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고독한 군주 (2)
생모 콤플렉스
연산군은 언제 폐비 윤씨에 대해 알았는가?
많은 야사들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서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고 전하고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연산조 고사본말〉에는 '폐비 윤씨의 복위'라는 항목에서 《기묘록(己卯錄)》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성종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다.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 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내 아이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 또 거둥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라고 해서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릉)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생모 윤씨가 비명에 죽은 원한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렸다.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를 친모로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노해서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기묘록》)
이 기사는 연산군이 모친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라는 것이다. 인수대비는 연산군 10년(1504)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연산군은 재위 10년에야 모친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묘록》의 이 기사는 1936년 소설가 박종화가 《매일신보》에 갑자사화에 대해 연재한 〈금삼의 피〉 등 여러 소설과 영화에서 사실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기묘록》은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이라고 하는데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들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다. 김육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의 대표 인사 여덟 명을 뜻하는 기묘8현(己卯八賢)의 한 명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었다. 그래서 이 내용은 사실처럼 전파되었지만 이 또한 사림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비극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재위 1년(1495)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나서였다. 이날 연산군은 부친의 〈묘지문〉을 보고 승정원에 전교했다.
"이른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이란 이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령(領敦寧) 윤호(尹壕)를 기견이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폐비 윤씨가 성종 13년(1482) 사사당했을 때 세자 이윤의 나이 만 여섯 살이었는데, 3년 전인 성종 10년(1479) 폐위되어 출궁될 때 만세 살이었으므로 이런 사항을 알지 못했다. 그간 폐비 윤씨는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서삼릉의 태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윤씨의 태지가 발견되어 1455년 윤6월 1일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묘지문〉에는 성종의 왕비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처음 잠저에 계실 때 영의정 한명회(韓明)의 딸을 맞이하여 즉위하자 비(妃)로 봉하였는데 아들 없이 훙(薨, 세상을 떠남)했으므로 시호를 공혜(恭惠)라 했다.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올려서 비로 삼으니 곧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인데, 금상 전하(今上殿下, 연산군)를 낳으셨다. 또 숙의 윤씨를 올려 비로 삼으니 바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윤호의 딸이다.(〈묘지문〉)
성종은 세조 시절 한명회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그가 공혜왕후 한씨로서 예종 비 장순왕후의 동생이기도 하다. 한씨가 성종 5년(1474) 세상을 떠나자 후궁으로 있던 윤기견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가 폐위 후 사사하고 윤호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연산군은 윤호의 딸인 정현왕후 윤씨를 모후로 알고 있다가 성종의 〈묘지문〉에 윤기견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나오자 승지들에게 윤호를 윤기견이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아뢰었다.
"이(윤기견)는 실로 폐비(廢妃) 윤씨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연산군일기》 1년 3월 16일 자는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刺)를 들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산군은 즉위 3개월 만에 생모가 폐위당해 죽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연산군은 생모의 기일(忌日)을 엄숙하게 지키려 애썼다. 그해 8월 14일 연산군은 승정원에 전교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명일은 폐비 윤씨의 기일이니 사옹원(司饔院)으로 하여금 소선(素膳, 고기 없는 밥상)을 들이도록 하라."
승정원에서 아뢰었다.
“만일 소찬을 드신다면 아랫사람들이 감히 육식을 못하며, 또 기제(忌祭,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신다면 반드시 재계하여야 하는데, 재계를 하면 형옥(刑獄) 관계 판결 문서도 아릴 수 없습니다. 신 등은 대신과 예관(禮官)에게 의논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것은 큰일이니 상전(上殿, 대비전)에 의하여 결정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했다. 대비들도 연산군이 즉위 3개월 만에 생모의 비극에 대해서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연산군은 다음 날인 8월 15일 어서로 승정원에 교시(敎示)했다.
“폐후(廢后)가 덕이 부족하여 부왕의 버림을 받았으니, 나는 골육의정을 잊지 못하여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여러 신하들이야 어찌 소식을 하려 하느냐."
그런데 《성종실록》에 따르면 폐비 윤씨가 사사당한 날은 성종 13년 8월 16일이었다. 성종은 이날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비상(독약)을주어 윤씨를 죽이고 세 대비전인 삼전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윤씨 사사 소식을 들은 삼전은 승지 성준을 통해 자신들의 소감을 담은 언문서간을 전해 왔고 성종은 이 시간을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에게 빈청(賓廳)에서 읽게 해서 재상들이 듣게 했다. 언문 서간의 내용은 윤씨가 비상을 차고 다니며 성종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대비들이 막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대비들은 성종이 윤씨를 죽인 것을 “대의로써 결단했으니 국가의 복'이라고 주장했다. 성종은 윤씨를 사사한 것을 서울과 지방에 포고하라고 했으므로 잘 알려진 사실인데, 연산군이 왜 8월 15일을 기일로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뒤늦게 생모의 비극을 알게 된 연산군의 충격은 컸다. 비로소 자신이 일방적으로 축복받은 출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출처: 《조선왕조실록》5, 연산군 ㆍ중종ㆍ인종. 사대부들이 왕을 폐위시키는 군약신강의 시대, 이덕일, 2022, 45~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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