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31-32장 언약의 땅으로 귀향) |
32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고 하십니다. 고향으로 자기의 ‘길’로 향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와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길(다르코,דרכו)’은 어느 특정한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이십여 년간 라반과 함께 있었고 그리고 좀 전까지도 라반에 의해 위협과 화해의 계약을 치르고 라반이 떠난 후의 ‘그 자신만의 단독적인 길’을 의미합니다.
삼촌 라반에게 향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부리는 천사들을 통하여 야곱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28장 후반부 참조). 이러한 천사들의 찾아오심은 앞으로 야곱의 진로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을 것임을 약속하는 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자손들과 언제나 동행하십니다. 이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본 야곱은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합니다(2절). 여기서 ‘마하나임’은 ‘천사의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28:15과 동일한 천사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고자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이 혼자서 가도록 버려두지 아니하고 많은 천사의 무리를 보내어 동행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하나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 ‘마하나임’은 ‘마하네מחה’(군대)의 쌍수형이며, 정확한 뜻은 ‘두 군대’, ‘두 진영’이란 뜻입니다. 이는 한곳에 머무르는 진영이 아니라 움직이는 진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모든 여정과 함께 동행하며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에서도 함께 하는 그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즉 야곱과 줄곧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두 진영’이라는 것은 앞뒤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을 전방위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부터 외삼촌 라반에게 떠날 때 천사들이 그를 도왔던 것처럼(28장 참조) 그가 돌아올 때도 역시 이들이 야곱을 만나 위로한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위험을 벗어나자마자 더 큰 생명의 위험이 그를 위협할 것이지만 이들 천사들의 출현은 야곱을 계속적으로 보호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라는 세상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종교를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찾아서 믿고 따르며 만들어진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본문처럼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찾아오시고 진리로 믿게 하셔서 따르도록 하시는 종교입니다. 이로 인해 믿게 되는 예수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만이 존재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믿게 해주시고 그의 은혜와 긍휼로서 천국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의 가치. 십자가의 가치가 나에게, 백 데나리온의 가치인지 일만 달란트의 가치인지는 각자의 신앙 양심으로 확인하셔야 합니다. 롬5장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십니다. |
3절부터는 야곱이 형 에서와의 만남의 장소로 향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서도 에서를 두려워하며 또 인간적인 계책을 꾸밉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사자를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3절) 재물을 주고 은혜받기를 원하였으나(4,5절), 앞서간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6절)라고 전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형으로 생각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자로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생명을 부지하고자 ‘내 주’라고 하며 다가갑니다. 형 에서에게 다가가면서 열조의 하나님과 벧엘의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야곱은 그만큼 형으로부터 자비를 베푸는 은혜를 간구함과 동시에 절박하며 두려움이 깔려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종들로 하여금 앞서 가서 형 에서를 만날 때 할 말을 입에 넣어주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십여 년 전 에서에게서 도망하고 피했다는 자신의 이미지보다는, 어쩔 수 없이 외삼촌의 집에 가서 거기서 머물렀음을 강조하여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4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류하며’와 ‘머물러 있었사오며’는 잠시 머물렀다는 것과 그리고 일찍 오려고 했었음을 드러내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래 계획과는 달리 아내 레아와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 라반과의 계약으로 인해 6년 도합 20년을 라반 집에서 지체하며 머물렀음을 종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로 다가온다는 소식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7절의 ‘답답하여’는 내리누르는 중압감으로 마음이 괴롭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더 가까운 위험을 느낀 나머지 야곱은 모든 소유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고 계략을 짭니다(7,8절).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야곱은 조금 전 만난 하나님의 군대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와 동행하는 것을 보고서도 재물로서 형 에서의 마음을 사서 은혜를 입으려는 인간적 계략으로 사자를 앞서 보낸 것입니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과거 이십여 년 전 벧엘에서 만나 주셨고,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하란에서 함께 해주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작전을 짠 자신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장면이 있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사백 명의 군사 앞에서도 뒤로 물러가거나 도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방법과 또 한편으로는 벧엘의 하나님께 의지하며 간구하면서 앞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얍복강’과 이름 ‘이스라엘’ 그리고 ‘브니엘’로 이끄시고 향하게 하시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언약자손에게 또 한 번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을 한 모세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이 광야로 나가면서부터 당장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고 위험에 노출됩니다. 애굽의 군대가 뒤따라 왔으며 아말렉 군대가 앞을 가로 막았으며 사막의 많은 위험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원망을 하며 한때 먹을 것은 염려하지 않았던 애굽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애굽을 향해 뒤로 돌아간 자는 없었고 모두 약속의 가나안 땅을 향했습니다.
