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이 본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원인 (상)
한국전쟁 이후, 장로교 선교부는 김재준의 조선신학교, 한상동의 고려신학교, 박형룡의 장로회신학교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으로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세워 신학교육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남장로회 선교부는 가장 적극적으로 박형룡 박사를 지지했고, 북장로회 선교부는 그의 행정 능력을 의심했으나 그의 신학은 지지했다. 한경직 목사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합동안을 제시했다가 박형룡 박사 지지자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52년 4월 대구 총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측근들은(총회장 김재석, 서기 김상권) 월남한 목사들의 큰 지지를 받으면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42년 제31회 총회의 이북 노회의 총대 수를 그대로 받기로 결정했다. 한순간에 10개의 이북 노회 79명의 총대가 확보되었다. 그 힘으로 조선신학교와 김재준 교수를 정죄했다. 1953년 박형룡 박사는 총회신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장로교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총회신학교의 교장이 된 박형룡 박사는 불과 4년 만에 선교사들의 모든 신뢰를 상실했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에 대한 주요 원인에 대해 혹자는 에큐메니칼 신학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1950년대 후반 선교사들의 문서와 편지 그리고 <기독공보>에 보도된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박형룡 박사와 그의 주변의 NAE (한국 복음주의협회) 인사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그들의 비윤리적 행동과 거짓말 때문이었다.
1. 박형룡 박사의 해외여행과 모금 2만불의 행방에 대한 의혹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박형룡 교장이 세계로 안목을 넓히고 장로회신학교를 위한 모금을 할 수 있도록 3000불의 여비를 마련해서 세계 여행을 하도록 지원했다. 그는 1954년 10월 12일에서 1955년 4월 16일까지 6개월 동안 미국, 스코틀랜드와 런던, 스웨덴 스톡홀름, 네덜란드 암스텔담,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스위스 제네바, 로마, 아테네, 레바논, 예루살렘, 파키스탄 파라치, 인도 카타, 태국 방콕, 홍콩, 마닐라, 동경을 여행했다. 이 당시 미국북장로교회는 12만불을 모금해서 10만불은 서울로 직접 송금했고 2만불은 박 교장에게 직접 수표로 주었다. 반하우스는 『한국에서의 스캔들』(Scandal in Korea, 1960)에서 1957년 3천만환 사건을 조사할 때 미국에서 받은 2만불의 행방에 대해서 감사가 있었으나 그 돈이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1955년 4월 박형룡 교장이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독공보 기자는 박교장에게 WCC에 대해 질문했다. "[문] WCC 본부를 방문하였습니까? 용공단체라는 데 대하여 어떻게 관찰하였습니까 [답] WCC 제네바 본부에 들렀었다. WCC는 공산국에 있는 교회와도 연락을 짓는다. 그들이 국제회의에 공산국가의 교회 대표로 참석하나 사업적 연락을 짓는 단체뿐이요 그것을 용공 단체라고는 할 수 없다. (<기독공보> 1955.4.25.) 그러나 2년 후 정치적 어려움을 당하자 박형룡 박사와 측근들은 WCC를 용공, 신신학, 단일교회를 추구하는 단체로 공격했다.
2. 태국 선교에 대한 공격과 선교비 증발 사건
1955년 예장 총회는 해방 후 첫 해외선교사 파송을 결정했다. 그때 한경직 목사가 총회장이었고 영락교회가 태국선교비를 후원했다. 최찬영 선교사는 태국 선교사로 사역했고 훗날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성서공회 총무로 사역했다.
