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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김씨(汎金氏)의 뿌리는 대보공 김알지이다. 신라국에서는 AD261년 12월 28일에 12대 왕인 석씨계(昔氏系) 첨해이사금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대보공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味鄒) 일명(一名) 미조(味照)는 온 국민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신라국의 경사일 뿐 아니라 범신라계 김씨의 영광이라고 하겠다. 이는 김씨로서는 첫째 왕이 된 것이다.
미추왕이 재위 22년 10개월간 덕으로써 선정을 베푸시다가 23년 10월에 승하하였다. 17대 내물이사금으로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53대 신덕, 54대 경명, 55대 경애왕등 박씨계 3왕을 제외한 왕이 모두 김씨이니 신라국 56왕 (박씨:10왕, 석씨:8왕, 김씨:38왕)중 38왕이 김알지의 후예이다. 이는 대보공의 후광(後光)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하는 일이며 범신라계 김씨는 김씨왕에서 분파되어 각기 파조를 세워 관향(貫鄕)을 정하였던 것이다.
※ 미추왕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선계로 볼 때 직계는 아니며, 다음에 나오는 동생인 말구가 직계이다.)
○ 제7세 말구(末仇) : 신라 13대 미추(味鄒)왕의 동생이고 14대 유례(儒禮)왕 8년 (291)에 각간(角干)이 되었다. 부인은 휴례부인 김씨이다.
1984년 12월 13일 회상사간(回想社刊) 한국인의 성씨일람표에 의하면 광산, 경주, 안동, 강릉등 각각 다른 성씨로 불리워지는 신라계김씨는 498본(本)으로 되어있다. 또 김알지 선원계보(金閼智璿源系譜)에 의하면 679본으로 되어있다.
이 양자의 통계가 정확한 것은 못 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가장 잘된 것이기에 광산김씨의 뿌리를 고찰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광산김씨는 신라계세(季世)에 난리를 피하여 광주지방에 세거지(世居地)를 정한 왕자 흥광(興光)을 시조로 하여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온 것이다.
평장동 전경
고려전기의 광산김씨 (태조∼의종)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인심을 얻어 918년 6월 궁예(弓裔) 휘하의 장군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통일왕조를 건설하였다. 왕건은 고구려(高句麗)의 계승자(繼承者)임을 자처하고 북진정책을 써서 청천강(淸川江)까지 국경을 넓혔고 개성(開城)을 서울로 정하여 정권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뜻을 충분히 이루지 못하고 후대제왕(後代諸王)이 지켜야 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놓았다. 2대 혜종(惠宗)때의 외척 왕규(王規)의 난을 정종(定宗)초에야 진정시키고 4대 광종(光宗)의 개혁정치를 통하여 문벌귀족사회가 지속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유교적 정치이념하에 왕권이 안정되고 문치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송나라와의 문물교환이 활발해지고 글안(契丹)침략의 격퇴와 여진(女眞)정벌 등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민심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태평의 그늘에서 점차로 귀족계급의 전제가 심해짐에 따라 나라 안이 어지러워진데다가 태평환락(泰平歡樂)이 극성에 달했던 18대 의종(毅宗: 1146∼1170). 24년에 드디어 무신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들 무인들 사이에 정권쟁탈이 계속되기 시작했다. 우리 광산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통합할 때 3세 길(佶)이 왕건을 도와 민족통일의 왕업을 성공케한 공으로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은 삼중대광 사공을 지냈다.
그리고 최근 학자들의 논문에 의하면 3세 김길께서 중국사서인 책부원구(冊府元龜:중국의 사료집)의 외신부 조공조에 보면 "청태원년(934년) 8월에 고려조의 조공사 김길의 선박이 청주(靑州:지금의 山東省)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이는 김길이 후백제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태조를 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4세 준(峻)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 5세 책(策) 좌복야(정2품)와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오늘날의 장관급), 6세 정준(廷俊) 문하시랑 평장사(정2품), 7세 양감(良鑑), 8세 약온(若溫)과 의원(義元) 등이 대대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워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께서는 문종조에 급제하여 문종 24년(1070)에 간의대부 어사대사(정4품)를 거쳐 태복경일 때 송(宋)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가지고 돌아와 성현의 근원을 닦고 공자의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를 지내니 우리나라에 문묘(文廟)를 시작한 연원(淵源)이 되었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로 추앙받게 되었다.
문종 32년(1078)에는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호부상서(정3품)로서 접반사가 되었고, 문종 35년(1081)에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와 서경유수를 겸하였으며 선종 3년(1086)에 문하시랑 평장사를 거쳐 수태위(정1품)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현재 전북 고창에 있는 화동서원에 철향(주벽으로 모심)되어 있다.동방이학의 종사라 불리운 문안공 김양감의 아들이 두 분 있었는데 맏아들인 김약온(金若溫:8世)은 예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상의국어 봉어(정6품)부터 시작하여 지추밀원사와 참지정사를 거쳐 인종 원년(1122)에 수태부 문하시중 판호부사(종1품)에 까지 이르렀으나 성품이 공손하고 청렴하였으며 뒤에 이자겸이 정권을 휘두르는 그때였지만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남에게 교태를 보이지 않았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다.
문벌 귀족사회가 전개되면서 그 대표적인 문벌은 인주이씨로 문종때부터 인종때까지 80년간 세력을 잡았다. 문벌 귀족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이자겸은 우리 광산김씨의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던 김정준의 외손자이다.이 무렵 우리 광산김씨의 김의원(金義元:8世)은 문안공 양감(良鑑)의 아들로 문종조에 성균시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과 군기주부동정(정8품) 벼슬부터 시작하여 예종 4년(1109)에 병마판관이 되었고, 인종 4년(1126)에 동지추밀원사(종2품)로 발탁되었으나 이자겸의 실각으로 인척이라 하여 양주로 좌천되었고, 인종 10년(1132)에 공부상서 수대호부사를 받으시고 늙어서 집에 돌아오니 호부상서겸 삼사사를 제수하고 금자광록대부(정2품)에 특진으로 가자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으시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마침내 무신들은 의종 24년(1170)에 정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
켜 문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김광중(金光中:9世)은 의종 17년(1163)에 급사중(종4품)으로 있다가 서북면 병마부사(정4품)로 승진되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실지를 회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집을 불사르고 그들을 몰아낸 뒤 그곳을 계속 지키려고 둔전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가 금나라의 항의를 받은 고려 정부명령으로 철수 하였다.
의종 24년(1170)에 간의대부비서감(정4품)과 상서우승(종3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중부의 난 때 몸종 박광승이 밀고하여 살해되게 하였다.
광중의 아들 김 체(金 체:10世)는 순안현령(종5품)이 되었는데 마침 배순석이 군사를 모집하므로 체가 군사를 훈련하여 접응하러 가다가 박광승이 제고사로 온다는 말을듣고 먼저 사람을 보내어울주로 가서 광승의 아비를 체포하고 또 광승을 잡아서 순안에 이르러 광승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체의 다음으로 김 위(金 位:11世)와 김주영(金珠永:11世) 형제가 있었는데 위는 황국인 송나라에서 상서령으로 추봉되었고 주영은 벼슬이 금오위중랑장 동정행대정(정5품)이었고,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상장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위의 아들 김광세(金光世:12世)는 벼슬이 신호위의 중랑장(정5품)인데 황국에서 상서우복야를 추봉받고 신호위의 대장군(종3품)에 추증되었다.
주영의 아들 김광존(金光存:12世)은 벼슬이 홍위위의 별장동정(정7품)이었고 이부상서겸 판예부사 상호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광세의 아들 김경량(金鏡亮:13世)은 금오위의 대장군(종3품)이었고, 문하평장(정2품)에 추증되었고, 광존의 아들 김대린(金大鱗:13世)은 금자광록대부(종2품) 예빈경과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고려후기의 광산김씨 (명종∼공민왕)
무인정권이 시작되자 제19대 명종(明宗)이 즉위했다. 그러나 정권은 여전히 무인들의 손에 의하여 전횡(專橫)되었다. 무신들은 약 20여년 정권쟁탈을 계속하다가 최충헌이 집권했는데 그동안 19대 명종, 21대 희종의 2왕이 폐위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23대 고종 등 4왕을 옹립(擁立)하는 등 무인들의 독재정치가 강행되었다. 최씨정권은 글안의 침략이 6차나 계속되는 고금 미증유(未曾有)의 국난을 당하였다. 이 때 우리 민족의 저력(底力)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고 30여년간을 줄기차게 항몽(抗蒙)을 계속한 것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불력(佛力)에 의존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조 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종 45년(1288)에 최씨정권이 타도(打倒)되고 24대 원종(元宗)이 즉위함으로서 친몽정책(親蒙政策)으로 전환되어 원나라에 복속(服屬)되어 신하로서의 충성을 하게 되고 민족의 자존심을 꺽이고 정치는 문란해졌다. 따라서 31대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좌절되어 원에 추종하는 사대부(士大夫)세력과 친명(親明)을 주장하는 신진세력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신진세력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을 계기로 친원파(親元派)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32대 우왕, 33대 창왕을 폐하고 34대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 4년(1392)에 양위(讓位)를 받아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단행하니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하고 이씨왕조(李氏王朝)가 개국(開國)되었다. 이와같이 어지러웠던 고려 후기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지조를 지텼고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도 무게있는 활약을 함으로써 명문으로서의품격을 유지해 왔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광산김씨들도 후손들의 수가 늘어나고 모두가 벼슬길에 올라 벼슬자리가 끊이지 않으니 평자사를 비롯한 여러 고관대작을 배출하게되니 일약 명문으로 자리를 잡게되고 이시기를 기점으로 분파가 되어 5대파의 파조가 생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에 많은 공을 세운 현조(顯祖)는 삼별초(三別抄)의 난에 순절(殉節)한 14세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 설암 김태현(金台鉉:15世)은 김 수(金 須:14世)의 아들로 문정공파의 파조이시다. 태어나면서 용모가 수려하고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다. 충렬왕1년(1275) 15세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사부(운자를 달아 지은 한문 시)의 걸출한 문장에 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충렬왕 32년(1306)에 지도첨의사사로 다시 원나라에 갔을 때 왕과 아들인 충선왕을 이간시키는 도당들의 흉계를 밝히고 돌아와서 충선왕이 복위한 후에는 판삼사사와 중찬등을 거치고 마지막에는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 대제학겸 전리사사(정1품)로 치사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정공 김태현의 부인은 고려왕족인 개성군 대부인 왕씨이다. 부인은 인자하면서 근엄하고 총명하여 가사처리에도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시어머니인 고씨부인을 향년 102세까지 극진히 모셨으며 부군인 문정공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까지 오르게 하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들 넷 모두가 문과에 급제, 국법으로 종신토록 국록을 받게 된 복 받은 부인이었다.
김주정(金周鼎:14世)은 문숙공파 파조이시다. 원종 5년(126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해양부녹사, 이부시랑을 거쳐 충렬왕 2년(1276)에 대부경 좌사의 대부가 되었다. 충렬왕 4년(1278)에는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대가 공물을 받는 것을 없애고, 김방경의 유배를 상소하여 풀어준 공으로 좌부승지(정3품)가 되었다. 충렬왕 7년(1281)에 원나라 세조가 2차 일본 정벌을 계획하자 여원연합군부원수를 지냈고 계속하여 여원연합군으로 일본을 침공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으며 나중에 광정대부 지도첨의사사(정2품)를 지냈으니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 연(金 璉:14世)은 양간공파의 파조이시다. 고종 42년(1255)에 시어사를 시작으로 내시문하록사, 병부시랑, 추밀원부사를 거쳐 형부상서(정3품)에 이르렀다. 충렬왕 1년(1275)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일본을 정벌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였다. 이때 어느날 저녁에 허리에 차고 있던 금어대(관직을 표시하는 황금주머니 모양)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해몽하기를 "몸에 있던 신장이 이미 갔으니 이제 이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로 벼슬길에 물러났다. 충렬왕 17년(1291)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끝내었으니 화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재 화상찬만 남아 있으며 원종 2년(1261)에 발행한 호적이 예안파의 유물관인 숭원각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정조 5년(1781)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전동에 있는 노산사(蘆山祠)에 철향 되었다.
김 규(金 珪:14世)는 낭장공파 파조이시고 낭장동정(정6품) 벼슬을 지냈다.
김 이(金 珥:14世)는 제안 황대전고를 지냈는데 충렬왕 33년(1307)에 광산김씨의 가장 오래된 문서인 광산현제영시서를 지었는데 그 글이 전해지고 있어 더 없이 다행스럽다.
만약 김이가 이때 광산현 제영시서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시조공의 세거지와 우리 광산김씨의 선계 세계를 잃어버릴 뻔도 했으니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김 영(金 英:17世)은 사온직장공파 파조이시고 고려말에 사온서의 직장(종7품)을 지냈으며 조선조에 공조참의(정3품)로 추증되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에 설단하였다.
김 심(金 深:15世)은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충렬왕 때에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와서 낭장(정6품) 벼슬부터 시작하여 밀직부사만호(종2품)를 역임하였다. 그 뒤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을 모시고 나온 공으로 찬성사(종1품)가 되었으며 그의 딸이 원나라의 왕후가 되니 원나라에서 고려의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14년(1327)에 왕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벼슬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화평부원군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 유(金 流:15世)는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문림랑 감찰어사 문하시중수문전 태학사(종1품)를 지냈다.
김사원(金士元:15世)은 양간공 연의 아들로 충렬왕 19년(1293)에 총랑(정4품)으로 김언을 국문할 때 공평한 판결을 내렸으며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첨의찬성사(정2품)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부인은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유(安裕 또는 安珦)의 딸이다.
김사형(金士亨:15世)은 양간공 연의 아들로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종2품) 벼슬을 지냈다.
김 진(金 ? :16世)은 정경공 사원의 아들로 충렬왕 33년(13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祭酒:정3품)로 통례문 부사를 겸하였고 충숙왕조에서는 정당문학(정2품),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거쳐 충혜 왕조에서는 지공거(과거의 총책)로 인재를 가장 많이 봅았고 충숙왕 2년(1333)에 작성한 호적이 있으며 시호는 장영(章榮)이다.
문정공 태현의 아들 4형제는 첫째가 김광식(金光軾:16世)인데 충렬왕 20년(129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총부의랑(정6품)을 지냈으니 그 후손을 의랑공파라 하고, 다음은 김광철(金光轍:16世)인데 충렬왕 31년(1305)에 문과 급제하여 관직이 삼중대광밀직사사(종2품)에 올라 화평군에 봉작되고 시호가 문민(文敏)이므로 그 후손을 문민공파라 이른다. 다음은 김광재(金光載:16世)인데 충선왕 5년(1313)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전리판서(정2품) 및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시호가 문간(文簡)이었으니 그의 후손을 문간공파라 하며, 다음은 김광로(金光輅;16世)인데 충숙왕 4년(1317)에 문과 급제하여 가안부녹사(정8품)를 지냈으니 그 후손을 녹사공파라 한다.
문숙공 주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이가 충숙공 심이고 둘째가 시중공인 유이다. 다시 심에게는 아들을 5형제나 두었는데 김석견(金石堅:16世)은 삼사좌사 상호군과 우정승(종1품)이며 화평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은 화평부원군파라 하며, 김승사(金承嗣:16世)는 충목왕 때 벼슬이 삼사좌사(종1품) 병마도원수를 지냈으니 그 후손은 삼사좌사공파이고, 김승진(金承晉:16世)은 벼슬이 상호군(정3품)을 지냈으므로 상호군파라 하며, 김승로(金承魯:16世)는 벼슬이 예조판서(정2품)을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예조판서공파라 부르며, 김승한(金承漢:16世)은 후사가 없었다.
문숙공 주정의 차자가 시중공인 유인데 유의 아들이 김백간(金伯幹:16世)으로 무후하였고, 다음이 김중간(金仲幹:16世)으로 벼슬이 상호군이며 동지밀직사사(정3품)이므로 그 후손은 밀직사사공파이고 다음인 김윤장(金允臧:16世)은 벼슬이 봉익대부 판도판서 밀직부사(종2품)을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판도판서공파라 부른다.
양간공 김 연(金 璉:14世)의 아들은 정경공 사원, 참지정사 사형이다. 사원에게는 장영공인 진 한사람 뿐이나 진은 아들 5형제가 있다. 아들 김광리(金光利:17世)는 공민왕 1년(1352)에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봉익대부 전리판서(종2품)를 역임했으므로 그 후손은 전리판서공파라 하고, 다음 김영리(金英利:17世)는 신현의 문인으로 삼은과 같이 성리학을 배웠고 공민왕 3년(1354)에 통의대부 판군기감사(정3품)를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판군기감사공파라 부르고, 김성리(金成利:17世)는 벼슬이 판전의사사와 통정원의 사온승(정6품)을 역임하였으므로 그 후손을 사온승공파라 하고, 김안리(金安利:17世)는 벼슬이 대사성을 거쳐 판도판서(종2품)를 역임하였으므로 그 후손을 판도판서공파라 하며, 김천리(金天利:17世)는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을 지냈고 조선조의 개국공신으로 원종공신록에 수록되었는바 그 후손을 밀직부사공파라 부른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이 쇠퇴하자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홍건적은 그러한 반란군의 한 무리였다. 이 홍건적의 난에 활동한 사람으로는 문정공 태현의 손자이며 문간공 김광재의 아들인 김흥조(金興祖:17世)는 수원과 해주의 목사를 지냈으며 중헌대부 군기감에 이르렀을 때 홍건적이 침입하였으니 이 때 임금을 호종하고 남행한 공으로 공신록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18년(1368)에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으로 있던 김 정(金 精:17世)과 더불어 요승 신돈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두 사람 모두 유배도중 몰래 죽엄을 당하였다.
같은 무렵에 문민공 김광철의 아들인 김회조(金懷祖:17世)가 통헌대부 판도판서 해양군에 봉해졌고 그의 동생 김도탁(金都卓:17世)도 광정대부(종2품)로 추증되었다. 김흥조의 아우 김윤조(金胤祖:17世)는 여말에 형과 같이 요승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형은 살해당하고 제주도로 은거하여 제주도의 입도조가 되었다.
녹사공 김광로의 아들이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순조(金順祖:17世)이고, 손자가 삼척부사를 지낸 김 조(金 眺:18世)이고, 증손자가 또한 전라 병마절도사를 김정무(金丁茂:19世)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내었다.
