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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헌의 대한민국 장군 評傳 〈上〉 군인은 戰功과 軍政으로 평가…戰功 백선엽, 軍政 이병형·류병현 기억해야
글 : 김국헌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
金國憲
⊙ 66세. 육군사관학교(28기)·서울대 철학과 졸업. 오하이오주립대 석사,
런던대 킹스칼리지 군사학 박사.
⊙ 국방부차관 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21세기 국방개혁 연구위원,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참석,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역임.
⊙ 저서: 《국가전략의 이해》 《한 군인 40년의 지향》
《헌팅턴의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역서).
군인은 전공(戰功)으로 평가된다. 전쟁이 멈춘 동안에는 군정가(軍政家)가 각광을 받는다. 우리가 전공으로 기억할 장군은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활약한 분들이다. ‘춘천회전’의 김종오, ‘한강선 방어’의 김홍일, ‘다부동 전투’의 백선엽, ‘포항 방어’의 김석원, ‘북진의 선봉’ 김백일, ‘용문산 전투’의 장도영, ‘수도고지 전투’의 송요찬, ‘최고의 연대장’ 한신, 베트남전의 채명신, ‘두솔산 전투’의 공정식 등이 그들이다.
군정(軍政)에서는 율곡계획의 이병형·이재전, 한미연합사 창설의 류병현과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존 베시 장군을 잊을 수가 없다. 군인의 문화를 세운 분들도 기억해야만 한다. 난초와 같은 이미지의 ‘참군인’ 이종찬, ‘육사의 중건자’ 이한림, ‘생도문화의 건설자’ 장창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도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다.
‘포용의 제독’ 김형진, ‘신사의 전형’ 강영훈, ‘민족사관의 사도’ 박창암, 공군의 건설자 장지량, 대범한 공군참모총장 조근해, 전사를 처음으로 편찬해 낸 이형석, ‘충절의 화신’ 이대용도 군인의 기상을 드높였다. 반부패특별위원을 지낸 ‘청렴전도사’ 서생현, ‘면도날’이란 별명의 이춘구는 국민들에게 군인을 넘어서는 인상을 남겼다. 5·16군사정변에 육사생도 혁명 지지행진을 반대한 동창회장 출신의 ‘철인(哲人)’ 강재륜은 군인의 기준을 세웠다.
이 ‘장군 평전’은 상찬(賞讚)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오점에 대해서는 다시는 이런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도 목적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성모, 채병덕 기용의 뼈아픈 잘못을 그려낸 것도 이러한 뜻에서다. 물론 초기의 실패는 있었지만, 6·25전쟁 중 백선엽 등 청년장군들을 통어(統御)하고 미국과 외교상 일전을 벌여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낸 족적 또한 곳곳에서 소개하고 있다.
건군 67주년을 맞아 필자는 생존 인물의 인터뷰를 추가해 격동의 70년을 이어온 대한민국 별들의 내밀한 스토리를 기록하고자 한다. 일본은 국가적 영웅을 문인들이 만들어낸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가 《대망》,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가 《언덕 위의 구름》,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가 《군벌흥망사》에서 근대 일본을 만들어낸 지사(志士), 장군을 그려 패전 후 저상(沮喪)되어 있던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모쪼록 재기발랄한 문인이 군에 관한 이 ‘기초 자료’를 바탕으로 국민소설을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金鍾五, 6·25전쟁 초기 지연전에 성공
1950년 6월 25일 북괴군이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을 때 38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김종오(金鍾五·1921~1966)의 6사단만이 전선의 적 진출을 지연시켰고, 서울의 우익으로 진공하려던 북한군 2군단의 남하를 지체시켰다. 격노한 김일성(金日成)은 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을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키고 동북항일연군의 맹우 최현(崔賢)을 군단장으로 임명하였다. 6사단은 춘천·홍천 방면에 집중하는 적의 공격을 3일 동안 저지함으로써 김홍일(金弘壹)의 시흥전투사령부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춘천전투는 오늘날 ‘춘천회전’으로까지 불린다.
춘천-홍천 전투에서 적을 지연시킨 김종오의 6사단은 음성군 동락리-무극리 전투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던 인민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 사살 1000명, 곡사포 14문을 노획하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노획한 장비는 유엔에 소련군의 개입을 알리는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 6·25전쟁 초기에 지연전을 성공시킨 김종오의 전공은 실로 컸다.
북진 기간 동안 6사단은 전군의 선두에서 초산에 진출하여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치기도 했다. 국군은 바야흐로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전쟁은 이후 2년여를 더 끌었고, 6·25전쟁은 사실상 ‘미니 세계대전’이 되었다.
김종오는 1952년 10월, 9사단장으로서 휴전회담 중 최대의 진지전인 백마고지 전투, 열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에서 중공군 제38군의 대공세를 막아냈다. 9사단은 5만5000발 이상의 적 포탄 세례를 받았고, 미 9군단 포병은 48만50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어 9사단을 지원하였다. 중공군 38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9사단도 총 사상자가 3500명에 달했다.
1952년 10월 26일 미8군사령부를 방문해 밴 플리트 사령관(오른쪽)을 만나는 김종오 9사단장. |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 장병들이 보여준 투지는 국군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서,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극찬을 받았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김종오 사단장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 및 부대 교체가 결정적인 요소였다.
특히 김종오 사단장이 장병들에게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살수에서 장사시킨 을지문덕 장군과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연개소문 장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사단 전 장병은 나와 같이 여기에 뼈를 묻자”며 쏟아낸 피를 토하는 훈시는 사단의 전 장병을 격앙시켰다.
