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31-32장 언약의 땅으로 귀향) |
31장과 32장은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려고 언약자손 야곱으로 하여금 그의 출생지로 돌아오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 자손을 반드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야곱 역시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갔다가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 자손에게 약속의 가나안 땅은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31장 1절에서 16절까지는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시는 내용입니다.
1절과 2절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 모습을 또 보게 됩니다. 인간들은 한 마디로 욕심쟁이입니다. 끝없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조카 야곱으로 인해 가축들이 늘어나며 부자가 된 라반 그리고 그와 계약된 야곱 사이에는 새롭게 태어나는 새끼의 모습으로 야곱의 품삯을 정하기로 서로 약정하였는데, 어느 날 야곱에게 늘어난 양과 염소를 본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의 부가 자신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소유를 야곱이 빼앗았다고 하면서 시기와 질투를 합니다(1절). 그리고 외삼촌 라반마저 안색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2절).
*그렇다면 왜 이러한 불편한 삶의 과정과 관계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일까요? 야곱이 외삼촌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그간 정든 하란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함과 동시에 그를 고향으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데라의 죽음(11:32)을 통해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고, 바로의 핍박(출1:8~11)을 통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섭리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아니한 때 여호와께서는 야곱에게 외삼촌을 떠나 야곱의 조상의 땅 그의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명하십니다(창28:15 참조).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3절). 이곳으로 너의 길을 인도하신 것처럼 이제는 귀향길에도 돌봐주시겠다는, 20여년 전의 벧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잊지 않고 반드시 불러내십니다(요10:28).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의 성도들에게도 때가 차면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고후5:1/벧전1:17).
야곱은 즉시 아내들에게, 지금 가족들과의 불편한 동거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 아내들의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게 종으로 충성스럽게 섬겼는데 반해 라반은 야곱 자신을 속여서 열 번이나 품삯을 변경하였으며, 하지만 아버지 라반에게 당하는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야곱 자신을 보호하셨음을 토로합니다(4~7절), 여기서 ‘변경하였다’는 것은 라반이 야곱과의 계약을 점점 좋게 바꾼 것이 아니라 더 악한 마음으로 야곱으로 불리하게 변경한 것입니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지금까지 조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야곱 자신을 지켜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8,9절)
위의 본문에서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으로 된다는 것은, 거듭되는 라반의 술수 가운데서도 야곱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시고 돌보신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라반의 아들들이 말하는 것처럼 야곱이 라반의 가축들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반의 소유를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빼앗다’는 것은 원문에서 ‘나찰(גצל)’이라고 하는데, 본문에서는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그가) 회복시키셨다’, ‘(그가) 되찾게 하셨다’입니다.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 라반에게서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양 떼가 세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10절)에서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를 원문에서 직역을 하면, ‘그러자 내가 나의 눈들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꿈속에서 보았다’입니다. 즉 이 말씀은 양들의 배태기가 꿈속에서 야곱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계시로서, 야곱이 계획한 양들의 생식 문제까지도 언약 자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아래 있음을 확인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앙토록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11,12절)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행위를 다 보셨다는 뜻이고, 13절의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28:13 참조) 그리고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라반이 야곱을 속였으나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세운 언약대로 다 이루시고 또 언약대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려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지거나 가지지 못하는 소유 능력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언약 자손은 타인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할지라도 억울하여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언약 자손을 타인이 속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에게 세우신 언약은 아무런 차질이 없이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근본 물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제쳐 놓고 인간이 물주 노릇을 합니다. 내 이름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땅이나 집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재물이 내 이름으로 되어 있거나 다른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소유주가 아닌데 자기가 소유주로 생각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망각하는 가운데서 자기를 소유주로 알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알면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인간이 욕심을 부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은 자기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속인 라반은 재물을 빼앗기는 자가 되게 하시고, 라반에게 속은 야곱은 재물을 취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에게는 결국 속아도 좋게 하시고 속지 아니하여도 좋게 하십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믿어지는 언약 자손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행위가 곧 믿음의 행위입니다. 남을 속이는 행위는 상대를 속인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아내를 얻는데 속이고 재물을 모으는 데도 속였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야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을 받아 거부가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믿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복을 언약하여 이루어 주시므로 인간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진다는 것이 대단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기 전까지는 불신이 당연하므로 우선 신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을 믿도록 여러 모양으로 이끄십니다. 둘째 아들을 집에서 내어 보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셔서 그 믿음을 의로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정죄하여 죄인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과는 관계없이 언약하신 복을 이루어 주시므로 그것을 보고 야곱으로 하여금 믿게 하여 의인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의는 완전히 하나님이 언약 자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
하나님께서 라반의 것을 빼앗아 주시는 과정을 8절에서 12절까지 말씀하시고서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다”고 야곱은 아내들에게 알려 줍니다(13절). 여기서 ‘서원’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한 방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서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의 서원은 자기 자신의 의지적 소원일 뿐입니다.