1956년 장로교 NAE 세력은 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교회고, 장로교회가 아닌 '잡종' '혼혈아'교회를 낳는다고 트집을 잡아 공격했다. (<기독공보> 1956.10.8.) 사실 그것은 한경직 목사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었다. 1956년 총회 교권을 장악한 NAE 세력은 총회 총무제도를 신설하고 김상권 목사를 서기 겸 총무로 임명했다. 그는 해외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내는 책임도 담당했다. 당시 선교비는 한국 북장로회 선교부 사무실을 통해 태국의 북장로회 선교부 계좌로 송금 되었다. 그러나 태국의 선교부 회계는 한국선교사가 선교활동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선교사들에게 보고했다. 1959년 최찬영 선교사가 태국교회 총회장을 데리고 입국했을 때, 그는 친구 목사가 보낸 상당한 금액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사건이 1959년 대전 총회에서 다루어질 사안이었고 그 책임은 김상권 목사였다고 말한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 대전 총회의 배경' 미국연합장로교회로 보내는 출판용 보고서)
3. 신학교 3천 만환 부정 지출 사건이 지닌 윤리적 의미
박형룡 교장은 정부 소유의 남산장로회 신학교 부지소유권을 매입할 목적으로 자기의 측근 NAE 인사들을 중심으로 부지위원회를 임명했다. 그리고 총무과장 박내승과 회계 김창준과 더불어 이사회 허락 없이 신학교 자금 3천 만환을 로비스트 박호근에게 지출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이 사실은 1957년 11월 신학교 실행이사회에서 공론화되었다. 그 땅은 이미 국가에서 국회의사당을 설립하기로 계획된 땅이었다. 박형룡 교장이 잃어버린 공금 30,162,172환 중 큰 내역은 다음과 같다.
채용금지불이자 2,673,300, 지목변경측량비 475,450, 접대비 115,570, 잡비 126,800, 박호근에게 준 돈 22,534,192, 박내승에게 불법으로 지출한 돈 4,186,700 (<기독공보> 1960.6.6.)
간단히 말하면 선교부와 해외에서 보낸 소중한 헌금과 가난한 신학생들의 등록금을 가지고 함부로 접대하고 엄청난 거금을 사기당한 것이다. 당시 3천 만환은 현재의 물가지수로 50배의 가치가 있고 약 15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박호근에게 주었다고 주장하는 2200만환은 박형룡 교장의 서명으로 30회 이상의 수표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단 1건의 영수증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를 주었은지 증명할 길이 없다. 사전에 부정행위를 저지를 목적이 아니라면 이사회 허락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이다. 박형룡 교장은 자기는 아는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고, 총무과장과 일개 직원이 이 사건의 주모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결국 선교사들은 신학교 부지지원회 위원들(대구 NAE 김삼대, 서울 NAE 김윤찬 등)에게 혐의가 있다고 보았다. 이 3천만환 사건은 평신도위원회가 조사했고, 역시 1959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내용이었다. 따라서 총회 NAE 세력은 막강한 정치 세력인 경북 NAE와 야합해서 교권을 대구 쪽으로 넘겨주고 대신 자신들의 문제를 덮고 박형룡 박사를 복귀시키는 방안을 구상하게 된다. 3천만환 사건을 숨기지 말고 형사사건으로 넘겼더라면 오히려 교단 분열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출처 : 한국기독공보 (http://www.pckworld.com/article.php?aid=8882718371)
선교사들이 본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원인 (하)
해방 이후 남장로회는 적극적으로 박형룡 박사와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북장로회는 비교적 포용적인 신학교를 세워 장로교 분열을 방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상황을 뒤바꾸어 놓았다. 1951년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에 몰려온 500명의 학생 중 3/4이 실향민이었다. 이로써 박형룡 박사의 신학교육 주도권은 분명해졌다. 1953년 총회는 이북 노회의 힘을 얻어 조선신학교를 정죄했고 박형룡 박사는 총회신학교의 교장이 됐다. 그러나 1959년 장로교 분열 과정에서 3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박형룡 박사와 그 측근 NAE로부터 돌아섰다. 그것은 신학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문제 때문이었다. 「한국기독공보」 2021년 4월 10일 제8면에서 선교사들이 심각하게 생각한 문제 중 1. 박형룡 박사가 미국 여행에서 받은 모금, 2. 태국 선교사 선교비 횡령, 3. 총회신학교의 3000만환 증발 사건을 다뤘다.
