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전협정(1953.7.27.) 이후 70년이 흘렀다. 6월 7일 발행된 국가안보전략서1)에는 ‘종전’이나 ‘평화협정’이 삭제되고, 억제(deterrence) ↔ 단념(dissuasion)2) ↔ 대화(dialogue)의 순환 개념이 등장했다. 대통령은 서문에서 “일시적으로 전쟁을 회피하기만 하는 취약한 평화”를 부정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대척점에 뒀다. 그는 평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평화학이나 종교도 한 생을 사는 인간에게 ‘영구한 평화’를 의무로 부과하지 않는다. 당대에 전쟁을 막고 우호적 관계를 증진하는 것이 최대치다. 대통령의 태도는 지나치게 높은 목표로, 사실상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인생 파업 선언 같다. (여기 교회의 반성 지점이 있다. 목표만 높고 능력(순종)은 없는 사회인을 너무 많이 배출했다. 사사기는 40년 선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사사들을 최고 영웅으로 기록한다.) 대통령에게 돌려줄 말은 이미 작년에 나왔다. “평화는 전쟁을 하루 미루는 것부터 시작한다.”3)
이 글은 1953년 두 번째 분단 이후 70년간 남과 북은 분단의 형질 변경을 위해 꽤 많은 경험을 쌓아왔고, 통일이나 평화는 결국 그것이라 주장할 작정이다. 그러자면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분단의 형상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다. 강화도에서 고성까지 15곳의 전망대(남북 상호 감시 지점) ‘도장 깨기’도 좋은데, 전자도서관에서 쓸 만한 논문을 채굴해보고 발견한 지식을 나누고 검증하는 일을 강권한다. 분단에 관한 항간의 지식은 빈곤과 편향의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3개의 분단선, 분단 벨트
흔히 쓰는 ‘분단선’이란 말은 ‘분단 띠’나 ‘분단 벨트’의 현실을 싹둑 잘라내고 있다. 우리는 군사분계선(MDL)과 나란히 남방 2㎞에 남방한계선(SBL)이 그어져 비무장지대(DMZ, 907㎢)의 절반을 형성하고, 다시 군사분계선 기준 5~20㎞의 넓은 폭으로 민간인통제선(CCL)4)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민통선 폭은 1980년대까지 20~40㎞였다가 대부분 10㎞ 이내로 좁힌 때가 2008년 이후이고, 인제군 남부는 아직도 20㎞까지 내려온다(총 1,369㎢). 민통선이 북상한 이후에도 그 선에 접한 강화, 김포,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과 그 지역들에 접한 고양, 양주, 동두천, 포천, 춘천은 ‘접경지역’으로 분류된다(총 8,097㎢). 바다에는 비무장지대가 없고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가 접경지역이다. 모르긴 해도 북측으로 두 곱을 해야 분단의 두께를 어림잡을 것이다. 이걸 ‘선’이라 말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가.
1910년 조사된 DMZ 벨트의 ‘가옥 밀도’5)를 보면, 대략 화천에서 고성에 이르는 동쪽 절반은 산악이라 밀도가 낮았지만, 그 서쪽으로 파주까지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지금은 왕래가 적은 철원은 남북을 잇는 가교 도시로 성황이었던 곳이다. 널문리(판문점)를 품은 파주나 연천 역시 중요한 길목이었다. 1기 신도시로는 최북단(?)인 일산과 고양시로 연결된 파주가 접경지역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번화한 편인데, 거기 고속도로가 들어선 때가 불과 2020년 11월이었다. (평택파주고속도로의 행주산성JC~내포IC 구간, 자유로는 ‘대북 선전’과 군사용으로 1992~1994에 개설.) 연천, 철원, 화천, 양구, 고성은 아예 고속 교통망이 없고, 인제도 남쪽 끝에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스쳐갈 뿐이다. 북쪽으로 뻗어나갈 일이 없으니 군사분계선에 한참 못 미쳐 길이 끝나는 셈이고, 그만큼 토지이용률은 대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접경지역들은 대다수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있고, 거기에 농림지역, 녹지지역, 농업진흥지역 등의 규제가 겹겹이 쌓여있다. 철원군 규제 면적 비율이 지역 총면적의 200%로 가장 높은데6) 앞서 열거한 규제들이 겹으로 적용되어 군 전체 면적의 2배라는 의미다. 토지 이용 규제는 자유의 제한을, 재정자립도 약화를, 최종적으로 인구감소를 불러온다. 농림, 녹지, 농업 진흥 등의 개념도 군 작전에 방해되는 시야를 가릴 수 없다는 의미이므로, 사실상 군사시설을 위해 도시와 촌락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지역들 발전을 위해 ‘접경지역 지원 특별법’(2000~, 2011년 6월 특별법으로 격상)이 필요했고, 나라 전체를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르는 대가로 특혜를 명시하고 중앙정부에서는 각종 지원예산도 분배하고 있지만, 누릴 사람이 적으니 ‘예산 소진’의 압박이 발생한다. 예컨대 Y군에는 서울에서 두 시간 이상을 달려 민통선 너머, 그러니까 신분증을 내보이고도 한참을 더 달려 다다르는, 북한이 코앞인 ○○전망대 근처에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행사 때문에 두어 번 다녀오면서도 반 고흐나 다빈치가 다시 살아오지 않는 한 누가 여기에 작품 감상하러 올까 싶었다.