야곱의 떠나자는 말에 라헬과 레아는,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 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하며 동의합니다(14,15절).
여기서 라헬과 레아는 지금까지 불편한 사이였으나 떠나자는 야곱의 말에는 함께 동의하고서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라고 합창합니다. 위 본문에서 ‘외국인처럼’이라는 말은 라반의 철저한 무관심을 반영한 딸들의 표현입니다.
오늘날도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라비아인은 처녀의 부모에게 지불된 지참금 중 일부를 처녀의 혼인 밑천으로 사용합니다. 또한 고대 앗수르 법에도 이 지참금을 신부 자신에게 지불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례에 비추어 보면, 라반이 지참금으로 대치된 야곱의 노동력과 또한 그 노동력에 대한 부차적인 대가마저 몇 번이고 변경된 것에 대한 딸들의 불평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기에 라헬과 레아가 함께 동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라헬과 레아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며 야곱에게 위임합니다(16절). 여기서 ‘하나님이 ~ 취하여 가신 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빼앗아 야곱에게로 돌려놓으신 재물‘을 가리킵니다.
17절부터 20절은 야곱이 모든 가족과 함께 라반이 모르게 도망을 나오는 내용입니다.
본문 17절에서 ’야곱이 일어나‘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와 아내들의 동의에 힘을 얻어 단호히 귀향길에 오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야곱은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에 태우고서 지금까지 모은 모든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 아버지 집으로 가려 하는데(18절),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한 체 가만히 떠납니다(19,20절).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다‘는 것은 여러 날이 걸리는 큰 행사로서, 그날은 친구들을 초청하는 등 큰 잔치를 배설하여 축제 분위기의 날들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자신들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늦추어진 이 시기에 행동을 개시한 것입니다.
라헬이 도둑질한 ‘드라빔’은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가정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으며, 복을 빌고 점을 칠 때 이용되었습니다. 또한 발견된 고대 근동의 장자권 상속과 양자 제도에 관한 규정이 기록된 누지 서판에 의하면, ‘드라빔’을 소유한 자는 유산 상속권과 한 씨족 내에서 지도권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라반 몰래 떠난 것은, 라반이 떠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떠나게 한다 하여도 모든 재물을 빼앗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라반은 야곱과의 계약을 열 번이나 자기 뜻대로 바꾸었습니다(42절 참조).
21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라반이 야곱을 쫓아가서 드라빔 때문에 야곱과 언쟁을 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몰래 떠난 여러 날 뒤에 라반은 알게 되었고 곧바로 형제들을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야곱을 추격하여 야곱을 따라잡았는데(21~23절), 그날 밤 라반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24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라반이 형제들을 거느리고 함께 야곱을 추격한 것은 그를 붙잡아 시비를 가려서 소유를 빼앗고 해한 뒤에 드라빔도 되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29,31절 참조). 그런데 그가 길르앗 산에 미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몽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선에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란 뜻입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어떤 것이든’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 관용어로서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화난 감정으로 따지지 말고 친절하게 조용히 말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선택받은 언약 자손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그것은 언약 자손과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셔서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고 그로 인해 백성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게 하시려는 의미입니다.
만일 라반이 야곱을 붙잡아 모든 소유를 빼앗고 해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은 모두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언약대로 이루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현몽하신 것입니다.
라반은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서(25절) 야곱에게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며 말합니다(26절). 이어서 라반은 야곱에게 왜 자신을 속였으며 왜 몰래 도망갔는지, 그리고 떠난다면 잔치를 베풀어 기쁘게 떠나도록 해 주었을 것이며 그리고 딸들과 손자 손녀들과 작별의 인사라도 못하게 했으니 야곱으로 어리석었다며 말합니다(27,28절).