휴전 후 김종오는 군단장, 육사교장, 교육총본부 총장, 1군사령관을 거쳐, 5·16 후 장도영(張都暎)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조국을 위해 몸과 혼을 다 바친 김종오는 1966년 45세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반드시 조국 통일을 이루시라”는 비원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김종오는 충북 청원 출신으로 일본의 중앙대학을 다니다 소집된 학병 출신이었다. 중일전쟁 이래 전쟁에 휩싸인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상당히 유족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영어도 잘해 일본 육사 출신의 노병에 비해 고문관과의 적응도 빨랐다. 춘천회전,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종오 장군은 국군사에 찬연히 빛나는 별이다.
金弘壹, 이승만 대통령에 五星將軍 휘호 받은 지연전의 大家
김홍일(金弘壹·1898~1980)은 중국군 출신이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일본군 학병 출신들이 국군준비대 등을 만들었으나, 이응준(李應俊), 김석원(金錫源), 유승렬(劉升烈) 등 일본군 대좌 출신들은 자중하고 있었다. 일본군 출신은 자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들은 마땅히 광복군이 국군 건설의 중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기대를 걸었던 사람 중에서도 김홍일은 명분과 실력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홍일은 1932년 세계를 진동시킨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에 쓰일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였고, 동경에서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폭탄도 준비하였다.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소장 계급까지 올랐고 사단급 부대를 지휘했던 유일한 장군이었다.
6·25전쟁 초기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시흥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김홍일은 김종오의 6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괴군 2군단을 저지하고 있을 때, 후퇴하는 백선엽(白善燁)의 1사단, 유재흥(劉載興)의 7사단, 이형근(李亨根)의 2사단 장병들을 대대 단위로 재편, 한강 방어에 투입하였다. 공황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를 수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밥을 먹여야 했다. 김홍일은 부녀자들을 동원, 주먹밥을 만들어 허기를 달래도록 했다. 그러고는 문짝을 떼어내어 ‘미군 참전’이라는 플래카드를 큼지막하게 내걸었다. 배가 채워지고, ‘미군 참전’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은 장병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되었다.
장제스(아래)와 김홍일 장군. 오산학교를 졸업한 김 장군은 1918년 상하이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여 이곳에서 1년 동안 근대식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했다. |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4일까지 북괴군을 저지하였다. 김일성이 서울 함락 후 수일을 지체한 이유는 첫째, 수도가 함락되면 전쟁은 끝난다는 ‘상식’, 둘째 박헌영(朴憲永)의 남로당원 20만명이 궐기하면 후방에서의 전쟁은 끝난다는 장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 이유다. 이나마 서울을 지탱한 것은, 김종오의 6사단이 서울 외곽으로 진출하려는 북괴군 2군단의 기동에 차질을 빚게 한 것, 김홍일의 시흥지구전투사가 한강방어선을 일주일 동안 지탱해 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6월 28일 영등포에 비래(飛來)한 맥아더는 한국군이 궤산(潰散)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 지상군의 투입만이 이 사태를 막아낼 수 있다고 트루먼에게 건의하였다. 이때 맥아더는 노량진 언덕에서 분전하고 있는 한국군 병사에게 “귀관은 언제까지 이 언덕을 사수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명령이 있을 때까지”라는 단호한 답변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청년들이 있는 한국은 지켜줄 가치가 있다’고 결심한 일화다. 이는 한국군 장병의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강선 방어의 주장(主將) 김홍일의 불굴의 정신을 보여준다.
한강선 방어 이후 김홍일은 1군단장으로서 미군이 본격 투입되기 이전,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지연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951년 김홍일 장군을 주중대사로 보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오성장군(五星將軍)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국군에 원수(元帥) 계급은 없는데, 김홍일의 공은 원수로 임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평소 “나라를 사랑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완수하며, 죽어도 명예를 지키라”고 말하던 오성장군 김홍일은 우리 군의 영원한 정신적 사표(師表)다.
다부동의 300 용사 白善燁
스파르타의 300 용사가 마케도니아 해안의 테르모필레(Thermopylae)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역사는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다. 1950년 북괴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多富洞) 전투는 한국의 테르모필레였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8월 15일 다부동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30세의 청년장군이었던 사단장 백선엽(白善燁·1920~현재)은 부하들에게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쏴라”는 비장의 투혼으로 사단의 선두에 섰다. 8월 16일 왜관 북서쪽 낙동강변에 B-29 99대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다부동 전투는 8월 30일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백선엽은 북괴군 8월 공세의 예봉을 꺾었다. 백선엽의 1사단은 김종오의 6사단과 함께 국군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북진에서는 평양 입성의 선두에 서게 된다. 평양의 지리에 익숙한 백선엽은 1950년 10월 대동강을 선두로 도하하여 평양에 입성한다.
1920년생 백선엽은 평양사범 출신이었다. 백선엽은 이후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간다. 정일권(丁一權)은 4기, 백선엽은 9기였다. 박정희는 봉천군관학교의 후신인 신경군관학교 2기였다. 이들은 모두 각 기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이를 빌미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준식 등은 백선엽 등을 친일 군인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일이 있다. 제정 러시아의 기병 중장이었던 마네르헤임(Mannerheim)은 그의 군사 경력을 활용하여 러시아 통치에서 핀란드가 독립하는 전쟁을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마네르헤임은 1939년 스탈린이 침공해 오자 지형과 스키를 이용한 절묘한 기동전으로 소련군을 몰아낸다. 스탈린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되고 이것이 히틀러가 소련군을 얕보고 소련을 침공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마네르헤임은 후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우리는 중국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사 경력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대동강 다리에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평양 탈환작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
이승만 대통령 때 대장은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세 사람뿐이었다. 그중에서 전공은 백선엽이 으뜸이었다. 매슈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등 미군 장성도 백선엽을 가장 믿었다. 백선엽은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잘 받아들이고 성과를 거두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데는 이승만의 공이 절대적이지만, 미 군부와의 친분을 활용하여 미 군부에 처음 이 구상을 제기한 것은 백선엽이었다.