문숙공후로 화평부원군 김석견의 아들이 해양군으로 봉해진 김 수(金 粹:17世)가 있고, 그 아들이 또한 판도판서를 지낸 김조간(金祖?:18世)이고, 상호군 김승진의 아들은 3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적선(金積善:17世)이고 둘째가 문하시중을 지낸 김덕선(金德善:17世)이며 셋째가 경상감사를 지낸 김종선(金從善:17世)이며, 밀직사사 김중간의 맏아들 김덕룡(金德龍:17世)은 사복시사를 지냈고 그의 동생 김덕봉(金德鳳:17世)은 사의벼슬을 거치었으니 모두들 고려말에 우리 가문을 빛낸 이들이다.
김인우(金仁雨:18世)는 전리판서 광리의 아들로 공민왕 10년(1361)의 홍건적의 침입 때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이르렀으나 아우인 갑우(甲雨)의 화로 연좌되어 현 고창인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김갑우(金甲雨:18世)는 공민왕 18년(1369)에 천우위대장군(종3품)으로 명나라 황태자의 천추절(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공민왕 21년(1372)에 대호군(정3품)으로 탐라(제주도)의 공마 50필을 몰고 명나라로 가는 도중 두 필을 잃어 대신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명나라 황제가 대노하여 받아 들이지 않고 공민왕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이던 오극충과 함께 주살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제가 각처로 흩어져 전북과 경남 지방에 세거하게 되었다.
인우의 아우로 갑우 이외에 또 김삼우(金三雨:18世)와 김시우(金時雨:18世) 그리고 익제 이제현의 사위인 창주 김남우(金南雨:18世) 형제가 더 있었는데 삼우는 상서벼슬을 지냈고, 시우는 판사 벼슬을 지냈으며 남우는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갑우의 화로 연좌되어 모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로가 큰 광산김씨로는 김성우(金成雨:17世)를 들 수 있다. 그는 약관 18세에 절충장군(정3품)으로 제수되었고 충정왕 3년(1351)에 도만호겸 전라 충청 양호초토사에 발탁되어 왜구토벌의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전주, 나주, 부령 등 전라지역의 왜구를 무지르고 우왕 6년(1380)에는 진포구의 왜선 5백여척을 함몰시켰으며 임주, 한주, 서주지구에 침입한 왜구도 휩쓸었다. 또 다시 내포지역에 왜구가 침입한다는 급보를 접하고 출전하여 소탕하니 서해안의 도처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40여년에 걸쳐 왜구의 소굴이 된 이 지역을 소탕함에 있어 군둔전을 두고 군마를 자축하고 생포한 왜구는 노예로 삼아 노역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장기간 대비하면서 개선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성계의 등극으로 고려의 운명이 다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불사이군의 절의로 그가 타고 오던 말의 목을 자르고 장군 역시 그 자리에서 자결하니 지금도 충남 보령군의 군드리 모랭이에 조잠이란 마을이 있고 옥마봉, 남서고개에 〈사혁〉이란 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혁이란 김성우장군의 호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 무렵에 김 정(金 鼎:18世) 또한 충청, 전라도의 찰방을 지냈는데 그 때 공로로 추성 보리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중대광 광성군에 봉해졌다. 아들은 약채, 약항, 약시 삼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 때 묘가 실전 되었으나 후손인 김화택(金和澤:32世)이 춘천부사로 있을 때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김종연(金宗衍:18世)은 고려 말기에 벼슬이 상장군(정3품)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정이 권신인 신돈을 죽이기 위해 일을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화를 당하였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신돈이 죽고 난 뒤에 다시 나와 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퇴한 공로가 있다. 공양왕 때에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커가며 국운이 기울어감을 개탄하고 이성계를 살해하려고 도모하다가 또 누설되어 각처로 숨어 다녔는데 부인과 장인을 순군(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니 부인이 울면서 하는 말이 "설사 내 남편이 있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어찌 말 할 수 있으며 지금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데 무엇을 말하겠느냐?"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종연은 곡주 숲 속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굶어서 장차 죽게 되었으니 나를 좀 구해 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죽이라도 끓여 오겠다고 말하고는 내려가서 관가에 고하여 잡혀 죽었다.
사은 김승길(金承吉:19世)은 고려말에 함종현령으로 있으면서 정몽주와 의리를 같이 하다가 정몽주가 죽고 고려가 망하자 :나라가 위태로워도 구하지 못하니 이는 불충이고 친구가 죽어도 조문하지 못한 것은 신의가 없음이라, 이러고서야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설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불사이군하는 절신이 되었으며
아들인 매은 김오행(金五行:20世)에게 "너희도 나의 뜻을 받아들여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유훈을 받들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절의 부자가 되었다.
척약재 김약항(金若恒:19世)은 광성군 정의 둘째 아들로 고려말에 사헌부 집의로 있었는데 이성계와 친교관계에 있었으므로 거사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해 왔는데 신하로서의 절의를 고집하고 응하지는 않았으나 친구와의 정의를 지키면서 그 음모를 고발하지는 않아 성공케 한 소극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하자 처음에는 벼슬길을 사양하였으나 뒤에는 수락하였는데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라는 서적을 맡아보는 관청의 으뜸 벼슬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하정표를 동료들과 함께 지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그 글의 내용이 불공스럽다고 성토하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는 글 지은 사람을 징계한다 하니 공은 피하지 않고 명나라에 찾아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공은 굴하지 않고 의리를 분석하여 조리 있게 대답하니 명나라 황제가 고문에서 풀어주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멈추었으나 마침내 우리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운남성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이태조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광산군으로 봉하고 청백리에도 선정되어 자손에게도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광성군 정의 셋째 아들인 음촌 김약시(金若時:19世)는 고려말에 직제학의 벼슬에 있었으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등극을 하니 처음에는 두문동에 들어 갔다가 다시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의 금광리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을 삼고 살았으며 말을 하지 않고 의관도 괴이하게 갖추고 살았다. 이성계가 등극한 뒤에 거처를 탐문하고 원래 벼승을 주었으나 병을 앓아 앞을 못 본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어도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유언하고 세상을 뜨니 공은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익제 이제현의 외손인 김 유(金 維:19世)는 고려 공민왕조의 중랑장(정5품)으로 이성계와 함께 남정 북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신돈이 정사를 문란하게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군 도진으로 피해 살다가 이성계의 등극으로 괴로움을 또 받자 합천군 영창으로 이거하여 세거하였는데 그 때 사람들이 3은과 같은 절의있는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수산 김자진(金子進:20世)은 고려 말기에 금위시정이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정몽주와 더불어 의리를 같이 했으며 나라가 망하자 나주의 우정산 아래에 살면서 조선의 하늘을 보기도 싫다고 하면서 외출도 않고 여생을 끝낸 두문신도 있었으니 그 절의는 이상으로도 충분히 알 만하다.
아들 김 허(金 虛:20世)는 강호 김숙자의 문인으로 벼슬이 사제감부정이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만리 타국에서 별세하니 한스러워서 효경 상례장을 벽장에 써 붙이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고, 대호군에 추증되었다.
조선전기의 광산김씨 (태조∼연산군)
조선 전기는 1392년(태조 원년)부터 1566년 연산군이 폭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약 115년간이다. 이 기간은 처음에는 조선왕조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골육상잔에 대한 염증이 심하였으나 세종대왕의 선정으로 왕권이 확립되어 점차 조선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다져지고 한편 사회적으로는 양반사회가 성립된 시대였다. 조선조는 유교를 치국의 원리로 삼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하였기 때문에 불교문화는 쇠퇴(衰退)하였지만 성리학이 기반을 굳히고 유교가 발전하였다. 특히 세종조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자인 한글이 창제(創製)되고 각종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다. 세조의 찬위(簒位)로 또 다시 왕실의 존엄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세조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왕권이 회복되고 학문이 발전하였다.
이 무렵 관찰사공 김약채(金若采:19世)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때 문하부의 좌의사로 있으면서 조반의 옥사를 바르게 다스려서 명성을 드높였고,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때 지신사(도승지)로 있었는데 이에 항거했다 하여 외지로 유배도기도 하였다.
조선조 정종 2년(1400)에 문하부의 좌산기 상시(문하부에 속해 있던 간관)로 돌아와 그 때 대사헌이던 권근과 같이 권세가문의 사병 양성하는 폐단을 막았다. 그 해 겨울에 대사헌으로 있다가 태종 2년(1402)에 형조판서로 승진되고 3년 뒤에 충청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임함으로서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잡고 세거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유적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룬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편 연계 김 첨(金 瞻:18世)은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정4품)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학문에 전심하고 경사에 밝아 제자백가로 통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몽주와 친교가 있었다는 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태종이 등극하자 풀려 나와 예문관 제학(종2품)까지 지냈으며 업적으로는 아악을 바로 잡아 궁중의식에 활용하는데 기여하였다. 뒤에 참지의정부사로 있을 때 태종의 처남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와 가까이 하여 왕족간에 이간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파직되는 불운을 겪었다.
또한 김자린(金自麟:18世)은 태조 2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종3품)로 있을 때 관내의 농사짓는 일, 누에치는 일, 세금을 받고 인부를 부리는 일 등을 잘 처리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태종이 왕위를 잇자 개국 초의 혼란은 가시고 정국이 차차 안정되었다.
태종이 왕위를 잇는데 역할을 한 이는 송곡 김계지(金繼志:18世)인데 태조와 태종의 양궁을 내왕하면서 태조의 뜻이 태종으로 가겠끔 하는 회천대업의 공이 있었다. 특히 김계지라는 자신의 이름까지 태조의 뜻을 태종에게 잇게 했다는 계지이고 병조판서 및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정2품)을 지냈다.
계지의 아들 김 재(金 滓:19世) 또한 문과에 급제하고 판군자감사를 거쳐 상호군과 수문전 직제학을 지냈다.
이 무렵에 김문발(金文發:22世)은 도평의 녹사로서 전라도 원수의 부하가 되어 남원, 보성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4품)가 되었다. 순천부사와 경기, 충청, 경상도의 수군 도절제사(종2품)가 되었다가 낙향하여 부용정을 짓고 남전향약과 백녹동규를 본 받아 실행하니 광주(光州)지방의 향약좌목이 되었고 태종 17년(1417)에 황해도 관찰사로 갈 때 계지와 같이 궁온(임금이 내려 주는 술)의 은전도 받았다.
그리고 조선 태종과 사돈관계에 있던 김한로(金漢老:21世)는 양녕대군의 장인으로서 고려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의좌랑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예문관 제학으로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온 일도 있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정2품)과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장차 부원군이 될 뻔도 했는데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정1품)에 추증되고 광산군에 책봉되었다.
또한 삼정 김 방(金 倣:17世)은 전라도 도절제사를 지냈으며 태종의 명령을 받고 전라도 김제에 관개용 저수지인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그 공사의 책임자였으며 김제 고부간에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당시의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김 문(金 問:20世)은 20세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요절하니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17세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었다. 친정의 부모가 개가를 시키려하자 죽기를 맹세코 부모의 명에 따르지 않고 어린 아기를 업고 개경에서 시가가 있는 연산까지 수 백리 길을 낮에는 사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다가 밤에 거둥 하였는데 걸어오는 동안 호랑이가 호위하여 주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논산에 지금도 〈범 넘이 재〉가 있다. 그 때 업고 온 아이가 세종조에 사헌부감찰(정6품)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된 김철산(金鐵山:21世)이다. 허씨부인은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고 요역도 면제되었다. 그의 후손 중 고관대작과 대제학 등의 많은 유현을 배출하였으니 그의 유덕이 더욱 우러러 보인다.
한편 총제공 김 한(金 閑:20世)은 중군도총부 부총재를 지냈으며 형수인 허씨부인과 큰 집을 도왔고 배위는 완산이씨로 익안대군 방의의 따님이다.
김 열(金 閱:20世)은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의 아들로 큰 형님 김문이 21세로 조졸하니 벼슬길을 단념하고 형수인 허씨부인과 어린 조카를 보호하며 훈육에 힘써서 종통과 가업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열은 자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큰 집을 위하여 희생한 표본이며 형조도관 좌랑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하여 호를 퇴촌이라 하였다. 학문이 고매하여 빙옥난고라는 시집이 전하고 합천에 있는 화곡사에 모셔졌다. 공의 묘소가 실전되어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1983년에 후손인 김대중(金大中:40世)의 탐수로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광음리에서 찾아 수호하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건국 초기인 이 시대에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김천리의 맏아들인 김희선(金希善:18世)은 족보에는 강원도관찰사로서 백성을 다스리는데 청백하고 도량이 넓어 선정한고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무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에 발췌된 자료에는 조선조 초기의 명신과 의학자로서 개국원종 공신록에 기록이 보이며 태종 2년(1393)에 전라도 안렴사로 있을 때 각 도에 의학원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였다. 태조 4년(1395)에는 정조사로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의학에 밝아 중요한 의학서적을 저술했다.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그의 아우인 김 무(金 務:18世) 또한 조봉대부로 제용감의 소감(종4품) 벼슬을 지내면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 형제들이 있었다.
세종조에 활약한 김 췌(金 萃:20世)는 세종조 초기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상원군사가 되었는데 이 무렵 경상도 성주고을은 아전들이 세력을 부리고 민심이 거칠어져 관청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그 고을을 다스릴 사람을 구하던 중 김췌는 약관의 나이로 뽑혀 세종에게 하직 인사를 드릴 때 "저에게 생살권을 주시면 그 고을을 잘 다스리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므로 그 고을에 부임하여 포악한 무리 수명을 가려내어 처형하니 비로소 수령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아전들을 다스리는데는 흙으로 구워만든 갓끈을 매도록 하여 무거워서 고개를 저절로 굽히게 하는 등 기강을 세우니 한 달도 못되어 진압되었고 백성들도 거친 마음이 부드럽게 바뀌고 어리석음에서 착함으로 바귀었으니 이것이 모두 수령의 덕이라 칭송하게 되었고 뒤에 도승지(정3품)로 추증되었다. 이 이야기는 현지에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김 소(金 遡:20世)는 태종조의 증광시에 급제하였는데 이조, 예조, 병조의 정랑과 군수를 거쳐 대호군을 지낸 뒤 성균관 사성(종3품)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세종께서는 종실의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할 기관인 종학을 설립하였다. 이 종학에서 책임자 격인 종학박사를 겸임한 대학자이고 세조조에서는 좌익공신 3등에 추록되었으며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정2품)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김 청(金 廳:20世)은 태종조의 역과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천추사의 통역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에 승문원사에 임명되었는데 중국황제에게 올리는 글에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는 죄로 경상도 상주에 귀양을 가는 불운을 겪었으나 곧 풀려나서 대호군(종3품)이 되어 지신사 안승선과 더불어 압록강 중류로 흐르는 파저강에서 야인을 토벌하여 성죄하는 방문을 초하여 바쳤다. 문종조에 지중추원사(종2품)에 승진되었고 단종조에는 임금으로부터 비단 한필을 받았으며 세조조에는 좌익공신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만사 김예몽(金禮蒙:21世)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랑을 거쳐 감찰에 제수되었고 144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과거의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다. 문종이 즉위하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찬술에 참여하였고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세조조에는 사은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겸 성균사성이 되었다. 이때 후학들에 대한 교육에 힘써 자주 시험을 보고 제술이 우수한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 뒤 강원관찰사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466년 발영시에 아들 성원과 함께 급제하여 한때 조야의 선망을 받았다. 이어 공조, 예조판서에 올랐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시관이 되어 뽑은 인재가 거의 뒷날 조정의 현직을 차지하여 빙감(氷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예몽에게는 형으로 승훈랑을 지낸 인몽(仁蒙:21世)과 문과를 급제하고 사간원정언과 강화부사를 거쳐 이조참의를 지낸 의몽(義蒙), 그리고 아우로 봉직랑을 지낸 지몽(智蒙)과 통례원 좌통례(정3품)를 거쳐 회양 도호부사를 지낸 신몽(信蒙:21世)이 있었는데 모두가 학문이 높아서 높은 벼슬을 하였는고로 세상에서는 이들 5형제를 5몽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종조 말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광암 김태정(金台鼎:21世)은 재주가 특출하였으나 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3년 동안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고 상을 마쳤으며 과거에는 응하지 않고 오직 학문만 강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니 점필재 김종직이 '강양(江陽:현재의 합천)의 주인'이라고 칭찬하면서 호를 광암이라 지어 주었다.
만취당 김맹권(金孟權:20世)은 세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숙하면서 학업을 닦는 반유로 있었는데 세종대왕께서 원손인 단종을 안고 나와 후일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았는지라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그 날로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토정 이지함과 천휴당 이몽규 같은 명인을 배출하였다.
김치온(金致溫:20世)은 고양현감(종6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수양에게 선위하니 장차 큰 화가 임박하였음을 짐작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흥으로 내려가 사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과 교우하다가 단종의 흉변을 듣고 자탄하되 단종재위시 3정승과 사육신 같이 못 죽은 것이 한이라고 몹시 슬퍼하였다.
오옹 김효종(金孝宗:20世)은 학문이 고매하여 학행으로 벼슬길에 올라 단종조에 사복시정(정3품)에 이르렀는데 수양대군이 인륜대의를 저버리고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로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리고 곧 벼슬을 버리고 사퇴하고 고향인 부여로 은거했다가 단종이 영월에서 비명으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운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해만 뜨면 궁검대에 올라가 동쪽을 향하여 3년간을 통곡하였으며 매월당 김시습과도 도의로 사권 절의신이다.
부여의 청일사에 배향되었다.
세종조에 김 호(金 瑚:21世)는 문과 급제하여 외직으로 함진도안렴사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인 김자중(金自中:22世) 또한 남평현감을 거쳐 사헌부 wq의를 지냈고 추원재에 모셔졌다.
김맹윤(金孟胤:24世)은 벼슬이 한성부참군(정7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병을 핑계삼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 산과 물 좋은 자연을 벗삼아 평생동안 시를 읊으며 방랑을 하니 안평대군의 잔당으로 몰려 영종도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 무렵에 율재 김덕원(金德源:22世)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영천군수에서 이조정랑을 거쳐 춘추관 기주관으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헌부 정령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정3품)에 으르렀으며 세조조에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문치와 대화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였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이를 적개공신이라 부르는데 우리 광산김씨에서 2등 공신으로 3명이 책록되었다.