이로 인해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29절/24절 참조). 야곱의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현몽하셔서 절대 불가의 명령으로 그를 막으신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부드럽게 대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현몽을 하신 결과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어구가 하나 발견됩니다. 그것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과 ‘너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위 본문에서 ‘능력(엘,אל)’이라는 것은 단순한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욱 큰 능력 즉 ‘신적인 힘’을 뜻합니다. 라반은 자신에게 신이 가진 것과도 같은 막강한 힘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하나님’은 신이 가진 것과도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자신에게 나타나셔서는 야곱으로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보다 비교 불가능한 분이심을 뜻하는 어구입니다. 그래서 굴복합니다.
사실 외관상 라반이 야곱을 치면 야곱은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는 연약한 아내들과 어린 자식들 그리고 소수의 종과 수많은 가축만이 있었을 뿐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 가장 큰 힘은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이를 확신하는 성도는 비록 위험 가운데 처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라반은 이제까지 자신과 야곱이 부유해져 가는 과정을 통해, 그가 믿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0장 27절에,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라고까지 말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반은 여러 번에 걸쳐 야곱에게 줄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31:7). 또한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해하려고 쫓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현몽하셔서 경고하시자 그의 마음을 돌이킨 것입니다.
라반은 자신이 야곱을 추적한 이유와 그리고 지난 밤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서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며 자기의 신 드라빔의 행방에 대해 말하며 찾고자 합니다(30절).
여기서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아버지 집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뜻합니다. 이 어구를 맛소라 본문에서는 ‘네가 사모하고 사모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지나치게 정말 갈망하여 얼굴이 수척하며 창백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에 야곱은 라반에게 떠난 이유를 설명하면서(31절) 외삼촌이 찾는 신에 대해 찾아보라고 하였고(32절), 이에 라반은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하다가(33절) 그 드라빔을 훔친 라헬의 장막까지 들어갔지만 라헬의 꾀에 속고 찾아내지 못합니다(34,35절). 라헬은 아버지에게 ’생리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월경 중인 여인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그래서 분히 여기며 타오르는 노를 정중히 거두어 달라는 간청의 의미로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라반이 그토록 드라빔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드라빔이 조상 대대로 섬겨 오던 수호신이자 재산 상속의 합법성을 보장해 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으려 했고 이에 야곱은 라헬이 가져온 곳을 몰랐으므로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고대 근동의 법 제도를 반영하고 있는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신상을 훔친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라반이 라헬의 장막에서 물러나자마자 야곱이 불같이 진노하여 외삼촌 라반을 향하여 책망합니다(36,37절). 그리고 그 책망과 함께 지난 20여 년 세월 동안의 억눌림과 고난 그리고 수고에 대하여 불같이 쏟아내면서(38~41절),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빈손으로 귀향하였으리라는 말을 합니다(42절).
야곱은 라헬이 아버지의 신을 훔쳤음을 알지 못하므로 라반에게 당당하게 대처하며 자기의 허물이 무엇이냐고 말하면서 자기의 결백함을 강조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내는 중에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38절)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 중근동의 관례를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주인의 양떼를 치는 목자들에게는 숫양을 언제든지 먹도록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수양은, 새끼를 낳고 젖을 생산하는 것 외에도 고기와 털까지 제공하는 암양과는 달리, 제사드릴 때나 손님을 접대할 때 등과 같이 필요할 때는 목자가 언제든지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삼촌의 양을 치면서 한 마리의 양도 잡아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라반은 각 들짐승에게 물려 찢겨 죽은 것이나 도둑맞은 것까지도 야곱으로 찾았다는 것입니다(39절). 즉 변상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라반의 양 가운데서 손실입은 것을 스스로 보충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방의 관례에서는 목자가 양을 치다 사고로 죽은 것에 대해서는 주인은 변상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라반은 야곱에게 변상하도록 요구했고 야곱은 이에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라반은 야곱으로 품삯에 대해 열 번씩이나 변역한 것을 야곱은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고 라반을 책망하지 않으셨더라면 자기를 빈손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곱의 어려움은 외삼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40절에서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거주했던 하란은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실제로 낮과 밤의 일교차가 매우 심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밝히듯이, ’낮에는 더위‘라는 것은 곧 ’뜨거운 폭염‘을 말하고, ’밤에는 추위에 무릅쓰고‘는 얼음이 얼 정도로 몹시 추운 혹한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같은 야곱의 표현은, 그가 지난 20여 년간 극심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를 모두 견디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극도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라반의 양때를 지켰다는 강변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오게 된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라고 표현한 것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이 자기와도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이십여 년 동안 라반에게 속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수고의 댓가가 이십여 년이 지날 때에 풍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언약자손 야곱이 의지하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42절에서 지나칠 수 없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에서 ‘보시고(라아,ראח)’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감찰하시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뜻은 개혁개정 번역처럼 ‘보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하게 ‘보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하여 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피다’, ‘자세히 살피다’ 등을 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그 모든 역경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자세히 살피셨다는 의미입니다.