백선엽은 이종찬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된 이래 정일권과 번갈아가며 참모총장과 1군사령관을 역임, 대장을 7년 반이나 달았다. 그만큼 백선엽은 군인으로서 전공도 대단하였지만 영예도 누렸다.
그중에서 백선엽이 숙군 과정에서 절체절명의 박정희를 살리는 데 도움을 준 일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이다.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 숙정 시 백선엽은 정보국장으로서 실무 책임자였다. 후일의 특무대도 당시에는 백선엽의 휘하에 있었다. 박정희는 백선엽에게 구명(救命)을 탄원하였고, 백선엽은 박정희의 선처를 상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백선엽은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게 하였는데, 6·25가 발발하자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
백선엽은 지금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자유로 구사하여 미국의 참모대학, 일본의 방위대학교에서 강의한다. 한국에 부임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이 부임 초기에 가장 먼저 챙기는 일은 백선엽 장군을 찾아 인사하는 것이고, 그것은 관례가 됐다. 그들이 전설처럼 받드는 맥아더, 리지웨이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백선엽은 그들에게는 이미 신화다.
金錫源, ‘포항 방어’로 전공 세우고 성남高도 설립
김석원(金錫源·1893~1978) 장군은 구한말 무관학교에 입교했다가 한일합병 후 일본 육사에 편입해 27기로 임관, 일본군 대좌까지 복무하였다. 김석원은 해방 후 일본군 출신은 근신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군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육사 8기 특별반으로 임관, 1사단장으로 1949년 1월 개성지구를 담당하였다. 1949년 5월부터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국지도발이 시작되었다. 1사단은 송악산 전투에서 용전하였는데, 육탄 10용사가 나온 것이 이때다.
당시 남북교역에 군 수뇌부가 관련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과 1사단장 김석원은 정면충돌하였다. 일본 육사 26, 27기의 대좌 출신이 많았음에도 49기의 병기소좌 채병덕을 육군의 수장(首將)으로 기용한 이승만 대통령과 국방부장관 신성모(申性模)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변명과 용서의 여지가 없다.
6·25가 터지자 김석원은 수도사단장으로 진천, 안강, 기계 지연전을 이끌었다. 북괴군의 8월 공세 때는 3사단장으로 영덕, 포항을 방어하였다. 학도의용군이 활약한 대표적 전투다. 학생들이 3사단을 택한 것은 김석원이 한국군에서 가장 용장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용전과 희생은 영화 〈군번 없는 용사〉에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카이젤 수염에 일본도, 돌격전술에 익숙한 김석원의 모습은 미군 고문관들과 융화되기 어려웠다. 김석원은 이후 전선에는 크게 기용되지 못하고 1956년에 예편, 육영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김석원은 1938년 성남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였다. 구한말에 황실과 선교사 등이 설립한 배재, 양정, 휘문, 보성, 중앙, 중동에 이은 7대 사립의 하나였다. 북한에는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숭실학교 등이 있었다. 성남학교는 중일전쟁에 참전한 김석원 중좌에게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귀관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학교를 설립하고 싶다”고 말했고, 미나미 총독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일제하 유일하게 사립학교로 인가를 해주었다.
1950년 7월 12일 진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리어카에 실려 청주로 후송된 부상병들을 위로하는 김석원 장군. |
성남학교의 교훈은 특이하게도 ‘의(義)에 살고 의에 죽자’였다. 봄철의 청명(淸明)에는 효창동의 백범(白凡) 묘소와 백정기(白貞基) 등 5열사 묘소를 전교생과 함께 참배하였다. 자유당 시절 백범의 묘소를 참배하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옹졸한 처사를 지시할 리가 만무한데도 자유당의 졸개들은 이런 패륜을 저질렀다. 김석원은 이에 개의치 않고 매년 백범 묘소를 참배하였다. 경찰도 김석원 장군의 위엄이 워낙 대단하였기 때문에 차마 가로막지를 못했다.
김석원은 윤봉길 의사의 손자도 성남학교에서 보살펴주었다. 김석원이 4월 28일 충무공 탄생일에 아산 현충원에서 헌화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김석원은 군의 대선배이기도 하였지만, 김석원의 차남(김영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전사)이 박정희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김석원은 친구의 부친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김석원 장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예우는 선배에 대한 예절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수범(垂範)이었다.
그러나 김석원의 애국충절과 육영의 공로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이준식 등이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 군인’이라는 한마디로 폄하(貶下)되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비판도 이와 똑같다. 이들이 무어라 하건 5만 성남인에게 김석원 장군은 진정한 애국자요, 교육자였다. 군정의 핵심은 인사다. 군의 문민통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바른 인사가 요결(要訣)이다.
