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옥헌원림, 죽림재, 수남학구당, 식영정 등을 둘러보고 송강정으로 차를 돌렸다.
물빛이었던 하늘도 점점 맑아졌지만 습한 바람은 그칠 줄 모르고 등줄기에 땀골을 만들어 놓는다.
명옥헌부터 열림 땀샘은 시원한 승용차안에서만 잠시 닫히고 차 문을 열고 내려서면 안경알부터 뿌옇게 변하는
지독한 습기에 다시 열려 몸과 마음은 지쳐가기만 한다.
차라리 땡볕이라도 푹푹 내린다면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련만 무심한 하늘은 바람조차 쉬게 만들고 있다.
대사헌이 된 송강 정철이 동인의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난 후 어릴적 살던 담양으로 내려온 것이 50세때인 1585년.
이미 그 전에 진도군수 뇌물사건으로 동인파의 탄핵을 받아 40세때 낙향, 4년간 창평에서 지낸 적이 있으니 이번이 두번 째이다.
낙향하여 정철은 이곳 송강정 자리에 죽록정이라는 초막을 짓고 은둔의 시간을 보낸다.
10여 년전에도 낙향하여 4년 세월을 보내다 선조의 부름으로 다시 올라 갔으니 이번에도 한 4년 지내면 선조가 다시 부르리라.
그러나 그때 정철의 나이가 50세 였으니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차라리 이곳 죽록정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이 후세에 악역으로
이름을 떨친 정치인보다 문인으로서 가사문학의 대가로 칭송받고 사랑받는 정철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에 아쉬움 가득이다.
<성산별곡>을 노래하며 서하당 김성원의 삶이 부러웠다면 선조의 부름이 있었더라도 정철은 기축옥사의 칼자루를 잡지 않고
송강정에 머물려 서하당과 식영정을 오가며 후학을 기르고 시를 읋으며 신선같은 삶을 살았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상에 있을 때 아름다운 퇴장보다 권력욕을 더 향유하려는 마음은 권력의 맛을 본 사람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인것은 틀림없다.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송강정은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274번지에 있다.
입구에 넓다란 주차장과 화장실도 구비되어 있어 아주 편하게 찾고 오를 수 있다.
송강 정철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아닌 내가 정확한 판단을 내려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는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문인으로서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복수의 화신 정철이란 상반된 얼굴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여기서는 2번에 걸친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서 드러난 중앙으로의 복귀욕구가 결국
정여립사건으로 촉발된 서인에 의한 동인의 대숙청과 관계된 것으로 보여 그 부분만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로 한다.
우선 송강 정철에 대한 나이별 약사를 이해를 편하게 하기 위해 표로 만들어 보았다.
표의 노란색부분이 정철이 담양 창평에 있던 시기로 58세의 일생동안 18년을 담양에서 보냈으며 사춘기인 16세때 부친을 따라
창평에 와서 27세에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머물며 인격수양과 학업에 전념하였고, 모함이나 탄핵 등으로 관직을 버리고 4년씩
2회에 걸쳐 다시 창평에 내려온 송강 정철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담양 창평과 고서.
<성산별곡>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인 25세때 발표되었다고 하나 사실데로 믿기엔 부족함이 있다.
자신의 신세를 빗대 신선같이 지내는 서하당 김성원을 부러움반, 시샘반으로 글을 썼기에 아직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부에
진출도 않았고 각종 정쟁에 휘말리지도 않은 청년 정철이 그러한 시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으로 40세에 처음으로 낙향하여 약 4년간 머물던 시절에 쓴것으로 보여진다.
년도 | 나이 | 임금 | 약 력 | 담양 낙향 |
1536년 | 1세~ 9세 | 중종31 | 서울 장의동 출생, 인종의 후궁인 누이와 계림군의 부인인 막내 누이로 어렸을 때 부터 궁중출입이 잦았으며 동갑인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도 친하게 지냈다. | |
1545년 | 10세 | 명종1 |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부친과 맏형이 유배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 | |
1547년 | 12세 | 명종2 |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부친이 맏형이 다시 유배되었고 정철은 부친과 유배지에서 생활, 맏형은 장형으로 유배중 사망 | |
1551년 | 16세 | 명종6 | 명종의 원자탄생으로 부친 유배해제, 조부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창평으로 부친과 같이 낙향하여 과거 급제때까지 10년간 보내며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김인후,송순,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운다. | 10년 (성산별곡) |
1552년 | 17세 | 명종7 | 문화 유씨 강항의 딸과 결혼. 이후 4남2녀를 둔다. | |
1560년 | 25세 | 명종15 | 성산별곡 | |
1561년 | 26세 | 명종16 | 진사시1등 합격, | |
1562년 | 27세 | 명종17 | 문과별시 장원급제후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 좌랑.현감,도사, 함경도 암행어사 | |
1566년 | 31세 | 명종21 |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됨, 함경도 암행어사 | |
1567년 | 32세 | 율곡 이이와 더불어 호당으로 선출.이어 수찬,좌랑, 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 | ||
1570년 | 35세 | 선조3 | 부친상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시묘살이. | |
1573년 | 38세 | 선조6 | 모친상으로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 |
1575년 | 40세 | 선조8 | 시묘살이 끝내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 성균관사성, 사간등을 거쳤으나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에 휘말려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여 4년간 지냄. 선조로 부터 수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사양. | 4년 |
1578년 | 43세 | 선조11 |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진출. 그해 사간원대사간에 제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파의 탄핵으로 다시 창평으로 낙향. | |
1580년 | 45세 | 선조13 |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그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등 16수를 지었다. | |
1583년 | 48세 | 선조16 | 예조판서,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음 1585년 사직하고 창평으로 돌아가 4년을 보냄 | 4년 (속미,사미인곡) |
1585년 | 50세 | 선조18 | 고향인 창평에서 4년간 은거생활을 하며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 |
1589년 | 54세 | 선조22 |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우의정에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 최영경등 동인들을 관계에서 추방 | |
1590년 | 55세 | 선조23 | 좌의정과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짐 | |
1591년 | 56세 | 선조24 |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로 동인파의 거두 영의정 이산해와 광해군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혼자 광해군 책봉을 건의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되어 명천,진주,강계로 유배 | |
1592년 | 57세 | 선조25 | 임진왜란 발생하자 귀양에서 풀려 평양에서 왕과 함께 의주까지 동행. 경기도 충청도 체찰사 | |
1593년 | 58세 | 선조26 |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뒤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했다. |
송강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송강정은 송강 정철의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770년에 세운 것으로, 죽록정으로 불리던 것을 송강정이라 고쳐 불렀다.