서석 김국광(金國光:22世)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으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병조판서와 적개공신이 되었다. 세종 때 명재상이던 방촌 황희가 일찍 사람됨을 인정하여 손서로 삼았으니 젊어서부터 출중하였음이 짐작된다. 국광은 세조가 거국적인 지력을 동원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바 그 업적이 뛰어나므로 임금이 "국광에게 힘입어 배운 바 크다"고 칭찬하면서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글을 써 주고 밥까지 떠 먹여 주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예종조에 우의정, 성종조에 좌의정을 거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도 다녀와 좌리공신 1등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에 봉해지고 부조(나라의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리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은전을 받았다.
국광의 아우 서정 김겸광(金謙光:22世)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세조 6년(1460)에 체찰사 신숙주를 따라 건주의 북방 오랑캐 침입을 막는데 공을 세워 군기감정에 임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이르니 형인 국광은 호조판서로 세조의 은총이 두터웠는데 겸광을 보고 세조가 직접 모자를 벗기고 꽃을 꽂아 주며 "그대가 비록 벼슬은 형보다 낮으나 현량한 것은 형 보다 낫다"고 칭찬하면서 술을 구 할 정도로 형제가 모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서 예조판서겸 오위도총관(정2품)이 되었고 성종 즉위에 보필한 공로로 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에 책봉되었으니 청백리에 녹선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겸광의 아우 김정광(金廷光:22世) 또한 벼슬이 제용감 첨정으로 출사하였고 김경광(金景光:22世)은 위로 3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감으로 인해 할머니인 허씨부인과 어머니인 안동김씨의 양대 정경부인의 봉양과 거상을 마치고서야 53세가 되어 겨우 집안 일을 벗어버리고 성종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니 벼슬은 통정대부 군기시정겸 교서관 판교(정3품)를 제수받고 봉직하였으나 연만하였기로 웅지도 펴보지도 못하고 한성 임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백겸(金伯謙:21世)은 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북방의 오랑캐를 소탕하는데 여러번 공을 세워 승진하였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서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원군에 봉해졌으며 절충장군(정3품)에 제수되었다. 황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의 연임 요청을 받아 명성을 얻었고 시호는 양호(襄胡)이다.
김달전(金達全:21世)는 강화도호부사로 재임시 임소에서 병이 위독하자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냈으나 운명하니 특명으로 부물을 하사하였다. 아들인 충목공의 귀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심재 김여석(金礪石:23世)은 수의 아들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고 세조조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니 세조가 영재라 칭찬하고 동궁에게 장차 좋은 보필자가 될 것이라 하였으며 최항을 시켜서 욕심부리지 말고 술을 즐겨 마시지 말며, 교만하지 말라고 '무기욕(毋嗜慾), 무기음(毋嗜飮), 무교긍(毋驕矜), 아홉 자를 쓰게 하고 옥쇄를 눌러 주었다. 벼슬은 검열, 경연관을 역임하고 군자감주부에 올랐으며 성종 10년(1479)에 사예로 있을 때 원수인 윤필상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의 야인을 토벌하였고 도승지 관직을 거쳐 말년에는 형조판서에 승진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김 면(金 沔:22世)은 통례원 판관을 지냈고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천군에 책봉되고 경원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장도(莊悼)이다.
앞에 설명한 좌의정을 지냈던 국광에게는 아들 5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김극뉵(金克?:23世)은 세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대사간(정3품)을 지냈고 광원군으로 봉해졌다. 공의 묘소가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데, 이 터가 한국의 8대 명당의 하나로 산세의 웅장한 기세에 전후좌우, 청룡백호와 현무주작이 기세 등등하게 일대 명기를 이루어 세칭 만대 발복지지로 일화가 있다.
이 묘를 쓴 후 대제학 7분, 상신 3분, 유현 2분, 종묘배향 3분, 왕비가 1분이 나고, 고관대작과 명유석학이 대를 이어 나와 광김이 해동명벌로 지칭되었으니 모두가 대사간 묘 음기의 여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인 김극니(金克?:23世)는 한성좌윤을 지냈으나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직언으로 논박하다가 강화유수로 좌천되었다가 후에 이현의 파당으로 연좌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셋째인 김극수(金克羞:23世)는 충훈부의 경력(經歷:종4품)으로 있었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통하다가 3년 상도 다 못 치르고 임종하였고, 긴극괴(金克愧:23世)는 그 인품이 뛰어나 숙부인 공안공이 장재라고 추천하여 성종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니 손을 잡아 맞으면서 도총부 도사를 임명받고 물러 나와 그 손을 비단으로 싸서 국은을 잊지 않은 이로 유명하였으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도임하여 적병을 토평하고 돌아와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김성원(金性源:22世)은 단종조의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승지로 있을 때 야은 길재의 증직을 탄원하여 허락을 받았고 세조 12년(1466)에는 정2품 이하의 대소 신료들에게 탁영시라는 시험을 보였는데 공이 좋은 성적을 얻은지라 임금이 술과 풍악을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성종조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는데 이 때 김성원은 수찬관으로 있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매산 김석원(金錫元:21世)은 성종조의 저작박사와 사헌부 지평으로서 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승문원 교리로서 서거정, 강희맹과 같이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고 성균관 직강을 거쳤으며 사후에는 고창의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김순성(金順誠:21世)은 세종조에 벼슬길에 오랐는데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 성종의 왕명으로 경국대전을 고쳐 편찬하는데 공선되어서 그 일에 참여하였고 아들인 김 석(金 석:22世)은 성종조에 분과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고, 그의 동생인 김 굉(金 ?:22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정언 벼슬에 들어섰으나 중종조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되어 명나라의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왔고 암행어사로도 함경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기민구제책을 건의하였고 중종 11년(1516)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버금가는 사예로 조광조와 같이 간택되기도 하였다. 사간원의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공정한 처벌과 관기를 바로 잡는데 힘썼고 경상, 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김현뢰(金賢賚:19世)는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을 거쳤는데 성종 2년(1471)에 평장동 유허서를 지어 후세에 전함으로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그 곳을 성역화 하는데 일조하였다.
육행당 김처겸(金處謙:23世)은 성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공부는 하지 않고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하고 정이 넘치며 믿음이 있고 이웃을 돕는다는 효(孝), 우(友), 목(睦), 인(?), 임(任), 휼(恤)의 여섯 가지를 논하고 실천하여 담양지방의 향약으로 정립되어 덕망이 드높아 가문을 빛내었으며 호도 육행당(六行堂)이라 불리었다.
김 감(金?:28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병마절도사, 좌찬성에 이르렀다.
지월당 김극기(金克己:23世)는 중종조에 무과로 급제하여 전라우후를 지낸 후 제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스스로 퇴임하고 귀향하여 지월당이란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경현사에 위패가 모셔졌고 그의 종손자인 양정헌 김 정(金 禎:25世) 또한 의주교수를 지냈으나 육학시경에 전념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후학지도를 하였고, 또한 그의 아들들로 전하여져서 청원정 김언우(金彦瑀:26世)도 도학에 고명하여 성리학 효경독서에 전심하여 청심정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언우의 동생인 칠계 김언거(金彦?:26世) 또한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나 물러나 풍영정을 짓고 후학을 대를 이어 지도하였으니 문장가의 집으로 빛나고 있다.
조선중기의 광산김씨 (중종∼경종)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안정을 되찾은 1506년 9월부터 22대 정조 곧 1799년까지의 약 293년 간이다. 이 시대의 정치적 특징은 실추(失墜)된 왕권을 재정립하고 나아가서는 국력을 신장(伸張)시키고자 노력한 시대였으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점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에 의하여 좌절(挫折)되고 정치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형태를 면치 못하였고 당쟁(黨爭)이 시작되어 정치의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국방을 소홀히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고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이 어김없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간 중 무오, 갑자의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사화란 사림, 즉 선비들이 입은 화를 말한다. 세조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등을 포함하는 인척세력을 훈구파라 하고,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을 사림파라 하는데 이들간의 대립으로 다투다가 사림파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농수 김효로(金孝盧:21世)는 무오사화의 참화를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예안현에 자리잡고 세거하였으니 이 분이 오늘날 예안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는 과거를 일삼지 낭ㅎ고 독서로 임천에서 자적하였으며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아 불천위가 되어 별묘가 있다. 팔순을 넘기고 유택을 정하니 그곳이 마침 고려조에 시중을 지낸 김방경의 지석이 나오는지라 안동김씨인 그의 후손들에게 연락하여 밑자리로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유택을 정하니 양가의 후손들이 서로 고맙다고 두 곳 모두 시제를 지내고 있으니 기이한 현상이려니와 공이 시중공의 7대 외손이 된다. 이조참판(종2품)으로 추증되었고 별묘가 있다.
시기적으로 거의 비슷하나 예안보다 조금 앞서서 안동 구담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은 퇴촌 김열의 증손자이며 세조조에서 벼슬을 하였던 판서인 여석의 동생 담암 김용석(金用石:23世)은 형과 같이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주자의 고사를 모방하여 향약을 설정하고 성균관에 모여 소학을 강의하면서 미풍양속을 진흥시켰다. 이 때의 정치정세로 보아 집권한 간소배들이 미구에 사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므로 가솔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자손들에게도 "성균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라는 교훈을 남겼으니 후손들이 유언대로 학문을 닦으면서도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선생과도 동문 수학한 사이이니 학문의 수준을 알만하며 사후에는 용계서원에 철향되었다.
중종반정의 공신을 정국공신이라 부르는데 청라 김극성(金克成:21世)은 연산조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고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뒤 북평사가 되었다. 홍문관의 헌납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심순문이라는 사람에게 죄를 씌워 죽일 때 군신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부당하다고 말을 못하였다. 공이 혼자 원통하다고 죄상을 아뢰었으나 연산은 듣지 않고 심순문을 처형하였으나 극성의 직언하는 죄는 주지 않았으며 그 용기는 높이 평가되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국공신으로 책록되고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광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공조참판을 지내고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의주목사가 되었을 때 고을이 계속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인의로 무마하며 성심으로 백성을 대하니 1년만에 안정되었다. 그리고 예조판서에 오르고 우참찬, 이조판서에 전보되었을 때 서북도에 소란이 일어나니 공을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하여 평정하게 하였으니 출장입상하는 표본이 되었다. 계모의 상기를 마치고 다시 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찬성(종1품)이 되었을 때 희락당 김안로의 모함으로 정광필로 함께 흥덕으로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된 후 다시 복관되어 우의정(정1품)이 되었으며 부조의 은전까지도 입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앞에 설명되었던 청백리인 겸광의 아들 중 맏이인 김극회(金克恢:23世)는 성종조에 무관으로 출발하여 중종조에는 통정대부까지 증진되면서 여주목사와 장예원 판결사를 지냈고, 둘째인 김극치(金克 :23世)는 학행이 높아서 참릉참봉을 지냈고, 셋째인 김극핍(金克 :23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예조정랑 벼슬에 있었는데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를 충성된 신하들이 간한다 하여 고산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승문원 교감으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종1품)겸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께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할 것을 아뢰어 흉당들의 원한을 사던 중 김안로, 허항 등에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하였으나 김안로의 사사 후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평정(平靜)이다.
넷째인 김극개(金克愷:23世)도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병조정랑, 훈련원첨정, 지평, 사간, 사도시부정을 거쳐 승정원우부승지와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다섯째인 김극제(金克悌:23世)는 성천부사를 지냈고, 여섯째는 김극신(金克愼:23世)이고 막내 김극심(金克心:23世)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중종조에 간신이던 김안로와 우리 광산김씨와는 악연에 있던 사람이 많았는데 운암 김 연(金 緣:22世)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조광조의 왕도정치에 협력하였으며 김안로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냈는데 채무택, 심언광 등이 모의하여 김안로를 다시 등용하려 하니 회재 이언적 선생과 함께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두 달 뒤에 김안로가 다시 쫓겨나니 우부승지로 돌아왔다. 이 때에 중종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간신에게 미움을 당한 줄 모르고 외방으로 멀리 나가서 수고한 일은 내 마음에 불안함이 있다"고 하였다. 다시 좌부승지를 거쳐 강원관찰사(종2품)를 역임하였다.
탁청정 김 유(金 綏:22世)는 연의 동생으로 중종조 생원시에 합격하고 무예에 정통하였기에 무과에 수차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자 문무 양시를 그만 두고 부모 모시기로 하였다. 벼슬길에 나간 형 대신 부모 공양에 최선을 다하였고, 정자를 세우고 빈객을 맞아 즐기었으나 옳지 못한 사람은 즉석에서 꾸짖어 용서가 없었고,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김유가 세운 정자가 탁청정이라 하며 그 현판 글씨가 한석봉의 친필이다. 그 정자가 우람하고 훌륭한 고 건축으로서 잘 보존되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김말문(金末文:23世)은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을 편찬한 김성원의 아들로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중종조에는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토평할 때 종사관이 되어 좋은 계책을 세워 승전하고 돌아오자 황해도 관찰사를 배명받았다. 승정원 동부승지와 형조와 이조참의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에까지 올랐다. 말문에게는 백문(伯文), 성심재 중문(仲文), 숙문(叔文), 계문(季文), 윤문(胤文), 철문(綴文) 등 6분의 형과 아우인 내문(乃文)등 모두 8형제가 있었는데, 연산조에 형님인 윤문, 철문과 아우인 내문과 더불어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는 가문의 영광을 가져왔다. 윤문은 이조정랑이 되고, 철문은 예문관 직제학에 올랐으며, 내문은 사간원의 사간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4형제도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여 8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이들 8형제를 〈8문의 집〉이라 부르고 부러워 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중종 14년(1519)을 보면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장계하기를 "담양부에 사는 사노 박유엄이 그의 아들 박근에게 말하기를 '처주(妻主) 김말문이 조상을 담양 동면 명당 자리에 장사지내고 4형제가 급제하였으니 장차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였고, 그 이웃사람 보린과도 그런 말을 하였다는데, 말이 패란(곧 반역을 뜻함)과 관계되어 놓아 두기 어렵기에 감히 위에 계문하오며,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습니다. 라고 하는 관찰사의 장계를 보아도 당시의 8문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때 서청자 김숭조(金崇祖:22世)는 연산조 별시 문과에 올라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니 청맹고질 이라는 눈병을 빙자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니 처음에는 옛 임금을 위하는 신하의 절의로 좋지 않게 보다가 곧 폭군을 물러나게 한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중종조에 중시 문과에 다시 급제하고 사간원 헌납을 거쳐 나주목사(정3품)를 지냈다.
김세우(金世愚:23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뛰어난 재질과 방정한 행실로 시대에 아첨하지 아니하여 당시 요로에 있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적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이민(관리와 백성)을 애모하고 뛰어난 공적을 남겼으나 신병을 얻어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자택에서 죽으니 3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성고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산역을 도았으니 인심 얻은 목민관의 표본이며 여지승람의 적성편의 명환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충윤(金忠胤:24世)도 이 무렵에 부호군 벼슬에 있었으나 34세로 요사하니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져서 살기가 어려워졌다. 그의 부인인 한산이씨는 할 수 없이 거느리던 10여명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하여 네보내고 어린 두 아들과 겨우 끼니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하루는 친정 조카인 토정 이지함이 찾아왔다. 마음으로는 반가우나 대접할 음식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빈 도마와 식칼을 내놓으며 하는 말이 "때가 되었는데 점심을 대접할 양식이 없으니 미안하구나!" "그런데 이 도마와 칼은 왜 갖다 놓은 거예요" " 이 집 양반이 대단하니 다른 것은 줄 것 없고 양반이나마 썰어 먹으려무나"고 하였다. 조카인 토정이 하도 기가 막혀 "고모님 생활이 그렇게도 어려우십니까? 내가 고모님을 돕는 길은 고모부의 묘 자리나 제대로 잡아드리는 길 밖에 없으니 금시발복지와 만세번영지 중 어느 곳을 원하십니까? 하니 토정의 고모이자 김충윤의 부인인 한산이씨는 "지금 우리 집 형편으로 금시발복지라야 살지 않겠느냐?"하니 토정이 정해준 자리로 부호군의 묘소를 이장하였더니 그 이듬해에 집에서 내어 보냈던 노비들이 그 동안에 잘 살게 되었는지라 다시 찾아와서 땅을 사주고 재물을 가져와서 가난을 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화와 함께 지금도 부호군의 묘가 있는 논산 양촌의 석서리 고개를 〈토정의 고개〉라 부르고 있다. 이 묘지의 여음인지 자손에 많은 재력가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결국 16세기에 들어와 헝클어지기 시작한 조선조의 봉건질서는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분열과 대립을 격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과 민중의 대립까지 심화시켰다. 비록 사림은 그때마다 큰 타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하여 계속 성장하고 있었으며 16세기 후반에 다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기묘사화 때 피해를 본 김숭로(金崇老:22世)는 당시 은진현감으로 있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주은 김 식(金 軾:22世)은 조광조의 죄가 없으므로 구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금강 11현 중의 한사람이며 돈목재 김기서(金麒瑞:22世)는 연산군의 혼정이 시작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양팽손과 도의로 사귀며 경학을 강론하였고 뒤에 조광조와 도의로 사귄 연고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인 고창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육성하였는데 그 때 건립한 돈목재라는 강학당이 현존하고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자암 김 구(金 絿:24世)는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고 성균관 사성으로 사가독서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중종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임금께서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까지 왔노라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오"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3암(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자암 김구)과 같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는데 13년이나 그곳에 있는 동안 화전별곡이라는 문학작품을 남겼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가 모두 별세하였는지라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며 기절도 하였고 묘역을 떠나지 않고 애통하다가 병들어 타계하였다. 그는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도 높았으며 조선전기의 4대 명필중 한 사람으로 서체가 독특하였는데 그가 살던 서울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구의 종제인 의암 김 강(金 綱:24世)은 기묘사화로 종형이 남해로 귀양가자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10년만에 나라가 평온해지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을 거쳐 외직으로 정선군수로 나가 선정했고 다시 예조정랑을 거쳐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에 승진하면서 춘추관의 편수관(정3품)에 이르렀다.
김신동(金神童:23世)은 중종조의 현량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한림이 되어 3암과 더불어 정론을 주장하면서 선정의 기대사 크더니 사화가 일어나 홍패를 반납하고 오래도록 금고의 형을 입고 두문불출하다가 명종조에 다시 현량과가 복과되자 종부시주부를 거쳤으며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재주가 특출하였음을 말함이다.
