를 굽어 살펴주소서.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박달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정성을 다해 치성을 올렸다. 박달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릴 때마다 금봉은 합장한 채 손을 비비며 박달의 과거급제를 속으로 빌고 빌었다. “도령님, 저 길로 곧장 올라가면 이등령이 나와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영남지방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이 이 길을 지나가면서 이 성황당 앞에 잠시 서서 각자의 소원을 빌곤 해요. 제가 도령님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니 부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금봉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박달은 다가가 금봉을 살짝 안아 주었다. “고마워요. 내, 그대를 생각해서라도 꼭 과거에 합격하리다.” “도령님, 꼭 장원급제하셔야 해요.” “고맙소.” 박달은 다시 한 번 금봉을 꼭 안아 주었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인연을 맺은 금봉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박달은 금봉을 남겨두고 한양으로 가야하는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가 능하다면 함께 갔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는, 저는 도령님 떠나시면 못 살 것 같아요.” “무슨 소릴 그리 심하게 하오?” “모르겠어요. 괜히 눈물이나요.” 박달의 풍에 안긴 금봉이 흐느끼자 박달의 마음도 무거웠다. “걱정 말아요. 그대와 한 언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리라.” “고마워요. 도령님-.” “울지 마오. 금방 성황신께 모든 일이 잘되게 빌어놓고 울면 어떡하오?” “죄송해요. 도령님.” “사랑하오. 만약 내가 그대를 버린다면 나는 천벌을 받을 거요. 저 성황신님이 지켜보고 계시잖소. 꼭 과거에 합격하여 그대를 보러 벌말로 한걸음에 달려오리다.” “고마워요. 저는 도령님이 한양에 과거보러 가신 뒤에 이곳에 와서 서낭신께 빌고 이등령에 올라 저 먼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도령님을 그리워할 거예요. 도령님이 다시 이곳 벌말을 찾는 그날 까지요.” “고맙소.” 두 사람은 서낭당을 지나 이등령을 향해 걸었다. 저 산 아래 벌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식경 쯤 걷자 정상이 나타났다. “금봉, 이리와요. 이 바위에 잠시 앉아요.” 박달 도령이 어른 세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박달과 금봉이 바위에 나란히 앉아 산 아래 아득하게 펼쳐진 북쪽을 내려다보았다. “저기 좀 보오.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만산에 홍엽(紅葉)이 가득하지 않소?” 박달은 손을 들어 시야에 들어온 늦가을의 산과 들을 가리켰다. 금봉이 박달이 가리키는 산을 내려다보았다. “도령님, 이곳 이등령은 슬픈 역사가 많이 간직된 곳이에요.” “나도 대충은 들어 알고 있어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 천년의 신라를 통째로 받치기 위하여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이 고개를 넘어 갔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 박달은 고향에서 스승이 한양가는 지도를 펴놓고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도령님, 신라의 왕이 천년왕국을 왕건이란 사람에게 넘겨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요? 생각만 해도 그 왕이 측은해요. 경순왕에게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는데, 그중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는 분은 아버지 경순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금강산에 들어갔다는 전설도 들은 것 같아요.” 금봉이도 신이 난 듯 이등령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었다. “이등령에 깃든 전설에 대하여 잘 알고 있구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어요. 왜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바쳤나요?” 금봉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아주 좋은 물음이요. 경순왕이 신라를 통치할 때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 나라 전체를 다스릴 수 없었지요. 사방에서 초적(草賊)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그들을 진압할 군대도 없었지. 귀족을 빼고 실질적으로 나라의 살림을 맡고 있던 육두품들 대부분이 이미 신라 왕실에 등을 돌린 상태였어. 서쪽에는 견훤(甄萱)의 후백제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북쪽에는 신흥강국 고려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나라를 살릴 방법이 없었던 게지. 만약에 마의 태자의 뜻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면, 전 국토는 초토화 되고 신라 백성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게야. 내 생각에도 경순왕의 선택이 옳았다고 봐.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왕관을 써보지도 못하고 평민이 될 처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러나 백성의 안전이 우선시돼야 해.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하루아침 에 떼죽음 당할 수도 있으니까.” 박달은 신이 나서 신라 망국사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어머나, 과거에 그런 것도 문제로 나오나 봐요?” “과거는 역사, 군사제도, 나라 안의 어려운 문제, 주변국과의 외교적 마찰, 백성들 살림살이, 부국강병 등 다양하게 출제가 되는데, 요즘은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해법을 묻는 문제가 자주 등장하곤 하지.” “도령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니 틀림없이 급제하시리라 믿어요.” 박달의 조리 있는 말솜씨에 금봉은 그만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참. 경순왕이 나라를 받치고 이 근처 어디에 궁을 짓고 살았다고 하던데…….” 박달이 다시 신라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아요. 여기서 가까운 방학에 궁뜰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어요. 그 왕께서 그 궁들에 이궁(離宮)인 동경저(東京邸)를 짓고 살았었데요.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그때는 그곳이 시끌시끌 했을 거예요. 저도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인생무상이라는 느낌만 받고 돌아오곤 했어요.” 금봉은 말을 마치자 멀리 북녘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은 외적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지?” “도령님, 저보다도 우리 고을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계세요.” 금봉이 신기한 듯 박달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지금의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었지. 지금부터 대략 삼백년 전쯤 될 거야. 북방에 거란이란 오랑캐 나라가 있었어. 그 거란이라는 나라가 십만 대병을 고려에 보내 금수강산을 짓밟았지. 원주와 지난 충주에 침입하자 전군병마사였던 김취려(金就礪) 라는 장군이 이곳에 복병을 두어 멋도 모르고 이 재를 넘어오던 거란 군사를 크게 무찔렀어. 생각만하여도 통쾌해. 그러니 이 고개가 호국의 장소이면서 고려 병사들의 피땀이 어린 곳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 나와 그대가 호젓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 조상님들에게 괜히 죄송스럽기도 해.” 박달은 이등령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곁에서 박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금봉은 존경의 시선으로 박달을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도령님, 그 이야기 말고 소녀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슬픈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또 다른 슬픈 이야기?” “네에.” “이왕이면 즐거운 이야기가 듣기 좋을 텐데…….” “이상하게 이 고개에는 즐거운 이야기보다 슬픈 전설이 얽혀있어서 저도 마음이 아파요. 도령님, 수양대군에 대하여 잘 아세요?” “잘 알지. 그 분은 비록 조선의 일곱 번째 왕을 지낸 분으로 본명은 이유(李瑈), 하지만 욕심이 너무 많은 분이야. 세종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그 분의 형님이신 문종대왕 이향(李珦)이 승하하 시자 나중에 단종(端宗)이라는 시호를 받는 어린 아들 노산군 이홍(弘暐)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지. 그런데 야심가였던 그는 조카이며, 어린 왕을 좌우에서 보필하던 중신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 얼마 후에는 조카를 상왕이라는 구실로 물러나게 한 뒤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앉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세월이 지나갔으면 좋겠지만 얼마 안 되어 상왕 인 노산군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터지게 돼. 사육신이라 분들이 상왕을 다시 옹위하려다 발각되어 삼족이 멸하는 비극이 벌어지지. 그러자 수양대군은 상왕이었던 노산군을 영원 청령포로 귀양 보내 그곳에서 죽이는데 그때 그 상왕이었던 비련의 노산군이 죄인이 되어 이 고개를 넘었다고 알고 있어.” 박달 도령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하듯 말하였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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