언약자손 야곱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만을 의지하고 계속 아버지께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그는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써서 에서의 은혜를 입으려고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아버지 이삭도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여 목숨을 유지하고자 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저들을 보호하시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올립니다.
본문에서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에서 ‘~치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카(גכה)’인데 이는 사역형 능동으로 쓰여 ‘때리다’, ‘공격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좀 더 강한 의미로 쓰이면 ‘갈기갈기 찢다’(시3:8), ‘죽이다’(4:5/출2:12)라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우리는, 야곱이 에서가 그의 소유물을 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고 모든 재산을 약탈하는 것까지도 상상하며 우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 변곡점 단어가 바로 ‘사백 명’입니다. 그래서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는 피하리라고 두 떼의 간격을 벌립니다.
그리고 야곱은 동시에, 지난 이십년 전 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던 때에 벧엘로 찾아오셔서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말씀들이 기억되면서,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쎌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9~12절)라고 간구합니다.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벧엘에서 세워주신 언약대로 에서의 손에서 건져내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여호와가 벧엘에서 자기에게 언약하신 분이심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씀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할 의무가 있음을 밝히고자 ‘여호와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벧엘에 나타나셔서 언약하신 내용을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그 언약대로 이루어 달라며 여호와께 강력히 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언약에 근거하여 간구하며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인데 뜻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입니다. 언약대로 이루시고자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단지 정하신 때의 차이일 뿐입니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에 대하여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라고 합니다. 이는 ‘제게는 너무 과분합니다’(바른성경번역),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새번역성경), ‘가장 작은 것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킹제임스흠정역) 등의 뜻입니다.
이는 곧, 야곱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넘치는 인자와 진실하심에 비하면 작은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야곱 자신은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받아 누릴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너무도 작고 나약하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짧은 말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두 무리가 되도록 크신 은총을 베푸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사백 군사에서도 구해 달라고 하는 간구를 이어서 계속 합니다.
야곱은 11절에서,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라고 하며 연속하여 두 번의 형의 손을 거론하면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에서의 군사력과 그의 힘을 표현합니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는 절박한 기도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형의 보복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야곱이 결사적으로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절박한 간구의 결론으로 12절에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언약을 상기시키는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그렇게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일하실 때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제 일어나셔서 자신의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달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간구는, 에서가 자기와 처자를 칠까 두려워하여, 한편으론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또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려고 에서로 하여금 야곱을 향하여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에서는 동생 야곱을 도우려고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데 동생 야곱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사백 인이 두려움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시려고 에서로 하여금 야곱을 향하여 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하셨으면, 야곱이 조상의 땅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에서가 쫓아오지 못하게 하시면 좋은데 도리어 에서로 하여금 쫓아오게 하신 것은, 야곱에게 시련을 주어 하나님께 의지하고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아니함을 깨닫게 하시고자 간구하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자손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시련을 주십니다. 그래서 언약 자손은 시련도 복으로 생각하고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형의 위협을 당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은, 이십여 년 만에 부자가 되어 조상의 땅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하지 아니하게 하시고자 그렇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언약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자상하고 세심하신가를 알게 하여 줍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사랑에 대하여 하나님과 야곱의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 자기를 잊어버리고 의지하지 아니하면 시련을 주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가는 백성에게는 기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 이상 행복한 삶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13절부터 20절까지는 야곱이 에서를 위하여 많은 예물을 앞서 보내어 주는 내용입니다.