평정공 극핍의 아들 김명윤(金明胤:24世)은 중종조 현량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경기 관찰사와 의정부좌찬성(종1품)에 이르렀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김홍윤(金弘胤:24世)은 황해도 관찰사(종2품)를 지냈으며 아우인 시은 김의윤(金懿胤:24世)은 명종조의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곳의 정랑과 사헌부의 지평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광릉에 은거하면서 화담 서경덕과 오묘한 이치를 토론하였다. 을사사화를 당하자 병을 청탁하여 출사하지 않았고 그가 살던 곳을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했다 하여 '염퇴고개'라 불리운다.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재 김극통(金克通:24世)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정통하여 조광조를 찾아가서 같이 강론하였는데 정암이 "남주(지금의 전남 장흥군 남면의 지명)의 높은 선비는 참으로 그대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알만하고 형제가 문장과 도의가 높아 '3통' 또는 '3수사'라 불이었다고 한다. 벼슬은 동몽교관 이었다.
그 외에도 중종조에 벼슬길에 들어선 노계 김경희(金景熹:23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김안로 간당의 농락으로 과제가 위격이라 말썽이 생겨 탈락시키고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에도 연루되니 벼슬길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취석정'이라는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고로 문하생 중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에도 능했고 중종조의 동국필원에도 참여한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성리설'과 '노계집'이 있고 고창의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옥곡 김 기(金 紀:23世)도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고 의정부 사인(정4품)에 이르러 임금을 보필할 대관의 물망에 올랐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졸하니 임금이 친히 지사점시관(호조의 관아)에 명하여 장례를 돌보게 하고 제수를 하사하였다.
김 개(金 鎧:25世)는 중종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들어 섰는데 명종조 정시에 장원 급제하니 가자되어 동부승지(정3품)로 배수되었다가 명종조에 형조와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돈영부사가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도 참석하였는데 당시 고봉 기대승 계열의 학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시흥에 있는 금천농막으로 물러나 분사하였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퇴계 이황, 동고 이준경과 함께 명종임금이 직접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으며 호는 독송정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송월헌 김인경(金仁慶:25世)은 일곱 살 때 중종의 부마로 선발되어 순의대부 광천위가 되었다. 중종 22년(1527)에 옹주의 모후인 경빈 박씨가 궁중 음모인 '작서의 변(쥐를 불에 구워 복숭아나무에 매달아 세자 인종을 저주하는 사건)'에 화를 입어 상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돌아오니 김안로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서 이번에는 서천으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형되자 즉시 석방되어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종실 부마들만 모아 보이는 제술시에서 장원하여 통훈대부로 승진이 되었다. 공의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아우와 우애가 깊었다.
김질충(金質忠:24世)은 명종조에 급제하여 황간 김계휘와 같이 호당에 뽑혔으며 벼슬은 형조좌랑과 지제교를 지냈다.
탄수 김 규(金 규:24世)도 명종조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이조정랑을 거쳐 전한으로 있으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였고 성균관 사성을 거쳐 장악원정에 승진되었다. 선위사로서 동래에 머물러 있을 때 이 무렵 공의 빠른 승진을 시기하는 윤원형 일파의 무고로 투옥되어 경원에 유배되었으나 나중에 풀려 전리로 돌아왔다.
중종조에 김 호(金 浩:22世)는 의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치면서 선정하였고 그의 아들 김우서(金禹瑞:23世)도 문과 급제하여 북병사로 국경수비에 업적이 있고 이 시대에 김 신(金 紳:24世)은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나중에는 관찰사의 소임을 다하여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金允悌:24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전중어사 벼슬을 역임하고 고창, 부안등 10여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다가 을사사화 후 사직하고 향리인 광주에서 환벽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현사들과 도의로 교류하였다.
우리나라 성리학은 조선조에 들어와 16세기에 이르러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회재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며 다른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양 선생이다.
이황의 학통은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등의 제자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의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우리 광산김시로서는 조선의 5부라 일컬음을 받는 문순공 후조당 김부필(金富弼:23世), 읍청정 김부의(金富儀:23世), 산남 김부인(金富仁:23世)과 양정당 김부신(金富信:23世), 설월당 김부륜(金富倫:23世)등 5종반과 내종형제인 봉화금씨의 일휴당 금응협과 면진재 금응훈까지 모두 7인이 퇴계 선생의 고제자로 학덕이 뛰어나 그 당시의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 한 마을은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연유되어 오늘까지도 군자리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김부필(金富弼:23世)은 호가 후조당인데 강원관찰사를 지낸 연의 아들이다. 퇴계의 제자로 학덕이 뛰어나 여러번 벼슬을 제수하여도 모두 사양하니 퇴계 선생이 "후조당 주인은 절조가 굳세어, 임명장을 내려도 반기지 않네, 앉아서 빙설 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 도의 존재를 눈여겨보며 읊조리기만 하네'라는 7언 절구에서 보듯이 벼슬을 탐내지 않고 오직 도학에만 뜻이 있음을 말해 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공의 시호를 제수하였다. 퇴계의 시호가 문순공 인지라 스승과 제자의 시호가 같을 수 있느냐는 시비가 한 말에 있었으나 나라에서는 〈문순공의 문하에 다시 문순공이 나니 어찌 두 가문 모두가 광영이 아니겠는가〉라는 화답으로 시비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도 있다.
안동 와룡 가야에 살던 유일재 김언기(金彦璣:25세)도 이 무렵 퇴계의 제자이다. 명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조부인 담암의 유언대로 벼슬에는 마음이 없었다. 10년 동안이나 도산서원에 가까이 있는 청량산에서 학문을 닦고 하산을 하니 산천초목이 모두 글자로 보였을 정도로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가야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그 덕풍을 듣고 모여든 사람이 수백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비지 남치리, 지헌 정사성, 옥봉 권위, 청신재 박의장, 오봉 신지제, 정곡 권태일 등 그 외에도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 학문 융성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여강동주가 되어 이황이 죽은 후 여강서원을 세우고 퇴계의 주리론을 높이며 유학의 전수에 노력하였다.
김부인(金富仁:23世)은 호가 산남으로 관찰사 연의 아우인 유의 맏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향시에 장원하고 명종조에 무과에 장원하니 문무를 겸비하였고 경상좌도병사와 북병사로 경원에 쳐들어온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사위인데 결혼하게된 경위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오고 있다. 산남공이 어렸을 때 하루는 낙동강에서 잉어를 보고 쫓아가다가 애일당에 이르렀다고 한다. 애일당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정자인데 농암 선생이 산남의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한 것을 보고 맏 따님의 작이라고 점찍어 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론적인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통은 중봉 조헌과 우리 광산김씨의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등 많은 유현으로 계승되어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 도관찰출척사를 지내면서 충청도 논산의 연산 땅에 세거지를 잡은 약채의 아들이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21세의 나이로 요사한 문이며, 그 때 17세의 부인 양천허씨가 열녀로 정려를 받아 조선시대의 부도의 표본이 되었다. 예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상신 서석 김국광은 문의 손자이다.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국광으로 하여금 가도승지라는 직제에도 없는 임시 벼슬까지 겸직케하여 가까이에서 자문케 한 것으로 세조가 어느 만큼 그를 소중히 여겼던가를 짐작케 해 준다. 국광의 아들이 대사간을 지낸 극뉵이고, 극뉵의 증손자가 선조조에 대사헌과 호당에 든 황강 김계휘(金繼輝:26세)이다. 그는 조선조 500년간의 가장 유수한 박학자로 나라 일 마다 그의 생각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을 정도였다. 성리나 예의 뿐만 아니고 산천지리의 자연과 인물 그리고 씨족의 원류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선조 14년(1581)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계변무 교섭 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버낼 때도 황강을 추정사로 보내어서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광국 원종공신에 녹선되었고 경연에 나아가 시강도 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나주의 월정서원에 철향되었다.
사계 김장생(金長生:27世)은 황강 김계휘의 아들로 어릴 때는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덕과 예학을 수학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니 마침내 그를 유학의 종장이요, 예학의 태두라 일컫게 되었다. 김장생은 선조 12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처음 벼슬로 들어와서 여러 관직을 두루 겪어 형조참판을 지냈으나 학문 쪽에 뜻을 더 두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가 위기에도 독전과 군량미 조달 등 임무를 완수하였고 그 와중에도 근사록석의, 상례비요, 경서변의, 의례문해 및 가례집람을 저술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면서 "사계 김장생과 여헌 장현광은 덕이 큰 사람들인데 내 옆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하던 학자였다. 심지어 그를 불러 들이기 위해 직제에도 없던 성균관 사업이라는 새 직제까지 만들어 그를 불러 들인 일도 있었다.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의 영수인 그는 법치보다 예치를 우위에 놓고 법치가 못 다스리는 심성을 예치로 순화하여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사회의 규범을 집대성한데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당대의 조정이나 학자 또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에 관한 질문은 모두 사계에게로 집중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학문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경서와 가례등 저서가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현대에 와서 사계전집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선생 문하에 아들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문묘에 배향된 선정3현을 비롯해 상촌 신흠, 지천 최명길, 계곡 장유, 월당 강석기, 우재 이후원, 백헌 이경석, 기암 정홍명, 유포 구인후, 충익공 신경진 등 많은 문형과 유현, 재사를 배출하여 사림의 종사가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문묘에 종향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돈암서원에 주향을 비롯하여 전국 10여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원공 김장생의 첫 번째 부인은 창년조씨로 은(?)과 신독재 집(集)과 허주 반(槃)을 낳았고, 두 번째 부인은 순천김씨인데 절재 김종서의 7세 손녀이다. 계유정란으로 가정이 몰락하였는데 손자가 종의 기지로 생명을 부지하였으며 그 후손이 어려운 환경에서 신분이 보존되어 왔는데 17세 되던 해 아버지인 증참의 수언이 말하기를 "절재(김종서의 호)의 충성과 절의를 밝히려면 지금 조정의 덕망이 사계 선생보다 높은 분이 없는데 네가 그 집에 들어가면 우리 집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선대의 가승을 가지고 시집와서 아들을 낳은 뒤에 남편인 사계 선생에게 그 가승을 보이니 크게 경탄하였다 하며 후에 효와 열행이 임금에게 상달되어 효열의 정려를 받았고 칙령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장생의 아들 역시 거유인 신독재 김 집(金 集:28世)이다. 판중추부사(종1품)를 지냈고 아버지와 같이 문묘에 종향되었다. 신독재는 18세에 진사가 되고 광해 2년(1610)에 참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한 때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요현감, 임피현령, 지평, 집의, 공조참의를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세웠다. 이때 실각한 영의정이던 낙서 김자점이 청나라에 가서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문책을 받게 되어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했다. 그 후 대사헌을 지냈고 판중추부사(종1품)로 재임중 서거하였다. 부친인 사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그 학문이 송시열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문묘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한 가문에서 역적이 나면 비록 그것이 무고였을 지라도 그 가문은 바로 파멸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의 서동생인 김 고(金 고:28世)가 무고를 받자 집은 아우 반과 더불어 즉일로 대죄를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고에게 망언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아버지와 형들이 모두 어진 사람이므로 특히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풀어 주어 역사적인 특례를 만든 것이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보아도 사계와 신독재 부자는 그의 학문과 덕망 때문에 법 위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학의 종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의롭게 봉사하면서도 벼슬을 사양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했던 성덕군자라는 호칭을 받았고 부여의 부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있는 여러 서원에 철향되었으며 저서로 신독재 전서가 20권이 있다.
두계 김 규(金?:28世)는 현종조에 경학으로 동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다시 자여찰방으로는 부임하였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숙종조에 특명으로 관로에 나오도록 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사은 숙배하고 바로 물러나와 처음에는 황산(지금의 연산) 강상에서 살다가 중년에 논산 두계로 복거하여 청복을 누리며 정훈을 이어받아 효우가 출천하니 중형인 신독재가 칭찬함이 대단하였다.
장생의 3째 아들이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종2품)를 지낸 허주 김 반(金 槃:28世)은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공주로 갔다가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참판에까지 이르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또 왕을 호종하였으며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었다. 정사(인조반정 공신)와 영사(유효립 모반진압 공신) 공신책봉 때에 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 무렵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왕실위주의 국가질서론과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예학이 발달하였다. 예학은 도덕윤리를 기준으로 하는 형식논리를 중시하였고 명분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형식을 중요시 함으로서 관혼상제에 예학이 발달하였는데 예학의 태두라는 사계 김장생의 공로가 크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광산김씨를 일러 예문의 종가라 일컫게 되었다.
족보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족보가 등장하였다 하나 한 종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15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는데 최초의 족보는 세종 5년(1423)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 하나 현존하는 것은 없고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성종 7년(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의 세보로 알려져 있다.
우리 광산김씨도 족보도 비교적 빨리 편찬된 편인데 16세기에 병조참판을 지낸 용계 김지남(金止男:25世)이 당시 영남에 살고 있는 종인들과 같이 족보를 만드니 공의 호를 따서 세칭 용계보라 하나 전해지지 않고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숙종 임금의 국구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서석 김만기(金萬基:30世)가 숙종 3년(1677)에 만든 서석보이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숙종 13년(1687)에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가 이를 보수하여 죽천보를 만들었으나 이것마저 보존치 못하더니 드디어 영조 23년(1747) 지추 김진동(金鎭東:31世)이 다시 족보를 편찬하니 이를 정묘대보라 하고 이 족보가 현존하는 광산김씨 족보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로부터 93년 후인 고종 11년(1874)에 미서 김재현(金在顯:35世)과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이 정묘보를 기준으로 수정하여 고종 13년(1876)에 족보를 다시 발간하니 이것이 병자대보이고 각파의 족보를 만드는데 지금까지도 근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에도 일제하인 1939년에 '장성보'를 그리고 해방후인 1957년에는 '한성보'라는 대동보를 발간하였다.
위에 말한 병자대보가 광산김씨의 족보로는 비교적 잘된 족보이고 오래 되어서 가치 있다고 판단되어 새 천년(2000)을 맞는 기념으로 영인본으로 만들어 다시 배포한 바 있다.
당시에 족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김문서(金文瑞:22世)는 통훈대부로 낙안현령을 지냈으나 그의 묘소가 대천에 있는데 상석 밑에 족보함이라는 석함을 갖출 정도였으니 사후라도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뜻이리라 해석된다.
16세기말 조선은 양산사회가 동서 붕당으로 분열되어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고 국력도 약화되어 갔다. 이때 이웃나라인 일본은 도요토미(豊臣秀吉)에 의하여 100여년 동안 계속되어 온 혼란이 수습되고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부하인 장군들의 관심을 해외로 쏠리게 함으로서 국내의 불평세력을 무마하고 아울러 그의 대륙 침략 야욕을 펴고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선조 25년(1592) 4월13일, '명나라를 치러가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고 핑계하고 20만의 대군을 이글고 부산 앞 바다로 몰려왔으니 이것이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김해로부터 성주, 추풍령을 넘어서 청주로 진격한 왜군을 막기 위해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여 죽으니 이때 광김의 김 일(金 鎰:27世)도 탄금대에서 신립과 같이 전사하였다. 이 때 김민선(金敏善:25世)도 사헌부집의(종3품)로 있었는데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부평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소설옹 김영남(金穎男:25世)도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우도 도사로 있다가 진양군수로 벼슬자리를 옮겼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먼저 동강으로 쳐들어온 왜적을 방어하는 한편 사천에 머물러 있던 적을 소탕하고 수천석의 군량미를 서울로 운반했다. 이듬해 경상우도 감사 학봉 김성일과 우도병사 송암 김면이 모두 왜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중위장으로서 군중을 통솔한 공로로 당상관으로 품계가 올라 수원도호부사가 되었다.
한편 김 감(金 :28世)은 서천군수로 재직시 서해로 침공하는 왜적을 방어하는데 공로를 세워 말년에는 공조참의로 많은 사람 중에 뽑힌 이가 되었는가 하면 그 밖에도 양형재 김택남(金澤南:26世)은 군자감 참봉으로 있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룩하는데 전공을 세웠고 김몽성(金夢成:27世)은 판관으로 있다가 노량대첩에 참여하여 전공은 세웠으나 순절하였고 김덕유(金德宥:31世)는 한산도 대첩때 전공을 세웠으나 전사하자 부인인 장수황씨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이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3대첩에 우리 광김의 선조가 빠짐없이 참전한 모습이 보이니 문장 쪽 뿐만 아니라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는 얼을 증명하는 바라 하겠다.
광김의 김 결(金 潔:27世)은 조헌 문하에서 수학중이었는데 선생의 창의를 도와 청주대첩에 공을 세웠고 청악 김충국(金忠國:28世)도 중봉 조헌을 도와 창의했으며 김희도(金希道:26世)는 조카인 묵은 김응생(金膺生:27世)과 더불어 참전하였으나 일족인 김치원(金致 :28世), 김 헌(金 憲:28世)과 함께 금산에서 7백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한편 조헌이 의병을 모집할 때 오강 김성휘(金成輝:26世)는 많은 재산을 희사하여 의병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일조하였고 집안에 거느리는 노복들을 시켜 많은 군량미를 진지로 보내 독전하여 그 군공으로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직방재 김보원(金輔元:24世)은 조헌의 병막에 참가하였다가 청주전투에서 공로를 세웠고 다시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과 같이 남강에 투신 자살하였고 김기면(金基命:28世)은 희천군수로 재임중 평양성 탈환에 전공을 세웠고 남하하는 적을 쫓아 행주대첩에도 전공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진주성 수성에도 참전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삼계 최경회와 같이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 밖에도 묵암 김대민(金大民:23世), 김신민(金信民:23世), 김광운(金光運:25世)도 진주성 함락 때 묵숨을 다한 이들이다.
경상도 의령에서는 망우당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항상 적은 군사로 적을 무찔렀으며 붉은 옷을 입고 적진을 진격하여 그 용맹스러움이 나는 새와 같이 가벼우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다 하여 천강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이때 절재 김 질(金 質:26世)은 내금위 봉사의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 김성일, 망우당 곽재우와 같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이 되어 진주로 가는 도중 왜병 수십 명을 베고 임곡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왜적에게 포위되어 대적할 수 없음을 미리 알고 편지를 써서 웃옷과 같이 말안장에 얹어 집으로 보내고 곧 바로 칼을 빼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말이 집에 도착하니 부인 박씨는 옷과 신을 무덤에 묻고 초혼장을 지내고 소,대상을 마친 후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참아온 것은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할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고 이르고 곡기를 끊은 지 10일만에 죽으니 모두들 열녀라 하였다.
