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제가 문단에 등단하여 제1집을 출간할 때 상재하였던 글입니다.
지금의 제가 있게 하였던 아주 어린시절의 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꿈들 이었죠.
용근이 성
유옹 송창재
익산, 그 시골~~~
그곳엔 나의 어릴 적 “울긋불긋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의
어릴 적 꿈을 그리면서 놀던 꿈동산이 있습니다.
그 곳은 지금의 나를 길렀고...
내게는 엄마 같은 곳이기도 하고, 나를 울보 못난이로 만들어 놓은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없지만, 거기에는 용근이 성이 살았습니다.
내게는 형이 아닌 성이었습니다.
성은 재실 집에 살았습니다.
난, 그때 성이 용근이 성
익산, 그 시골~~~
그곳엔 나의 어릴 적 “울긋불긋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의
어릴 적 꿈을 그리면서 놀던 꿈동산이 있습니다.
그 곳은 지금의 나를 길렀고...
내게는 엄마 같은 곳이기도 하고, 나를 울보 못난이로 만들어 놓은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없지만, 거기에는 용근이 성이 살았습니다.
내게는 형이 아닌 성이었습니다.
성은 재실 집에 살았습니다.
난, 그때 성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더 먹은 어른인 줄 알았고,
그래서 힘도 그렇게 세서. 소도 잘 먹이고, 지게도 잘 지고, 참새, 때까치도 잘 잡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라서 보니, 나보다 겨우 8살 더 먹었었습니다.
이름처럼 생긴 것도 대충 생겼고, 시커먼 촌놈이고... 힘만 세었습니다.
성은 재실 집에 살면서, 우리 할머니네 머슴이었습니다.
아니, 성만 머슴이 아니고 그 집 식구들 모두가.....
그래서 우리 집 한 식구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근이 성 아버지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용근이 성의 엄마를 작은엄마라고 불렀고, 성은 나를 창렬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은 학교도 안 가고,
나 하고만 놀았습니다. 나도 성하고만 놀았습니다.
성하고 나는 비밀이 없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시내 중학교를 다니는데, 성은 교복도 안 입고.
잠벵이만 입고, 지게만 지고 다녔습니다.
성네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성보고 목수 질을 배우라고 한다는데....성은 그것이 싫답니다.
의사가 되고 싶답니다.
의사가 되어서 내 다리를 고쳐주겠답니다.
성은 나하고만 놉니다. 나 없으면 함께 놀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하고 나는 꼭 같았고 우리는 친했습니다.
이른 봄 못자리 때부터 모심기, 김매기, 물대기, 피살이하기... 나락베기
성은 못하는 것이 없는 최고였고, 성 옆에는 언제나 지게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지게가 없는 때는,
아침에 할머니 집으로 나를 부르러 올 때뿐 이었습니다.
나를 부르고 나서는, 헛간에 있는 지게를 지면 성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게위에는 내가 앉고, 한손에는 누렁이의 고삐가 쥐여졌고...
그것이 성의 아침풍경이었습니다.
“ 성, 오늘은 어디가?”
“ 응, 저기 총소리 나는 메깥 알지? 거기 가서 누렁이 먹이자.”
성은 모르는 산이 없었고, 새 집도 잘 찾았습니다.
나도 그 산을 잘 압니다.
둠벙도 있고 할머니네 고추밭이 있고, 메뚜기들도 많아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곳입니다..
할머니한테 왜 그 산에는 총소리가 나냐고 물었더니,
그 너머에 군인 훈련소가 있어서 그렇다고 알려주어서 그 산을 더 잘 압니다.
성은 산에 가면 소를 메고, 나는 봉창에서 누룽지를 꺼냅니다.
그것이 성의 아침간식입니다.
아닙니다. 혹시 오늘 아침은 걸렀는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네 집에는 늘 누룽지가 있었습니다.
농촌은 밭일, 논일이 그칠 때가 없었고, 성 네 식구들하고 함께 먹을려고 할머니는 늘 밥을 많이 합니다.
밥을 해서 샛거리, 점심. 또 샛거리, 저녁까지 성 네 식구들하고 함께 먹습니다.
그래도 성 네 아버지는 한 번도 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간난이한테 먹을 것을 따로 보내면서 욕을 합니다.