오두산통일전망대 앞.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너른 모래톱 저편이 개풍군 광덕면이고, 멀리 송악산까지 보인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통일촌과 오두산
곧 잊으시겠지만, 이만하면 막대한 분단 비용의 지리 부문은 알려드린 셈이니 몸으로 느껴볼 ‘안보 관광’ 지점들을 안내해볼까 한다. 우선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 가운데 두 번째로 특이하면서도 분단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통일촌’을 추천한다. 서울에서 가자면 오두산통일전망대, 임진각을 지나 통일대교로 임진강을 건너면 왼쪽에 있는 마을인데 통일대교에 민통선 검문소가 있다. 미리 통일촌 내 식당 두 곳 중 한 곳에 전화해서 마중 나와달라고 해야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고, 모든 일행이 신분증을 맡겨야 하며, 나올 때도 차량과 사람이 같아야 한다. 말하자면 ‘마을 주민 초청 방문’으로 민통선 통과 자격을 얻는 셈이다. 식당 메뉴는 특산물인 장단콩으로 만든 순두부, 콩비지, 된장국, 두부전골 등이며 주민들의 조합 식당이라서 그런 분위기가 나고 관광버스 한두 대의 손님도 넉넉히 받는다.
식후에 마을을 둘러보는 데 한두 시간을 써도 좋다. 통일촌 마을 조사 보고서7)를 미리 읽으면 이해가 깊어진다. 주민들의 구술 생애사가 빠져들게 한다(집필진에 민속학자들이 여럿 있다). 거기엔 식민지, 전쟁, 전후의 피폐한 삶과 희망, 무엇보다도 남북 대결이 빚어낸 접경지 삶의 양식이 들어있다. 그 주인공들은 마을 박물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바로 옆 ‘통일촌교회’에 세워진 이런저런 비석들은 통일을 향한 강했던 열망을 보여주고, 이에 부합하지 못한 현실 인식을 한탄하게 한다. 아담하지만 모든 것을 갖춘 초등학교, 북측 인사들이 내려는 길에서 훤히 보이는 지점에만 있는, 마을 주택들과 확연히 다른 저택은 남북 간 과시욕의 산물 같다.
마을 입구 상점 특산물과 기념품, 부동산 간판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분단’을 소개한다. 농산물에 붙은 ‘DMZ’라는 브랜드는 ‘산업 시설이 전혀 없어 청정함’을 의미한다. 셔츠나 컵은 ‘세계에서 유일한’ 곳에 다녀온 티를 내기에 좋다. 녹슨 철조망 액자는 베를린 장벽 조각과 비슷한데, 분단 철책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장벽과 다른 점이다. 80호가 사는 마을에 ‘민통선 땅’(부동산) 간판이 둘이다. 아마도 ‘미래를 위한 저가 매수’ 기회를 파는 것 같다. 이처럼 ‘분단’이라는 상품은 양립할 수 없는 희망과 절망이 다 붙어있다. 으레 접경지대 상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원산지인 술도 팔았는데, 지난주에 다녀온 고성통일전망대 검문소에는 유사품으로 바뀌어있었다. 서체만 북한 분위기로.