4. 경북 NAE의 선교부 재산 유용과 선교사 사인위조 사건
1957년 3월 경북노회는 회장 김삼대 서기 황규석이 선출되었다. 곧이어 5월 대구 NAE 지부가 창설되면서 장로교에서 회장 박병훈, 부회장 최재화, 총무 김삼대, 협동총무 황규석이 임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들은 대구동산기독병원, 계성중고등학교, 신명여자중고등학교의 법인을 장악하기 위해, 대구선교지부와 경북노회 사이에 합의한 정관을 폐지하려고 했다. 1957년 9월 제42회 총회에서 이 사실이 폭로되었다. 1958년 총회에서 박형룡 교장사임이 수리되고 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가 조직된 후, 총회 교권은 경북노회 NAE의 도움이 절실했다. 1959년 초 경북노회 NAE는 계명대 재산권과 관련해서 대구시에 제출한 서류에 감부열(Archibald Campbell) 선교사의 사인을 두 차례 위조했다가 적발되었다. 「기독공보」(1959.8.31.)와 '한국에서의 스캔들'(Scandal in Korea)에 근거하면 서류는 노회 서기 황규석이 제출했고 그는 선교부 토지에 불법 건축을 했다. 계명대 학장 안두화는 2월 23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정관'을 개정했다. 경북노회가 7명의 대학 이사를 파견하는 것을 다른 노회와 형평성에 맞게 3인으로 축소했고, 계명대 학장을 임면하는 경북노회의 권한을 문교부 장관 승인과 이사장의 임면으로 변경했다(「기독공보」 1959.5.25.).
5. 대전 총회에서 NAE의 회의 진행의 불공정과 불법 파행
1959년 총회 임원은 회계를 제외한 전원이 NAE 인사였다. 이들은 총회장소를 결정하고 회의를 진행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총회에서는 3000만환 사건 조사위원회의 보고와 태국선교비 문제보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선교사의 표현에 의하면 NAE 측에서 볼 때 "교권을 장악할 수 없다면 총회는 열리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었다." 미연합장로교 선교부 동아시아 총무 리틀(Henry Little Jr.)은 "총회의 무질서는 사전에 신중하게 계획된 것이었다."라고 보고한다(Letter to John Smith on October 9, 1959). NAE 교권은 총회 20일 전까지 총회 장소를 발표하지 않았다. 총회 장소 중앙에 NAE 총대를 배치했고 에큐메니칼 측 총대 자리는 주변으로 배치했다. "전체 투표에서 에큐메니칼 총대가 다수가 된 후 총회를 파행으로 몰고갔다." 선교회는 이 총회에서 노회 수의 과정을 거친 연합장로교회와 에큐메니칼선교부로의 명칭 변경의 건을 승인받고, 선교회 사업과 재정을 총회 협동사업부로 이관하려고 했다. 그러나 NAE 교권은 첫 번째 건은 계속 연기하고 두 번째 재정은 취득하려고 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공격 대상으로 삼으면서 에큐메니칼 돈으로 총대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리틀은 즉각 선교사업 이관은 "무기 연기"라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다. 선교사들은 NAE 교권이 임원 선거에서 패배가 확실하고, 윤리적 부정행위가 폭로될 위기에 직면하자 총회를 불법 정회한 것으로 확신했다. "남장로회 성명서"(1959.10.2.)와 미연합장로회 성명서(1959.10.8.)는 교권이 총회를 정회한 것을 불법과 변칙으로 발표했다. "3개 장로교선교회 화해제안서"(1959.11.6.)는 신학교 3000만환 사건 조사위원회가 지목한 범행자의 명단을 교회 앞에 공개하고, 총회의 모든 사무 행정을 감사하고, 화해위원회를 통해 양측이 화목하자고 제안했다. 선교사들은 10월 28일~11월 6일까지 화해위원회를 구성해서 모든 노회를 방문했다.