송강 정철은 50세때 동인의 탄핵을 받아 두번 째로 낙향하여 이곳에 초막을 짓고 식영정과 서하당 등을 오가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만들었다.
<사미인곡>을 제작한 연대는 창평으로 돌아온 해인 1585년으로부터 2∼3년 뒤이며 제명 그대로 임금에 대한 충성을 읊은 노래이다.
임금을 사모하는 심경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사에 비겨 자신의 충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아름다운 가사문학의 정취가
배어나는 글이지만 동인의 탄핵으로 본의 아니게 정계에서 쫓겨나 실의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고 음주와 한탄으로 세월을 보낸
정철이 <사미인곡>을 쓰면서 선조의 신임을 받아 중앙으로의 복귀를 노렸을 수도 있다.
송강정에 머물던 4년은 정철을 가사문학의 절정으로 이끈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만들어 냈으며,
여기서 고서 식영정과 서하당을 오가며 김성원 등과 두터운 우정을 쌓고 문인으로서 절정에 다다랐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서시 : 임과의 인연)
이 몸이 태어날 때 님을 좇아서(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함께 살 인연이며 하늘이 모르던 일이던가
나 오로지 젊어있고 님도 오로지 날 사랑하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견줄 곳이 다시 없다
( 서시 : 이별후 임에 대한 그리움)
평생에 원하건데 임과 함께 살아가자 하였더니,
늙어서는 무슨일로 멀리 보내고 그리워 하는가
엊그제 님을 모시고 달나라의 궁궐에 올랐더니
그 동안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왔는가
올 적에 빗은 머리 얽힌지 삼년이 지났구나
연지와 분이 있지만 누구를 위하여 곱게 치장할 것인가
마음에 맺힌 설움이 겹겹히 쌓여 있어, 짓는것이 한숨이오,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끝이 있는데 근심은 끝이 없구나
( 서시 : 세월의 무상함)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구나
더웠다 서늘했다하는 계절의 순환이 때를 알아 가는 듯 돌아오니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느끼는 일도 많기도 하구나
(봄의 원망 ; 매화를 꺾어서 임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내니
창 밖에 심은 매화 두 세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차갑고 답답한데 몰래 나는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의 달이 좇아 배개 맡 머리위에 비추니
흐느끼는 듯 반기는 듯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 꺾어내어 님 계신곳에 보내고 싶구나
님이 너를 보고 어떻게 여기실고
( 여름의 원망 ; 옷을 지어 임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
꽃이 떨어지고 새잎이 나니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 그늘이 깔려있는데, 비단 포장은 쓸쓸히 걸렸고,
수놓은 장막 속도 비어있다.
부용(연꽃)으로 만든 방장을 걷어 놓고 공작 병풍을 둘러두니
가뜩이나 시름이 가득한데 날은 어찌 이리도 길던가
원앙으로 만든 비단을 베어놓고 오색실을 풀어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 임의 옷을 지어내니
솜씨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격식도 잘 갖추어져 있구나
산호로 만든 지게를 위에 지고 백옥으로 만든 함을 담아두고
님에게 보내려고 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산인가 구름인가 험하기도 험하구나
천만리 되는 길을 누가 찾아 갈까
이것을 열어보고 나만큼 반기실까
( 가을의 원망 ; 임금의 선정을 갈망하는 마음)
하룻밤 서리가 내린 후 기러기 울 때
높은 누각에 혼자 앉아 수정알로 만든 발을 걷으니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북쪽 끝쪽에 있는 별이 보이니
임이신가 반기니 눈물이 절로 난다
맑은 달빛을 쥐어내어 봉황루에 부쳐 보내고 싶구나
누각 위에 걸어두고 온 세상을 다 비추어 깊은 두메 골짜기까지
낮같이 환하게 만드소서
(겨울의 원망; 임에 대한 그리움)
온 세상이 추위 때문에 생기가 없고 흰 눈이 일색으로 덮여 있을 때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날짐승의 날아다님도 끊어져있다.
소상강 남쪽도 이렇게 춥건만은 임금이 계신 곳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따뜻한 봄기운을 부치어 일으켜 내어 임이 계신 곳에 쐬이고 싶구나
초가집 처마에 비친 해를 궁궐에 올리고 싶구나
붉은 치마를 여미어 입고 푸른 소매를 반만 걷어 해는 저물었는데 밋밋하고
긴 대나무에 기대어 있으니 근심이 많기도 하구나
짧은 해가 넘어가고 긴 밤을 꼿꼿히 앉아
청사초롱을 걸은 곁에 공후를 놓아두고(그냥 전을 빼고 공후라고 하면 된다)
꿈에나 님을 보려고 턱 받치고 기대어 있으니
원앙새를 수 놓은 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이밤은 언제나 셀 것인가
(결말 : 임에 대한 변함 없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