해 지기 전에 다시 통일대교를 건너 돌아와야 하지만, 검문까지 거쳐 민통선에 들어갔다면 도라산역, 도라전망대, 캠프그리브스(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 해마루촌, 허준 묘 등이 가까이 있으니 방문할 수 있다. 남한의 마지막 역인 도라산역과 나란한 도로는 개성공단 길목이고, 남북 간 열차 시험 운행(2007-2008) 때 동해선과 함께 경의선 입·출경 역이다. 무던히 전쟁을 좋아하던 조지 W. 부시가 서명한 침목과 그 사진이 전시돼있었다. 도라전망대에서는 북쪽으로 개성공단과 깃대 높이 경쟁하는 기정동 마을을 볼 수 있다. 2016년 박근혜 정권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이전까지 수천 명의 종사자들이 출퇴근했던 곳을 굳이 ‘전망’하는 묘함이 있다. 주의할 점은 민통선 내에서 내비게이션이 백지가 될 수 있다는 것. GPS 정보는 수신되지만, 지도 데이터가 없으므로 반드시 지도 이미지나 약도를 갖고 움직여야 한다.
온종일을 잡고, 빠르게 움직일 요량이면 ‘통일촌’ 점심 식사 전후로 오두산통일전망대 - 임진각을 잡되, 맑은 날, 맑은 시각에 오두산을 향해야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너른 모래밭과 그 너머 북한 땅을 내려다보는 4층 카페는 요샛말로 ‘뷰 맛집’이기 때문. 2층 전시관에는 철조망으로 현을 이은 통일 피아노가 있고 실향민들이 직접 그린 고향집 그림을 타일처럼 빼곡히 붙여둔 벽면, 구술 영상이 있는데 여기에 잡히면 시간과 감정 소모가 상당하다. 지난달 함께 갔던 탈북민 청년은 움직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통일촌 마을박물관에 가면 보고서에 나오는 구술의 주인공들을 볼 수 있다.
강화평화전망대와 DMZ박물관
장쾌한 시야가 오두산의 이점이라면,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1.7~2.5㎞)은 ‘강화평화전망대’(제적봉)다. 임진각에서 제적봉까지는 직선거리 28㎞지만 북한 땅을 밟을 수 없으므로, 일산대교까지 남하했다가 다시 김포를 종단, 무려 72㎞를 달려야 한다. 웬만해선 당일 코스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분단이 주는 은근한 ‘빡침’이 있다). 역시 청명한 날을 골라 강화평화전망대 - 교동망향대(교동도) - 교동마을(시장) - 화개정원을 배열할 수 있다. 교동망향대 앞은 3㎞ 내외인데 간물때는 북한 땅과 갯벌로 이어진다.
요즘 ‘뜨는’ 교동마을(시장)의 상징은 제비다. 갯벌 너머 훤히 보이는 고향을 못 건너가는 실향민들은 눈앞에서 북의 흙을 물어다 집 짓는 제비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남쪽 사람들 눈에는 전망대 앞이 대충 ‘북한 땅’이지만, 실향민은 오두산에서는 개성의 송악산, 강화전망대에서는 개풍군과 멀리 개성시, 교동망향대에서는 연백평야로 각각 자기 고향을 구분한다. 자주 오는 행색의 어르신은 자기 고향 개성시 고려동이 보일세라 망원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연백을 떠나온 실향민은 교동시장에서 며느리를 앞세워 고향 있을 때 먹던 강아지 떡을 팔고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고향에서 멀리 가지 못한다.
교동의 대룡시장에 가면 연백에서 건너온 실향민들의 고향 음식 강아지 떡을 만날 수 있다.
청명한 날이 많아서 금강산 줄기가 바다로 뻗어 해금강으로 이어진 풍경을 말끔하게 볼 확률이 높은 곳은 고성통일전망대다. 양양이 38° 선이고 이곳은 38°35′이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금강통문’까지 직선거리 2.3㎞를 앞두고 있는데, 보이는 북측도 고성군이다. 2021년 고성군을 출발, 10㎞ 헤엄쳐서 고성군에 도착한 탈북민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전망대를 등대 삼았을 것 같다. 주차장에서 200m 정도 오르막이 있고, 경치가 좋아 시간을 소진하기 쉬운데, 적어도 1시간 이상 여유를 두고 가까운 DMZ박물관까지 봐야 한다. 한반도 분단사와 동서를 가로지르는 분단 벨트의 현실, 분단이 아니었을 때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며, 독일 분단과 통일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남북 단일팀 유니폼 등 분단의 형질 변경을 위한 노력도 짚는다. 지금, 남북 간 협력은 추억으로, 전시물인 대북 확성기는 다시 현역으로 돌아가려는 흐름이 씁쓸하다. ‘DMZ에 묻힌 종이 폭탄 삐라’8) 전시관은 독보적이다. 전쟁 양상과 서로의 인식들, 자극 대상인 욕망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몸을 드러낸 여성 사진과 원색적 문장으로 북한 병사를 유혹하려 했던 1980년대 말 삐라들에 대해 자녀들이 묻는다면 답이 길어질 수 있다.
