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신비
식물은 진화론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관찰되는 식물의 외관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꽃들이 존재한다. 그 꽃들은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과 다양한 형태를 지니며, 종류에 따라 향기와 꿀도 있다. 그러나 어떤 과학기술로도 산야에 피는 이름 모를 꽃에서부터 우리가 정원과 실내에서 재배하는 화초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흉내내지 못한다.
꽃 은 왜 피는가? 진화가설은 꽃이 종족번식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암술과 수술이라는 배우체를 만들며, 수분과 수정을 통하여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따라서 꽃은 수분을 해주는 벌과 나비 등 많은 충매들을 유인하기 위해 각각 독특한 아름다운 색과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수분만이 목적이라면 색깔, 형태 그리고 향기가 그렇게 다양할 필요가 있을까?
진 화론자들은 꽃은 색깔과 형태에 있어 매개체와 상호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는 꽃이 색깔과 형태가 다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되어 왔다면 같은 장소에서 자라는데, 어떤 식물은 일년생이고 어떤 식물은 다년생이 되는가? 또한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는 수많은 꽃들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람에 의해 전파번식되는 식물들은 왜 꽃을 피우는 방향으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과 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화론자들은 꽃에서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꽃피는 식물은 열매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그 속의 씨는 새로운 종자이고 나머지 우리가 먹는 부분은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영양분을 저장한 것이라고 한다. 나무에 달린 과실은 때가 되어 땅에 떨어지면 그 영양분을 이용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그 러나 과실의 존재가치가 단지 번식이 목적이라면 수많은 과일의 아름다운 색깔, 맛과 향기는 왜 생겨나며 필요이상의 풍성한 영양분은 왜 간직하는 것일까? 생존과 적응만이 목적이라면 각각의 독특성과 다양함을 지닐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과실이란 식물체가 생명유지와 성장을 위한 필요성을 다 채울 뿐 아니라, 또 다른 목적-동물의 영양-을 위한 잉여영양분의 저장소인 것이다.
식 물은 크게 꽃, 열매, 잎, 줄기, 뿌리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식물들은 모두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삶을 영위하고있다.
진화론자들은 식물의 다양함은 환경에 따른 적응과 변이의 결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구마는 뿌리가 진화한 것이고, 감자는 줄기가 진화한 것이며, 완두는 잎이 진화하여 덩굴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 감자는 줄기가, 고구마는 뿌리가 진화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같은 환경에 사는 식물들이 잎과 줄기, 뿌리 그리고 열매가 서로 다른 것은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
우리가 흔히 알뿌리 식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식물들은 양분을 저장하는 독특한 땅속 저장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환경속에서도 어떤 것은 뿌리가, 어떤 것은 잎이, 어떤 것은 줄기가 변형되어 저장기관을 형성한다. 형태 또한 다양하기 그지 없다. 우리가 먹는 마늘, 양파에서부터 백화, 수선화,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등의 조화를 생각해보라. 이런 것을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흔히 환경에 맞게 변화되어 왔다고 한다. 차후에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우리는 적응과 진화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환경에 적응할 수는 있으나, 그 변화가 축적되어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가 을의 단풍은 아름다운 색의 조화로 우리에게 황홀감을 준다. 이러한 조화와 아름다움이 우연히 생겨난 것일까? 진화론자들은 나무가 추위가 오기 전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엽록소를 파괴하고, 영양분을 체내에 보관하며, 그러한 과정의 산물로서 단풍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단풍의 색을 내기 위해서는 당이 잎속에 축적되어야 하며, 카로틴과 크산토필, 그리고 화청소라 불리는 일종의 플라보노이드 계통의 물질이 새로 합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합성을 하는 이유를 자기보존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진화가설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 뭇잎의 떨어짐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토양의 비옥함을 위한 자기희생이며, 떨어진 나뭇잎은 토양 속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에 의해 다시 식물체가 이용할 수 있는 무기물로 분해되고, 지력의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모든 상호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처음부터 설계된대로 완벽한 조화와 질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1장 11-13절, 29-30절 그리고 2장 9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셨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울 정도로 조화, 균형, 질서와 다양함을 갖춘 식물들을 만드셨으며, 식물이 인간이나 동물의 음식물이 되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알의 종자가 죽어서 완전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일련의 과정과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움을 보노라면 하찮은 식물에게까지 미치는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를 알 수 있다. 창조주의 섭리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경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어찌 이와 같은 조화와 균형과 질서, 그리고 한치 오차없는 통합성과 합리성이 자연계에 편재할 수 있는가?
모 든 것에 확신과 믿음으로 일관해 온 과학자들일지라도 자연만물의 증거자료를 분석종합하여볼 때 과학적 탐구로는 지혜의 존재 그 자체는 알 길이 없으나, 놀라운 지혜의 손길은 의심할 수 없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보여 주셨던 보이지 않는 그분, 그 사실을 우리의 유추적인 논리로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1:20) 이다.
과 학이란 하나님의 활동을 관찰하고 그를 통해 좀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활동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중 약 20%는 쌀을 주식으로 한다. 아시아의 경우 약 6천년 전부터 쌀이 경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모든 식물 중 쌀만큼 지속적으로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한 것도 없을 것이다. 즉 가장 오랜 동안, 가장 인위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처리를 한 식물이라면 벼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실 제로 수천년 간, 증산과 품질 향상을 위해 일반 재배법의 개선에서부터 방사선처리까지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왔다. 그러나 얻은 것은 무엇인가. 키가 크든 작든, 잘 생겼든 못 생겼든, 또는 생산량이나 저항성이 크든 작든 간에 결국 쌀을 얻었을 뿐이다.
자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보존, 즉 생존이다. 그런데 왜 모든 생물체가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진화의 결과 얻어지는 이득이 무엇인가?
진화 가설의 핵심 주장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가설대로 태초의 한 하등동물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는 접어두고, 진화하지 않아도 생존하는데 이 생물체는 고등한 생물체로 진화해야 하는가?
아메바에게는 생의 목적도 사랑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위 과학의 발달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의 탐욕을 슬그머니 진화가설에 끼워 넣어 모든 생명체에게 확대하는 것은 왜일까?
오 늘날 수없이 많은 생물체를 보고, 그것의 복잡함을 따져서 진화의 서열을 정한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점은 오늘날 진화가 잘된 생물체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등생물까지도 엄연히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도 서로 직, 간접으로 상리상생하면서 말이다.
어느 생물체가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 즉 생존만이 중요하다면 아메바가 가장 진화된 생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상의 적응으로(가장 경제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화가설은 필연성에 대한 해답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에 의해서, 몇 개의 원소가 모여 분자가 되고, 그것이 마침내 하나의 독립세포로 이루어졌다는, 순전히 물질론적인 진화가설로는, 무목적성 생명체인 아메바가 선택압에 의해서 최상의 생명체로 진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인간이 가지는 생명체 내부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삶에 대한 성스러운 명령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이나 돌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둘 다 분해해보면 똑같은 재료요, 더 따져보면 똑같은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 진화가설은 삶에 대한 성스러운 명령(인생의 목적)에 대해서는 이처럼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창조지 제 101호 [1997. 1~2]
손기철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