“ 지랄했다고, 와서 함께 쳐 먹으면 좋으련만...” 그러면서도 보냅니다.
그러면 작은엄마도 따라서 웃어 넘기곤 합니다.
매일 듣는 욕이라 괜찮은가 봅니다.
그래서 항상 흰쌀밥 누룽지가 여유있게 있습니다.
저녁에 갈 때 작은엄마가 가져가지만, 일부는 내 몫으로 남겨두고 갑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아침에 성은 맨 누룽지를 그렇게 잘 먹었습니다.
난 지금까지 누룽지를 그렇게도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은 빠드득 빠드득 소리를 내면서 한참 먹다가
“ 또, 없냐?”하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다른 봉창에 넣어두었던 누룽지를 꺼내주면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씩 웃고 받아서, 소리 내어 또 먹습니다.
이제 누룽지도 없으면....,
버들강아지에 물이 오를 때면, 둠벙가에 있는 버들가지를 벗겨 버들피리를 만들고,
보리가 나와서 대궁이 굵을 때면, 그 대궁으로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나한테도 하나 만들어 줍니다.
“불어 봐.”
난 아무리 불어도 소리가 안 나는데...
성은 너무 힘껏 부는지 눈물이 납니다.
“ 성, 힘들어? 그러면 불지 마. 눈물 나 잖여!‘ 하면
“아니, 갠찮여.”하면서 저리 가버립니다.
가면서는 괜히 말없이 풀을 찾아 뜯고 있는 누렁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저쪽으로 데리고 가 버립니다.
나는 성이, 피리소리가 안 나서 피리 부느라고 힘이 들어 눈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창렬아, 풀무치 잡아주까?”
“응”
나는 왕치는 잡을 수가 있습니다. 왕치는 멍청하게 느려서 잡기가 쉽지만, 때때기하고 풀무치는 너무 빨라서 성이 잡아주지 않으면 내 옆에 앉아있어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구경하면서 놀 수밖에 없습니다.
성은 풀 가지 끝에 종이를 동그랗게 오려서 나비를 호리는 법도,
장구잠자리 등에 호박꽃 노란 술을 칠해서 장구잠자리 수놈 잡는 방법도,
바늘 끝에 파리 잡아서 나뭇가지에 묶어서 개구리 잡는 법도...
송사리, 올챙이를 고무신으로 잡는 법도...
우렁 구멍을 찾는 것도....
언덕배기 쥐구멍에 쥐불 놓는 방법도....
전부 성이 알려 주었습니다.
한번은 재실 앞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때까치가 집을 지어 새끼를 쳤습니다.
성이 그 위에 올라가서 때까치새끼 한 마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이것을 본 엄마때까치가 어찌나 시끄럽게 이리저리 다니면서 울어 대는지...
성보고 다시 가져다 올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때까치가 새끼를 얼마나 예뻐하는지를 알았고, 때까치가 매우 사납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둠벙에 있는 물방개, 소금쟁이, 물장군, 물매암이, 똥강구... 그 이름들을 성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은 그렇게 자연과 친하게 노는 법을 내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2년...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군산으로 나왔고 성과 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할머니한테도 편지를 쓰면 성이 읽어 드렸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글씨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전상서”.. “할머니 일기도 불순하신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엄마가 옆에서 읽어 주시는 데로 삐뚤삐뚤한 글씨로 썼습니다.
난 그래서 편지쓰기를 옛날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구마 철이 되면 수확한 고구마를 지게에 지고, 이리 역까지 와서 수화물로 우리 집에 보내고, 추수를 하면 할머니가 성 등에 지게를 지어서 이리 역에서 군산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성은 그 속에 나뭇잎도 넣어서 보내고, 어떤 때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창열아 잘 있냐? 보구 십다.”
침 바른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정말 못 쓰는 글씨로....
나의 정서는 이렇게 못 배우고, 글씨도 되게 못 쓰는, 성이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다 내가 중2때 할머니가 돌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성과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그때에도 그 곳이 엄청나게 먼 곳 인줄 알았고, 아마도 성도 군산이 어디쯤에 있는지 몰랐을 겁니다.