남한 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 두무진은 장군머리 모양을 한 기암과 해안 절벽이 연출하는 비경으로 유명하다.
백령도와 북한군 묘지
이 장르의 끝판왕은 백령도다. 섬의 북쪽 끝이 38°선이니 개성시의 북단과 동일선이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하루 두 번 출항하는 배로 213㎞, 약 6시간을 달려야 하고 뱃삯은 편도 7만 원 내외다. 용기포항에 내려 멀미의 끝을 보고 고개를 들면 육지(북한 장산곶)가 눈앞이다. 섬에서 13~16㎞ 지점이 육지라니, “여길 왜 배 타고…” 하는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38°선 분단 이전에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빡침은 더한다. 1900년 11월, 언더우드 선교사는 장연군 소래교회에서 출발하여 중화동교회(1896년 백령도 최초 회집)에 오전 중 도착, 문답과 세례, 임직식, 저녁 작별 예배까지 마치고 다음 날 새벽에 소래로 돌아갔다.9) 몽금포 어딘가까지 항해하는 시간은 편도 한 시간도 안 됐을 것이다. 육지가 코앞인 이 섬에 공항 건설이 추진 중인데 주민들을 위해서는 필요해 보이지만, ‘평화’라는 더 나은 해법을 배제한 고비용 해법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정전협정(1953, 영문판은 휴전협정이다)은 접경에서 길이 막혔을 경우 서로 길을 내어주도록 합의돼있다. 남북 관계가 진전된다면 장산곶과 백령도까지 육로 이동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섬은 마치 동해 바다에 솟은 듯 깊은 바다 분위기, 천연 활주로와 두무진은 독보적이다. 피난민들을 따라 북한 말도 옮겨왔고, 북한 음식은 인천까지 따라 나갔다. 해병대 제6여단에 연락해 브리핑을 듣지 않는다면 섬을 반도 못 보고 가는 셈이다. 군인이 주민보다 많고,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다.
여단장에게 “가장 염려되는 상황이 뭡니까?” 물었더니, “(북한군이) 태탄비행장에서 이륙해서 섬을 폭격하고 복귀하는 데 불과 몇 분밖에 안 걸립니다. 그사이에 응사하지 못하면 상황이 끝나버릴 수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 여단장에게는 육·해상 침투 염려가 없었다. 백령도 둘레는 땅굴이 일주하고 있다. 땅굴 하면 북한이 연상되는 것은 착각이다. 기술도 자본도 모두 우리가 앞선다.
경치도 없고, 더 멀고,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곳이니 마니아들에게만 권한다. ‘북한군 묘지’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6-1이다. 내비게이션에서는 아직도 옛 명칭인 ‘적군 묘지’로 찾아진다. 이름이 바뀐 건 2014~2016년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고 난 2018년이다. 2개 묘역에 각각 북한군과 중국군을 구분했지만, 각 유해는 모두 ‘무명인’이고 전사 장소만 밝히고 있다. 빈 무덤 묘비에 모두 본국 송환 날짜가 새겨진 것으로 봐서 송환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2019년 남북 군사 합의 이전에는 접근이 어려웠던 화살머리고지에서 새로 발굴한 유해들 중 중국군은 더 이상 여기 오지 않고 속속 송환하고 있으며, 선양의 ‘항미원조전쟁열사능원’에 안장되고 있다고 한다(총 913구). 2022년 9차 송환 때는 중국이 ‘젠-20’라는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로 그들을 호위했다. 우리 전통에 묘지를 북향으로 쓰는 일은 드문데, 이 묘역과 북한의 출신도 별로 구분돼있는 파주의 실향민 묘지(동화경모공원)가 모두 북향이다.
