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1932. 12. 4 ~
932년 12월 4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인 노병수, 어머니인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노태우는 이들 부부가 혼인한지 8년만에 얻게 된 자식이었다.노병수는 키가 190cm나 되고, 미남형이었고 음악을 잘 했다.이에 노태우와 차남인 노재우를 무릎에 앉혀놓고서는 유성 축음을 틀어 노래를 들려주고는 하였다.노태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노래를 참 잘 부르게 되었다.그러나, 노태우가 7살이 되던 1939년, 아버지인 노병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이에 숙부인 노병상이 책임 지고 노태우 일가를 먹여 살렸다.
노태우의 집은 팔공산 근처였는데, 집에서 6km나 떨어져있는 공산 소학교(현 공산초등학교)에 맨발로 왕래했다고 한다.소학교 시절 노태우는 매우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다.이에 노태우의 6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를 저녁까지 남게 하여 특별 수업을 해주었다.
노태우는 대구공업중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당시 공산초등학교 출신으로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한 남학생은 노태우가 유일하였다.중학교 2학년 때, 말라리아와 열병으로 고생하였으나 극적으로 살아 남았고경북보통고등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편입학하여 상위 성적을 유지하였다.주위 학생들은 노태우에게 정치 활동을 권유하였으나"학생은 학업에 전념해야 한다." 고 하고서는 그 권유를 물리친다.몸집도 작고, 성격도 순탄하고, 정치에 관심도 가지지 않아 학교 생활이 조용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장래희망을 의사로 삼고 있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 하여 꿈을 포기하게 된다.
노태우는 이 때의 일로 자식 교육에 신경을 각별한 신경을 쓰게 된다.
노태우의 동창인 이태원은
"나는 고졸한 후에 대학교에 가고 싶어 노태우에게 찾아가 매번 그의 공책을 빌렸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혀 내게 귀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노태우가 정리한 공책으로 공부를 해서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하였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참전하게 되었다.그러나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학하게 된다.
그 때, 노태우는 육사에서 전두환을 만나게 된다.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말하기를
"전두환은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고 밝혔었다.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에 임관하게 된다.1956년,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게 되는데 당시 제5보병사단의 사단장은 박정희였다.
노태우는 육군 중위 시절에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집을 드나들다가 우연히 그의 누이인 김옥숙을 만나게 되고그 날 이후로 김옥숙에 관심을 보이다가 청혼, 1959년 5월 31일, 결혼식을 치루게 된다.
1961년 5월 16일,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전두환과 함께 육사생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박정희에게 제안,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다.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었으며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을 전멸시키는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노태우는 을지무공훈장을 받게 된다.노태우는 베트남에서 대민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주민들의 거주지가 완성되자 그의 이름을 따서 태우촌이라고 명명하려 하였으나
노태우는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 마을의 이름을 재구촌이라고 명명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전두환과 함께, 빠르게 군부를 장악하는 12.12 쿠데타에 가담한다.
노태우는 정치적 문제로 감금되어 있던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에게 깍듯이 대우했고,김종필은 그러한 노태우에게 고마워하며 그에게 2인자로서의 처세술을 알려주었다.
1981년, 노태우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고대통령인 전두환에 의해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에 선출된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명을 받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등 대륙을 방문하였었는데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인 요한 바오르 2세에게 대한민국에 방문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성사시켰다.
귀국 후에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게 되었는데'무사명, 무책임, 무소견, 무기력을 추방하자!' 는 구호를 내걸었다.각 행정기관에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퇴근하지 못 하는 공무원이 없게 하였고일 미루기 행위를 일절 금지시켰다.
1985년 2월, 민주정의당 대표에 선출되었고1987년,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그런데 1987년 6월, 6월 민주 항쟁이 발생하였다.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한국의 민주화를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고전두환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전두환 정부의 정치적 위기는 해소되게 된다.대통령 선거 유세할 때에 "나,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라고 주장하며과거 군부 출신 대통령들과의 차별화를 두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하지 못 하고 서로 출마하자, 노태우는 손쉽게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대한민국 제 13대 대통령 선거>
유권자 : 25,127,128 명
투표자 : 23,066,419 명 (89.2%)
노태우 후보 : 8,282,738 표 (36.6%)
김영삼 후보 : 6,337,581 표 (28.0%)김대중 후보 : 6,113,375 표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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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줘서 고맙고이 글은 위키백과의 내용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서술되었다.
노태우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그 때 그 때 처세를 잘 한 것 같다.그리고 유순한 성격이었기에 누군가와 마찰을 빚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사람을 대할 때 착하게 대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