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도우심]
행 26:16~23
우리는 세상의 도움과 성령의 도움을 착각합니다. 그래서 도움 그 자체에 집착하고 고마워하고 미워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종과 증인으로 그들에게 갈 때 도우십니다.
성령님이 도우시려면 우리가 들어야 할 명령이 있습니다(16절). 돈 주고 사탕 주는 것이 도움이 아니라, 내가 가시채로 주님을 뒷발질한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 그렇게 박해하던 당사자인 주님의 명령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자신을 밝히신 주님은 땅에 엎드러져 있는 바울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엎어진 자리는 세상의 권세를 휘두르다 주님을 만나 자신의 실체가 드러난 자리였습니다. 자신이 자랑하던 권세가 주님을 대적하던 무기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자리였습니다. 주님 앞에 일어설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하나도 없는데 바울이 왜 다시 일어나야 하느냐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종과 증인으로 삼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종과 증인을 삼기 위해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종의 원어는 ‘휘페레테스’입니다. ‘아래서’라는 ‘휘페’와 ‘뱃사람’이라는 ‘레테스’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즉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노예이기에 사람들에게 드러날 일이 없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사람들, 지시받은 일을 철저히 밑에서 섬겨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증인은 원어는 ‘마르티스’, 즉 순교자입니다. 세상이 너무 듣기 싫어하지만, 반드시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세상이 던지는 비난과 조롱을 잘 당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바울이 떠나고 싶은 그들에게 일어나 종과 증인으로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는 말씀은 바울을 예수님 자신처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환경은 그대로인데 감겼던 눈이 떠진다는 것은 이 환경이 해석된다는 뜻입니다. (18절). 눈을 감고 있었을 때는 그저 다 지옥이었는데 내 눈을 뜨게 하시니까 이게 뼛속까지 죄인인 나를 위해 허락하신 고난이었구나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니, 미움과 증오로 사단의 권세 아래 살다가 성령의 권한으로 용서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나와 내 가정의 종과 증인으로 다시 그들에게 나아갈 때 다시 들어간 그곳에 죄 사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주십니다. 힘든 가족은 내가 벗어나야 할 올무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콕 집어 선택하셔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으키시며 종과 증인의 사명을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할 때 도우십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주목합니다. 바울 한 사람이 변해 피바람이 불 뻔했던 다메섹은 복음이 선포되는 은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내가 속한 가정이 피바람이 부는 다메섹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되는 가정으로 변하게 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도 변하길 바라며 간증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았다’(19절) 고 했습니다. 이전에 하늘에서 큰 빛이 있었고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4-5)을 듣고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박해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내 가정이 복음의 도시로 변화되는 출발은 하늘에서 내게 보이신 것을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거스르지 않으려면 거스를 힘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데 아그립바는 거스를 권력과 힘이 있었기 때문에 도우심을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육이 무너져야 비로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게 틀릴 수도 있구나, 내가 했던 일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구나’ 인정할 때 피바람이 부는 가정이 복음의 도시로 변합니다. 또한, ‘하늘에서 보이신 것’(19절)은 주변 모두가 말한다는 뜻입니다. 온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말하는데 나만 모른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도 틀렸다고 하고, 모든 지체가 하늘의 큰 소리로 틀렸다고 하는데 나만 혼자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소리를 거스르지 않을 때, 피비린내 모든 도시가 복음의 도시로 변합니다. 그리고 생각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에 합당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인정만 해서는 안 되고 손과 발이 따라가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그리고 인정했다면 그 일을 행했다는 것도 공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셋째, 나를 죽이는 상황에서 증언할 때 도우십니다.
바울이 거스르지 않는 순종으로 응답한 결과는 유대인들이 잡아 죽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변명하고 변호하고자 권한을 쓰지 않았습니다. 늘 일관되게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 말한 것, 즉 예수의 고난과 돌아가심과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자신의 간증과 함께 전했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첫 출발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운 성령의 도우심으로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면서 여전히 사명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또한 그 대상의 높고 낮음 없이 자기 제자들, 동료들, 동족 이방인, 총독, 심지어 왕에게까지 점점 지경이 넓어졌습니다. 자신의 간증 때문에 동네 유대인들에게 계속 무시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만,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그 자리에서 늘 증언했습니다. 지금 나의 간증은 같은 고난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가장 큰 도움이고, 더 나아가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여기서 도우심은 헬라어 ‘에피쿠리아’인데 동맹자, 조력자라는 의미입니다. 성경 전체에 오직 여기만 쓰인 단어입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할 때, 보혜사 성령님, 즉 조력자, 동맹자가 내 옆에서 나를 도와주십니다. 바로 이게 효과적인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거기서 당장은 풀려났겠지만, 인간의 도움은 너무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이 사명의 자리를 지키며, 고난을 겪을 때 주님은 바울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으므로 주님이 친히 동맹군처럼 달려오셔서 바울을 도우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종과 증인으로 그들에게 갈 때 도우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맞고 틀리고 따지지 마시고 믿음 있는 사람이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죽이는 상황에서 증언할 때 주님은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가득한 한 주 보내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