전라도 광주의 김덕령(金德齡:31世)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명령을 받고 형인 덕홍(德弘:31世)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니 6천여명이나 모였다. 고경명과도 연합하여 잔라도로 침입한 왜적을 무력화 시켰으며 익호장군의 호를 받고 모악 '권율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진해, 고성지방에 상륙하는 왜군을 물리쳤고 홍의장군 곽재우와도 협력하여 곳을 가리지 않고 왜군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의병장이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가 전쟁터에서는 항상 철퇴 2개를 허리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었다니 팔도에서는 그를 신장이라 불렀고 왜군들은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왜장 카토오가 그 명성을 듣고 화공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오게 하여 보고는 "정말 장군이다"라고 감탄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조 30년(1596)에 흥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역적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 순찰사 신경행의 무고로 큰 지혜와 용맹을 펴보지도 못하고 6차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춘산화연곡〉이라는 글을 남기고 29세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운명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왜병들은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부터 양호(전라 충청도)는 걱정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덕령장군은 사후에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의열사에 제향되었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도 받고 최근에는 광주 시내 중앙에 충장로라 명명된 거리가 있고 무등산에 충장사를 지어 그 일대를 성역화하고 추모하고 있다. 동생인 덕보(德普:31世)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니 이들 형제는 충절 3형제로서 의열사에 같이 배향되었다. 충장공의 부인인 흥양이씨 또한 여장부로서 부군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친정어머니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고 정유재란 때는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하다가 왜적의 위협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크게 꾸짖으며 절벽 아래로 투신 순절하였으니 그 석벽에 이 내용이 각자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김덕휴(金德休:31世)는 임진왜란에 훈련원 주부로 종형 김덕령 장군을 따라 항상 군중에 있으면서 많은 협조를 하다가 장군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면서 적진에 돌격하여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서하당 김성원(金成遠:30世)은 하서 김인후의 문인이며 선조조에 효행으로 침랑(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에 제원찰방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으로서 군량미를 조달하여 의병들을 도왔고 종질인 김덕령 장군에게도 군량과 병기를 조달해 주었다. 정유재란때에는 노모를 업고 동보 모후산으로 갔다가 왜적을 만나 모녀가 같이 희생되었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의 막하에서 활약한 김득종(金得宗:25世)과 김 각(金 珏:27世)이 있었는데 득종은 용강현령 김숙진(金叔珍:20世)의 후예로 제봉 고경명과 같이 금산에서 순절하였고 각은 고경명 막하에서 종사하다가 정략 장군이 되었다. 이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을 한 곳에 묻은 무덤이 칠백의총으로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으며 지금도 후손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또한 만취당 권율 원수의 막부에서 활약한 김 온(金 :26世)은 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을 세웠으나 계모와 동생 김 갑(金 :26世)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진중에서 전해 듣고는 놀라서 병을 얻으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충주에서는 김시척(金時 :25世), 김시성(金時省:25世) 형제가 난동하는 왜군에 잡혀가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3모자가 함께 적의 칼날에 참혹하게 죽으니 나라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왕명으로 삼강행실록에 수록케 하고 정려를 내렸다.
한편 경상도 안동의 근시재 김 해(金 垓:24世)는 왜란이 일어나자 안동 유림의 추대를 받아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고 종형인 김 기(金 圻:24世)가 정재장겸 소모사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낙금헌 이정백과 금역당 배용길을 좌우부장으로 삼고 출전을 하니 종제인 설애 김 강(金 堈:24世)과 극재 김 평(金 坪:24世) 형제와 족손인 도봉 김득렴(金得 :26世)과 쌍벽당 김언구(金彦球:25世)의 손자인 김백웅(金伯熊:27世) 또한 이에 따랐으니 순식간에 수만명의 의병이 모여들어 경상좌도 의진이 편성되었다.
이 때 유림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니 굳건한 충의로 뭉쳤기에 함창의 당교전투와 예천의 용궁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특히 당교 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순찰사였던 몽촌 김수에게 바치니 '전도내 의병중 첫째라'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예천 송구천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많은 적병과 적장까지도 죽인 큰 전과를 올리고 이듬해 5월에는 밀양으로 내려가는 적군을 추격하다가 경주의 진중에서 전사하니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호는 근시재이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그가 남긴 향병일기에는 의병으로 활약한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갈봉 김득연(金得硏:26世)은 서애 유성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청취헌 김득의(金得議:26世)와 같이 창의하여 의창을 설치하니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장무덕(張懋德)이 크게 감탄하여 그의 덕행과 충의를 칭찬하며 영천과 경주사이에 공의 인품과 공적을 찬양하는 비를 세우려고 까지 했으나 명군이 퇴각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후에는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저서로 갈봉문집 2권과 한글로 된 〈지수정가〉와 〈산중잡곡〉이 전해지고 있다.
그 동생인 만취헌 김득숙(金得숙:26世) 또한 백담 구봉령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나 영남좌우도 선비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었는데 나중에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를 제치고 수위에 뽑히는 재주를 가져 대성할 것을 기약했으나 요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득의의 아들 김광원(金光源:27世)은 호가 석당인데 학행과 문장이 사우들 중 뛰어나 향천에 올랐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은거하며 영재를 육성하고 사림을 계도하여 유풍을 진작하니 문하에서 훌륭한 명사,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나왔으며 담암공부터 아들 손자까지 진사가 계속나와 7대 진사집, 문한가로 명성이 높다.
황해도에서는 4형제 의병장으로 소문난 김만수(金萬壽:26世)가 동생 천수(千壽:26世), 백수(百壽:26世), 구수(九壽:26世)와 함께 봉산에서 의병 9백명을 모아 대장이 되었으며 장단에서 일어난 유극량의 군사와 합세하여 임진강에서 북상하는 왜적과 싸웠지만 처음에는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우인 백수가 전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남은 두 아우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황해도 일대의 적을 추격하니 이번에는 적을 많이 격파하였다. 특히 부차벌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여기서는 도총부 도사이던 아들 광협(光鋏:27世)을 잃는 불행을 또 겪었다. 선조 26년(1593)에는 진도군수에 임명되어 한산도의 통제사 이순신 군대와 광주의 의병대장 김덕령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급해 주었다. 왜란이 끝나고도 시기하는 자들 때문에 공록을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어 봉산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이때 전라도 고창에서는 김 계(金 繼:24世)와 김 위(金 緯:23世)등 6형제가 모두 나서서 의병을 모집하고 장성현감을 지냈던 오봉 김제민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벼슬이 부장과 병절교위가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해남에서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리고 왜란이 평정된 뒤에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장성에서는 백곡 김홍우(金弘宇:24世)와 모남 김광우(金光宇:24世), 양촌 김덕우(金德宇:24世)의 3형제와 만옹 김기수(金麒壽:24世), 국재 김성진(金聲振:24世)등 한 집안과 서석 김언욱(金彦 :27世), 김언희(金彦希:27世) 형제등 많은 광김의 뜻 있는 이들이 남문에서 창의하고 역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고창과 장성은 물론 직산, 용인, 소사 등지로 옮기며서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렸고 군량미를 모아 행재소와 강화도로 보내는 등 그 공적이 매우 컸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나주의 죽헌 김 부(金 溥:27世)는 훈련원정으로 남원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일심재 김 명(金 溟:27世) 또한 의병으로 참전하였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였으나 쉬지 못하고 적의 침입이 우려되어 형수와 조카 그리고 자기 가솔을 이끌고 피난 중 적에게 잡히어 처참하게 살해되었으니 이를 본 부인과 형수가 분격하여 강물에 투신 자살 하였다.
이 때 살아남은 아들의 나이 15세였는데 그 어머니가 투신 자살한 곳에 여막을 짓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하여 6년 목을 추가하니 나라에서는 이 두 형제 내외의 충절과 아들의 효도를 기리기 위하여 한 집에서 3강을 다 지켰다는 일문삼강의 정려를 내렸다. 지금도 오산 창의사에는 당시의 의병으로 궐기한 사람들의 공이 현저하다 하여 72위의 공신을 배향하고 있는데 이중 우리 광산김씨가 13위로 앞에 설명한 모든 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서석 김언욱(金彦 :27世)에게는 맏형으로 김언익(金彦益:27世)이 있었는데 선무랑(종6품)이었고 언욱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중 왜란이 일어나 전국을 짓밟으니 장성으로 달려가 동생 창영 김언희(金彦希:27世)와 함께 군량미 수십석과 유지들 80여명과 같이 의거를 도모하였다. 언욱은 어가를 따라 호종한 공로로 선무원종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의정부좌참찬(정2품)에 증직되어 구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언희는 전란 중 군량미 조달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명나라 지원군이 남하할 때 의병 6백여명과 함께 진주로 가서 고종후(고경명의 아들)장군 휘하에 들어가 육박혈전 하다가 운명하니 장예원정(정3품)에 증직되었다.
도천 김윤국(金潤國:25世)는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고 임진왜란때는 관양관으로 영천군수를 지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의 접반관이 되었고 선산부사에 승진되었으며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김은휘(金殷輝:26世)는 선조 15년(1582)에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아전들이 올리는 회계장부를 살펴보고 어느 물건은 얼마가 남아 있고 아무 물건은 얼마가 모자란다고 지적하니 아전들이 처음에는 불복했으나 정산한 결과 모두 처음 지적과 같으니 그 때부터 아전들이 두려워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왜란이 일어나자 익위를 제수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체찰사인 송강 정철과 함께 군무를 계획하여 여러번 군공을 세우는 등 이대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느나 뒤에 사헌부 감찰과 형조정랑을 거쳐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입휘(金立輝:26世)는 지혜가 총명하여 경학에 밝아 일천으로 함열현감을 거쳐 장예원 사의를 지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고 그의 아우인 김공휘(金公輝:26世)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전과 예학을 강구하였고 파주목사를 지냈다. 선조조에 율곡의 추천으로 찰방 벼슬을 비롯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고 정여립의 난을 토평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후에도 아산 현감을 비롯하여 파주 목사까지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치적이 현저하였고 사후에는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위의 계휘, 은휘, 입휘, 공휘 4형제를 가르켜 황강4파라 한다.
지천 김공희(金公喜:28世)는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종사관, 영광군수,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기양사에 철향되었다.
임란 직전에 무과에 급제하였던 금은 김수연(金壽淵:24世)은 정유재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세부득하여 아들인 사은 김몽룡(金夢龍:25世)등 4형제와 같이 순절하였고 부인과 자부까지도 뒤따라 순절하였으니 7명의 한가족이 몰살하는 참변을 당하였다. 뒤에 예조에서 충·효·열행을 장계하여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밖에도 순절한 집과 각 지역에서 의분에 못 이겨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기록이 많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 일일이 다 나타내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여길 뿐이다.
선조 8년(1575)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감정문제로 벌어진 동서의 분당이 그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더니 북인들끼리 또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서 당파싸움이 드디어 왕위계승 문제와 엉키어서 광해군의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우리 광산김씨에서도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그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위할 때 폐모 불가론을 이론적으로 논책한 이는 용계 김지남(金止男:25世)인데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였다. 지남은 선조조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암행어사로서 관서지방을 두루 살폈고 우리 광산김씨의 최초 족보인 용계보를 만든 주인공으로 이름이 남아 있다. 약산 김위남(金偉男:25世)은 이이첨 등의 간신들이 백관들을 협박하면서 의견을 말하도록 하는 자리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으나 "이 일은 신하된 자로서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반대했으며 그래도 결행을 하니 그 후부터 식음을 전폐하면서 자결하고야 마는 절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김원록(金元祿:25世)도 선조조 식년시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겪다가 선조가 승하하자 통례원 통례로서 태묘에서 선조임금의 3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시는 예를 마치자 광해군으로부터 관복을 하사 받았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부당함을 지적하여 반대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며 인조반정 후에 돈녕부 도정을 제수하였으나 그 때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임금이 위로의 은전을 베풀고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종2품)를 제수하였다.
한편 청파 김효성(金孝誠:27世)은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간신배들을 처형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며 인조반정후에 청주목사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대사헌(종2품)에 추증되었다.
소봉 김대덕(金大德:26世)은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광해조에서는 통정대부로 승차하여 천추절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인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었고 이괄의 난에 임금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한성부 좌윤까지 지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과 같이 적의 포위를 받고 있을 때 척화신들을 적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 상소하여 임금이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하였다. 뒤에 형조참판에 이르렀고 문장과 명필로 당대의 이름이 있었으며 특히 초서와 해서를 잘 써서 국조필원에도 올랐다.
김태우(金泰宇:24世)는 간신배들이 폐비의 일로 청류들에게 화를 입히자 말하기를 "인륜이 무너지는데도 선비가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무엇으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랴"하고 김효성과 더불어 이이첨, 정조, 윤인등 삼적의 머리를 베이고 오리 이원익을 불러드릴 것을 상소했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김태정(金泰廷:24世)과 송고 김태국(金泰國:24世)은 형제인데 형인 태정은 서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판일 때 인성왕후(인종비)의 복제를 기년으로 주장하다가 대세에 몰렸으나 당시 사류들은 정론이라 동조하였고 동생인 태국은 음직으로 고부와 금산군수를 지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공빈김씨(광해군의 생모)를 종묘에 배향함을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조야를 놀라게 하였으니 이렇게 절의가 곧은 형제도 있었다.
김영구(金永耉:28세)는 광해조때 정조, 윤인 등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으로 유폐시켜 폐모론을 주장하니 이때 공이 홍무적과 같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위의 두 사람을 주살 할 것을 주청하였다.
벼슬은 인조때에 전주판관을 지냈다. 이 밖에도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한 이로 추담 김우급(金友伋:26世), 시서 김 선(金 旋:26世)등 여러 사람이 더 있었으니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는 광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찬성하는 쪽이 있었다고 무고 되어 억울한 죽임까지 당한 이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재 여류시인으로 소문난 허난설헌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은 자기와 교류하던 서자 출신인 박응서 등이 계축옥사로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당시의 권신이던 대북파의 관송 이이첨에게 아부하면서 폐모론을 주장하여 왕에게까지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계획을 진행시켰다가 발각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능지처참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약관 22세에 성균관 생원이 된 김상하(金尙夏:27世)는 교산 허균의 역모사건에 가담하였다고 무고되어 국문을 당하였는데 모진 고문에도 불복하고 항변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한 바 있었다. 그의 아들 김종길(金宗吉:28世)은 숙종조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광해조에 벼슬한 쌍오 김질간(金質幹:26世)은 선조조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외직으로 출발하였으나 광해군이 등극하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기주관이 되었고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는 서장관이 되어 중국을 다녀온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시집 쌍오문집 진본이 전해지고 있다. 말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종2품)에 까지 이르렀고 세조의 영정을 영변에서 봉안한 공로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앞에 설명된 김상하와는 당숙질간이다.
덕암 김상양(金尙養:27世)은 광해조 사마시에 합격하여 통훈대부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인조반정의 공로로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광해조에 승정원 주서로 있었던 계암 김 영(金?:24世)은 북인들이 농간을 부림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예안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사표를 수리하지 낭ㅎ고 승정원 일기를 계속 쓰라고 독촉을 하니 부득이 상경은 하였으나 성밖에서 일기를 써서 올리고 돌아왔다. 인조반정 후 그동안 북인들에게 피해를 본 관리들을 승진시켜 높은 벼슬을 제수하면서 복귀토록 종용하였으나 병을 핑계삼아 계속 사양을 하였는데 그 까닭은 전왕이 비록 폭군으로 몰락은 했다 하나 그의 녹을 받은 벼슬아치로 새 왕의 녹을 받지 못하겠다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보인 표본으로 평가되어 숙종조에 도승지(정3품)로 추증되고 순조조에는 양관대제학에 가증되어 문정(文貞)의 시호와 함께 세상에서는 계암선생이라 칭송을 받게 되었다. 영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대를 이어 배출되었으니 그 중에서도 손자인 초당 김 용(金 鏞:26世)과 현손인 지애 김 협(金 협:28世), 6대 손인 일일재 김시찬(金是찬:30世)이 더욱 돋보인다.
귀래정 김효신(金孝信:27世)은 귀성 중군으로 출정하여 반란군과 싸워 숙천에 이르렀을 때 반란군인 강작이란 자가 졸지에 효신을 치니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적의 머리를 베어 원수부에 보내는 전과를 올려 가선대부에 가자되어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고 진무원종훈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김인방(金仁邦:26世)의 공로가 인정되어 진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고 벽류정 김운해(金運海:25世)는 광해조에 무과 급제하여 이괄의 난에 어가를 모시고 공주로 호종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추증하였고 충청도 조방장 일때는 공로가 있어 임금으로부터 말과 갑옷을 하사 받는 특례도 남겼으며 시은 김신길(金愼吉:27世)도 공주로 어가를 호종하는데 공이 있고 송암 김여강(金汝剛:25世)과 호봉당 김곤보(金坤寶:28世)는 의병을 일으켜 병기와 군량미 수송등 일익을 담당한 이들도 있다.
또한 인조조에 벼슬길에 오른 긍구당 김중정(金重鼎:27世)은 청백리로 뽑힌 공안공 김겸광의 5대손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나 이괄의 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진안으로 내려가 와룡암이라는 서재를 짓고 충효사상과 근검정신을 지표로 삼고 후학을 지도하고 산수와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며 세상을 멀리하였다. 긍구당 유고가 있고 와룡암과 긍구당은 건축양식이 특이하여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 왕조에서는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안으로 전후 복구사업에 노력하는 한편 대외정책에서는 명과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에 대하여 중립 외교정책을 썼다. 그것은 중국대륙의 명나라가 점차 쇠퇴해지고 만주의 후금이 크게 강성해지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심산에서 나온 정책이다.
이 때 명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후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여 토벌하였는데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해 왔다. 광해군은 할 수 없이 내촌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고 1만 3천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중국땅 건주위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곧 패전하고 후금에 항복하고 말았는데 이때 김동립(金東立:25世)과 김원복(金元福:25世)도 출전 하였다가 심하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의하여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외교정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정책이 의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하고 후금은 오랑캐의 나라이니 배척해야 한다면서 명에 대하여 친선정책을 폈으니 후금을 배척하는 것이 되어 그들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인조 5년(1627)에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침략하였다가 물러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때 남곡 김정립(金廷立:28世)은 어영 아관으로 강원도 금화에서 적과 싸워 수백을 참하고 적장의 투구와 철갑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김 진(金 搢:26世)은 광해조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언을 지냈고 인조 5년(1627)에 정주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곳 능한산성 싸움에 대장으로 항쟁하였으나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인조 8년(1630)에 송환되어 예안현감이 되었으나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같은 무렵 삼육재 김정망(金廷望:28世)은 사계선생의 문인으로 효우하고 근신함을 가상히 여겨 천거되어 현감에 이르렀는데 손바닥에 효우 두 글자를 써서 항상 실천하였으므로 연산과 은진 두 고을 유생 60여명이 모여 도백에게 맹종(孟宗)과 왕상(王祥)과 같은 효자라고 상신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김여성(金汝聲:25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광해조 계축사화에 연루되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 김장생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에서 세자를 배알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아들 남식을 보내어 나라에 충성을 다하게 하였으니 남한산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 갔음을 듣고서는 북망 통곡하였으며 학행으로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병조호란에 관련된 광산김씨를 살펴보면 ...