간구를 한 야곱은 거기서 밤을 지내며 묵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서 자기의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따로 구분하는데(13절), 양과 염소 그리고 낙타와 소와 나귀 등 여러 종류의 가축들로 준비합니다(14,15절).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해 예물을 택하여 여러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거리’를 둡니다(16절).
여기서의 ‘거리(상거)’는 어떠한 상황에 닥쳐서도 숨돌릴 만한 여유가 있는 거리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 벧엘 언약을 가지고서 간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여 계속된 불신과 불신앙적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을 결코 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해하여 죽이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벧엘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28:15)라고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 할 때에도 막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여호와께 간구를 하면서도 인간의 생각과 수단을 버리지 못합니다. 택한 백성은 절대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주어질 때에 담대하여지고 걱정이나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은 인간에게서 담대함은 물론 평안함과 기쁨을 모두 상실하게 합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차있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되고 되지 않고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습니다. 야곱이 살고자 형에게 아첨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자 계획하셨으므로 살리는 것입니다.
생사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를 주장하시는 여호와 전능자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참 신앙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줄 예물을 각각 여러 떼로 나누어 종들에게 맡기고 에서를 만났을 때에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할 것을 지시하여 줍니다. 즉 예물의 출처와 주인은 야곱이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17,18절). 이렇게 둘째와 셋째와 각 떼로 나눈 모든 종들에게 지시를 하는데 이렇게 하는 야곱은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19,20절).
위 본문에서 ‘형의 감정을 푼 후에’라고 하는 것을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내가 그의 얼굴을 가리울 것이다...그리고 그 후에’입니다. 즉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줌으로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은, 예물로 피해자의 눈을 덮어 가해자를 보지 못하게 하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물로 형 에서의 분노가 풀리기를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 주리라’는 말은 ‘그가 나의 얼굴을 들어 올릴 것이다’라는 뜻인데 이는, 형이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려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함으로 그를 죄인된 위치에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이 이름대로 반드시 언약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믿지 못하는 야곱은 두려울 뿐만 아니라 생각도 매우 복잡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살기 위한 꾀를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종들에게 지시한 내용은 아주 그럴듯한 것 같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적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과 걱정을 놓지 못하여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의 감정이 풀리거나 풀리지 않는 것이 야곱의 수단과 방법, 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꾀와 이삭의 꾀 역시 그것으로 위기를 면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한 것이 아니라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어리석고 비열한 생각을 가지게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은 지혜롭고 담대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21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가족과 소유를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네고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하며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축복을 요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받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줄 선물들을 자신보다 앞서 건네고 자신은 장막에서 그날 밤을 지내다가(21절), 그 밤에 일어나 자기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자기의 소유도 건너게 한 후(22,23절), 홀로 남아 머뭅니다. 자신은 더 진행할 담력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진행하지 못하고 홀로 남게 되는데,
그때에 벧엘의 하나님께서 또 야곱에게 다가와 주십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4,25절). 본문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홀로 남은 야곱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 이 두려움 속에 있을 때 찾아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실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즉 언약대로 보호하셔서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통해 야곱으로 믿도록 하시기 위함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야곱 개인에서 민족으로 전환되는 역사를 드러내시고자 하심입니다. 이 은혜 언약은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야곱을 거쳐 이제 민족으로 이어가고자 씨족 부족으로 연결하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언약’에 대해서 좀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은혜언약’을 성경은 다른 표현으로 ‘복’이라고도 하며 이를 ‘절대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먼저 은혜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담이 여호와의 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죄로 인해 사영체(死靈體)가 된 그에게 동물을 죽여서 만드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복’의 실체와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에 대조되는 것이 ‘상대언약’ 혹은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행위언약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해야만 이루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율법 조문에서 계명과 율례 등이 행위언약입니다. 하지만 상대언약이나 행위언약이 은혜언약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속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율법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율법이 수여되는 시점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게 한 다음 시내산에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순서를 정리하면, 먼저 은혜언약으로 출발하여 행위언약이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자(어떤 사람)가 야곱을 찾아와서 야곱과 씨름하십니다. 