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동 도서관 강의(2017년 10월 25일) 관련하여 안양 문협과도 인연이 .... 그리고 올 해 강연이 두군데가 더 추가됐네요.. 베트남도 다녀와야 하고 환갑기념 책 출간도... 먹고 살아야 하고 아들녀석 장가도 있고 ... 아무튼 바쁜 2017년이 될 것 같습니다.... 어제는 신익이하고 ...
책상과 걸상
예전 걸상이란 말이 꽤 친근했는데 이제는 서먹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 말도 나처럼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실은 걸상은 의자도 거상도 포한한 앉는 가구를 통털어하는 말인데 요즘은 벤치 스툴 의자라는 말로 영역을 세분화하여 걸상은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걸상이라 하면 못 알아듣는 젊은 친구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은 흔해빠진 걸상이나 책상이지만 그 시절 집에는 책상이나 걸상이란 존재가 아예 없었다.
대신 무릎을 꿇고 마주하는 얕은 상이면 모든 것이 충실했다. 한동안 우리 집은 반반한 사과괘짝이 이 역할을 대신 했었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이 잘 버텨내지 못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의외로 무릎을 꿇는 자세이다. 매운 음식은 잘 참아도 앉는 자세는 곤혹스러워 한다. 사는 문화의 차이를 그럴 때 쉽게 느낀다. 문화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우리의 예절에서 앉는 자세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가부좌를 틀거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지내는 생활에 또한 꽤 익숙하다. 큰절은 물론이고 밥상 제사상 모두가 앉아서 하는 행위이다. 유럽인들의 문화에는 꿇는 자세가 거의 없다. 예로부터 하느님을 위해 두 무릎을 꿇는 외에 이들은 본국의 왕을 만나도 한쪽 무릎만 꿇었다. 우리와 같은 문화권이라 해도 일본의 여인들은 거의 맹종에 가깝게 무릎을 꿇는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서양에 가깝다.
그 정도의 차이만해도 큰 정서의 차이이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의자에 앉고 하는 안배의 정도가 아주 적당하게 혼합되어 있다. 서당하면 무릎을 꿇는 것이고 학교하면 의자가 소용된다. 의자의 의미는 의외로 크다. 의자가 없을 당시 발뒤축을 엉덩이에 보탠 아주 불편한 자세를 취해야 했다. 공식장소에서 이런 자세는 반드시 규정된 자세였고 예절의 한가지였다.
중국 기록을 보면 동한 말년에 "호상(胡床)"이라는 접이식 걸상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는 북방 유목민족지역에서 사용하던 생활용품으로 당나라 중기에 와서 "호상"은 팔걸이와 등받이가 있고 두 다리를 자연스럽고 펼 수 있는 의자로 변화하였으며 송나라 때 와서 비로소 중국인들의 다리는 자유를 얻게 됐다.
의자의 유행은 사람들의 앉는 자세를 개변(改變)시켰을 뿐만 아니라 앉는 예절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는 또 많은 사회적인 예의에 영향을 주었고 주택내부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 사람들은 방바닥에 앉는 것이 관례였고 이로 인하여 방 중앙에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어야 했다. 의자를 사용한 후에는 탁자가 생기게 되고 탁자는 식사와 독서의 중요한 가구로 부상했다.
옛사람들은 앉은 자세가 낮아 사용하는 다기, 그릇도 받침부위가 긴 형태였다. 사용하기에 따라 달라진 그릇이다. 송나라 때에 와서 그릇들을 탁자에 놓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다기, 식기 등이 "키가 작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정교하게 변해갔다. 의자가 있기 전에 자세는 누구나가 지켜야 하는 행위규범이었다. 황제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지켜야 했다.