金白一, 맥아더도 극찬한 전술가이자 흥남철수 주도한 휴머니스트
김백일(金白一·1917~1951) 장군은 흥남철수 시 북한 동포 10만명을 구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막상 전장(戰將)으로의 김백일은 민간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육군보병학교의 ‘백일사격장’ 유래를 아는 장교도 많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은 1950년 7월 김홍일의 뒤를 이어 1군단장에 기용되었다. 서울 수복 후 북진이 시작되자 1군단은 10월 1일 38선을 처음으로 돌파하였다. 국군의 날의 기원이다.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한 수도사단은 10월 31일에는 문천, 11월 25일에는 청진, 11월 30일에는 부령으로 진출하여 최종목표인 회령-웅기를 향해 진격하였다. 함남 북청 출신의 이병형(李秉衡) 장군의 명저 《대대장》은 이때 고향으로 귀환하는 장병의 감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10월 7일 원산 상륙을 위해 작전을 개시한 미 제10군단은 원산항 기뢰 제거를 위한 소해 작업 때문에 뒤늦게 10월 26일에야 원산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원산은 이미 10월 10일 국군에 의하여 탈환되어 미 10군단은 유병(遊兵)이 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 후 10군단을 8군의 지휘하에 넣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또 한 번의 원산 상륙전으로 극적 반전을 이루려던 맥아더의 결정적 판단 착오의 결과였다.
더 큰 불행이 닥쳐왔다. 국군 3사단이 장진호를 향해 진격 중 10월 25일 수동 부근에서 예기치 못한 적의 저항에 부딪혔다. 중공군 8군이었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김백일은 유엔군이 후퇴하자 흥남을 거쳐 철수하던 중 피란민 10만명을 안고 나왔다. 이것이 영화 〈국제시장〉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김백일 장군은 특히 전술 능력이 뛰어났다. 창군(創軍)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는 대체로 일본군 출신보다 만주군 출신 중에서 전술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을 상대로 옥쇄작전을 벌이던 일본군에 비해 만주군은 공산당을 토벌하면서 대유격전 실전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백일이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유학을 가려 하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귀관은 포트 베닝(Fort benning)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격찬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말뚝에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라는 문구를 써 넣고 있다(왼쪽). 흥남철수가 끝나자 제10공병대대와 해군 수중 폭파팀은 고속 수송선 비고르호의 지원을 받아 해안으로 이동해 모든 자재와 장비를 파괴했다. |
김백일은 백선엽과 함께 특히 공비 토벌에 공이 컸다. 전선 후방에서 준동하던 빨갱이들이 섬멸적 타격을 받은 것은 이들의 분전에 의해서다. 빨갱이들이 김백일에게 극악한 행패를 부리는 것은 공비 토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박혔기 때문이다. 백선엽의 만주군 경력을 트집 잡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백일의 본명은 찬규(燦奎)이다. 김백일은 정일권, 백선엽과 함께 봉천군관학교 출신이다. 그들은 북한이 소련군 점령하에 들어가자 바로 월남하여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김백일은 백선엽에서 백(白), 정일권에서 일(一)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전우애는 이만큼 각별하였다. 만주군에서 공산당을 상대해 왔던 그들은 투철한 반공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김백일은 1951년 3월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였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가 신임 리지웨이 8군사령관의 단호한 지휘로 지평리 전투 등 반공(反攻)을 시작하던 시기로 그 손실은 컸다. 만주군 출신의 김백일 장군은 뛰어난 전장이었다.
張都暎, 용문산 전투의 용장이며 5·16혁명의 성공에 결정적 기여
장도영(張都暎·1923~2012)은 용문산 전투의 용장이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70만명을 전개하고 춘계 공세를 감행하였다. 3군단이 현리에서 와해되었다.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밴 플리트 탄약량’이 맞붙은 화력의 대결이었다. 전투의 마지막 결판은 보병에 의해 결정된다. 장도영은 홍천강과 용문산 일대에 전면방어진지를 구축, 중공군 63군 예하 2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도주하는 중공군을 쫓아 절반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용문산 전투의 승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창황망조(愴惶罔措)하던 유엔군의 숨통을 트고 국군은 3군단 현리 전투의 수치를 씻은 일대 전기가 되었다.
1951년 춘계 공세에서 중공군의 피해는 투입 병력의 3분의 1, 9만명에 이르렀다. 엄청난 피해는 중공군의 공격 일변도 전략에 제동을 걸었다. 반격을 개시한 유엔군은 5월 말 고랑포-연천-화천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리지웨이가 벼랑 끝 전국을 안정시켰다면, 밴 플리트는 공세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다.
공산 측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보려 6월 23일 소련 유엔 대표 말리크를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서방 측은 이 제의를 공산 측이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야욕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6월 30일 수락하였다. 그러나 공산 측은 휴전협상 동안에 진지를 강화하면서 담담타타(談談打打) 회담전술로 나와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참호전과 같이 막대한 출혈을 내며 2년 이상을 끌었다.
장도영은 평북 출생으로 일본 동양대 재학 중 학병에 나갔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2공화국에서 최영희(崔榮喜), 최경록(崔慶祿)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다. 창군 초기 김석원, 김홍일 등의 원로를 제외하고 6·25전쟁에서 활약한 김종오, 한신(韓信), 장도영, 최영희 등은 모두 학병 출신의 30대 청년장군들이었다. 이들이 6·25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주로 이북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같이 월남하여 군에 들어온 순서대로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을 같이하였고 전투에서 피를 나눴다.
5·16 군사정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도영(왼쪽)과 부위원장 박정희(오른쪽). |
장도영은 6·25가 터질 때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파면된 박정희를 문관으로 채용하고 김종필(金鍾泌) 등 8기생들을 데리고 정보국을 이끌었던 것이 장도영이었다. 채병덕이 이들이 올린 정보보고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이 국군이 남침을 당한 치명적 실수였다. 5·16이 나기까지, 그가 취한 애매한 행보는 이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16이 혁명으로 성공하는 결정적 계기는 장도영 참모총장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수락하였기 때문이었다. 국가위기 시에 군의 지휘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이 점에서 군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킨 12·12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같은 평안도 출신, 가톨릭으로서 장도영 참모총장을 믿었던 장면(張勉) 총리가 격노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5·16이 난 50여 일 후인 7월 2일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장도영을 기습 제거하였다. 선참후보(先斬後報)였다. 장도영은 어차피 혁명이란 이런 것이라 여기며 체념했다. 그는 미국으로 보내졌고, 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후 미시간대학 교수로 있다가 2012년 8월 타계하였다.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에 대해 여한이 없다”고 유언을 남겼다. 용문산 전투의 용장 장도영이 5·16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없다.