할머니는 재취로 익산으로 가셨습니다. 할머니에게는 한 점 혈육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나를 더욱 애틋하게 사랑해 주셨나 봅니다.
난 그렇게 할머니 산소에도 가 보질 못했고,...
할머니 산소를 끝까지 보살핀 이가 성이었습니다.
해마다 어머니가 명절과 기일이면 산소에 가셨지만,
살기가 팍팍해지고, 어느 때 부턴가 그것마저 소원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 곳은 멀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고향의 봄을 생각하면, 성과 놀던 메깥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커서 그 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도 보고 싶고 성도 보고 싶어 버스를 타고 갔었습니다.
그러나 버스종점에서 그 곳이 내게는 너무 멀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씀을 드려 함께 찾아갔지만..
그렇게 찾아간 할머니가 사시던 집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살았고...
양해를 얻어 마당의 우물 속을 보았더니, 완전한 어항이었습니다.
새 주인에게 내가 어렸을 때 때 이곳에 고기를 넣었다고 했더니 ,
웃으면서 지금 이 물은 먹질 못하고 자기들 낚시터랍니다.
재실도 없어지고, 성 네 집은 옆 마을로 이사를 갔었습니다.
성은 나를 보자, 붙잡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습니다.
대낮에 술 냄새를 풍기면서....
법대에 다닌다고 했더니,
머리 좋으니 공부 많이 해서 판사가 되어, 너나 나 같은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 많이 봐 주라고 하면서....
작은엄마가 이야기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논, 밭을 조금 떼어 주시고, 생전에 남들에게 빌려주셨던 장리쌀을 받아서 쓰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아무도 주질 않는다고...
그렇지만 지금은 먹고 살기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성은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또 술이 취하면 주사가 심해서, 동네에서 멍석말이도 당했다고....
내가 “성, 그러지 말어. 왜, 그래?”했더니,
이제부터는 술 덜먹고, 내말 잘 듣겠다고 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내게 차가 생긴 후로는 자주 그 곳에 다녔습니다.
성이 나보고 술 한잔 하자고 하면, 난 운전을 해야 한다고 거절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은 술 먹고 자기하고 자면서 이야기나 많이 하자고 하였었는데, 난 성의 청을 한 번도 들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석에, 할머니 산소에 성묘할 겸 성 네 집에 들렀습니다.
성은 없고 작은엄마만 계셨습니다.
“작은엄마. 성 어디 갔어?”
“ 창렬아, 오늘이 니 성 제사란다.” 난 너무 놀랐습니다.
“아니. 왜?”
“니가 작년 추석 전에 다녀가면서 준 용돈으로....”
작은 엄마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내가 그전 추석 전날에 들렀을 때, 작은엄마는 안 계시고 성이 혼자 있었습니다.
작은엄마는 어디 가셨냐니깐, 이리 동생네 집에 가셨다 장보고 오신다고 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형수는 어디 갔느냐니깐, 형수는 애들 데리고 벌써 집을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작은엄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다 그냥 돌아왔습니다.
상황이 짐작은 되었지만, 아는 체 할 수가 없어...
어느 정도의 넉넉한 용돈을 드리며 “성, 이것 고기사서 차례 모시고, 술이랑 과일 준비해서 차례 상에 올려드려! 나머지는 성 용돈 쓰고.”했더니
“그려, 알았어. 고맙다.”하면서 즐겁게 받았습니다.
작은엄마가 다 저녁에 들어와 보니, 방에 누워서 잠을 자더랍니다.
항상 있었던 일인지라 예사로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상해서 흔들어 보았더니.
어찌된 일인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날 낮부터 “군산 동생이 와서 용돈 주고 갔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사주더라고...
그리고는 집에 와서는 세상을 버렸습니다.
작은엄마는 글도 모르니, 내게 연락도 못하고...
그래서 추석 전날이, 성의 제삿날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성묘하러 들렀더니, 그 집은 빈집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 어릴 때, 내게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귀함을 가르쳐 주었던..
무식하지만, 너무 선하고 순하던 그러나 진정으로 유식하던...
나의 큰 선생이었던 성이었는데....
성! 그곳에서 학교도 많이 다녀서 의사도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형수 집 나가지 않게 오래 살아!
이제 다시오면 함께 술도 한잔하게! 자면서....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나면 팔봉에 다녀옵니다.