그리고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25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의 부리는 종이 인간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인생이 하나님의 사자를 이깁니까? 이들 하나님의 사자 혹은 천사들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부리시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대신 행하는 자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성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 그리고 그 성을 불로 멸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25절 본문이 전해주시는 말씀은 곧, 죄인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꺾거나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를 칩니다.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므로 어긋나고 야곱은 그로 인해 절게 됩니다(31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며, 자신은 죽은 존재다는 것이 인정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야곱 스스로는 안되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안되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셔서 대신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몸은 죽이고 그의 영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야곱이 절게 되므로 이제 꼼짝도 못하며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이후의 야곱은, 뒷 꽁무니에서 자신만 살고자 하던 모습에서(32:20) 가장 앞으로 나서게 됩니다(33:3).
이 ‘허벅지 관절(환도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절)라고 말씀하시고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32절)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을 신학자들은 남자의 힘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하며 또는 남자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부분으로서 생(生)의 원천을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이므로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요 은혜의 가시가 됩니다(고후12:7~10/갈6:17 참조). 곧 ‘위골되었다’는 것은 곧 〈자신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의 육은 죽고 예수님의 의로 영은 살아서 예수께서 주시는 새 몸을 입고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나로 가게 하라”(26절)고 하는데 이에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주의 사자는 야곱의 요구에 답은 하지 않고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27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축복을 구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이름을 물으며 갑자기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야곱의 바뀐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28절). 이에 야곱은 주의 사자에게 청하기를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29절).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이름은 말하지 않는 그 사람은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합니다. 여기서의 ‘축복’은 앞서 주의 사자가 야곱에게 바꿔준 이름 ‘이스라엘’이 축복이며, 이 이름이 야곱이 앞서 26절에서 요구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덧붙혀서 이름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해 주십니다. “너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과 겨룬 자들은 곧 하나님과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야곱은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30절)고 하여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지만 인생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셔서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예표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을 축복하며 이름을 개명하여 ‘이스라엘’이라 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축복의 장소를 ‘브니엘’로 화답하며 죽었던 자가 살아났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으므로 그곳을 기념하여 ‘브니엘’이라 한 것입니다. 이는 장차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이 직접 대면하는 살아가는 곳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요구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가요?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축복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얼굴로 대면했으나 생명이 보존되는 특별한 인생들의 무리입니다(민23:9 참조).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서도 죽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뿐입니다. 여기서 야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셔야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택하심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나라에 대한 계승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에서에게로 가는 야곱에게 또 찾아와 주셔서 위와 같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개명입니다.
‘이름’은 성경 역사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하신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름으로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는 이름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야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고 이 이름대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새 이름 그것은 곧 위로부터 오는 재창조의 행위를 뜻하며 이는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생명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그리고 ‘임마누엘’로 오신 것입니다.
한편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명명자(命名者)에게 통치권과 소유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이스라엘의 통치와 소유는 그 이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속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싸우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들을 대신하여 싸우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전쟁을 뜻합니다(출17:16 참조).
하나님은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열두 아들을 주시고 이들을 애굽과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대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다윗 왕으로 하여금 하게 하심으로 성취하십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자들’ 입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드디어 해가 돋는데 그때 야곱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며 걷습니다(31). 야곱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주의 천사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절개되면서 걷게 되고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 즉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은 먹지 않습니다(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