6. NAE 지도부가 ICCC를 교단 갈등에 끌어들인 것
그러나 NAE 지도부는 ICCC를 한국교회 분열에 이용함으로써 화해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을 만들었다. 이북 교권의 실세이며 박형룡의 측근인 김윤찬은 미국의 매킨타이어에게 편지를 보내 WCC를 탈퇴하고 ICCC와 관계 갖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며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기독공보」 1960.1.18.). 그는 이미 고아원과 모자원 운영에서 선교사들의 신뢰를 잃은 사람이었고 3000만환 사건의 주역이었다. 박병훈은 '월드 비전'과 '어린이 기금'으로부터 고아원 지원을 받으면서도, WCC를 반대해서 에큐메니칼로부터 고아원 지원이 끊어졌다고 거짓말을 해서 매킨타이어에게 지원을 받아냈다. 매킨타이어는 11월 12~20일 전국을 순회하며 WCC를 용공으로 공격했고 NAE는 이것을 자파 확장으로 이용했다. 장로회신학교에서 NAE 교수들은 학생들을 매킨타이어 집회로 동원했다. ICCC는 분열된 장로교단을 ICCC에 가입시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12만불을 지원했다.(「기독공보」 1960.7.18./9.19) 그 돈은 신학교를 마련하고 노회를 정비하며 장신대를 차지하기 위한 재판비용에 사용되었다. 승동측은 ICCC파와 반ICCC파로 갈라졌다.
7. 미국 NAE 한국 NAE와 관계 단절
한국의 NAE가 복음주의협의회(NAE)라는 이름을 교회 정치와 분열에 사용했고, ICCC 지원을 받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거짓 혹은 절반의 진실에 근거해 비난을 가하면서 국제 복음주의 단체들도 이것을 심각하게 보았다. 미국 NAE 총무 조지 포드(George L Ford)는 1959년 10월 14일에 미연합장로회 베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NAE는 모든 행사에 한국 NAE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승동 총회의 초대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선교사들과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전했다.(「기독공보」 1959.10.26.). 이로써 사실상 한국 NAE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8. 남장로회 선교사 폭행 사건
남장로회의 원로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호남 NAE(김재석, 정규오 등)의 성장과 활동에 협조했다. 그러나 1959년 대전 총회 이후 남장로회는 NAE와 거리를 두었고 1960년 2월에 형성된 통합 총회와 협력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호남 NAE는 크게 분노했다. 그것이 1960년 6월 9~16일에 전주 남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 때에 선교본부 습격과 선교사 폭행 사건으로 나타났다. NAE 측은 호남전역에서 60~70명의 성경학교 학생과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데모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남장로회가 중립을 지키고 통합과 협력하지 말고 독립 선교를 하라고 요구했다. 어린 학생들은 흥분해서 선교부 기물을 파괴했고, 급기야 6월 14일 여선교사 숙소에 투석하며 난입했고 그를 막는 선교사들을 폭행했다.(「기독공보」 1960.6.27./10.24.)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지켜보았고 화해시키려 노력했던 3개의 장로회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정당화할 신학적 명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본국 교회들은 모두 WCC와 NAE에서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편집장이며 남장로교의 공식 화해위원단으로 1959년 12월 한국을 방문했던 넬슨 벨 박사(Dr. L. Nelson Bell)는 "나는 이 분열의 근본 문제가 교리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세계에서 한국 장로교회 보다 보수적인 교회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교회를 향해 한국에서 소수 집단이 매킨타이어를 불러들여 불안과 불신을 조성하고 분열을 확대했으며, WCC를 향한 용공, 신신학, 단일교회 논쟁을 일으켰다고 증언하면서, 잘못된 정보를 듣고 이들을 지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January 18, 1960). 박형룡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했던 남장로회 원로선교사 조차도 더 이상 박형룡을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은 일부 NAE 지도자들의 정직성과 윤리 문제 때문이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첫댓글 박형룡 박사 진짜 구질구질하다ㅋㅋㅋ 에효합똥
바리새인이죠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