이조참판을 지냈던 허주 김 반의 둘째 아들로 창주 김익희(金益熙:29世)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건주위의 청태종이 즉위식을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이 식전에 조선의 사신을 참석시키고자 간계를 썼고 이곽은 참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국내에서는 즉위식에 참석한 이곽 일행을 나라에 오명을 입힌 자라고 여론이 대단하였다. 이윽고 이곽과 나덕헌이 청국 서신 용골대(龍骨大) 등과 같이 귀국하였는데 김익희는 그의 아우 김익겸(金益兼:29世)과 더불어 "이곽, 나덕헌을 죽여 8도에 효수하고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상자에 넣어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야 한다"고 상소를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와 같은 소문을 듣고 객관을 몰래 빠져나가 저희 나라로 도망쳤고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호란 중 창주 김익희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는 독전어사로 싸우면서 척화를 주장하였고 조선조에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양관 대제학을 지내신 분이다.
그의 아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 서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소수의 선비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싸우다가 강화도가 점령됨에 원임대신인 선원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의 남성루에서 자폭 순절하였다.
이 때 형조좌랑으로 있던 만취당 김수남(金秀南)도 함께 분사하였는데 뒤에 승지(정3품)로 추증되었고 강화 충렬사에 익겸 신망과 같이 광김에서 세 사람이 배향되었다. 익겸의 어머니이자 허주공 반의 부인인 연산서씨는 강화도에서 피난 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순절하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충정공 김익겸의 부인 정경부인 해평윤씨는 선조의 사위인 문목공 신지의 손녀로서 부덕을 겸비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신사임당과도 비 길만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강도로 피난했다가 시어머니인 연산서씨와 남편을 여의고 해평윤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잉태중 만삭이었고 큰 아들 만기 역시 다섯 살인 유아였으므로 죽지 못하고 돌아오는 배안에서 둘째인 만중을 출산하였다. 친정으로 돌아와 두 아들을 법도로 가르쳐 소학, 사략, 당시 등을 직접 가르칠 때 공부하는 과정은 지극히 엄격하였다. 항상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남보다 한층 더 노력해야 겨우 남과 같을 것이다"하고 "사람들은 행실이 모자라는 자를 꾸짖을 때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라 하니 너희들은 뼈에 새겨 들어라"하였다. 형제가 허물이 있으면 손수 매를 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너희 형제를 내게 부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너희가 만약 이와같이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너희 아버지를 대하겠느냐? 학문을 하지 않고 살려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스스로 미망인이라 일컫고 종신토록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큰 아들 만기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비로소 잔치와 음악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가문의 경사요 내 한 몸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다"고 했다. 만중 또한 과거에 급제하고 형제가 모두 양관 대제학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웃으며 "네가 이제 지하에 가서라도 너희 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섰다"고 하였다.
정묘호란때 사계 김장생(金長生:27世)은 80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양호 호소사로 임명되었는데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격문을 보고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우리 광김의 화양당 김 현(金 현:27世), 수우당 김성하(金聲夏:26世), 김숙남(金淑南:25世) 등도 이때 응소되어 많은 활약으로 업적을 남겼다.
장흥의 해은 김유신(金有信:27世)은 광해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척화신인 청음 김상헌을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김유신이 정묘호란 때는 임금을 강화섬으로 호종하여 위성원종훈에 책록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우산 안방준과 같이 의병을 모아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여산에 이르니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벽에 대명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청자가 든 글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 아들인 만절당 김후경(金後慶:28世)과 김 오(金 墺:28世)도 장성하였기에 같이 출전하였다가 돌아왔으며 고흥의 모헌 김취지(金就砥:25世)도 안방준의 막하로 의병을 모았다. 이때에 한 집안의 김득선(金得善:24世), 김의정(金義精:24世), 김정일(金精一:24世), 김여호(金汝瑚:24世)와 김덕보(金德普:31世)까지 그 대열에 합세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담양의 죽계 김존경(金存敬:28世)은 사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조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강진현감과 삼척부사로 재임중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현존하며 정묘호란 때는 왕실이 강화도로 파천하고 왕세자가 분조하여 완산으로 남하할 때 호위한 공이 있으나 공훈 기록을 사양하였고 천추사 서장관 및 성절사오 연경을 다녀왔다. 그 후 강원관찰사(종2품)로 선정을 하였으나 노년에는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사우들과 풍류와 독서로 여생을 보내었다.
또한 이때 어가를 호종한 김득신(金得信:26世)과 김재관(金在寬:27世)이 있었는데 전후에 그 공로로 호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한편 매원 김광계(金光繼:25世)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임진왜란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이던 근시재 해의 아들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는데 청군이 에워싸서 위급함이 알려지자 병대장이 되고 아우인 야일재 김광악(金光岳:25世)을 참모로 삼고 종제인 두문자 김요형(金耀亨:25世)과 조카인 김 초(金 礎:26世)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일으켜 출병을 하였으나 죽령에 이르니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서향 통곡하고 돌아 왔으니 임진, 병자 양난에 부자 의병대장으로 충절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 김자빈(金自빈:27世)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추천으로 종사관이 되어 숙부인 김덕란(金德鸞:26世)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광주(廣州)로 출전 하던 중 번천에서 접전을 하다가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고로 숙질이 같이 화를 당하였다. 논산에 있는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매죽헌 김득남(金得男:28世)은 광해조때 무과 급제하여 인조반정 일으켰을 때는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병자호란때는 철곶첨사로서 세자 일행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송하던 중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같이 가던 선비와 부녀자들이 많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부평에 있는 계양산 밑에 까지 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포로가 되어가던 무리들을 찾았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달아나던 적을 계속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와 무안의 묘충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懿)이다.
봉곡 김동준(金東準:25世)은 광해조 증광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광해군의 폭정 하에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홀로 찾아 뵈었고 정묘호란때는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로 남하하였으며 병자호란에는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는데 척화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호란 후에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황명처사라 자처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쓴 고로 호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죽헌 김 설(金 渫:25世)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고창의 토성산 밑에 송죽을 심고 정자를 지어 영취(永翠)라 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의촌 김남식(金南式:26世)은 신독재의 문인으로 아버지인 송와 김여성(金汝聲:25世)의 명을 받들어 고창에서 김남철(金南哲:26世)과 같이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자가 수백 명에 으르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출전하다가 청주에서 오랑캐의 무리 90여 명을 참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려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했다. 그 후 과거에 뜻을 버리고 정읍의 계령산 아래에 옥산정사란 강학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수백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나라에서 충신의 정려를 받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은 김이성(金履成:27世)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과거를 폐하고 화헌정사를 지어 후진 양성을 했으며 효행이 탁이하여 효자의 정려를 받았으며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할 때 당계 김화준(金華俊:27世)은 충절을 다한 고로 보연(寶硯:벼루)을 하사 받았고 수졸헌 김익제(金益濟:27世)도 어가를 호종하였다가 전쟁이 멎자 향리로 돌아와서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외에도 호종공신으로 더 많은 사람이 기록에 나타나나 일일이 이 자리에 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세한재 김성일(金成一:29世)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아우인 사호 김성구(金成九:29世)와 같이 아버지의 원수인 종놈 김이란 자를 죽이고 관가에 가서 자수하니 인조임금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특사하였다. 성일은 병자호란 때에 군공을 세워 삭주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의 정려를 내렸고 담양에 있는 증암사에 배향되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지은 '형제복수전'이라는 글도 전한다고 한다.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한 우리 광산김씨는 별로 많지는 않으나 미산 김여옥(金汝鈺:27世)은 인조조에 식년시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 정묘호란에는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고 환도 후에 봉교, 전적, 예조와 병조좌랑, 지평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함평현을 수비하다가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였으나 강화가 성립된 뒤에 해산하였다. 이어서 밀양부사, 한성부우윤이 되고 부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효종조에서는 병자호란 때 겪은 굴육을 설욕할 밀명을 받았으며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두 번씩이나 평안도 관찰사를 배수 받아 실천에 옮기려 했으나 불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김익견(金益 :29世)을 북벌의 선봉장으로 쓰려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천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효종이 진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스스로 마음을 굳히고 효종께 사은숙배 하러 갈 즈음에 효종이 승하하므로 북벌은 계획에만 그치고 실천이 안된 허사가 되어버린 사건으로 남았다.
긍구당 김세환(金世煥:29世)은 유일재 김언기(金彦璣:25世) 둘째 아들인 만취헌 김득숙(金得숙:26世)의 증손으로 의지가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경사에도 밝아 창설 권두경, 우헌 류세면 등 유현들과 사귀어 수갑계를 맺어 성현의 경전을 강독하고 임천에서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여 문호를 빛냈다.
김진원(金振遠:27世)은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 경학을 통달하였고 충효의 사적도 많이 읽어 충신열사의 풍토가 있었다. 효행 또한 탁이하여 인조조에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음에 임금이 거듭 부르므로 부득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부임하였다. 숙종조에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고 효자의 정려도 받았다.
또한 효종조에 활약한 이를 더 들어본다면 탁계 김우인(金宇仁:27世)은 진보현감을 지냈고 효종조에 엄선한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문도가 100여 명이 모였는데 문하에 학문을 성취하여 문과 급제자가 10명,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가 40여 명이나 되어 문명을 떨쳤다. 교관임기를 마칠 무렵 동기 문하생이 탁계 동문록을 간행하여 선생의 음덕을 추모하였다.
기오당 김우형(金宇亨:27世)은 효종조 증광시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시독관으로 임금 앞에서 대학을 강론하였고 서장관으로 중국도 다녀온 외교통이며 공조판서를 거쳐 기로소(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이는 곳)에 들어 갔으나 기사환국을 개탄하면서 녹을 받지 않았다. 예서에 능하였다고 하고 저서로는 옥산유고를 남겼으며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숙종 6년(1680)에는 경신대출척이 있었다.
이 때 우리 광김은 7대제학을 배출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인맥을 살펴보면 허주 반의 맏아들 학주 김익열(金益烈:29世)은 인조조에 선공감 가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았으며 그 후에 남원부사(정3품)를 지냈고 둘째인 김익희(金益熙:29世)는 호가 창주인데 남한산성 독전어사로서 척화신으로 이름이 높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정2품)와 양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셋째인 김익겸(金益兼:29世)은 병자호란 때 강화수성에 실패하자 순절하여 광원부원군(정1품)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넷째인 김익훈(金益勳:29世)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 의금부 도사부터 시작하여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가 세워졌고 그 뒤에도 여러 벼슬을 거쳐 경기총융사겸 어영대장을 제수받아 광남군(光南君:정2품)을 봉작받았다. 경신대출척때 남인을 출척했다가 뒤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으니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다섯째인 김익후(金益煦:29世)는 인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정9품)을 지냈고 이조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김익경(金益炅:29世)은 현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종2품)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학덕이 높았으니 그의 자손들이 역사를 빛낸 가문으로서 이때 초석을 다져 놓았다.
익겸의 아들 만기는 뒤에 영의정과 국구가 되었고 만중은 국문학의 대가인 서포로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등을 저술하였다.
서석 김만기(金萬基:30世)는 다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버지인 김익겸을 잃어버리고 어려서부터 숙부인 창주 김익희에게 수학하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효종 3년(1652) 사마시를 거쳤고 그 이듬해에 별시 문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수찬, 정언, 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인 인경왕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정1품)에 승진되었다. 그 후 문곡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공을 세워 보사 1등공신이 되었다. 사후에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석의 아우인 서포 김만중(金萬重:30世)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조에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종 벼슬을 두루 거쳐서 예조판서겸 양관대제학을 지냈는데 숙종 임금께 아뢰기를 장희빈에게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과 남해등지로 유배되었다. 서포는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윤씨부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시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오는 도중 배 위에서 만중을 낳아 길렀다. 그러한 사연이 있는 서포 였기에 유배도중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
서석 만기와 그의 아들인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와 진규의 아들인 건암 김양택(金陽澤:32世)은 어느 문중에서도 드문 3대 대제학을 지냈고 또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과 하정 김영수(金永壽:37世)가 대제학이 되었으니 7대제학 모두가 사계선생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으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이 시대에 활동한 광산김씨로 몇 사람을 더 든다면 오헌 김 총(金 총:26世)은 현종조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를 미롯하여 정랑, 수찬 등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때 시관이 되었는데 시사에 연루되어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왜국의 사신접위사로 동래공관의 임지에서 졸 하였다.
전곡 김익렴(金益廉:29世)은 효종조에 문과 급제하였고 사헌부 집의를 거쳐 사간원 사간과 명사를 겸하니 효종이 기재라 예찬하였으며 종성부사를 지냈고 판서에 추증되었다. 역사 김우화(金愚華:29世)는 숙종조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각 고을의 수령과 부사를 지냈으며 기사환국 때에 중전을 구호하는 장계를 올렸다. 김정봉(金廷鳳:29世)은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평안도 장시도사가 되고 황해도도사, 춘추관 기주관, 봉상시정, 승문원 판교를 지냈다. 입지당 김우철(金愚喆:29世)은 숙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노론 4대신의 신원할 것을 주청하였고 장령을 거쳐 형조참의에 승진하였다.
김자건(金自鍵:27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스승을 따라 도학을 강하였으며 벼슬과 명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인조조에 향천으로 선공감역, 빙고별감을 지냈으며 현종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읊으며 말년을 지냈다.
김자남(金自南:27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자질이 뛰어났는데 벼슬길이 여의치 않아서 인조의 국상 때 초사로 영사전 참봉이 되었다가 사응원 직장, 군자감 주부로 옮겼고 정선 안응현감을 거쳐 예빈시정에 이르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익화(金益華:28世)는 현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창락, 대동찰방, 예조좌랑, 사헌부 감찰을 거쳐 함창, 보령, 강진현감을 지냈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치적이 있어 보령 고을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숙종의 첫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31世) 김씨인데 서석공 김만기의 딸이다. 조선왕조 5백년동안 광산김씨로는 오직 한 분뿐인 왕비였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쉬울 따름이며 뒤를 이은 인현왕후 민씨마저 왕자를 낳지 못하였다.
현종 초기부터 경종 말기까지 약 70년간은 당쟁이 극에 이르렀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보복 또한 처참하였으니 희생이 연속이었다. 이와같이 당쟁이란 이념이 친족이란 혈연도 초월하고 사생결단을 하고 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와중에 만기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오라버니 되는 만구와 김진구(金鎭龜:31世)와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 형제를 먼저 들 수 있다.
형인 진구는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역란을 토제하였으며 호, 병, 예, 형, 공조등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었고 어영대장 수어사도 겸직하였고 숭정대부에 승진하고 광은군(종1품)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아우인 진규는 숙종조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으며 갑술옥사로 복관되어 교리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때 소론으로부터 척신으로서 궁중 출입이 잦아 월권행위가 많다고 탄핵을 받아 사직되었다. 그러나 곧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복관되어 우부승지(정3품)가 되었을 때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숙종 33년(1707)에 병조참판에 이르렀을 때 소론이 집권하니 공은 덕산으로 유배되었다. 4년 뒤에는 다시 양관 대제학으로 복관되고 또 2년 뒤에는 예조판서와 좌참찬(정2품)으로 승좌되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서석이 만들었던 광산김씨의 족보를 증보하여 죽천보를 완성한 주인공이며 거제의 반곡서원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김진화(金鎭華:31世)는 숙종조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은 충주목사를 지냈고 김진일(金鎭一:31世) 또한 현릉령과 사제감의 첨정을 거쳐 한성서윤을 지내다가 경종조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낙향 은거하였다.
한편 진구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위에 말한 거듭되는 정변에 정권도 잡아 보고 또한 반대파로 몰려 고초도 겪은 희비의 양극을 고루 체험한 8택을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맏이인 북헌 김춘택(金春澤:32世)은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이름이 높았는데 훈신의 적장자로 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유배되었다. 유배를 당하였어도 인현왕후 민비를 복위하는데 앞장서서 갑술옥사를 일으켜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로 복관 되었으나 그 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소론의 무고를 당하여 다섯 번이나 영해로 유배되고 세 번이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시와 글씨에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며 종조부인 서포가 지은 한글소설 〈구운몽〉과〈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고종 24년(1887)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충효의 절개를 지킨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정2품)와 광녕군으로 추증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둘째인 척재 김보택(金普澤:32世)은 숙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검열, 정언, 감사를 지냈고 소론의 거두인 약천 남구만 등의 오역을 두둔한 죄를 논박하다가 소론의 미움을 샀으며 경종 2년(1722)에 일어난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벼슬을 추탈 당하였으나 영조 2년(1726)에 복관되고 고종 5년(1868)에 이조판서(정2품)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셋째인 백운헌 김운택(金雲澤:32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참판이었고 신임사화 때 무고로 영변에 유배된 뒤 다시 반역한다는 목호룡의 무고로 장살되었다. 영조 즉위로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넷째인 죽헌 김민택(金民澤:32世)은 숙종조에 별시문과로 급제하여 교리로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신임사화 때 무고로 연루되어 혹형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고 영조 즉위로 신원되어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다섯째인 평재 김조택(金祖澤:32世)은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신임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섯째인 묵헌 김복택(金福澤:32世)은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영휘전 참봉으로 부임하였다가 사퇴하고 귀향했으나 신임여흉들의 무고로 다시 투옥되어 옥중에서 졸한 뒤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일곱째 김정택(金廷澤:32世)ds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위도로 유배되었고, 막내인 만죽당 김연택(金延澤:32世)도 공히 신임사화 때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즉위로 모두 신원되는 동일 운명을 겪은 형제들이다.
또 이 무렵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으로 김만년(金萬年:28世)은 숙종조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포서 별검을 거쳐 남행주서를 역임하였고 문학과 행의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기사환국 때 친우인 이사명은 죽고 공은 온성에 유배되어 죽었는데 이듬해에 복작되었다.