의자가 있고 나서부터 황제는 의자에 앉게 되고 대신들은 꿇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왕권을 강조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책상과 걸상. 이 쓰임이 얼마만한 큰 의식의 차이와 깊이를 갖는지 요즘 책상머리에서 알았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책상이 따로 없었다. 집에서는 밥상이 책상이 되고 방바닥이 책상도 되었다. 하지만 학교엔 비록 낡고 헐어서 볼품은 없었지만 그 당시로선 귀하다 할 엄연한 책상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책상에 올라서거나 마구 다루는 아이들은 큰 벌을 받았으며 책상 줄맞추는 작업도 숫하게 했다. 책상 속에 딱지나 구슬을 몰래 숨겨놨다가 걸린 적도 도시락을 꺼내 먹다 걸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기에 책상정리가 잘 안된 아이들은 용모검사와 더불어 꾸지람을 들었다. 짝꿍하고는 책상의 반을 못 넘어오게 경계표시를 하고 그로 투탁거리기도 했다. 책상얼굴을 보면 거의 대부분 반쯤 줄이 나 있고 곰보 투성이 었다. 그래서 책받침이 꼭 필요했다. 빳빳한 투명 책받침은 한자가 들어간 것도 구구단이 적힌 것도 있었고 황금박쥐 황금철인 로보트나 이소룡 신데렐라 같은 멋있거나 예쁜 모습들이 차지를 했는데 의외로 그 기억에 대한 추억이 쏠쏠하다.
훗날은 책상 한 구석에 예상 답을 적어놓아 빽빽한 컨닝 페이퍼 노릇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한 게 그나마 순진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책상 속은 늘 만화책이든 먹을거리이든 딴 짓을 하거나 음모를 꾸미기에 충분 했다. 체육시간에 책상 속을 뒤져 남의 도시락을 쥐 파먹듯 해치운 간 큰 당번도 있었으며 옆자리와 반의 경계를 그어 넘어오면 뭔 욕심이라고 토닥거리기도 했다.
벌을 받을 때는 책상위에 올라 종아리를 걷었고 교실 뒤로 나가 걸상을 들고 벌을 서기도 했다. 청소를 할 때 걸상을 책상위에 올리고 뒤로 쭉 밀어놓고 청소를 한다. 그리고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고 줄을 맞춘다. 선생님은 엉터리 청소를 금세 알아차리고는 어느 때는 다시 하라고 호령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애꿎은 책걸상이 골병이 들었다. 골 병 들다 부러진 책걸상은 건물 뒤 창고에 수북이 쌓였다. 나는 이를 불쏘시개로 쓰는 것을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이는 책상이란 엄격한 자리이며 처신이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자세 똑바로 못해! 그 소리가 여전히 쟁쟁하다. 당시 걸상은 늘어지지 못하도록 고딕 형식의 바른 모습이었다. 책상에 앉으면 차분히 정리를 하게 되고 집중을 하게 된다.책상과 의자는 바로 또 다른 행위규범인 셈이다. 자세는 비단 예절 뿐 아니라 행위규범으로부터도 크게 얻는다. 나는 요즘 글을 쓸때 반은 책상에서 하고 반은 쪼그리고 앉아서 쓴 글을 다시 살핀다. 사고가 필요하다 싶을 때는 책상의 규범을 준수하고 사고의 혼돈을 잠재울 때는 마치 기도하듯 무릎을 꿇는 자세가 효과적이다.
이는 그런 의식으로 살아온 세계의 산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문화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이고 나 역시도 그 문화 속에서 묻어난 한 숨결이다. 아무렇든 내게 주어진 책상과 걸상은 행위 규범으로서도 삶의 가치로서도 당당히 존립하며 곳에 머무는 그 자체가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물체로 치자면 질박한 나무 조각에 불과할 뿐인데 오늘도 나는 곳에서 한 시대를 쉽게도 넘나든다. 책상과 걸상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늘 곁에 존재할 지킴이인 셈이다. 나는 오늘도 녀석들을 믿고 어린 시절 그대로 문명이란 세상과 만나고 있음이다.
첫댓글 유독 모습과 이름이 생각나는 한 남학생이 있어 친한 친구들한테 알아본 결과, 3학년 때 나의 짝꿍이었더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책상과 걸상을 같이 썼고 구시장에 살아 하교도 같이 했던 때도 있었으니 그렇게 그렇게 기억이 났었구나...^*^......근데 난 책상에 금을 그어본 적은 없구 000 남학생이 도나스라고 놀리며 걸상을 뒤로 빼 엉덩방아를 찧는 일이 많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