43절부터 49절까지의 말씀은 야곱과 라반이 돌무더기를 쌓고 증거 삼아 언약한 내용입니다.
라반의 수긍과 함께(43절) 야곱은 삼촌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44절). 언약을 맺는 방법으로는 돌기둥과 돌무더기입니다(45,46절). 이 돌기둥과 돌무더기는 무엇입니까?
15장 내용을 기억하시는지요? 당시 고대 족장시대 때에 계약 방법이 동물의 몸을 쪼개어서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돌기둥과 돌무더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계약 방법입니다. 돌기둥은 야곱이 집을 떠나서 삼촌 라반의 집을 향하는 도중 벧엘에서도 돌을 가지고서 언약을 합니다.
그러면 ‘돌’은 성경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곧 ‘지워지지 않는 약속 새김’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약속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영원함을 말씀하는데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성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이 돌과 같은 의미의 단어들이 구약성경에는 ‘할례’, ‘돌판’, ‘마음판’, ‘돌기둥’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세우고 언약을 한다는 것은 곧 지워지지 않는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낱말들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용되어,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와 보증, 확증으로서 보여지는 것들입니다.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아람 방언으로 ‘여갈사하두라’라 하였는데 그 뜻은 ‘증거의 무더기’라는 것이고, 야곱은 히브리 방언으로 ‘갈르엣’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 역시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47,48절). 그리고 히브리 방언으로 ‘미스바’라고도 하였는데 그 뜻은 ‘망대’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높은 데서 내려다 보시고 살피신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입니다(49절).
50절에서 55절까지의 말씀은 라반과 야곱이 돌무더기 곁에서 라반의 딸을 박대하거나 다른 아내를 취하지 아니하고 서로 해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한 후에 라반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라반은 자기 딸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야곱에게 자기 딸들을 박대하지 말 것과 딸들 외에 다른 아내를 맞이하지 말 것을 맹세하게 하고 증인으로 하나님을 세웁니다(50절). 만약에 야곱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자신은 가나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목격자가 되시고 또 친히 증거가 되시기 때문에 야곱이 한 행위에 대하여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라반의 소망이 담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야곱이 번성하여 강대하게 되면 자기를 해할까 두려워하여 야곱에게 해하지 말 것을 맹세하도록 합니다(51,52절). 라반이 도망친 야곱을 쫓아 온 것은 그가 야곱을 붙잡아 소유를 다 빼앗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꿈에 나타난 하나님으로부터 야곱을 해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후에 태도가 변하여 도리어 그가 야곱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며, ‘보라’를 두 번 반복하여 외치며 강조하고 언약을 결코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축을 할 때도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았었고 또 귀항하는 가운데서도 야곱과 함께 하시며 자신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으므로 두려워진 것입니다.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아내와 조카 롯과 함께 이방 땅인 가나안으로 이동한 아브라함은 ‘홀로’였습니다. 이웃도 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셨고 이들을 보호하셨으며 강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맹세를 촉구하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라고 합니다(53절).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라반은 나홀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도 되셔서 자기와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과 나홀이 형제이기 때문에 그들의 아버지 데라를 비롯하여 그 이상의 조상들을 말하는데, 이 역시 야곱의 하나님이 라반 자신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를 합니다(53절). 그것은 야곱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라반과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언약 자손이지만 라반은 언약 자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과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서(54절) 라반은 딸들과 손자들에게 축복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55절).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인데, 가족 중 임종을 앞둔 자나 혹은 먼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 번영과 승리를 기원하는 축원과 함께 애정어린 포옹으로 엄숙한 작별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54절에서 ‘제사를 드리고’는 당시 중근동 지방의 언약이나 동맹 관계를 위한 계약을 맺는 행위인데, 그리고 나서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뜻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고 남은 음식을 함께 먹던 관습으로 떡을 함께 먹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언약을 맺은 당사자 간에 화해와 우정을 다졌고 언약의 진실성을 확인하고 그 언약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린 후 이렇게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훗날 히브리인들의 중요한 관습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