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을 예언한 이준경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은 정승에 올라 조정에서 매우 명망이 높았다. 다만 재주와 식견이 매우 부족하고 성질이 곧고, 선비를 높이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아량은 없었다. 그는 나라가 재해를 입어 인심이 흉흉할 때에도 임금에게 아무것도 건의하지 않아 선비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신진 사류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신진 사류 기대승은 일을 의논할 때 과감하고 날카로워 이준경과 점점 틈이 벌어졌다. 기대승은 화를 못 참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죽고 말았다. 이때 이준경에 대한 신진 사류들의 불만이 많았다.
백인걸이 말했다.
“지금 조정에서 대신들 간에 신․구가 불화를 빚는 것은 훈구파의 대신은 안정에만 힘쓰는 데에 그 잘못이 있고, 신진 사류는 무엇을 하려고만 힘쓰므로 과격한 데에 그 잘못이 있다. 이때 조정이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 내가 전하께 아뢰겠다.”
사류들은 백인걸의 말이 그 참뜻을 잃어 도리어 임금이 붕당을 의심하지 않을까 몹시 두려워했다.
그 무렵, 신진 사류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했지만, 많은 대신들은 속류들이었다. 자연히 대관․소관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아 조정이 항상 시끄러웠다. 이때 소인배들은 그 틈을 노렸다. 그러다가 오겸․박충원 등이 잇따라 탄핵 당하자 불평이 깊었다.
백인걸은 신진 사류들이 이준경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그는 기대승․심의겸을 매우 좋아하지 않아, 그들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신진 사류들이 자못 의심했다.
이준경의 재종 동생 이원경이 관직을 잃고 분통을 터뜨리며 조정에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이때 선조의 외숙 정창서도 권세를 한 번 잡아 보려고 박순․이후․백오건 등 10여 명을 공격하여 내쫓으려고 했다.
이원경은 이준경을 등에 업고 그의 말이라고 둘러대며, 박순 등의 과실을 들추어 내어 백인걸을 움직이려고 했다. 어느 날 이원경이 백인걸에게 말했다.
“주상께서 박순과 이후백을 매우 싫어하시니 조정에서 쫓아내려면 쉬울 것이오.”
백인걸은 민기문에게 이 사실 여부를 물었다. 이때 민기문은 노수신의 집을 방문했다. 뜻밖에도 그곳에 이원경이 와 있었다. 민기문이 노수신에게 말했다.
“백인걸이 망령 된 짓을 하려 하니 대감께서 나서서 말리셔야 할 것이외다.”
이원경이 발끈했다.
“그가 오직 사생결단으로 거사하려는 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것 같소?”
민기문은 불쾌하여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원경이 노수신에게 말했다.
“민기문은 믿을 사람이 못 됩니다. 오늘 나하고 백인걸의 말을 듣고 와서 대감께 말리라고 말한 자올시다.”
그 후 노수신이 백인걸을 만났다. 백인걸이 말했다.
“사림 중 젊은 자들의 기세가 자못 성하니 억제해야 되겠소이다.”
“말씀을 삼가시오. 서로 편을 갈라 공격하면 장차 조정의 꼴이 뭐가 되겠소.”
노수신이 말했다.
그런데 이예가 이원경이 정창서에게 한 편지를 심의겸의 형 심인겸에게 보였다. 심의겸 형제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먼저 연중추부사(이준경)를 보고 다음에 백인걸을 만나니, 이 일이 금명간에 일어날 것이오, 대궐에 내통하는 것을 빨리 해야 할 것이오.’
이 편지가 도화선이 되어 조정의 여론이 한쪽으로 쏠렸다.
“백인걸이 장차 사림을 해치려고 하는데 이준경도 뜻을 함께했다.”
이택이 이 말을 듣고 박수를 시켜 백인걸에게 그 진의를 묻자 백인걸은 깜짝 놀라 말했다.