김이수(金以壽:30世)는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전적을 지냈다. 우암이 유배되자 병을 청탁하고 두문자정 하였으며 폐호간서(閉戶看書)를 좌우명으로 삼고 학구에 전념하였다.
김응휘(金應輝:30世)는 장녕전 참봉으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였을 때 여러 날 동안 석고대죄 하여 왕비로 복위할 것을 계정하였고 문행으로도 당세에 명성이 높았다.
미암 김위재(金偉材:33世)는 신임사화로 신지도로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향리인 서산으로 귀환한 후 한강을 건너지 않고 학행에 있어 감역과 부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영조 말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서간 김선재(金善材:33世)는 신임사화 때 정의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상의원 첨정, 한산군수를 역임하였다.
김상현(金尙鉉:28世)은 재주가 뛰어나 정주의 학문에 힘을 기울렸다. 풍류에도 취미가 있어 명소를 다니며 글을 짓고 읊었다. 숙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익상(金翊相:30世)은 숙종조에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용천부사에 승진되고 이어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및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승지에 이르렀다.
오헌 김성택(金聖澤:32世)은 숙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예산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육오당 김영택(金令澤:32世)은 벼슬은 대흥군수였고 사복시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우 김경택(金慶澤:32世) 또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송재 김용택(金龍澤:32世)은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영조 때 신원 되었으며 순조 때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동생인 존오재 김광택(金光澤:32世)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중 신임사화로 여주 우만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원되었고, 그의 아우 김경택(金京澤:32世)도 같이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이술지와 같이 무주로 유배되었다가 21세로 요절하였다.
산천재 김덕재(金德材:33世)는 훈신의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 예에 따라 대호군을 배수하고 신임사화 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졸하였다. 이때 동생들인 행정 성재(聖材:33世), 희암 준재(俊材:3世), 후재(厚材:33世), 대제(大材:33世), 양재(養材:33世), 득재(得材:33世), 낙재(樂材:33世), 명재(命材:33世)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졸와 김중백(金重白:31世)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학문이 성취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신임사화 때 숙부 김일관(金一觀:30世)과 함께 구검 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니 석방되었고 저서로 졸와 유고가 있다.
음오당 김 근(金 瑾:28世)은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세상에 알려져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서 후진양성에 힘썼고 산수를 즐겼는데 인왕산 낭떠러진 언덕 사이에서 성삼문의 신주를 찾아내어 왕에게 품계하여 사육신의 원혼을 위안하는 한편 우암에게 신반실당(神返室堂)의 의미를 물어서 홍주 노은동 옛터에 사우를 세워서 향사케 하였다. 벼슬은 통덕랑을 지냈다.
운성 김재정(金在精:27世)은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우암이 화를 입고 귀양을 가니 양호지방의 유생과 함께 대궐 밖에서 풀어 줄 것을 진정하다가 다 같이 멀리 귀양을 갔다. 동몽교관에 제수되었고 유고가 있다.
칠매당 김 오(金?:30世)는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양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묘 배향 할 것을 제일 먼저 상소하였고 우암 송시열의 무고 때 통탄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글을 올리다가 혹독한 고문 끝에 흉변을 당하였다.
유고가 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소암 김계환(金啓煥:29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좌승지와 대사간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 시대에 같은 혈족이면서 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도 있었으니 소론쪽의 거두인 아계 김일경(金一鏡:31世)이다. 일경은 숙종조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중시에도 거듭 장원급제하여 승지로 있으면서 왕세제(뒤의 영조)의 책봉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이진유, 이명의, 박필몽 등과 함께 목호룡을 시켜 노론 일파가 왕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한 후 노론 4대신을 위시하여 김용택을 잡아 죽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영조 즉위 후에 전일의 무고죄로 목호룡과 함께 잡히어 끝까지 왕에게 불복, 공모자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고 처형당했다. 사후 83년째인 을사보호조약이후 순종 2년(1908)에 신원되어 복작되었으며 저서로 아계유고까지 남겼다.
그 외에도 이 때에 벼슬한 이들이 많았으니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한편 사계의 증존자로 김만균(金萬均:30世)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소청하여 이룩하게 하였고 자신은 승정원의 좌부승지에 올랐다. 둔촌 김만증(金萬增:30世)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교관을 배수하고 세자익위사 벼슬과 안동부사 등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만길(金萬吉:30世)은 현종조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숙종조에 강원,전라 양도의 관찰사를 거치는 동안 훌륭한 치적이 나타나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에 이르렀고 김만재(金萬재:30世)는 숙종조에 참봉으로 있다가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사면되어 부평부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만채(金萬埰:30世)는 대사간과 강원도 관찰사 및 개성유수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졸재 김광수(金光洙:31世)는 숙종조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였다. 경종조에 종제인 김팔화(金八華:31世)와 같이 왕자공 사당 건립 통문을 경향 각지에 보내니 제족들이 성원하여 주었다.
만취당 김낙룡(金洛龍:32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벼슬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에 승진하고 동부승지에 이르렀다가 초산부사로 외직으로 나가 서적을 구입해서 제생을 가르치니 북방풍속이 개선되어 문장의 선비가 많았다.
온재 김진옥(金鎭玉:31世)은 이때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강원관찰사를 지냈고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도와준 보답으로 명나라 황제 3위(태조, 신종, 의종)를 위한 대보단을 비원안에 축단하고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조정 중신들이 그의 의견에 따르게 한 공로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신망(金莘望:31世)은 호가 경희당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인재를 길러낸 바 있었고 김요경(金堯鏡:31世)은 숙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경종조에 평안도 관찰사와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쳤다.
김천여(金天與:30世)는 숙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천안군수를 지냈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김천록(金天祿:30世)은 영조조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학문과 덕행으로 동산서원에 봉향되었으며 김천상(金天相:30世)은 영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개풍군수 재임시에는 실전한 문숙공의 묘소에서 지적을 찾아 봉축하였다.
김진용(金晉鎔:25世)은 제주 입도조 김윤조(金胤祖:17世)의 8세손이며 어모장군 김귀천(金貴泉:21世)의 현손으로 어려서부터 마침 제주에 유배되어온 간옹 이익선생에게 수학하여 인조조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령전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귀향하여 학당을 지어 후학을 지도하니 제주도의 유학발달에 기여하였고 명도암(明道庵)에서 수학하였다. 하여 명도암 선생이라 불리어졌고 향현사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의 아들 김계륭(金繼隆:26世)은 현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고 김계창(金繼敞:26世)은 현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전적을, 조카인 김계흥(金繼興:26世)은 숙종조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김계중(金繼重:26世) 또한 현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을 지내 4인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 유학발달에 기여하였고 가문도 빛내었으며 이때 김계무(金繼武:26世), 김계홍(金繼洪:26世)도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 벼슬을 지냈다.
특히 우리 광산김문의 선조중에는 사계(沙溪), 신독재(愼獨齋) 두 분의 대현(大賢)이 부자간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얻었다. 또한 네분(益熙, 萬基, 萬重, 鎭圭)의 대제학(大提學)과 우의정(右議政: 克成) 한분을 배출했다. 특히 임진, 정유의 양대 왜란에는 만수(萬壽), 4형제와 만수의 아들, 그리고 의병장 덕령장군(德齡將軍)이 분전(奮戰)하여 왜적을 섬멸(殲滅)하는 공을세웠고
병자호란에는 수남(秀男), 득남(得男), 익겸(益兼)이 장렬하게 순절(殉節)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중기야말로 학행(學行)과 절의(節義)와 충효(忠孝) 등에 뛰어난 현조(顯祖)가 많이 나와서 광김(光金)의 문중을 빛내줌으로서 도덕(道德)과 예학(禮學)의 종가(宗家)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후기의 광산김씨 (영조∼대원군)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가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책을 쓰므로서 정국은 다소 안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상과 주장이 받아드려지지 못했고 고식적인 세도정치가 판을 침으로서 서정의 쇄신은 고사하고 탐욕과 부패로 삼정(三政: 田政, 軍政, 還穀)이 문란하고 지방관리의 수탈이 심해서 국정은 어려워지고 민심은 흔들렸다. 선각자들의 실학적인 개혁의 주장은 대세를 움직이지 못하여 과학기술은 도외시되고 말았으니 나라가 발전되지 못하였다.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섭정하여 서정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열강들의 개화사상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민비일파의 정권다툼으로 국내형편은 혼란만을 거듭했다. 따라서 선각자들의 개화의 노력, 독립자강(獨立自彊)의 노력도 허사가 되어 잔악한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어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초래하는 원인이 조성된 시대라고 하겠다.
영조시대의 활동한 우리 광김의 인물로는 먼저 계헌 김 계(金 계:30世)가 있는데 영조4년(1728)에 이인좌가 모반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반군들이 안의를 점령하자 이 때 합천의 조성좌가 밤에 군수 이정필을 찾아와 협박 할 때 힘이 장사인 김계는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고 별군을 구성하여 반군 일당을 소탕한 공로로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인좌의 난에 김수견(金壽堅:31世)은 반란이 일어나자 종군하여 적의 괴수를 사로잡은 공으로 판관에 추증되었으며 수운재 김지원(金智元:29世)과 김도원(金道元:29世) 형제 또한 의병참모로서 예안 의병대장인 이수겸을 보좌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은 임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근시재의 5대 손이므로 이 집을 가르켜 임진, 정묘, 병자, 무신의 '4란의 창의 가문' 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때 적암 김동준(金東俊:28世)은 경종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정랑이었고 기주관으로 일할 때 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거상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을 못하고 소모사 백화재 황익재에게 서신으로 적을 섬멸할 방략을 제시하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며 그대로 적용하여 적을 토평하여 원종일등훈에 녹훈되고 유고가 있다.
그 밖에도 이인좌 난에 창의한 광김으로는 덕헌 김천환(金天煥:29世)은 예천에서 졸와 김치장(金致章:32世)과 서호 김 박(金 撲:31世)은 안동에서 김경화(金慶華:32世)는 호남에서 창의했고 그 밖에도 더 있었으니 광산김씨는 언제나 군주를 옹호하는 충절의 길을 걸어왔음을 증명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계 없으나 영조시대에 활동한 현조들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김양택(金陽澤:32世)의 호는 건암이니 영조조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헌납, 보덕을 거쳐 영의정(정1품)에 까지 올랐다. 그가 홍문관 부수찬(종6품)으로 있을 때 당시 좌의정이던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받아 산청현감으로 좌천된 일도 있는 것을 보아 꼿꼿한 광김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영돈영부사(정1품)로 타계하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사구재 김원택(金元澤:32世)은 영조조에 감역을 비롯하여 시평과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판결사, 동돈녕, 한성판윤에 승진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직하 김상복(金相福:33世)도 영조조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검열, 사서, 정랑, 보덕, 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배수되었는데 영상이 된 처음 자리에서 왕실을 바로잡고 의리를 밝힐 것을 아뢰니 왕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파직을 명했고 그래도 쌓인 포부를 다시 진언하니 삭직을 당하여 공주로 유배될 정도로 절의가 굳었다. 순조조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근와 김 희(金 憙:34世)는 영조조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조에 규장각 직제학, 대사성, 경기도관찰사, 이조참의를 지냈고 우의정을 지냈으며 동지사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 갔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이길헌 김기성(金箕性:34世)은 장헌세자의 딸과 결혼하여 광은부위가 되었는데 문장이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고 정조 때 동지정사로 연경으로 떠날 때 〈어제노행시〉를 하사받았다.
퇴어자 김진상(金鎭商:31世)은 숙종조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으로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설서, 수찬, 지평을 지내다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이조정랑, 부제학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과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영조 13년(1737)에는 평장동에 시조공의 유허비를 세울 때 동국필언에 올라 있는 명필이었기에 그 비문을 썼다. 유고가 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김광윤(金光胤:31世)은 영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귀성도부호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묵와 김화택(金和澤:32世)은 영조조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설서, 승지를 거쳐 춘천, 곡산부사등 외직을 나갔으나 양친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하여 상소하니 임금도 감동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였다. 춘천부사로 재직 시에는 실전했던 선조 광성군 김 정(金 鼎:18世)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였다.
김화중(金和中:32世)도 이 무렵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석당 김상정(金相定:33世)도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김하재(金夏材:33世)는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로서 이 시대에 강원도 관찰사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낸 바 있는데 이재학의 무고로 화를 입었으나 융희 1년에 신원되었다.
육인재 김광국(金光國:32世)은 생원시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학식이 해박하고 문장이 좋아 눌은 이광정, 강좌 권만과 더불어 사귀니 영성군 박문수 어사가 공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고 유고가 있다.
김광호(金光虎:32世)는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한성참군, 선전관, 주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 때 조정의론이 분열되어 권간의 농간에 대해 김진상, 홍보석, 송환기 제현과 함께 소장을 올리니 4대신과 같이 무고하였다는 죄로 삭직되었다. 그 후 성균전적을 거쳐 삼례찰방으로 나갔을 때 사창을 털어 구제하니 군민이 거사비를 세웠고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사직하였다.
병자호란에 창의한 신성 임향조 김 봉(金 鳳:26世)의 증손자인 석포 김복수(金復壽:29世)는 어려서부터 탁이한 자질과 총명 영오하여 큰 재목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나주괘서의 변' '사도세자의 참사' 등 시국이 혼란함을 한탄하고 산 언덕에 '석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경서와 사기를 탐독하였으며 수직으로 가선이었다.
김종태(金宗台:30世)는 영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다. 서장관으로 중국도 다녀왔고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삼우재 김 윤(金 鈗:32世)은 영조조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이 높고 성리학을 탐구하여 유고가 있다.
연암 김상익(金相翊:33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통신종사를 거쳐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지도에 유배되어 졸하였는데 정조조에 신원되고 순조 때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봉 김홍구(金鴻九:32世)는 눌은 이광정의 문인이다. 천품이 총명하고 재예를 겸하였으니 스승이 공을 평하되 "침착하고 단정하며 참다운 군자"라 극찬하였다. 선대 유지를 계승하여 임하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였고 도의로 사귀고 학문을 강론해 유고가 있다.
복재 김두추(金斗秋:34世)는 경사에 밝았고 영천군수로 재임시 선정을 펴 치적이 나타났고 부정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관안군에 봉해졌다.
정조조 때 김명헌(金命獻:27世)은 제주에 살면서 학문 익히기를 즐겼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마침 어사 심락수가 베푼 과장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 81세였기에 특별히 급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벼슬길에 부임할 수 없음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명하기를 '제주 대정현의 유생 김명헌은 다음 해 급제자로 숙배케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별세하니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김효건(金孝建:31世)은 정조조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사간원 대사간과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조임금이 공의 단정한 풍모와 굳은 지조를 칭찬하여 상까지 내렸다 하니 그의 임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만림 김범구(金範九:32世)는 대사간 류정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성취하였고 덕행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동암 류장원, 반구재 권성제 제공과 도의로 사귀고 서당을 개설해 후진 육성에 힘썼고, 낭옹 김열택(金說澤:32世)은 별천으로 현릉 참봉과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정조 후기에 특명으로 승자하여 교자를 내렸으나 그래도 부임치 않았다.
취석당 김상구(金象九:32世)는 영조조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정조 17년(1793)에 실시한 도산별시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문제가 생겨 파방되고 말았다. 공의 재주를 아껴 왕이 자석으로 만든 벼류와 옥책띠를 하사하고 빈흥록을 간행할 것을 명 받아 실행 하였으며 유고가 있고 반와 김성응(金聲應:30世)은 정조 식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은 도사였으며 독실한 행실, 깊은 학문, 넓은 지식으로 향당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유고가 있다.
과재 김정묵(金正默:34世)은 경학으로 천망되어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사림의 천거로 사헌부 지평 겸 경연관,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선산 아래에서 두문하고 성리학에 전심해 그 밝은 식견과 문장 및 덕행이 뛰어나 당시 사림의 사표가 되었고, 구봉 김우택(金禹澤:32世)은 예학에 정통해 향천에 올랐다. 4례의 32편과 음사합록과 거가예의 등 각 1권이 가장되어 있고 예론 변설 1권이 세상에 알려져 예학의 대가로 통칭되었으며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기상(金箕象:34世)은 영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주재 김기응(金箕應:34世)은 학문이 성취하여 생원시를 거쳐 수령을 지내다가 황주목사에 이르렀고 점안재 김기헌(金箕憲:34世) 또한 같은 시대에 홍릉 참봉으로 출사하였다가 함평, 밀양, 충주 등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인일정 김성은(金性 :30世)은 정조 10년(1786)에 평장동 왕자공의 유허에 사우를 짓는 책임을 맡았고 정조 21년(1797)에는 문안공 양감의 위에 시조공의 위패를 봉설하고 서원강당 중수기를 썼다. 순조 3년(1803)에는 임진왜란 때 장성남문에 창의한 곳에 비를 세웠고 순조 26년(1826)에는 유림의 발의로 노산사를 창건하는 등 그 외에도 많은 문사일을 하였다. 동국문헌록, 삼강록을 편저하였고 성리변론, 태극해설 등을 저술하였으며 유고가 있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 수(金 燧:32世)는 재질은 경륜을 쌓았고 효우에 돈독하였으며 족조인 김성은과 더불어 장영공 진( ), 전리판서공 광리(光利)의 묘소를 풍덕, 망포 응봉하에서 비로소 찾아 수호하였고 저서로 동유록 및 풍천일기가 있다.
김상순(金相順:33世)은 순조조에 벼슬이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면서 국가에 충성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하 김기서(金箕書:34世)는 정조조에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고 순조조에 감역을 제수하였으되 또 나가지 아니하니 그 때 공론이 공을 경연관으로 뽑아야 한다 하니 부득이 나가 시직, 부수, 위수를 거쳐 청도군수로 선정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조야에 중망을 박았고 김효수(金孝秀:31世)는 정조조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김재삼(金在三:35世)은 학행이 높아 음사로 직장, 현령, 선산부사를 거쳐 형조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붕당의 폐단을 없애려고 탕평책을 썼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파당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과 사도세자 사건 등의 격동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난국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타계하여 지속적으로 이끌고 나가 성공하고 안정기에 들어서자 재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니 이곳이 이른바 실학이다.
우리 광김에서도 실학 쪽에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다. 암당 김도혁(金道赫:34世)은 노암 정필규 문하에서 경서를 독실히 탐구하여 오경중의 하나인 서경의 한편을 주해하였고 선기옥형(오늘날의 천구의)도 만들었다. 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구조(직각을 낀 삼각형의 짧은 변이 구, 긴변이 조)와 천문과 산수를 분명히 알게 하였고 저서로 오행심성도와 암당유고가 있다.
