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단의 분열
장로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전파될 때는 하나의 교단이었으나 고려신학파,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으로 분리되었고, 예장은 다시 '예장 통합'측과 '예장 합동'측으로 분리되었는데, 여기서 '기장'은 진보, '예장통합'은 중도 보수, '예장합동'과 '고려신학파'는 보수 교단으로 각각 대별된다.
① 고려파 장로교의 분열
1938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열린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당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문을 닫았고, 신사 참배에 굴복하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여럿이 투옥 당했으며 그 중 50여명이 순교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님은 널리 잘 알려진 주기철, 최봉석, 손양원,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 고흥봉 목사님과 박관준, 방계성 장로님 등이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투옥되었던 출옥성도 중심으로 보수적인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박형룡, 박윤선 등을 초빙하여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고신대)를 설립하였다. 경남노회는 교회 재건운동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에 관계가 호전되었으나 1948년 9월 21일 다시 고려신학교의 승인을 취소하였고, 1951년 5월 21일 장로교 총회는 고려파 대표를 총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고려파는 따로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 법통노회’라고 하고, 1952년 9월 고신측 제1총회를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하고 독립 총노회를 조직하였고, 1956년 6개 노회로 구성된 총회를 구성하였다.
@ 신학교 분리 @
1939년 신의주에서 열린 제28회 총회에서 조선 신학원 설립 안을 인준하였다. 1940년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원이 개강했는데 설립 목적을 "본 신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신학을 연구하며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 학교의 교수진은 김대현, 김재준, 함태영,윤인구, 전필순, 현제명, 전성천, 유호준, 박태준, 한경직, 정대위, 권태희 등이다.
조선신학교와 1940년에 복교한 평양신학교는 1945년까지 일제의 어용 기독교 일군들을 배출하였다.
장로교단의 분열 2 (기독교장로회)
②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분열
장로교는 고려파가 분열한지 1년만에 또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일제 하에서 탄생시킨 조선신학교는 1950년 한국신학(한신대)으로 인가를 받아 졸업생을 내었으며 한국 기독교장로회(기장)의 발상지가 되었다.
1947년 4월 대구 총회에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김재준, 송창근 교수 등의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ㆍ구약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의 오류를 주장하고, 정통교리를 비난하며 세속화의 방향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총회는 보수 신학을 목적으로 1948년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총회 아래 두 개의 서로 다른 신학교가 있어 양파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켰다.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에서 양 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하나의 총회 직영 신학교를 개교하였고 조선신학교는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였다.
1952년 4월 29일에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제명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학생은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5월에 경기노회가 열려 총회의 불법 결의를 부인한다는 성명을 냈으며, 같은 해 9월 대구에서 조신측을 지지하는 신도들이 호헌대회를 열었고,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 파면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조신측은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개최하고 1954년 6월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명명함으로써 교단이 완전히 분열되었다.
장로교의 분열 3 (통합과 합동)
③ 통합파와 합동파의 분열
고신파와 기장이 분열되어 나가고 남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1959년 또다시 분열하게 되었다.
예수교 장로회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격의 지도자와 세계복음주의 친교회(NAE)에 참여하는 보수적 성격의 지도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NAE측에서는 WCC가 자유주의적이고 용공적인 성격을 띤다는 이유를 들어 거기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했다.
보수적 집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ICCC의 회장 맥킨타이어 목사가 방한했을 때 고신파 지도자들과 NAE측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두 파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 파송할 총회 대표 선출 문제로 경기 노회가 갈라짐으로써 교단분열로 나아가게 되었다. 5월에 열린 경기 노회에서 뽑은 총대 선거에 부정이 있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같은 해 6월에 임시 노회를 열어 새로 총대를 선출하였다.
5월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NAE측이 많았고, 임시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WCC측이 많았다. 총회는 11월 2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하자는 증경 총회장들의 제안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은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후에 결합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1960년 총회부터 완전히 서로 다른 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WCC측은 통합 예수교장로회(장신대학), NAE측은 합동 예수교장로회(총신대학)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분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