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산림치유를 생각하며 시오름을 오르다.
서귀포 치유의 숲이 2016년 6월에 개장했다.
치유의 숲은 산림치유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나도 산을 즐기고 산림치유에 관심이 있어서
2015년에 산림치유지도사 공부를 하였고 국가 자격증도 취득했다.
3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이나 전시행정으로의 활용도가 높다는 느낌이다.
이권이 개입된 산림학자와 산림관련공무원의 합작품이다.
인터넷산악회의 프로그램보다도 눈금이 많이 모자라니
오히려 인터넷산악회의 지원정책개발이 대국민 건강과 힐링에 더욱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
산림청이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둘레길 혹은 자치단체가 조성한 걷기 좋은 길의 활용도만 높여도
힐링과 치유를 포함한 국민의 건강이 증진되며 의료비 절감의 핵심이 된다.
산림치유는 크게 두 가지로 산행과 치유의 숲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물론 대국민 건강증진으로 볼 때 주는 산행이며 부가 치유의 숲 프로그램이다.
서귀포 치유의 숲에 있는 모든 치유숲길을 돌아보고 시오름에 오른다.
가멍오멍 숲길,
가베또롱(가벼운) 치유숲길,
벤조롱(산뜻한, 멋진) 치유숲길,
오고생이(있는 그대로) 치유숲길,
숨비소리(해녀가 잠수한 뒤 물 밖으로 떠오르면서 내뱉는 숨소리) 치유숲길,
하늘바라기 치유숲길,
놀멍 치유숲길.
숲길이 좋다.
시오름은 웅악(雄岳) 즉 분화구가 없는 볼록한 숫오름이다.
꼭대기에는 한라산 방향으로 나무를 제거하여서
한라산의 멋진 남벽을 조망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제주도의 3대 수종은 삼나무, 소나무, 단풍나무이다.
1960-70년대 방풍림으로 자고나면 대나무처럼 쑥쑥 올라가는 삼나무가 인기였다.
섬 전역에서 울창한 삼나무 숲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편백나무이다.
육지에서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뿜어내는 편백의 열풍이 분 지 오래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도 삼나무 간벌과 동시에 편백나무 숲 조성이 대세이다.
내가 알기로는 나무마다 피톤치드 양을 조사할때 편백이 가장 많았으나 다양한 수종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피톤치드 양으로 편백 숲, 편백 숲하고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모든 숲은 다 좋으니 다양한 숲을 찾아야 한다.
서귀포 <운정이네>에서 해물뚝배기(18,000원)로 푸짐한 점심식사를 하다.
31) 차로 올라가는 조망이 뛰어난 군산
' 오르막에 내려오는 차가 있으면 곤란한데 ' 하면서
한 차선뿐인 임도를 조마조마하며 올라간다.
작은 주차장이 있고 조금만 걸으니 정상이다.
군산은 걷는 산이 아니라 관광하는 산이다.
한라산과 여러 오름의 산이 보이고
중문관광단지와 예레포구 그리고 바다가 확 터져 있다.
그러나 중국발 미세먼지가 최고치를 기록하여서 뿌였다.
쉽게 올라서 그런지 멋진 풍광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을 꼭 기대하마....
바다가 조망되니 역시나 일제의 진지동굴이 아홉 개가 있다.
두 군데를 들러본다.
32) 안덕계곡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창고천은 군산이 가로막아서 서쪽으로 틀어 흐른다.
안덕계곡은 군산의 끝자락에 있다.
주상절리와 계곡은 기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인 바위집터도 구경한다.
계곡의 식생도 좋다.
추사가 좋은 물을 쫓아서 창고천을 찾았다는 기록과
추사유배길 3코스 <사색의 길>이 대정향교에서 안덕계곡까지 이어진다.
33) 김정희의 유배지에서 단산(바굼지오름)을 사이에 두고 오 리도 안 떨어진 대정향교.
조선시대의 향교는 5성과 송조 4현 그리고 해동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기능과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기능이 있다.
즉 제향과 교육이다.