지금은 어느 고등학교 앞으로, 큰 길이 나서 내차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곳엔 할머니도, 성도 없습니다.
모두 화장을 하여 정리하였으니까요.
이곳이 나의 아기진달래 피던 고향이었습니다.
나이가 훨씬 더 먹은 어른인 줄 알았고,
그래서 힘도 그렇게 세서. 소도 잘 먹이고, 지게도 잘 지고, 참새, 때까치도 잘 잡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라서 보니, 나보다 겨우 8살 더 먹었었습니다.
이름처럼 생긴 것도 대충 생겼고, 시커먼 촌놈이고... 힘만 세었습니다.
성은 재실 집에 살면서, 우리 할머니네 머슴이었습니다.
아니, 성만 머슴이 아니고 그 집 식구들 모두가.....
그래서 우리 집 한 식구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근이 성 아버지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용근이 성의 엄마를 작은엄마라고 불렀고, 성은 나를 창렬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은 학교도 안 가고,
나 하고만 놀았습니다. 나도 성하고만 놀았습니다.
성하고 나는 비밀이 없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시내 중학교를 다니는데, 성은 교복도 안 입고.
잠벵이만 입고, 지게만 지고 다녔습니다.
성네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성보고 목수 질을 배우라고 한다는데....성은 그것이 싫답니다.
의사가 되고 싶답니다.
의사가 되어서 내 다리를 고쳐주겠답니다.
성은 나하고만 놉니다. 나 없으면 함께 놀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하고 나는 꼭 같았고 우리는 친했습니다.
이른 봄 못자리 때부터 모심기, 김매기, 물대기, 피살이하기... 나락베기
성은 못하는 것이 없는 최고였고, 성 옆에는 언제나 지게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지게가 없는 때는,
아침에 할머니 집으로 나를 부르러 올 때뿐 이었습니다.
나를 부르고 나서는, 헛간에 있는 지게를 지면 성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게위에는 내가 앉고, 한손에는 누렁이의 고삐가 쥐여졌고...
그것이 성의 아침풍경이었습니다.
“ 성, 오늘은 어디가?”
“ 응, 저기 총소리 나는 메깥 알지? 거기 가서 누렁이 먹이자.”
성은 모르는 산이 없었고, 새 집도 잘 찾았습니다.
나도 그 산을 잘 압니다.
둠벙도 있고 할머니네 고추밭이 있고, 메뚜기들도 많아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곳입니다..
할머니한테 왜 그 산에는 총소리가 나냐고 물었더니,
그 너머에 군인 훈련소가 있어서 그렇다고 알려주어서 그 산을 더 잘 압니다.
성은 산에 가면 소를 메고, 나는 봉창에서 누룽지를 꺼냅니다.
그것이 성의 아침간식입니다.
아닙니다. 혹시 오늘 아침은 걸렀는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네 집에는 늘 누룽지가 있었습니다.
농촌은 밭일, 논일이 그칠 때가 없었고, 성 네 식구들하고 함께 먹을려고 할머니는 늘 밥을 많이 합니다.
밥을 해서 샛거리, 점심. 또 샛거리, 저녁까지 성 네 식구들하고 함께 먹습니다.
그래도 성 네 아버지는 한 번도 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간난이한테 먹을 것을 따로 보내면서 욕을 합니다.
“ 지랄했다고, 와서 함께 쳐 먹으면 좋으련만...” 그러면서도 보냅니다.
그러면 작은엄마도 따라서 웃어 넘기곤 합니다.
매일 듣는 욕이라 괜찮은가 봅니다.
그래서 항상 흰쌀밥 누룽지가 여유있게 있습니다.
저녁에 갈 때 작은엄마가 가져가지만, 일부는 내 몫으로 남겨두고 갑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아침에 성은 맨 누룽지를 그렇게 잘 먹었습니다.
난 지금까지 누룽지를 그렇게도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은 빠드득 빠드득 소리를 내면서 한참 먹다가
“ 또, 없냐?”하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다른 봉창에 넣어두었던 누룽지를 꺼내주면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씩 웃고 받아서, 소리 내어 또 먹습니다.
