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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글 스크랩 개싸움/ 권기호
거웨인 추천 0 조회 79 17.08.23 2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개싸움/ 권기호



투전꾼의 개싸움을 본 일이 있다

한 쪽이 비명 질러 꼬리 감으면

승부가 끝나는 내기였다

도사견은 도사견끼리 상대 시키지만

서로 다른 종들끼리 싸움 붙이기도 한다

급소 찾아 사력 다해 눈도 찢어지기도 하는데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

고통 속 그것이 코앞에 놓여 있어도

건들이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개들이 지닌 어떤 규범 같은 것을 보고

심한 혼란에 사로 잡혔다

 

이건 개싸움이 아니다

개싸움은 개싸움다워야 한다(개판 되어야 한다)

개싸움에 무슨 룰이 있고 생명 존엄의 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느닷없는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왔다

 

 

- 시집『원로문인작품집』(대구문인협회, 2014)

.........................................................


 30년 전 쯤 투견을 딱 한번 구경한 일이 있다. 지금은 모텔로 바뀐 동촌유원지 야외수영장 특설무대에서였다. 지금 기억나는 건 피오줌으로 얼룩진 바닥밖에 없다. 고대로부터 세계 도처에서 행해졌던 투견 경기는 현재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동물학대로 간주하여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다. 일본은 도사견의 원산지인 고치현과 아키다현 등지에서 투견 경기가 행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동물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금지되었다. 다만 '민속경기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경우‘를 예외로 두었는데 ’청도 소싸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도 개와 소의 ’차별대우‘인가.

 

 시에서 이 희한한 싸움의 룰이 동물생태학적으로 검증된 보편적 사실인지는 잘 알지 못하나,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타의에 의해 서로 으르렁대며 싸움은 하지만 데스매치 상태에서 치명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상호 묵시적 담합이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개싸움은 당연히 개판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이 무슨 당치않은 개뼈다귀 같은 수작인가.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니 말이다. 마지막 보루, 최종의 밑천은 서로 존중해주어 거들내지 않겠다는 신사협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를 목격한 시인은 ‘심한 혼란에 사로잡히고’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졌다지만 이런 ‘개판’보다 못한 인간사도 버젓이 존재하기에 적이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무자비한 싸움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갈 데까지 간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을 짓밟는가하면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룰이나 규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생식급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거라도 이기기 위해서는 물고 늘어지고 감춰진 아킬레스근도 용케 찾아내어 물어뜯고야 만다.


 요즘은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기술이란 뜻의 '필살기'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데서나 함부로 쓴다. 이 필살기를 휘두르는데 가장 능숙한 사람들이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높은 곳에서 많이 가지고 누리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다. 그들의 명예욕이나 권력 욕구, 체면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위선과 기만, 그리고 탐욕은 그들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상류층 혹은 지도층이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양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의 필살기에 나가떨어진 많은 이들의 생식급소에는 패인 이빨 자국이 선명하다. 또한 고래가 싸우면 등이 터지는 건 새우뿐이다. 센 놈이 주먹을 휘두르면 약한 놈은 얻어터질 밖에 없다. 심하면 불알이 까이면서 아작 나버린다. 하지만 적대적 공생관계를 잘 유지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과거 여당과 야당이 한때 그랬고 정치인 개인 간에도 그렇다. 이건 좀 '서로 다른 종들끼리'의 싸움이지만, 극한 대립처럼 보였던 한반도 긴장상태가 속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개싸움'으로 끝날 조짐을 보여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생각에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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