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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일반 김재준과 ‘한신’ 그룹의 탄생 문익환의 ‘토착화론’과 안병무의 ‘민중론’ 파장
주의검을보내사 추천 1 조회 199 23.03.18 23:31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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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3.18 23:34

    첫댓글 예장과 기장의 분립은 그 배후가 미국 장로교와 캐나다연합교회의 노선 차이로 이해될 수도 있다. 김재준에 대한 캐나다연합교회의 지원은 해방 후에도 지속됐다. 1952년 한국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이 파직된 것에 격분한 캐나다연합교회는 새로 분립한 기장의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 작성자 23.03.18 23:36

    “우리는 우선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만 수립하면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로 소위 공산주의 운동을 몹시 우려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과학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더 좋은 재건을 기획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 (중략) 즉 상술(上述)한 제 자유만 확보한다면 공산주의 기타 여하한 정부라도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우선 감사히 수락한다.”(김재준의 ‘기독교의 건국이념’)

  • 작성자 23.03.18 23:38

    1950년대까지만 해도 구약의 예언서에 대한 해석 글 정도를 잡지 ‘기독교사상’ 등에 투고하던 문익환은 60년대 중반 들어 기독교 토착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놓기 시작했다. 문익환은 기독교가 히브리와 그리스의 기질을 받아 태동하고 자라 오늘날 세계교회의 형식이자 내용이 됐음을 전제한 후, 우리 문화가 이와 같을 수 없으므로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당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탈식민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강원용을 통해 한국 기독교계에 보고되고 있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움직임이 그 통로가 됐을 것이다. 후일 문익환이 통일에서 외세를 배제하고 ‘자주’를 강조할 때 밑바탕이 된 생각이 이즈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신의 인물들은 대개 민중신학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신학계에 알려진 ‘학문’으로서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은 안병무가 수립한 것이다. 안병무는 민중신학이 자기 삶의 주제가 된 계기를,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에 두었다. 전태일로 인해 살아 있는 민중을 보게 됐고, 이 민중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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