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朱子學)의 거유(巨儒)>, <도학(道學)정치의 대로(大老)>,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평가는 그를 일컫는 칭호만큼이나 각도를 달리한다. 그러나 어찌했든 그는 조선조 5백년 역사에 우뚝 선 거인(巨人)이다. "조선조 왕조실록(王朝實錄)에 한 사람의 이름이 3천 번 이상 나오기는 오직 우암(尤庵) 뿐"이라는 사실과, 전국 42개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겪은 조선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내건 반도소국가주의(半島小國家主義)의 비루한 국시를 3백년 만에 내던지고 북벌(北伐)-만주(滿洲) 옛터전 수복-대륙대국가주의(大陸大國家主義)의 이상을 되찾았던 감격의 효종 10년 통치를 지나, 방향을 잃은 민족 에너지가 자체분열의 당쟁(黨爭)으로 빠져들어 망국(亡國)으로 끝맺는 정체기에 들 때까지 우암(尤庵)은 이 나라 정치와 학계를 30여년간 한손으로 쥐고 흔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당쟁(黨爭)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싸움에서 북벌(北伐) 이상의 국사(國師)였던 우암(尤庵)은 노론당파(老論黨派)의 영수로 떨쳐졌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되던 학문도 주자(朱子)의 해설(解說)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게 됐다. 더우기 야만 만주(滿洲)왕조에 대한 적개심이 숭명(崇明)의 사대모화(事大慕華)의식으로 나타나 만동묘(萬東廟)를 이룸에 이르러서는 그에 대한 평가는 또 한 번 굴절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은진송씨(恩津宋氏)가 배출한 가장 큰 인물이다. 사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사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선조 40년에 태어난 우암(尤庵)은 인조 11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 벼슬길에 올라 인조ㆍ효종ㆍ현종ㆍ숙종의 네 임금을 섬기며 병자(丙子)ㆍ정묘(丁卯) 양 호란(胡亂)을 겪고 서(西)ㆍ남(南)ㆍ노(老)ㆍ소(少) 분당의 난세(亂世)를 살았다. 그 가장 득의의 시기는 효종의 10년 통치기간이다. 북벌(北伐)의 이상을 세운 효종이 우암(尤庵)을 오른팔로 삼아 나라 힘을 한데 모으면서 그는 정계의 제 1 인자가 됐다. 성균관(成均館) 문묘에는 역사상의 석유(碩儒) 18현(賢)이 배향되어 있다. 그중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배향되기는 광산김씨(光山金氏)(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와 은진송씨(恩津宋氏)(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ㆍ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뿐이다. '송씨상계보(宋氏上系譜)'에는 우리나라 모든 송(宋)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당(唐)의 호부상서(戶部尙書)였던 송주은(宋柱殷)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귀화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후 고려 때 그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이 유익(惟翊)(여산군(礪山君)). 천익(天翊)(은진군(恩津君)), 문익(文翊)(서산군(瑞山君)) 등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번성, 우리나라 송씨(宋氏)의 3대 산맥을 이룬다.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이들 3형제 중 둘째 송천익(宋天翊)의 후손이다. 그러나 송천익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는 바람에, 고려조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여산(礪山)><은진(恩津)><서산(瑞山)>등을 본관으로 하는 세 집안은 본관만 다를 뿐 그 뿌리는 같다는 것이 송씨(宋氏) 문중의 일반적 견해다. 때문에 송씨끼리는 본관이 달라도 통혼하지 않는다.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조선조에 문과급제 75명, 무과 80명, 정승 2명, 대제학 1명, 경연관 12명, 열사 21명, 효자 9명 등을 냈다. 그러나 은진송씨(恩津宋氏)는 벼슬보다는 학문을 중시한 유반(儒班)으로서 문집(文集) 등 저술을 남긴 사람만도 2백 31명이나 되었다. 조선 중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대사헌(大司憲)ㆍ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한 송인수(宋麟壽),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강화성(江華城)이 포위되자 자결한 충신 송시영(宋時榮) 등은 조선 초기에 가문의 맥을 이어온 인물들이다. 송경창(宋慶昌), 송시승(宋時昇), 송유관(宋有觀)은 판관(判官) 송세웅(宋世雄)의 자손들로 한 집안에서 3대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음으로써 은진송씨(恩津宋氏)의 뚜렷한 효맥(孝脈)을 이루었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은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당대를 대표했던 성리학자(性理學者)였다. 효종 때 집의(執義)로 기용되어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청서파(淸西波)의 집권을 가져오게 했다. 한편 효종의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했으나 김자점이 청(淸)에 밀고함으로써 실패, 벼슬에서 물러났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대사헌(大司憲), 병조(兵曹),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으나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당쟁이 격화되자 곧 사퇴하고 낙향, 학문연구로 여생을 마쳤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학문적 경향을 같이하는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율곡(栗谷)의 학설을 지지했다.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은 13촌 숙질간(송준길이 숙(叔))으로 두 사람 모두 사계(沙溪)문하에서 동문수학, 다 같이 학자로서 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老論)의 쌍벽으로 문묘에 함께 배향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송규렴(宋奎濂)(숙종조ㆍ예조판서(禮曹判書))은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던 대문장. 그의 아들 송상기(宋相琦)도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조에 대제학(大提學)ㆍ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지내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유배지에서 숨졌다. 송명흠(宋明欽)(영조조, 찬선(贊善)), 송문흠(宋文欽)(영조조, 형조좌랑(刑曹佐郞)) 등 형제도 유명하다. 이들 형제 중 아우 송문흠은 문장과 서예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인상(李麟祥)과 함께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필로 꼽힌다. 이밖에 송덕상(宋德相)(정조조, 이조판서(吏曹判書)), 송환기(宋煥箕)(정조조, 우찬성(右贊成)), 송근수(宋近洙)(고종조, 좌의정(左議政)) 등이 조선 후기에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고종조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던 송병선(宋秉璿)은 을사(乙巳)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않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했다. 그의 동생 송병순(宋秉珣) 또한 을사(乙巳)조약이 체결되자 <토왜(討倭)>의 격문을 지어 전국 8도(道)에 돌렸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그는 일제(日帝)의 숱한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고고하게 절개를 지켰던 한 시대의 양심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