성균관이 대학에 해당하는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이라 할 서당을 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받는 지방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서당과 서원은 사학기관인 반면 향교와 성균관은 관학기관이다.
향교는 조선이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사회을 지탱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시문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하되,
경학은 경전에 더하여 사서(史書)를 함께 익혔다.
제주도에는 제주향교, 정의향교, 대정향교 3군데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제주로 유배된 인물은 230명이 넘는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유배가 지방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당쟁에서 밀려난 지식인이 시골이나 섬으로 귀양되어도 대접 받을 수 있는 것은
설경(舌耕) 즉 말로 먹고 사는 일이리다.
추사는 종이품의 이조 참판 벼슬을 지낸 글천재이니 글실력으로는 대정향교 최고의 스승일 것이다.
대정향교 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재에는 환갑의 추사가 쓴 <의문당>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34)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서 세한이라 쓴 글을 보다.
김정희는 8년 3개월동안 대정에 유배된다.
긴 세월이다.
섬에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추사체를 완성한다.
세상은 그를 섬으로 쫓아내고 사람들은 그를 등졌다.
세한(歲寒)이라 쓴 예서체에서 외롭고 작아진 육순의 그가 보인다.
'歲'는 '해'를 뜻하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 무렵을 의미하며
'세한'을 국어사전에서는 '설을 전후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 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사색당파로 조정의 정권에서 밀린 당파는 핍박 받고 귀양 가서
울분과 인고의 생활을 하는 서러운 지식인을 일컫기도 하겠다.
세한(歲寒)이라 쓴 예서체를 사진으로 옮긴다.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라는 공자의 말을 적었다.
사람이 시련에 처했거나 시련을 겪은 후에야 그 사람의 진실된 참모습을 볼 수가 있다는 글이다.
35) 천주교 대정성지에서 난주를 생각하다. (정난주 마리아묘)
황사영은 정약현의 딸 난주와 결혼했고 소년급제한 글천재이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과
1801년 주문모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2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정약종,
그리고 정약용의 조카사위이다.
오래전에 읽은 김훈의 소설 <흑산>에서는 정약종 순교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정약종은 칼을 받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형리(刑吏)가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치였다.
.... 주여, 어서 오소서.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르며 웃으면서 칼을 받았다.
도성 쪽으로 날이 저물고 서강 쪽 하늘에 노을이 번져 있었다.
칼 쥔 망나니는 그 웃음이 무서워서 칼자루를 더듬었다.
망나니는 한칼에 약종의 목을 끊어내지 못했다.
망나니는 반쯤 잘린 약종의 목에 다시 칼질을 했다.
정약종의 머리는 두 번 칼질에 떨어져나갔다.
잘린 얼굴이 평안했다.
1801년 11월 5일에 황사영은
북경 주교에게 야소교 박해에 대한 사정을 알리고 조선 선교의 촉진을 요청하는 백서(帛書 1801)와 함께
충북 제천의 배론에서 잡혀서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명으로 참수 후
사체는 여섯 도막이 나고 머리는 대나무에 매달려 효수된다.
황사영이 처형되고 가족은 노비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아내인 난주는 제주도 대정으로 보내진다.
난주는 2살의 아들인 황경헌을 살리기 위해서
하추자도 예초리의 황새바위 갈대밭에 내려두고 제주도 배에 오른다.
어부 오씨가 데려다 길러서 현재 추자도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 있다고 한다.
난주는 29살에 대정으로 와서 66살에 죽을 때까지
37년동안 남편 황사영과 아들 황경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한다.
대정살이에서 야소교는 난주를 유일하게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
난주의 무덤을 측은하게 다시 바라본다.
추사는 정약용의 아들들과 친해서 13살 누이인 난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둘은 만나지 못한다.
추사가 대정으로 유배되기 3년 전에 난주는 죽었다.
첫댓글 여러 날 머물며 제주의 자연과 역사 현장들을 많이 돌아보며
의미있는 시간 가졌군요. 제주의 아픔들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수고많으셨고 늘 좋은 시간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