이제 누룽지도 없으면....,
버들강아지에 물이 오를 때면, 둠벙가에 있는 버들가지를 벗겨 버들피리를 만들고,
보리가 나와서 대궁이 굵을 때면, 그 대궁으로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나한테도 하나 만들어 줍니다.
“불어 봐.”
난 아무리 불어도 소리가 안 나는데...
성은 너무 힘껏 부는지 눈물이 납니다.
“ 성, 힘들어? 그러면 불지 마. 눈물 나 잖여!‘ 하면
“아니, 갠찮여.”하면서 저리 가버립니다.
가면서는 괜히 말없이 풀을 찾아 뜯고 있는 누렁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저쪽으로 데리고 가 버립니다.
나는 성이, 피리소리가 안 나서 피리 부느라고 힘이 들어 눈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창렬아, 풀무치 잡아주까?”
“응”
나는 왕치는 잡을 수가 있습니다. 왕치는 멍청하게 느려서 잡기가 쉽지만, 때때기하고 풀무치는 너무 빨라서 성이 잡아주지 않으면 내 옆에 앉아있어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구경하면서 놀 수밖에 없습니다.
성은 풀 가지 끝에 종이를 동그랗게 오려서 나비를 호리는 법도,
장구잠자리 등에 호박꽃 노란 술을 칠해서 장구잠자리 수놈 잡는 방법도,
바늘 끝에 파리 잡아서 나뭇가지에 묶어서 개구리 잡는 법도...
송사리, 올챙이를 고무신으로 잡는 법도...
우렁 구멍을 찾는 것도....
언덕배기 쥐구멍에 쥐불 놓는 방법도....
전부 성이 알려 주었습니다.
한번은 재실 앞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때까치가 집을 지어 새끼를 쳤습니다.
성이 그 위에 올라가서 때까치새끼 한 마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이것을 본 엄마때까치가 어찌나 시끄럽게 이리저리 다니면서 울어 대는지...
성보고 다시 가져다 올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때까치가 새끼를 얼마나 예뻐하는지를 알았고, 때까치가 매우 사납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둠벙에 있는 물방개, 소금쟁이, 물장군, 물매암이, 똥강구... 그 이름들을 성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은 그렇게 자연과 친하게 노는 법을 내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2년...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군산으로 나왔고 성과 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할머니한테도 편지를 쓰면 성이 읽어 드렸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글씨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전상서”.. “할머니 일기도 불순하신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엄마가 옆에서 읽어 주시는 데로 삐뚤삐뚤한 글씨로 썼습니다.
난 그래서 편지쓰기를 옛날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구마 철이 되면 수확한 고구마를 지게에 지고, 이리 역까지 와서 수화물로 우리 집에 보내고, 추수를 하면 할머니가 성 등에 지게를 지어서 이리 역에서 군산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성은 그 속에 나뭇잎도 넣어서 보내고, 어떤 때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창열아 잘 있냐? 보구 십다.”
침 바른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정말 못 쓰는 글씨로....
나의 정서는 이렇게 못 배우고, 글씨도 되게 못 쓰는, 성이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다 내가 중2때 할머니가 돌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성과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그때에도 그 곳이 엄청나게 먼 곳 인줄 알았고, 아마도 성도 군산이 어디쯤에 있는지 몰랐을 겁니다.
할머니는 재취로 익산으로 가셨습니다. 할머니에게는 한 점 혈육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나를 더욱 애틋하게 사랑해 주셨나 봅니다.
난 그렇게 할머니 산소에도 가 보질 못했고,...
할머니 산소를 끝까지 보살핀 이가 성이었습니다.
해마다 어머니가 명절과 기일이면 산소에 가셨지만,
살기가 팍팍해지고, 어느 때 부턴가 그것마저 소원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 곳은 멀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고향의 봄을 생각하면, 성과 놀던 메깥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커서 그 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도 보고 싶고 성도 보고 싶어 버스를 타고 갔었습니다.
그러나 버스종점에서 그 곳이 내게는 너무 멀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씀을 드려 함께 찾아갔지만..
그렇게 찾아간 할머니가 사시던 집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살았고...
양해를 얻어 마당의 우물 속을 보았더니, 완전한 어항이었습니다.