宋堯讚, ‘타이거 송’으로 알려진 수도고지 전투의 용장
송요찬(宋堯讚·1918~1980) 장군은 4·19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데모대가 경무대로 육박하는 가운데 급박해진 경찰이 실탄 지급을 요구해 왔다. 당시 군은 M-1 소총을 주로 사용하였고, 경찰은 칼빈 소총을 사용하였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에 M-1 소총 탄약을 지급도록 하였다. 물론 경찰은 이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다. 4·19 의거가 혁명으로 성공하는 데는 이처럼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적시적이고 엄정한 계엄군 운용이 크게 기여하였다. 4월 혁명이 학생혁명이라 하나 정확히는 국민혁명이다. 이때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국민의 군대로서 국군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일찍이 군에서 ‘타이거 송’으로 알려진 송요찬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다. 그중 백미는 1952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전선 부대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송요찬의 보고는 딱 세 마디, 즉 “Enemy is there. We are here. We are ready to attack”이었다. 상세한 브리핑을 기대했던 아이젠하워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아이젠하워는 “내가 받은 브리핑 가운데 가장 훌륭한 브리핑”이라고 격찬하였다. 과연 그 송요찬에 그 아이젠하워다.
1918년생인 송요찬은 당시 34세였다. 송요찬은 집안이 가난하여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다. 그는 평양사범학교 출신인 백선엽이나 일본 중앙대 출신인 김종오와는 배경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송요찬의 이 재치와 기개는 어느 명문 출신 장군에 못지않았다. 송요찬은 6·25 발발 당시 헌병사령관으로 한국은행의 자금을 진해로 반출하는 공을 세웠다. 북진 중에는 1군단장 김백일 예하의 수도사단장으로 원산, 함흥, 청진을 회복하였고, 1952년 수도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 2개 사단을 격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2월 방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경기도 광주의 수도사단을 방문해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당선자, 이승만 대통령, 송요찬 수도사단장.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
일본군 하사관 출신은 이밖에도 이병형, 임부택(林富澤) 등이 있는데 이들은 6·25전쟁 중 가장 전투를 잘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병형의 명저 《대대장》은 그 기록이다. ‘병은 소련군, 하사관은 일본군, 장교는 독일군, 장군은 미군으로 구성된 군대가 최고의 군대이다’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일본군에서 하사관은 부대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끌어가는 중추였다.
1959년 2월 육군참모총장이 된 송요찬은 1960년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미국 군원(軍援)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군원 물자를 빼돌리고 장병을 후생사업으로 부려먹던 자유당 군대에 만연하던 부패도 막지 못했다. 박정희가 4·19 이전에 궐기하려고 계획을 준비하였던 것은 이러한 군대를 그냥 보고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5·16에 가담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하나 이 모든 것에 앞서, 송요찬이 6·25전쟁 중 수도사단장으로 올린 전공은 길이 남을 것이다.
韓信, 헬기 타고 가다 식량보급 점검… 軍 부패척결에 앞장
한신(韓信·1922~1996)은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대를 나와 일본군에 징집, 남방에서 전투한 학도병 출신이다. 박정희와 같이 육사 2기생으로 임관한 한신은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 1950년 7월 김석원 사단장 예하에서 안강·기계 방어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1951년 5월 대관령 전투에서는 중공군과의 고지 점령에서 간발의 차로 고지를 선점하여 3군단의 치욕의 현리전투 이후 밀리던 동부전선을 안정시켰다. 1953년 6월 화천 전투에서는 정일권 군단장의 명령을 받고 5사단 부사단장으로 화천댐을 사수해 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현지에 나와 무전기로 독전하던 전투였다. 6·25전쟁 중 한신은 가장 전투를 잘한 연대장으로 꼽힌다.
5·16 이후 감사원장으로 잠시 혁명정부에 참여한 한신은 곧 군에 복귀, 군인의 길을 걷는다. 주월사령부가 귀국하여 제3야전군사가 되기까지 제1야전군이 전방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때 제1야전군사령관이었다. 그의 최종 직책은 합참의장이었다. 군사 기능을 군령(軍令)과 군정으로 구분한 1989년 8·18 개편 이전의 합참의장은 지금과 달라 일종의 한직(閑職)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신을 참모총장에 기용하지 않고 이세호(李世鎬) 전 주월사령관(육사 2기)을 시키는 것을 보고 모두들 군의 앞날을 걱정하였는데, 그 우려는 10·26으로 나타났다.
한신의 지휘철학은 장병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운다는 ‘장병 제1주의’였다. 수도사단에서 이등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한 한신은 사병의 고충을 잘 알았다. 당시 병사들은 배를 채우는 것이 소원인 상황이었다. 장병들로서는 취사병이 선호보직이었다. 장교들의 봉급은 가족의 끼니를 겨우 차릴 수 있을 정도여서 장교들의 부패는 문자 그대로 ‘생계형 부패’였다. 그러다 보니 전군이 부패고리로 연결되었다.