철조망 앞 바다에는 침투를 막는 말뚝이 박혀있고,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경계의 변화와 평화
평화와 전쟁은 곧 경계선의 형질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 두 번째(최초 분단은 1945년 38°선, 두 번째 분단은 1953년 휴전선) 분단 70주년을 맞기까지 형질 변경을 위한 노력과 변화의 기회는 충분했는가.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1998~2008)이, 서쪽에서는 개성공단(2004~2016)이 분단 이래 가장 크고 구체적인 형질 변경 사례였다. 개성공업지구 사업장들은 남한 관리자와 북한 노동자들이 하나의 생산 단위였고, 북한 내 기업소들에 남한의 생산·관리 방식이 전파되는 하나의 학교와 같았다. 시범단지 5만 4천여 노동자에, 부양가족은 20만 이상으로 추정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가로막은 본 단지는 그 20배였다. 서로의 생계와 번영이 평화로운 관계에 연계되는 것은 오랜 적대를 해소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는 해법이다.
그러나 충분하지 못했다. 못된 매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치 한꺼번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집어치우라는 식으로 비난했고, 남북이 함께하는 현실은 대중적 경험이 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이 핵 포기와 연계하여 본 단지 계획을 좌절시켰고, 박근혜 정권은 기어이 공단을 닫고 말았다. 대중들은 그것이 어떤 기회를 날려버린 것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개성이 열리자 대북 인도 지원 단체들은 공단과 무관하지만, 협상장과 전달 통로가 모두 개성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남북 간 출퇴근 시대였다. 그렇게 공단이 아직 가동되고 있던 어느 날 중부 전선 을지전망대(펀치볼)를 방문했는데 관측장교의 각 잡힌 설명에는 대결과 도발만 있었고 방문자들도 따라서 심각했다. ‘현실의 편집’이 가능하다는 사실, 대결의 관성이 아직 평화로의 전환을 압도하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의 형질 변경은 용의주도한 세력이 압도적으로 충분히 전개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반평화의 쓴 뿌리를 캐내기 어렵다.
이 글의 첫 주제는 ‘분단 교육’이었다. 수많은 ‘통일 교육’에 분단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과목이 없어서 분야의 동문들과 발품을 팔았다. 하고 싶은 말은 ‘기회가 있었다’는 것. 우리가 휴전선 분단 70년을 그냥 보낸 것이 아니고, 창조적인 노력과 접근이 있었으나 우리 머릿속까지 들어와있는 강고한 반평화의 짜임에 패배한 결과가 오늘의 모습이다. 이 승부처에 동의가 충분하다면, 분단 벨트가 말랑말랑해지고 흐지부지되는 날이 빨라질 것이다.
■ 주
1) 국가안보실, 〈윤석열 정부의 국가안보전략 – 자유, 평화, 번영의 글로벌 중추국가〉(2023. 06.)
2) ‘단념시킴’ ‘만류’가 정확한 번역이다.
3) 20대 대선 공약 제안 기독시민단체연대, ‘20대 대선 공약 제안 기독시민단체연대 공동 성명’(2022. 8. 16.)
4) 민간인통제선은 1954년 2월, 미 제8군 사령관 직권으로 DMZ와 인접한 지역에 민간인이 귀농해 농사짓는 것을 규제하는 ‘귀농선’(歸農線)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국군이 군사분계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면서 1958년 6월, 민간인통제선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59년 6월부터는 군 작전과 보안 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민간인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토지 이용을 허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지역 내에서의 자유로운 출입과 행동은 물론 경작권을 제외한 토지소유권의 행사 등이 일부 제한되고 있다. 민간인 통제구역은 민간인통제선이 몇 차례 조정을 거쳐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축소되고 있으며, 현재는 군사분계선 이남 10km 이내로 정해져있다(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제5조).
5) 1910년 조사가 최신 자료다. 해방 후 분단과 전쟁, 재분단 이후 비워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6) dmz.go.kr/korean/wantknow/border_area
7) 경기문화재연구원,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경기문화재단, 2013). memory.library.kr/items/show/210022969
8) 2020년 2월에는 ‘벌거벗은 심리전의 첨병, 삐라’였다. 전시 내용은 거의 같아 보인다.
9) L. H. 언더우드 지음, 신복룡·최수근 옮김, 《상투의 나라》 (집문당, 1999), 재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