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수원] '3일의 비밀'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신명 30, 15 - 20
† 복음 : 루카 9, 22 - 25
★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에 이르는 길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신다. 생명의 길은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길을 제시하신다. 그 길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메고 따르라고도, ‘짐’을 지고
따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까?
‘멍에’나 ‘짐’을 지고 가는 이라면 농부나 장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죄인 중의 죄인, 곧 사형수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금 새겨보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죄인으로 취급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날이 죄인으로 취급되며 사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형틀을 메고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 살아가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를
풀어서 말한다면, 세상의 논리 안에서 인정받는 삶이 아니라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스스로 버림받고 소외당하며
손가락질받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꺼이 죄인으로 취급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의인으로 인정받고자 하십니까?
-매일 미사 -
◈ [청주] 저의 뜻을 버리고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2-25
저의 뜻을 버리고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3년 전 한 자매와 그 자녀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가스폭발로 큰 상처를 갖게
되었습니다. 몇 일전 재수술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저는 손을 씻기 위해
세면장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유리창이 깨져 멀리 날아가 버리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져 있는 아내의 참혹한
얼굴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고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아내의 상처가 너무 심해 아들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아내는 말했습니다. “감사미사를 봉헌하라!”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인가?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감사하라니.....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사고가 있은 다음 날 아침, 어린 손자손녀가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와 품에 안기는 순간 “감사미사 봉헌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손자 손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또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3일만 고생하면 될 것을!
이렇게 살아서 고생을 하게 해 미안하다.”고.
참된 믿음은 어려울 때 알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믿음의
사람이 가야하는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고통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앞으로 치료해야 할 일이
‘산 너머 산’이지만 이내 맑은 미소를 간직하고 주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주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면 매순간이
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앞세우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나는 따를 뿐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30,15)“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30,19)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겨 생명을
선택하고 “제때에 열매를 내며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감당하기 힘들지만 기꺼이 짊어지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
(성 요한 비안네)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피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영원한 생명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고 하지요. 원래는 성 발렌티노
(Valentinus, 밸런타인은 영어발음)의 축일로, 성인께서
순교하시기 전에 젊은 연인들을 연결해주셨다고 해서
2월 14일을 연인들의 날로 ‘밸런타인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연인의 날이라기보다는
상술만이 난무하는 날처럼 보이네요. 즉, 사랑한다면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끔 사람들을 유도하면서, 사랑보다 초콜릿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가 기억납니다. 그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음식 속에 반지를
숨겨서 깜짝 놀랄만한 연출을 했지요. 물론 여자는 이
이벤트에 감동을 하고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 모습을
보고서 “정말로 저렇게 하면 감동하겠다.”라고 한 청년에게
말했더니만, 그 청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소중한 결혼반지가 입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뭐가
좋겠어요? 반지 함에 넣어 정성껏 주는 반지를 여자들은 더
좋아해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보이기 위한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초콜릿도 보이기 위한 것이고, 또한
각종 청혼 이벤트 역시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이 전부인 듯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뒤에
모든 사람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대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려 죽지 않으려고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으며 배고픔
없는 풍요로운 삶을 찾아 왔더니만 오히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하느님의 관점, 물질적인
관점보다는 사랑의 관점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고, 도저히 따를 수
없다며 등을 돌리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원하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그토록 노력해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오히려 행복과 더 멀어졌고,
그래서 더 많은 풍요와 더 높은 지위만을 추구했지만 더
힘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우리에게
내미십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주님께서 제시하신 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그처럼 짧으니, 그것을 가시로 보지 말고 꽃인 양
바라보아라. 거기에는 맛과 향기와 형태가 있다(시몬 페레스).
교구청 직원과 함께 재의 수요일 미사가 있었습니다.
재의 예식 중.
여행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여행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여행을 통해서 많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힘은 발견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을 보십시오. 왜 사진을 찍으셨습니까?
그 순간이 너무나 멋져서, 내가 발견한 그 멋진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발견할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 저는 여행을 잘 가지 않습니다. 바쁜 것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니 매일 매일의 삶 역시 하나의 여행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새벽 묵상 글에 올릴 사진을 위해 저는 항상 사진기를 들고
다닙니다. 그러다보니 새롭고 특별한 발견을 종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발견의 삶이 바로 매일을 여행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요?
매일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랬고 그래서 여행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내 마음을 통해 평범한 삶 안에서 주님을 찾는
특별한 날을 만들 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찾는
특별한 날, 바로 지금이며 내가 가장 큰 힘을 얻는 날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3일의 비밀"
2013년 다해 2월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복음 : 루카 9,22-25
< "3일의 비밀" >
인터넷에 보다보니 이런 근심거리를 읽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러 지방에 가게 됐는데 일이 끝나고
주인사모가 사례를 못해 미안하다며 다른 분에게 무당집
복비를 건네주며 나를 꼭 데려가서 보게 해주라 했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식사하러 가나 했더니
무당집이더군요.
