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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향기 스크랩 봉원사(8.25)
설악산 추천 0 조회 28 07.08.31 19: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봉원사(8.25)


서울에 봉자가 들어가는 절이 2개가 있으며, 봉은사는 강남에 있고 봉원사는 강북에 있다.

봉은사는 조계종이고 봉원사는 태고종이다.

지난번에 봉은사는 다녀왔으니 봉원사를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하다가 오늘 다녀오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전철 2호선 신촌역에서 7024번을 타던 지, 아니면 전철 3호선의 독립문역에서 7024번을 타던 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철을 타고 안내도를 보니 독립문역 갈려면 종로3가 가서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신도림에서 갈아타고 신촌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이 들었다.

신촌역 4번출구에서 탄다고 해서 나가서 기다리니 차가 오는 것이다.

기사분에게 물으니 간다는 것이다.

종점이니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것같다.

종점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니 부도군이 나온다.

생각보다 부도가 새것들인 것이다.

과거 것들은 다 어디 갔는 지 모르겠다.

절에서 인수인계를 잘못 했는 지 알 수가 없고 누가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청사초롱을 길 양쪽에 쭉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연꽃축제한다는 현수막이 시내부터 여러 군데 걸려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16나한이 무서운 눈으로 보초를 서고 있는데 그 나한도 한결같이 새것이다.

이 절도 언제 왕창 불타고 다시 지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면서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것도 천원사상인지 모르겠다.

그 연못 오른쪽에 비각이 하나 있어 살펴보니 어떤 분이 절 중축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왔는 모양인지 시주김성기공덕비라고 쓰여 있었다.

비각 위쪽으로 범종각이 있는데 그 단청은 아주 낡았다.

종은 비천도도 없고 종각 안에 다시 종을 받치는 것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종각은 초익공 덧서까래 건물이었다.

단청은 연화머리초에 바자휘 모양같았다.

범종각 위에는 요사채 같은데 봉원사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무량수각, 청련시경, 한 편액은 실력이 없어 해독이 곤란하였다.

그 요사채 건너편에 삼천불전이 궁전처럼 지어져 있고 두 건물 사이에 마당 그리고 그 마당뒤에 대웅전이 웅장하게 버티어 있었다.

그 요사채 꽃살 밑에 궁판이 있는데 색이 바랬지만 아마도 주작을 그린 것처럼 보였다.

인터넷에 보니 이름이 대방이고 염불방이라는 것이다.

모르던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어쩐지 무량수각은 선암사, 대흥사에서도 본 것인데 글씨는 틀려도 글은 같은 것같다.

스승의 글씨란다

“조선시대 서도가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산호벽루(珊湖碧樓)"와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 있고 부엌문의 신장도는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다.”

대방위에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알고보니 전씨영각이란다.

그 옆에 운수각이 있는데 흰고무신 세컬레가 놓여 있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아주 화려하고 현판 옆에는 용머리 2개가 나와있었는데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니 안에는 꼬리 2개도 있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과 협시불이 있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대웅전 앞 마당에는 현재 큰 고무대야에 연꽃을 심어서 연꽃 축제가 한창이다.

대웅전 옆과 뒷벽에는 위에는 팔상도, 아래에는 목우도가 있었다.

대웅전은 전형적인 다포식 팔작지붕의 건물이었으며 단청은 연화머리초에 바자휘 모양같았으며, 닫집은 보궁형이었다.

대웅전 옆에는 관세움보살 석불입상이 있었으며 왼쪽 옆의 계단을 통해 칠성각으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칠성각은 이익공에 맞배지붕이었으며 주불은 약사여래불이라고 하는데 약병은 보이지 않고 흰색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봉원사는 신기한 것이 궁궐처럼 수석이 몇 개 조경석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삼천불전 뒤에는 명부전이 있었는데 단청도 아주 화려하게 되어 있었고 건물은 초익공 맞배지붕이었다.

명부전 앞에는 흰연등이 쭉 걸려져 있었고 지장보살과 시왕들이 도열해 있었으며 닫집은 보궁형이었다.

명부전 뒤에는 극락전이 있었는데 아미타불과 왼쪽에는 약사불, 그리고 오른쪽은 어느 불인 지 알 수가 없었고 닫집은 운궁형이었다.

봉원사 홈페이지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고 하는데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불같았다.

극락전 뒤에는 만월전이 있는데 홈페이지에는 약사여래불과 협시불로 독성님을 모셨다고 했는데 스님이 한분 계셔서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다.

극락전 오른쪽에는 흰색의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전이 배치되어 있었다.

명부전 앞에는 있는 삼천불전이 이 절에서 가장 큰 건물 같았다.

다포식에 팔작지붕이고 단청, 꽃살, 궁판 모두 아주 화려하였다.

아주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무슨 내용인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안에는 비로자나불과 삼천불이 모셔져 있었고 닫집은 보궁형에 연꽃 사진 전시를 하고 있었다.

삼천불전 앞에는 석가모니진신사리탑과 비가 세워져 있었다.

돌아올 때는 7024번 버스가 독립문역과 서대문역으로 가는 버스여서 그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래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봉원사(奉元寺)는 신라(新羅) 51대(代)(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이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제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事)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 종 6년(1856)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제26대 고종 21년(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고종 31년(1894) 주지 성곡(性谷)스님이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스님의 중수와 사지(寺地)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45년 주지 기월(起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 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1966년 주지 영월(映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大院君)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 옮긴 것이다.

1991년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 지 혜경(慧鏡)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 대중은 50여스님,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50호(범패) 영산재보존회에서 단청과 범패분야의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 불교교양대학이 있고, 신행 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인경회, 거사림 등 법회가 개최 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 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어 태고종 총본산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동인 스님 : 구한말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동인은 봉원사에 주석하면서 김옥균등과 함께 교류하며 일본과 서양문물에 관한 지식을 쌓아갔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수차례 일본을 내왕하며 당시의 선진문물을 소개하여 김옥균등의 개화파가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신사유람단의 일본행에도 결정적 막후역할을 수행하는등 개화운동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만봉 스님 :  스님은 단청장으로서 70년대 초부터 일찍이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어 지금까지 독보적인 불화의 세계를 구축하고 후학양성에 여념이 없으시다. 만봉스님은 영조때의 유명한 도화서의 화원이었던 석상겸의 화맥을 이은 분으로서 1910년생인 스님은 6살에 동진출가하여 불화와 단청을 그리고 대가를 일컫는 금어(金魚)가 되기까지 20여년에 걸처 시왕초, 천왕초, 여래초라는 3단계의 습작훈련을 거쳤다고 한다.

송암 스님 :  1915년생인 스님은 봉원사에서 태어나 한번도 주소를 옮긴적이 없는 분으로 19세부터 범패를 배우기 시작하여 1940년에 어산 범패 일체를 섭수하셨다. 스님은 이월하스님과 남벽해스님 모두에게로 부터 사사를 받으시고 후진양성에 큰 힘을 기울여 범패의 계승과 전수에 일생을 다 바치시고 2000년 세수 86세, 법랍67세로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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