5·16 기념 리셉션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이 한신 소장, 박태준 당시 의장비서실장(오른쪽)과 담소하고 있다. |
한신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단호한 숙정(肅正)에 나섰다. 한신은 헬기를 타고 가다 아무 부대라도 불시에 내려앉아 1종 보급(식량)을 검열하여 부족량이 발견되면 바로 지휘관을 체포하여 압송하는 초강경 방법을 썼다. 1960년대 군의 부패는 이런 방법으로 잡혀간 것이다. 베트남 참전이 시작되자 장병들의 생활도 피기 시작하였다.
정군 과정에서 한신은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는 신조로 길러진 육사 출신에 기대를 걸고 이들을 ‘사단장의 분신’으로 활용, 사단장의 지휘력을 물샐 틈 없이 침투시켰다. 휴전 후 흐트러진 교육훈련을 바로잡는 데 이들 원칙대로 배운 정규육사 출신들은 교범이 되었다.
한신은 육사 출신 가운데 장재(將材)를 특별히 선발하여 부관으로 두고 철저히 훈련시켰는데, 빈틈없는 조성태(趙成台) 전 국방장관도 그중 하나다. 이들 부관 출신들이 후일 《참군인 한신 장군》을 출간한다. 조성태 부관이 “춘천호에 트럭이 빠졌는데 지금 구조하고 있습니다”고 보고하자, 한신은 “춘천호의 깊이가 얼마냐”고 물었다. 제대로 답을 못 한 부관은 얼굴이 붉어졌다. ‘면도날’ 한신은 “군인은 하나라도 철저히, 면밀히,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蔡命新, 사병묘역에 묻힌 유격전의 명수
‘나 채명신. 전우를 사랑해 여기에 묻히다.’ 채명신(蔡命新·1926~2013) 장군은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건군 이래 최초로 사병묘역에 잠들었다. 1926년생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교사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김일성이 같이 일하자고 회유하였지만, 모태신앙을 가진 채명신은 공산당과 같이 하늘을 이고 설 수 없었다. 채명신은 이를 뿌리치고 1947년 월남하여 경비대사관학교에 들어가 5기생으로 임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 등에 참가하였다.
1951년 백골병단을 이끌고 대유격작전을 하다가 노동당 제2비서이며 남로당 유격대 총책이었던 길원팔(吉元八)을 생포하였는데 귀순할 것을 설득하다가 거부하자 권총을 주어 자결하도록 하였다. 길원팔이 순순히 자결하자 “적이지만 훌륭한 군인이다”고 평하며, 그의 아이를 거두어 자신의 동생으로 입적시켰다. 그는 순탄하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성장하여 대학교수가 되었다.
채명신은 휴전 후 9사단에서 참모장 박정희와 같이 근무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5사단장으로서 5·16에 동참하였다.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는 양수리에서 1군사령부 참모의 저지를 받았으나, ‘사단 전 장병과 함께 혁명에 동참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서울로 진주하였다. 장도영 참모총장과 이한림(李翰林) 야전군사령관도 혁명의 당위성에는 공감하였으나, 장면 정권에 대한 의리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 때문에 주저하였을 따름이다. 4·19혁명 당시 군부도 궐기하려고 하였으나, 장면 정권의 등장으로 잠시 미루어졌다가 폭발한 것이 5·16혁명이다.
1966년 7월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일시 귀국해 서울 동작동의 베트남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 |
그러나 채명신은 10월 유신에는 반대하였다. 10월 유신은 5·16군사혁명의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채명신이 중장으로 예편하고 오랫동안 대사로 외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은 박정희가 채명신을 경원(敬遠)하였기 때문이다. 한신, 이병형과 채명신이 군에 있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10월 유신 후 1970년대에 일어났고, 결국 10·26에 이른 것은 군이나 국가에 다 같이 비극이었다.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자 박정희는 작전참모부장 채명신을 맹호부대장으로 발탁하였다. 대유격전에서 여러모로 검증된 채명신을 택한 것이다. 과연 최고의 선택이었다. 채명신은 베트남전 두코 전투, 짜빈둥 전투에서 중대전술기지 전술로 미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6·25전쟁에서 미군에게 배운 한국군에게 월남전에서는 미군이 배우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채명신이 파월 초기부터 한국군 독자의 작전권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채명신의 성공의 핵심은 대게릴라전에서 주민과 군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라는 것을 꿰뚫고 베트남 주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치심리전을 구사한 것이다.
채명신은 대유격전에서 적을 둘러싸고 있는 주민의 마음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휘 통솔에서는 장병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영면(永眠)의 터로 같이 싸운 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사병묘역을 택한 것은 과연 채명신 장군답다.
도솔산 전투의 영웅 孔正植
마산이 고향인 공정식(孔正植·1925 ~현재)은 손원일이 창설한 해방병단에 들어가 1946년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임관, 신현준(申鉉俊) 초대 해병대사령관, 김성은(金聖恩) 전 국방장관 등과 함께 해병대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공정식은 ‘해군과 해병대는 같은 뿌리’이며 ‘한미 해병대는 형제’라는 연대의식이 투철하였다. 8월 공세, 진동리 전투에서 마산을 구한 해병대는 1951년 6월의 도솔산 지구 전투에서 무적해병의 기개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도솔산은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지였다. 도솔산 지구 전투는 최초 미 해병1사단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피해가 속출하여 전투 손실이 1111명에 달하자 공격을 한국 해병대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6월 3일 작전명령을 받은 제1연대장 김대식(金大植) 대령은 “미 해병대가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기필코 해냄으로써 한국 해병의 기개를 보여주자”는 결사의 각오로 연대를 이끌었다. 공정식은 공격 목표가 많은 좌 일선 공격을 담당하여 야간공격으로 하나씩 목표를 탈취해 나가 6월 23일 최후의 고지를 확보,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승만 대통령은 “백절불굴의 인내로 쟁취된 그 승리의 결정체는 실로 구국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하며 무적해병(無敵海兵)의 휘호를 내렸다.
