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성도 필수 목회신학 이론 : 신학이 어떻게 발전했습니까?(5)
정영근
신학이 어떻게 발전했습니까?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그렇지만 기독교 신학이란
예수님이 설파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부인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이 신학 아니겠어요. 아담 해와가 최초의
신학 문에 들어선 사람들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신약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 글은 신학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시니이다.’(마 16:16)라고 말 했을 때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이
말해주고자 하는 신학 내용을 잘 담고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장 말년에 헬레니즘 문화의 거센 흐름 때문에 예
수께서 육체로 오신 실제적인 증명을 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고
영감의 글을 써 변증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약성경 자체가 신
학의 시작이며 곧 성경 자체가 신학인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4세기까지 삼위일체 사상이 거의 정리되었으며 5
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중요한 성경교리
는 거의 확립되었다 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즉 신론, 삼위일체
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사상까지 그에 의해 대성
되었다 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신학을 은총 위에 굳게 세워 복음주의 신학을 대성시킨 아우구
스티누스로부터 가지가 많이 생기게 되었는데 신 풀라톤주의의
신비주의, 중세 스콜라주의, 독일신학 등을 발전시켰다는 것입
니다.
이때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열쇠를 이어 받았다는 사도
적인 교회로 법왕은 무류하다는 교리와 더불어 종횡 교권주의
절대주의 교리로 나타나고 발전해 오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
러한 교권주의에 맞서 루터와 쯔윙글리와 부처와 칼빈이 중심
이 되어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며 결국 기독교 종교개혁에 성공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로마 카톨릭과 분리하여 희랍을 본거지로 해서 동
방정통교회라는 형태가 1054년에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발전시킨 신학사상은 로마 카톨
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학과 많이 다른 점이 있었는
데 희랍철학과 의지적인 신비주의의 영향이 많이 스며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이 다음에 있습니다. 16
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보다 더 발전시킨 것이 소위 신
교 정통주의라는 것인데 이후 17세기와 18세기의 프로테스
탄트 교회의 신학자들은 신학을 지나치게 이론적으고 사변적
인 면에서 발전시켜 신학과 교회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냉각
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로 신학이 이론이 되고 사변적이 되면 성령의 뜨겝게 하는
역사를 막는 것 아닌가 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좀 더 복음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동유럽을 중
심으로 일어난 진센돌푸의 경건주의, 그리고 영국에서 일어
난 존 웨슬리의 메도디스트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 각성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미국에서의 에드워즈의
각성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건주의 신학은 벽을 맞게 되었지요. 그것이 쉴라
이 에르 마헤르의 신학에 지배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신학이란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강조한 진리의 객관성, 곧
초월주의를 주관적인 것에 있다고 하는 내재주의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반해서 탄생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자유주의 신학
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주의의 초월주의와
교리주의에 대항하여 결국 휴우머니즘적이고 인본주의의 상
대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대충 하고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여 정통주의나 미국의 근본주의가 반기
를 들고 나왔으니 그 힘이 미약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신정통주의 신학자들, 바르트, 부르너, 투르나이젠이 중
심이 되어 자유주의신학을 통박하고 신의 절대성과 은총과
그 위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 신학을 ‘위기신학'이라고
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 자유주의 신학은 큰 타격을 받았었지
요.
제 2차 대전 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주요할 수 있습니다. 미국
의 틸리히와 독일의 불트만, 1945년 나치에 의해 처형된 본
회퍼 라는 신학자들이 나타난 시대입니다. 틸리히는 바르트의
새 신학운동에 동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신학적으로는 바르트
와는 달리 철학과 신학의 상관관계에 더 많이 관심을 쏟고 있
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불트만입니다. 불트만은 독일의 자유주의 산학의 조
류를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유주의의
어느 원칙을 따랐다고 보는 것입니다. 곧 그이 연구는 실존주
의적 방법을 적용하여 소위 비신화론적인 주장을 했다는 것
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역사적 실재성까지를 의문시 하게
되었고 성서를 신화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기록된 초대교회
의 종교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였다는 것입니
다.
학자들의 감화와 그 영향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불트만에게
서 영향을 받고 동조한 젊은 전후의 신학자들은 한 때 신(하
나님)은 죽었다고 까지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
주의 신학은 아주 짧은 기간에 끝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본
회퍼는 나치의 독제하에서 끝까지 기독교의 본질과 자주성
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옥사하고 말았습
니다.
그는 루터의 전통을 지지하며 보수적인 감각이 강한 신학자
였습니다. 그의 기성교회와 안일주의와 무능력을 통탄하면서
신학의 교수로 전념하는 등의 좋은 점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사명을 다 하려면 사회적, 정치적 행동을
수반해야 한다 라고 내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치정권
의 반유대주의에 적극 반대하는 동시에 히틀러 암살단에 비
밀리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본회퍼는 바르트의
반 나치적 신학운동을 직접 실천한 신학자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쯤 되었을까 해서 독일신학은 재평가
를 시도했었는데 그 이론은 아주 복잡합니다. 법왕 무류설과
절대주의를 부르짖으며 세계 정통을 자처하는 로마카톨릳교
회 안에서도 벌써 부터의 그들 나름대로의 개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합니다. 루터에 대한 재평가와 예배의식의 민주화
와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비전통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하
나 큰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실정입니다.
이제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끝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찰하고자 하는가 라는 이것
이 아주 주요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의 루트를 벗어난 신학사조의 특징들을
면면에서 찾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떠나면 반드시
다른 사상이나 물리에 의존하게 되고 그리고 그래야 버티고
일어서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길, 우리가
갈 본연한 결과는 거리가 먼 길이 되고 맙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따르는 길은 고루하고 인본주의 사고로
진행하는 길은 훌륭하고 그럴듯한 길로 크게 착각을 많이 합
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 아닌 것입니다. 우
리는 흔히 그런 길에서 어떤 의미의 유익과 교훈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본원적으로 지금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
사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잘 살펴보시지요! 이 길이 현금 재림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길이라고 확연하게 보아지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