새 주인에게 내가 어렸을 때 때 이곳에 고기를 넣었다고 했더니 ,
웃으면서 지금 이 물은 먹질 못하고 자기들 낚시터랍니다.
재실도 없어지고, 성 네 집은 옆 마을로 이사를 갔었습니다.
성은 나를 보자, 붙잡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습니다.
대낮에 술 냄새를 풍기면서....
법대에 다닌다고 했더니,
머리 좋으니 공부 많이 해서 판사가 되어, 너나 나 같은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 많이 봐 주라고 하면서....
작은엄마가 이야기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논, 밭을 조금 떼어 주시고, 생전에 남들에게 빌려주셨던 장리쌀을 받아서 쓰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아무도 주질 않는다고...
그렇지만 지금은 먹고 살기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성은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또 술이 취하면 주사가 심해서, 동네에서 멍석말이도 당했다고....
내가 “성, 그러지 말어. 왜, 그래?”했더니,
이제부터는 술 덜먹고, 내말 잘 듣겠다고 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내게 차가 생긴 후로는 자주 그 곳에 다녔습니다.
성이 나보고 술 한잔 하자고 하면, 난 운전을 해야 한다고 거절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은 술 먹고 자기하고 자면서 이야기나 많이 하자고 하였었는데, 난 성의 청을 한 번도 들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석에, 할머니 산소에 성묘할 겸 성 네 집에 들렀습니다.
성은 없고 작은엄마만 계셨습니다.
“작은엄마. 성 어디 갔어?”
“ 창렬아, 오늘이 니 성 제사란다.” 난 너무 놀랐습니다.
“아니. 왜?”
“니가 작년 추석 전에 다녀가면서 준 용돈으로....”
작은 엄마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내가 그전 추석 전날에 들렀을 때, 작은엄마는 안 계시고 성이 혼자 있었습니다.
작은엄마는 어디 가셨냐니깐, 이리 동생네 집에 가셨다 장보고 오신다고 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형수는 어디 갔느냐니깐, 형수는 애들 데리고 벌써 집을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작은엄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다 그냥 돌아왔습니다.
상황이 짐작은 되었지만, 아는 체 할 수가 없어...
어느 정도의 넉넉한 용돈을 드리며 “성, 이것 고기사서 차례 모시고, 술이랑 과일 준비해서 차례 상에 올려드려! 나머지는 성 용돈 쓰고.”했더니
“그려, 알았어. 고맙다.”하면서 즐겁게 받았습니다.
작은엄마가 다 저녁에 들어와 보니, 방에 누워서 잠을 자더랍니다.
항상 있었던 일인지라 예사로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상해서 흔들어 보았더니.
어찌된 일인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날 낮부터 “군산 동생이 와서 용돈 주고 갔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사주더라고...
그리고는 집에 와서는 세상을 버렸습니다.
작은엄마는 글도 모르니, 내게 연락도 못하고...
그래서 추석 전날이, 성의 제삿날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성묘하러 들렀더니, 그 집은 빈집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 어릴 때, 내게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귀함을 가르쳐 주었던..
무식하지만, 너무 선하고 순하던 그러나 진정으로 유식하던...
나의 큰 선생이었던 성이었는데....
성! 그곳에서 학교도 많이 다녀서 의사도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형수 집 나가지 않게 오래 살아!
이제 다시오면 함께 술도 한잔하게! 자면서....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나면 팔봉에 다녀옵니다.
지금은 어느 고등학교 앞으로, 큰 길이 나서 내차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곳엔 할머니도, 성도 없습니다.
모두 화장을 하여 정리하였으니까요.
이곳이 나의 아기진달래 피던 고향이었습니다.
첫댓글 새우는집 머슴아님
가끔들어와 님이쓰신 글 읽으며 감동을 받았는데 이 글 읽어보니 고향이 제 친정집 동네라 무척 반갑네요
고등학교는 원광고등학교이고 초등학교는 팔봉초등학교이지요?
우리동네에서 님과 같은 수필가가 탄생하여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저는 익산근처 시골 동네에 사는 70대후반 할머니랍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군산에 살지요.
어린시절 상두부락에 살았어요.
맞아요.
원광고, 팔봉국민학교
저 어릴때도 팔봉초등학교는 있었고
원광고는 아마 이곳으로 온것이 20여년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