기분 좋게 하루 휴무를 풀로 도와주고는 기분 완전히 잡치고
왔습니다. 집안 식구 모두가 성당엘 다니고 난 여유가 안돼서
계속 못 갔는데 최근 들어 어떻게든 다녀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그 무당이 저를 보고 ‘신 내림을 받아서 무당
할래?’ 이러잖아요.
암튼 저의 앞날에 재수 없는 온갖 모든 얘기들을 다하더라고요.
심지어 ‘지금 네가 하는 일도 무시하고 절에 들어가던지 아님
무당 되던지 안 그러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너는 병신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데 이거 원 사람 맘이라는 게 정말
미쳐버릴 것 같네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내년 초에
뒤통수 제대로 때리고 끝장이 난다하고 안 그래도 요즘
권태기라 서로 조심하고 있는데, 그 사람까지도 지금 불신이
생기게 되고, 이럴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누가 속
시원히 대답 좀 해주세요.”
우리 주위에는 성당에 다니면서 집안에 우환이 들끓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성당에 다니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 마음 속에 성당 다니면 세상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다는 ‘기복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 세례를 받은 어떤 신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성당에 다니면 다 잘 된다고 가르치지 않고,
이제부터 가시밭길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물론 신앙을 가짐으로써 얻는 은총과 영광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의 십자가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거든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곧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고통입니다. 그 이후에 부활의 영광이
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어떤 종교건 십자가의 고통은 제쳐놓고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많은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믿지 마십시오.
애벌레가 자신을 죽여 누에로 만드는 과정 없이 나비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자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엄마가 된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엄마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통도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는 영광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아니라 ‘영광을 받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종교입니다.
언제나 기쁨으로 얼굴이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늘 그것을 궁금해 하던 한 단골손님이 어느 날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손님 :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 봐요?
할머니 : 천만에요. 사람에게 걱정 근심이 없을 수가 있나요.
내게도 역경과 고통이 있답니다.
손님 :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기쁘게 사실 수가 있어요?
할머니 :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랍니다.
손님 : ‘3일의 비밀’ 이라니요?
할머니 : ‘3일의 비밀’ 이란,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하느님께 기회를 드리고 3일을 기다리는 것인데, 이는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일지라도 광명의 열매로 끝난답니다.
이 할머니는 부활의 비밀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에게 필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뜻을 죽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믿음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장 버리기 힘들었던 것이 결혼을
안 하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 없이 사는 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여기고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갓등중창단에 들어갔습니다. 나의 노래가
음반이 되어 나온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습니다. 예전에 가수가
되는 꿈도 꾼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에도
노래가 계속 생각나서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온 것이 내가 해 보지 못한
것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중창단에서 탈퇴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라는 요구는 계속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나면 언제나 부활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노래를 하지 않아도 기도의 맛을 느끼게 해 주셨고, 유학을
가기 싫었지만 결국 마치고 나서는 당신을 더 알게 해
주셨습니다. 3일은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입니다. 부활의
방법이 곧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뜻을 위해 나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임을 잊지 맙시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바로 자기
2013년 다해 2월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복음 : 루카 9,22-25
◆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바로 자기
재력, 권력 있건 예뻐지려 수술했건 다음날 죽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박사학위 받고 교문 나와서 즉시 차사고로 죽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니 온 세상을 얻어도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소용없는 거지요.
자기를 잃지 말아야 주변의 많은 걸 가졌음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바로 자기이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들. 이뤄져 고맙고, 있어 감사하고, 욕심 없어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한 거지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도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2013년 다해 2월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2-25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또 다시 맞이한 재의 수요일입니다. 매순간 젊은이들과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평소 단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삼시새끼를 꼭 챙겨먹던 사람들이었는데, 아침미사
후 식당으로 가지 않고 각자 청소구역으로 가자니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단식하는 날만 되면 존경하는 한 원로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 살레시안들은 사순시기에 더 잘 먹어야
합니다. 더 잘 먹고 그 힘으로 더 자주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고,
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살레시안들에게 가장 큰 보속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나 깨나, 기쁜 마음으로 청소년들
사이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 첫날 교회는 우리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선의 극복’입니다.
위선(僞善)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겉으로만 착한 척함.’ 실제보다 잘 보이려는 것, 본래는
별것도 아닌 데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것이 위선이
아닐까요?
세상의 모습이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 꽤나 좋아 보이는
물건이었는데, 가격도 아주 괜찮길래 하나 사들고 와서 포장을
뜯어보았습니다. 포장은 요란했습니다. 광고도 그럴 듯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용물은 너무나 허접스러웠습니다. 참으로 실망이
컸었지요.