공정식 당시 제1전투단 부단장이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왼쪽), 김종식 제1대대장(오른쪽)과 함께한 사진. |
군인으로서 공정식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은 ‘사투리 통신’이다. 당시 해병대는 SCR-300 무전기를 쓰고 있었는데, 혼전상황에서 어쩌다가 무전기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려 통신내용을 적이 환히 듣게 되었다. 공정식은 태평양전쟁 때 미 해병대가 인디언 나바호 언어(고립된 언어로 해독이 어렵다 함)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일본군은 영어는 해독하지만 인디언 언어까지 해독하지는 못했다.
1942년 나바호 암호병 29명이 미 해병사단에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540명의 나바호 인디언이 미 해병대에 근무했는데 이 가운데 400명이 암호병이었다. 태평양전사를 즐겨 읽은 공정식은 이 사투리 통신에 착안하였다. 해병 제1연대에는 제주도 출신이 많으니 통신병들끼리 자기 고장 사투리로 교신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사투리는 육지 출신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적이 들어봤자 뜻을 모를 터이니 안심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해병대에 제주도 출신이 많았던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제주도에서 해병 3, 4기생 3000여 명을 모집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오현고, 한림고 출신 학생이어서 두뇌가 우수했고 충성심과 협동심이 왕성했다. 지원자도 많아 해병대는 17대 1의 경쟁률로 뽑았다. 4·3사건은 제주도민의 독특한 유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한 원인이었다.
베트남 참전부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준비에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묻자 김용배(金龍培) 육군참모총장은 “6개월은 걸리겠다”고 답하였다.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은 해병대는 “1개 대대 전투단은 24시간, 1개 연대 전투단은 48시간이면 출동할 수 있다”며 “국가전략기동대로서 해병대는 언제고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이에 만족한 박정희는 청룡부대를 전군의 선두로서 베트남에 파병하였다. 청룡부대의 짜빈둥 전투는 맹호부대의 두코 전투와 더불어 파월 한국군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전투였다. 공정식 장군은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이었다.
《대대장》 저술한 李秉衡, 율곡계획 입안한 국군 최고의 전략가
군인은 전공으로 말한다. 그런데 전공은 운도 따라야 한다. 백선엽 대장은 전공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6·25전쟁의 영웅이다. 30대의 청년장군으로서 두 번의 참모총장, 두 번의 야전군사령관으로 7년 반 동안 대장을 달았던 행운은 그분에게 6·25전쟁이라는 무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김종오, 김백일, 송요찬 등도 무대가 주어진 가운데 최선을 다했다.
이병형(李秉衡·1928~2003)은 송요찬 수도사단장 휘하의 대대장으로서 북진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 과정을 모아 대대전투의 실상과 교훈을 정리한 《대대장》을 저술하였다. 육군의 전략 단위는 사단이다. 사단의 전술 단위는 대대이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나폴레옹,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군제의 기본이다.
대대장은 화력과 병력의 배치, 운용을 내 손과 발처럼 파악하고 운용하여야 한다. 사단장은 이들 결국 대대장들의 전술지식과 통솔력에 의존한다. 《대대장》은 북진 시 각종 부딪힌 상황에 대한 조치와 병사들의 통솔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실로 대대 전술교범의 살아 있는 지침서로서, 기계화 전술의 교본인 《롬멜전사록》에 비견될 수 있는 명저다.
이병형은 탁월한 전술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국군 최고의 전략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합참본부장으로서 1974년 율곡계획을 입안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형을 이런 막중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로 보았던 것이다. 이병형은 전력 증강의 우선순위는 북한군을 압도할 수 있는 공군력 건설에 두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육군 장군의 대다수가 북괴군 전차를 막기 위해 대전차 병기와 대전차 방벽에 골몰하던 시기였다.
초전에 우세한 공군력으로 적 공군기를 제압하면 이후 공군력으로 적 전차를 압도할 수 있다는 호쾌한 전략구상을 펴는 이병형 장군을 이세호, 노재현(盧載鉉) 등의 육군 수뇌부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병형은 일본 육군항공대에 복무한 덕분에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뜬 것이었다.
박정희는 율곡계획의 집행을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의 회의체인 합동참모회의에 맡기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는 합참본부장에 맡겼다. 율곡계획의 감사를 위해 특명검열단을 만들고 단장을 동기생인 김희덕(金熙德)에게 맡겼다. 그러나 박정희가 서거한 후 이 체제는 많이 흐트러졌다. 오늘날 방산비리가 검찰 특수부에 의해 파헤쳐지는 것은 박정희가 구상했던 방법이 아니다. 율곡계획의 기획(plan), 집행(do), 통제(see)를 대통령이 직접 제시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병형은 중장으로 2군사령관에 그쳤다. 박정희가 율곡계획 입안에 이병형을 발탁하는 판단으로 이병형을 군의 수장으로 발탁하였으면 윤필용(尹必鏞)과 하나회 등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이라는 파탄에 들어선 박정희는 이미 통수권자로서 제정신을 잃었다.
한신과 이병형에 의해 군이 이어졌다면 10·26, 12·12, 5·18 등의 비극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후배들은 애통해하고 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강청에 의해 이병형은 전쟁기념관 회장으로 국군의 역사를 정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병형이 5군단장일 때 노태우는 예하 연대장이었다. 삼각지 전쟁기념관은 이병형의 역사의식과 구상의 웅대함을 보여준다.
