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 (1909-1935)
농촌운동가였던 최용신은 황해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자국이 남았지만 생각이 바르고 의지가 곧은 신여성으로 자라납니다. 그녀는 16세에 도쿄대학 법대에 재학 중이던 교회 오빠 김학준과 10년 후 결혼하기로, 결혼 후에는 함께 못 배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자고 다짐하며, 약혼을 하게 됩니다.
서울 협성 신학교 지금의 감신대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여름 방학을 이용해 농촌 실습을 나갔다가, 농촌 계몽에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용신은 경기 화성군 샘골로 들어가 농촌 교육을 시작하게 됩니다. 낮에는 아이들을 교회로 모아 가르치고, 밤에는 주부들을 가르치고, 수업이 끝나면 새벽까지 이웃 마을을 다니며 글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 시킵니다. “농사를 지으면 1년 먹을 수확을 얻는데, 사람을 가르치면 백 년 치 수확을 얻는다.”며 2년 5개월을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영양실조로 각기병에 걸려 수많은 이들의 탄식 속에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용신의 장례는 뜻있는 이들에 의해 거국적인 사회장으로 치러지게 되었고, 이 기사를 본 소설가 심훈은 그녀의 삶을 “상록수”라는 소설로 그려 동아일보에 연재하게 됩니다. 그녀가 생을 마쳤던 샘골에는 약혼자 김학준이 유학을 마친 후 정착하여 샘골학원 이사장을 맡아 일하다가, ‘용신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5년 그녀 곁으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