한번은 복어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끌어올려놓자마자 녀석은
겁주려고 그러는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크게 부풀리는 녀석의 모습에 무섭기는커녕
웃겼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대단해 보이는 연예인들, 위대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들, 엄청 높아 보이는 정치인들, 최선을 다해 자신을 꾸밉니다.
본래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먼 또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려고
하니 삶이 피곤하기만 합니다. 그들 역시 까놓고 보니 정말
우리와 똑같습니다. 너무나 나약한 한 인간 존재일 뿐입니다.
이번 사순절,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애써 포장한 나, 있는 힘을 다해 부풀린
내 모습, 때 빼고 광낸 내가 아니라 부족한 나, 방황하고 갈등하는
나약한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겉모양, 형식, 법, 결과물,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을 더 중요시하는
우리 인간에 비해 하느님께서는 마음, 내용, 과정, 관계를 더
중요시여기십니다.
나를 잔뜩 포장하기보다 위선과 가식의 때를 벗겨내는 사순절이길
바랍니다. 본래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 자연스런 나를 추구하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위선과 가식, 이중성과 자기중심적인 삶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를 온 몸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리의 결과인 희생의 삶, 십자가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대구] 십자가의 의미
어떤 가게나 상점에 들어갔을 때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아, 이 집 주인이 신자구나!’라고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차를 타도 차 앞에 붙은 십자고상을 보면 차
주인이 또는 택시 기사가 우리 교우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가정의 벽이나 탁자에,
아니면 차 안에 십자고상 하나씩은 다들 갖고 계실 것입니다.
불상 가지고 계신 분 없죠?(웃음)
그런데 십자고상을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놨는데 치우기 귀찮아서 모시고 있다면, 이건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고상의 용도가 “내가
성당 다닌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성당을 다닌다. 세례를
받았다.”라는 표시로만 사용되고 있다면,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이 좀 섭섭하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통 받고 숨을 거두신 그 모습이 단지 우리가 성당
다닌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 안에서 나 자신을 버리기보다 먼저 챙기기 쉽습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보다 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늘 잊지 않고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가 십자고상을 집이나 차에 모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괴로워하고 팽개치는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잘 지고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성당에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보면서 그리고 우리 가정에 모신 십자가를
보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부활하기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십자가의 신비를
사는 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주요한 신부(대구대교구 효성중학교 교목실장)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천국도,행복도,내맡김도-이해욱신부
2013년 다해 2월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2-25
<후속> 14. 천국도, 행복도, 내맡김도 "선택"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순간순간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선택해야지 타인의
의지에 의해 선택되어진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또한 자신의 의지,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였다 하더라도 어떤 것을 선택하였는가에 따라 "행,
불행"이 갈라집니다. "행복한 삶을 사느냐, 불행한 삶을
사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천국이냐, 연옥이냐, 지옥이냐도 사실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신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진리를 다
밝혀주셨기에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사느냐, 내 뜻대로 사느냐도 선택입니다.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되는 것입니다.
정말 진실 된 신앙인으로 사느냐, 못 사느냐도 선택입니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느냐, 못 하느냐도 선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을 선택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도 내 뜻을, 하느님보다도
내 자신을, 세상의 것들을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을 선택하고 따름이 곧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선뜻 그것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알아도 선뜻 "내맡김"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나중에 천천히 선택해도
된다는 생각을 "마귀"가 넣어줍니다. 마귀가 유혹합니다.
마귀가 선택을 방해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을, "내맡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 ~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사랑하여
끊임없이 바쳐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요약인 화살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당신(뜻)께 맡기오니 저를 이끌어
주소서."를 끊임없이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내는 화살기도, "주님, 제가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를 끊임없이 바쳐야 합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2월14일 목요일 복음묵상/소나무 신부님~
2013년 다해 2월14일 목요일 복음묵상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9,25)
죽은 손에 온 세상이 쥐어져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이 말씀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토를 달 이는 없을 것이다.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 가슴 아픈 일이다. 잘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좌절도 하고 때로는
분노도 하며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
그러나 너무 기죽지 말자.
우리가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이들도, 이러한 삶의 과정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삶을
만들어가야 하는 인간조건이라 한다면 누구나 부딪히는
아픔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나약함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하시고 계시다. 포기하지 말라 하신다. 잘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힘을 내야 한다. 넘어져 있다면 다시 일어서는
거다.
비록 몰라서 지은 죄보다는 알면서도 지은 죄가 많을 우리의
나약함이라 하더라도, 그 나약함을 선택하신 그분의 마음에
희망을 걸고 힘을 내보는 거다. 잘 살고자 하는 마음과 그에
대한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보는 거다.
오늘의 말씀은 욕망과 죄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다시 한 번 일어서라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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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당신의 과거를 받아들여라.
자신을 갖고 당신의 현재를 다루라.
그리고 두려움 없이 미래를 맞이하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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