李在田, 휴전선 철책사업 주도, 완성
이재전(李在田·1927~2004)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6·25 때는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그는 1군사령부 참모장이었다. 김신조(金新朝)의 충격으로 전선에 철조망을 설치했다. 1953년 휴전 이래 말로만 ‘철통 같은’ 전방 방어태세가 실질적으로 강화된 것이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군사분계선처럼 엉성한 유자(有刺) 철조망에 불과했고, 장벽이 아니었다. 철조망은 오키나와의 미 해병사단 주둔지 둘레에 쳐져 있던 것을 가져왔는데,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업이었다. 이재전 참모장은 이를 철저히 챙겨나갔다. 155마일 전선을 구석구석 꿰뚫고 있는 최고의 전술가였기 때문이다.
이재전은 7사단장을 거쳐 한미1군단(ROK US I corp(group)) 부군단장이 되었다. 한미1군단은 한미연합사가 생기기 이전, 한국군과 미군의 협조를 위한 작전사령부의 원형이었다. 한미1군단은 1군단, 5군단, 6군단과 함께 미2사단을 지휘하는 집단군 모습이었다.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이 1978년 연합사 창설의 주역이 된다.
이재전은 합참 전략기획국장으로서 전력증강계획(율곡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율곡계획은 한신 합참의장-이병형 본부장-이재전 전략기획국장-임동원(林東源) 전략기획과장 체계로 추진되었다. 그 중심은 이병형 장군이었다. 임동원은 ‘율곡’이라는 코드 네임과 방위세 2% 부과 등의 아이디어를 냈다. 이를 이끌고 나간 것은 미군 철수의 비상상황에서 자주국방 노력을 가속화한 박정희였다. 그는 중화학공업 건설과 방위사업 육성을 연결시키는 국가경영전략을 발전시켰다.
10·26 당시 이재전은 차지철(車智澈) 밑의 경호실 차장이었다. 군단장, 합참본부장을 마친 이재전을 이런 자리에 앉힌 박정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합동수사본부는 “이재전이 10·26의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까지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정승화(鄭昇和) 참모총장은 이재전을 예편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박정희의 지혜롭지 못한 인사로 군은 귀한 재목을 잃었다. 한신-이병형-이재전의 군맥은 6·25전쟁 이후 군의 최고 자산이었다. 이를 끝까지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은 박정희의 최대의 실책이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이재전은 이병형의 뒤를 이어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았다. 전쟁기념관장 외에도 이재전은 ‘한자 배우기’ 전파에 앞장섰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과오 중에서 특히 유감스러운 것이 국문전용정책이다. 사범학교 출신인 이재전은 젊은 세대가 한자를 해석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여 한자 배우기를 전개하였다. 이재전은 대전현충원에 이병형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한미연합사 창설의 1등 공신, 柳炳賢
류병현(柳炳賢·1924~현재)은 충북 청원 출신으로 동경이과대학에 유학 중 징집된 학도병이었다. 육사 7기로 임관하였는데, 이때 중대장이 박정희였다. 휴전 후 류병현은 기갑병과의 창설과 육성에 공이 많았다. 베트남전에서는 채명신의 후임으로 맹호사단장이 되었다.
한미동맹은 1954년에 성립되었지만, 한미연합사는 1978년에야 창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연합사 창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것의 가능여부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역시절 미 고문관과 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작전통제권을 연합으로 행사하는 초유의 실험에 미군이 과연 응할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류병현은 한미연합사가 NATO와 같은 기능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작전권을 한미연합으로 행사한다? 당시 미군들은 거의 생각지도 않던 방법이었다.
이 어려운 과제를 추진하여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는 대역사를 이루어낸 것은 류병현의 공이 크다. 한미연합사 체제는 한미 양국군을 이인삼각(二人三脚) 관계로 묶어 놓은 것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한미동맹을 확고하게 증거한다.
한미연합사의 창설에는 주한미군사령관 존 베시(John Vessey) 장군의 이해와 협조가 컸다. 베시 장군은 존 싱글러브(John. Singlaub) 주한미군 참모장(소장)과 함께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계획을 반대, 보류시키도록 한 주인공이었다.
1978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CFC) 창설식에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미 대통령의 축사를 전달했다. 맨 왼쪽은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에서 둘째가 류병현 장군. |
연합사를 창설해 나가는 초기단계에 미군도 그 기능과 위상을 정확하게 잡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이 연합사부사령관의 집무실을 유엔군사령부 주임상사 방으로 잡았던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가운데서 연합사가 한미연합군 군령최고사령부라는 위상을 확립한 것은 류병현의 치밀한 노력이 컸다.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공용어가 된 것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이 이러한 대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시시콜콜하게 알기 어렵다. 현장에서 일을 해나가는 실무자들에게는 일일이 물을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고민이 많다.
류병현이 채명신의 뒤를 이어 맹호사단장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류병현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주월한국군은 채명신 장군의 일관된 논리와 노력으로 최초부터 독자적 작전권을 행사하였다. 맹호사단장으로서 류병현은 미군과 협조관계를 잘 유지하였다. 이 역시 한미연합사를 이루어나가는 데 초석이 되었다.
1968년의 1·21사태로부터 경계·방위태세의 전반적 쇄신, 1974년의 율곡계획의 시작, 다시 1978년의 한미연합사의 창설로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라는 미증유의 참사를 당해서도 군이 흔들리지 않고 대북억제태세를 유지하였던 것은 한미연합사가 확고하게 기능하고 있었고, 특히 중일전쟁, 6·25전쟁,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위기관리에 익숙한 류병현이 지키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한미연합사 창설로서 대미를 맺었다. 류병현 장군은 그 산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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