“내 어찌 사림을 해치겠소. 다만 방숙(의겸의 자)이 좋지 않다는 것 뿐이오.”
“지금 공을 사람들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에 비유하고 있소이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까지 의심한단 말이오?”
백인걸은 권철(권율 장군의 아버지)과 박순을 차례로 찾아가서 변명하고, 벼슬을 사직하고 파주로 내려가 버렸다. 백인걸이 은퇴한 후 사람들이 이원경을 죄주려고 했다가, 조정이 불안해질까 봐 그만두었다. 이때 조정에 심상찮은 기류가 흘렀다.
이준경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병석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불러 말했다.
“천명이 이에 다했거늘 어찌 약을 먹어 생명을 연장시키랴. 단지 주상께 한 말씀 올려야겠다.”
이준경이 부르고 아들이 받아썼다. 이준경은 선조에게 학문에 힘쓰고, 신하를 대할 때 위의를 갖춰야 하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라고 당부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넷째, 붕당의 사사로움을 깨뜨려야 할 것이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혹시 잘못이 없고 일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네와 뜻이 맞지 아니하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사옵니다. 자기들은 영검을 닦지 아니하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아니하며,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허위의 기풍을 양성하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군자이면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 두어 저희끼리 스스로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이제야말로 전하께오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대해 주시어 이 폐단을 없애기에 힘쓰실 때이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라를 구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 이옵니다…’
이준경은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심의겸은 인순대비의 동생으로 권세를 업고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사림을 농락했다. 장차 조정에 붕당이 조성될 징조가 보여 이준경은 전부터 걱정했다.
이준경의 유서는 조정에 큰 풍파를 일으켰다. 3사에서 이준경이 사림에게 화가 되게 한다고 관작을 추탈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이준경이 근거도 없이 붕당이란 말을 지어 내어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켰다.”
아침 경연에서 율곡 이이가 이준경을 소인배로 몰아붙였다.
“이준경이 머리를 감추고 모습을 숨기고 귀신처럼 지껄였나이다. 그의 말은 시기와 질투의 앞잡이요, 음해하는 표본이옵니다. 옛 사람은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했사오나 오늘날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매우 악하옵니다. 참으로 그의 말을 황당하옵니다.”
3사에서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사태가 이준경을 매도하는 쪽으로 흘렀다. 이때 유성룡이 나섰다.
“대신이 죽을 때에 주상께 말씀을 올린 것에 부당함이 있으면 변명할 것이거늘, 죄를 주자고 주청하는 것은 조정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체면이 아니니 여러분은 너무 심한 짓은 하지 마시오.”
좌의정 홍섬도 이준경을 두둔하고 나섰다.
“전하, 이준경이 붕당이라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이오나, 그는 신과 함께 조정에 가장 오래 있었사옵니다. 평소에 늘 성격이 강직하고 식견이 높았사오니, 이제 와서 그를 학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사온데, 어찌 사람에게 화를 끼칠 마음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사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준경의 공덕을 한․부에 비교하고 있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한과 부는 송나라의 한기․부필 두 어진 대신을 말한다. 이들은 새 임금을 세운 공이 많았다. 후세에 어진 대신을 말할 때 한기․부필을 표본으로 삼았다.
“정녕 조정에 붕당의 조짐이 있는 게요?”
선조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조정의 대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이준경의 일을 불문에 부치겠노라!”
판서 오상이 사신으로 베이징에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공적은 나라에 있고 혜택은 백성에게 있는데
능히 시종을 온전히 한 분은 이분뿐일세
백 년도 못 가서 공론이 정하여질 것을
오늘에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어찌 땅 속 사람에게 상관이랴.
이준경이 죽은 지 백 년은커녕 3년 만에 동․서로 갈리는 붕당이 생겼다. 그 뒤 이이는 이준경을 몹시 비판한 것을 여러 사람 앞에 솔직히 사죄했다. 그는 이준경의 선견지명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출처 : SKS'S HOUSE 201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