김기승(金箕昇:34世)은 영조조 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안군수를 지냈고 황주진영 병마동지절제사겸(종4품) 대구중군을 지냈고 수원북문을 건축하는데 참가하여 활동한 공로로 정조 임금으로부터 어주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이 무렵에 김기은(金箕殷:34世)은 정조조에 춘장대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사인, 대사성, 승지를 거쳐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또한 기기재 김상연(金尙 :30世)은 효성이 지극하고 숭조정신이 투철하였으며 대학, 중용, 상례비요 등 학문을 연마하여 학행으로 유명하였고 용양위 부호군을 거쳐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제수받았으며 논산에 있는 휴정서원에 배행되었다.
소산 김도손(金道孫:34世)은 시례고가의 법통을 이어받아 학문이 깊었고 필법 또한 정묘 간결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였다.
우리 광김에서 외척의 세도정치 시대에 활동한 이가 잘 나타나지를 않는다.
위암 김상악(金相岳:33世)은 순조 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에 부담을 느끼고 벼슬길에서 영달할 것을 단념하고 관악산에 들어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근세의 역학을 총망라한 저서로 산천역설 12권과 위암시록 3권을 편찬했다. 그 후 정조의 명을 받아 홍릉 참봉을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임명되었다.
세도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광김은 정부의 요직에 있던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개화기의 주역을 담당하지 못했음이 아쉽다. 벼슬길에 있었던 사람을 구태여 찾는다면 철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종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던 김영목(金永穆:37世)이 있고 호조참판을 거쳐 형조와 예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을 받은 김영철(金永哲:37世)등이 있으나 정도를 걷고 덕행을 쌓는데 주력했고 매국적 행동을 한 분이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번포 김재창(金在昌:35世)은 정조조에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순조조에 부수찬, 승지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초천 김상휴(金相休:33世)는 순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지와 이조판서겸 예문관 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많아 기로소에 들어갔다.
김낙수(金樂壽:33世)도 이때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과 이조참판을 지냈는가 하면 김재전(金在田:35世)은 순조조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외직으로 봉산, 안변부사를 거쳤고 내직으로 사간원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에 으르렀다.
순조조에 활약한 광김의 인사를 찾는다면 김재원(金在元:35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승계하여 의주 부윤에 이르렀다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김기순(金箕순:34世)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릉 참봉을 첫 벼슬로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에 임명되자 나가지 않았고 재임중 치적이 현저해 왕이 교서를 내려 우부승지에 특진시켰다.
평암 김상면(金相勉:33世)은 문과 급제하여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가주서, 성균관 전적, 장령을 거쳐 금산 현감으로 나갔다가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 등 여러 요직을 거쳐서 철종조에 형조참의에 까지 승진되었다.
귀산 김성관(金星觀:33世)은 순조조에 생원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명민하며 위엄이 있었으며 강직하여 공의 앞에서 함부로 비리를 행하지 못하였다. 선조의 유훈을 지켜 임천에서 자연을 벗하며 구도 수학하였고, 김재성(金在成:35世)은 순조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 벼슬을 시작으로 각급 관작을 거쳐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김종범(金宗範:30世)은 학문이 높아 음사로 간성, 해주, 연안 등 각 고을의 수령으로 선정하다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김공현(金公鉉:36世)은 순조조 식년시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김득현(金得鉉:36世)은 효력부위와 용양위 부사맹을 거쳐 돈녕부도정을 역임하고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는 등 그 외에도 여러분이 있었다.
이어서 헌종, 철종시대에 활약한 인사를 더 찾는다면 김재청(金在淸:35世)은 헌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대사성과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가 하면 김기주(金基周:35世)는 순조조에 벼슬길에 올라 헌종조에 동부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까지 승진하였으나 그 직위를 탐하는 자들이 있어 춘천부사로 자원하여 내려앉는 겸손을 발휘한 바도 있다.
미서 김재현(金在顯:35世)은 철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을 거쳐 이조판서에 까지 이르렀으며 김수현(金壽鉉:36世)도 이 무렵에 같은 이조판서를 거쳤고, 김기현(金琦鉉:36世)은 호조참판을 지냈고 광석 김태현(金台鉉:36世) 또한 이조참판을 같은 시대에 지냈으니 광김의 내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서계 김재찬(金在燦:35世)은 강고 류심춘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호를 서계라 하였고 사림의 중망으로 좌수가 되었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저서로 태극도설, 서명연주, 퇴소유요, 해동명현록, 서계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여기에서 좌수란 향청의 으뜸 벼슬로 자문하는 직책인데 그 고을의 향사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사가 천거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는데 주로 평민신분에서 맡아 향리를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성들에게 정령을 전달하고 민정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유독 안동과 울산좌수 만은 평민이 아니고 양반계층에서 담당하는 전통이 있었으니 위에 말한 서계 재찬의 조부 만오헌 김성열(金星說:33世)과 선친 애오헌 김도진(金趙振:34世)도 도학과 사류의 추앙을 받아 안동좌수를 역임하였으니 세간에서는 이 집을 3대 좌수집이라 칭송하였다.
석하 김기석(金箕晳:34世)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여 현종조에 선치 수령으로 형조참의에 승진되니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고, 정와 김 증(金 증:31世)은 헌종 증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율봉 찰방과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는데 재임중 청검하여 이름이 높았고 유고가 있다.
외암 김도명(金道明:34世)은 강고 류심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에 깊이 젖었고 예설을 정초하여 향폐를 구하고 여씨 향약을 만들어 시국폐단을 논하였고 후학 장려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외암 문집이 전해진다.
하서 김응규(金應奎:37世)는 헌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인품이 고매하고 의표가 단정하였으며 경사에 밝아 사림의 추증을 받았고 하서 유고가 있다.
정암 김의표(金儀表:34世)는 헌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비롯하여 이조정랑까지 역임하다가 외직으로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사헌부 장령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까지 승진되었고, 김재헌(金在獻:35世)도 이때 벼슬길에 올라 금성군수를 지내었다.
김우현(金佑鉉:36世)은 헌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와 목사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김오현(金五鉉:36世)은 고종조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마였으며, 목사를 거쳐 돈녕도정과 가선에 올랐다.
19세기의 중엽부터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 년간 게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정치기강이 무너졌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은 철종조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조의 참의와 대사간을 거쳤고 고종조에 들어와서 형조참판과 성균관의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좌빈객,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고, 어주까지 하사받았으며 말년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까지 오른 우뚝 솟은 인물이다.
김재성(金在聖:35世)은 천성이 호방하였고 춘추와 병서를 탐독 정통하였으며, 기력이 과인하여 궁술에 능했으며 무과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김증현(金曾鉉:36世)은 생원시에 합격 출사하여 목사를 지내고 승계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김익현(金翼鉉:36世)은 철종조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비롯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정정에 밝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폈고 부응교를 역임하고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김기문(金箕文:34世)은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을 지내고 병인양요 때 양성 영정을 받들어 승희전에 봉안한 공으로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열관,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계운 김낙현(金洛鉉:36世)은 철종조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림의 일천으로 현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경연관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익수(金翼洙:38世)는 풍도, 언행이 일문의 모범이 되었고 철종조에 무과 급제하여 삼군부 낭청을 거쳐 훈련원정, 도총관과 승지를 지내고 가선대부 반열에 올랐다. 고종말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임금을 사모하는 사군대를 쌓고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서울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남파 김갑교(金甲敎:32世)는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승문원 정자를 지냈다. 이 시대에 같이 과거를 본 청오 김봉상(金鳳相:34世)은 문필과 시화에 탁월하여 당시 영남의 거유였던 방산 허훈과 교류가 돈독하여 드디어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과거에는 관운이 없었는지 두 사람 다같이 번번이 실패하였다. 도산과 문순공 시비(퇴계 이황과 그의 문도인 후조당 김부필이 시호가 같았음으로 일어난 문중 싸움)가 있었는데 예리한 필봉으로 이를 막아 예조로부터 문순공의 문하에서 다시 문순공이 나니 그 어찌 광명이 아니겠는가(文純之下又出 文純 不可光榮哉)란 비답을 받아 왔으니 문중의 선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여생은 즐거이 후진을 양성하다가 졸하였으니 청오 유고가 있다.
김명수(金命洙:38世)는 음사로 사복시 주부와 여러 요직을 거쳐 목사를 역임하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김직현(金稷鉉:36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관 현감 등 여러 요직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용우(金容愚:34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황산도 찰방과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확재 김학수(金鶴洙:38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 필선, 상례, 전랑을 거쳐 참의, 동부승지를 지내고 예조참판과 우윤, 병조, 형조참판과 좌윤을 역임하고 특진관에 올랐다.
김영로(金永로:37世)는 동몽교관으로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검열에 발탁되고 교리, 선전관을 지내고 사직소를 올리고 하향하였고 계속 교리, 응교, 순천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당 김석상(金奭相:34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갑오경장이후 국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김덕수(金德洙:38世)는 고종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응교, 예조참의을 역임하고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섬계 김영윤(金永胤:37世)은 경학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고 예학에 밝았다. 도산,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안동 향중에서 추중되었고 저서로 섬계유고가 있다. 서운 김귀수(金龜洙:38世)은 고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해 참봉, 세마, 사직을 지내고 고종조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어, 부수찬, 부응교, 정언, 전랑을 거쳐 동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연심당 김영규(金永圭:37世)는 인품이 고매하여 사림의 추증을 받았고 고종조에 동몽교관으로 후진양성에 힘썼고 연심유고가 있으며, 아우인 연서 김영구(金永龜:37世)는 강고 류심춘의 학맥을 이어 실학에 힘쓰고 학부교관으로 후학 장려에 힘스고 인자한 천품으로 기근이 심한 흉년에 인근 동리의 호세를 자담한 선행으로 동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는 '시혜불망비'가 무주군 안성면 중산촌에 세워져 있다.
낙와 김영익(金永翼:37世)은 재예가 절륜하고 총명하여 경서와 사기에 박통하였으며 공명 정대하고 엄정 간결하여 사림에 추중되었고 저서로 낙와유고가 있고, 익와 김영규(金永奎:37世) 또한 경서와 사기에 해박한 식견으로 저술에 힘써 지역사적지 발간에 심혈을 기울여 지역풍토와 인물사 발간에 공헌한 바가 크고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임하에 은거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고 저서로 익와유고가 전해진다.
좌암 김용현(金龍鉉:36世)은 효우가 극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사림의 추천과 도천, 어사천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도학을 강마하고 일생을 보냈으며 유고가 있다.
김영전(金永典:37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고 자헌에 올라 종묘제조가 되었으며 서포 김영관(金永寬:37世)은 고종때 효릉참봉을 지냈는데 시조공 설단시 단비건립 등 종사에 공헌이 크다.
조선말기의 광산김씨 (고종∼8·15광복까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지 10년만에 물러나고 왕비를 중심으로 민비세력이 집권하면서 대외 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적극적으로 조선에 접근해 와서 마침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삼아 강화도 조약을 고종 13년(1876)에 체결하니 이것이 외국과 처음 체결한 조약이 된다. 이를 계기로 개화정책을 쓰게 되었는데 이어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나라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게 되었으나 모두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시대에 활약한 우리 광산김씨로는 7대제학 중 마지막 대제학을 지낸 하정 김영수(金永壽:37世)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영수는 고종 7년(1870)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초기의 벼슬이 합천군수를 거쳤는데 그 때 선정을 한 고로 지금도 합천읍 영창리에 선정비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 규장각의 요직을 거쳐 병조판서에 재직중 임오군란을 맞아 진압한 공로로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거쳐 정1품인 보국에 까지 승자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건국 후에는 장례원경, 의정부참정을 지냈다.
한편 김보현(金輔鉉:36世)은 헌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지만 대원군에게 추방되었다. 그러나 민씨일파의 척족으로 곧 이조와 형조판서, 통상당상과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지만 임오군란 때 궐내에 뛰어든 난군들에 의해 선혜청 당상을 지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정 김기석(金箕錫:34世)은 현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다가 정경, 승정원 좌우승지, 병조참의, 형조판서, 의정부 어영대장 총융사, 도통사, 해방사, 좌우포장, 내무독판기기 총관을 거쳤고 외직으로는 수안군수, 안동영장, 신도첨사, 경상좌수사, 수원중군, 강화유수를 거쳐 숭록대부에 승진되었으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출장입상의 표본으로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김진수(金鎭秀:37世)는 담략이 뛰어나 궁마와 무술을 익혀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갑신정변 이후에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분사하니 조정에서는 충절을 가상히 여겨 충무위사과 겸 부장에 추증하였다.
김재은(金在殷:36世)은 고종조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김주현(金疇鉉:36世)은 한말에 갑오경장후의 내무대신을 지낸 바 있다.
동학 농민운동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민의 생활이 더 어려워져 갔으나 정부는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그들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혁을 주장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려는 대규모의 농민운동이 고종 31년(1894)에 일어났으니 이를 가르켜 동학 농민운동이라 한다.
동학의 교리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나섰으니 동학은 밀물처럼 농촌사회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교주 최제우를 잡아 처형하니 기세가 꺾이는 듯 하였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계승하여 그의 노력으로 동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세력중 한 줄기인 동학교도가 전봉준을 앞세워 궐기하니 이것이 동학 농민운동이다.
우리 광산김씨의 일부 김재일(金在一:35世)이 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와 같이 연담 이운규에게서 수학하여 종래의 성리학 차원을 넘어서 유학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여 서경과 역경을 중심으로 정진하였다. 저술로는 역학과 도학 전통을 계승하여 정역쾌를, 그리고 이어서 '정역'이라는 대역서를 완성하여 이 나라 정역의 대가가 되었고 동문중 한 분은 동학의 창시자가 된 셈이다. 또한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로 쳐들어갔을 때 전라감사로 있던 김문현(金文鉉:36世)도 우리 광김이었다. 문현은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병방비장을 시켜 병정 50여명을 출동시켰지만 모두 동학군에게 생포되었으므로 인책 파면 당하고 거제로 유배되었다.
김병돈(金秉暾:33世)은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11년째에 동학의 교도가 난을 일으키니 군관이 되어 초토사인 홍주목사 이승우를 따라 관군을 통솔하여 나가서는 싸워 이기고 돌아와서는 다시 계책을 세워 적군을 무찔러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그의 전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등용코자 하였으나 예산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통정대부 군무참의에 추증되었다.
근대국가 운동과 대한제국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내정 개혁을 실시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조정의 내정개혁에 간섭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되자 그 해에 조선은 도원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 한다.
갑오개혁에서는 홍범 14조에서 그 정신이 나타나 있듯이 정부의 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새로운 관리 임용법과 사법제도도 고치고 신분제도와 도량형도 통일하는 등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으나 일본의 간섭 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 광산김씨로 을미의병에 참가한 이는 충남 논산 출신의 김기수(金冀洙:38世)가 연산지구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수차 교전하여 적을 괴롭혔으나 그 해 12월에 가야곡면 풍덕마을 전투에서 진두 지휘하다가 장열한 전사를 당하니 15세의 젊은 나이였고 경북 봉화의 김도수(金道洙:38世)는 그곳 삼계서원에서 대향회를 개최하여 원근 각향에서 일제 토죄의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그 휘하에서 의병장교로 출정하여 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성재 김재풍(金在豊:35世)은 시해 주동세력에 의해 구성된 내각을 살해함으로서 국모 복수를 하고자 모의하였다. 그는 그의 숙부였던 필동장신이라 불린 어영대장인 우정 김기석 휘하의 군관들을 설득하여 혈맹을 지키기로 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미리 내통해 두었던 시위대장 이진호의 변심으로 대궐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공격을 가해 왔기에 쿠데타는 실패하고 김재풍은 잡히어 무기도형의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유배지에서 풀려 나온 김재풍은 친로파 세력에 의해 허덕이는 국권을 보다 못해 이를 회복코자 다시 정변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사는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경쟁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갑신정변의 실패 후 겨레의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민족운동이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하여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자주 독립운동, 국민의 민족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민권운동,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는 자강개혁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던 고종이 1년만에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연호를 광무라 부르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니 비로소 자주국가의 면모는 갖추게 되었다. 이 때가 고종 34년(1897)인데 광무 1년이라 불렀다.
이 무렵에 활동한 김학수(金學洙:38世)는 고종 12년(187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고종 27년(1890) 함창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동부사로 있었는데 안핵사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고 그 후 감찰을 거쳐 갑오개혁 때 김홍집 내각에 의해 외무참의가 되었다.
김영덕(金永悳:37世)은 고종 14년(187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를 거쳐 동래부사 및 감리서 부산항 통상사무를 거쳐 판서에 이르렀는데 경술국치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고, 김영직(金永直:37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가선대부 직각을 지냈고, 서운 김영운(金永運:37世)은 '효제충신'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실천하였고, 1910년 충정공 묘소를 찾는데 큰 공헌이 있었고 유고가 있다.
계월재 김건수(金建洙:38世)는 국치 때 자중하다가 1929년 평장동 단소 원장 수축시 자력으로 공사를 마쳤고 전곡유사로서 위선하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문학과 행의로 향중에 추증을 받았다.
도계 김철수(金哲洙:38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비서랑을 지냈으며 유고가 있고 그 외에 유물도 다수 있는데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김용원(金容元:39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좌부승지 경주부윤을 지냈다.
김용덕(金容悳:39世)은 고종조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비서랑, 규장각 시제 시독을 거쳐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망국의 한
광무 8년(1904)에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니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독점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일제는 거리낌없이 한국의 내정간섭을 시작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이완용 매국정부를 조직하고 1천만원 차관을 강요함으로써 본격적인 식민지 통치작업에 착수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애국지사들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거나 자결하기도 하였다.
을사 5조약이 체결된 후에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은 청사에 길이 남으려니와 장지연의 한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명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최익현이 일으킨 유생들의 의병진에 김기균(金箕均:34世)과 김재관(金在寬:35世), 김용구(金容求:39世)가 참가하였다.
김기균은 한말 대한제국의 육군부위로 있었는데 면암 최익현이 호남지방에 내려와 창의하니 그 막하에서 의병을 모병하여 순창에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때 세 부족으로 최익현은 잡혀 일본의 대마도로 갔고 공은 총상으로 잡혀 옥고를 치루었고 김재관은 최익현의 의병에 처음부터 그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에는 기삼연의 호남의병 창의대와 합동하여 고창전투에 참가하여 5, 6차 전투를 치루었고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장의 직책을 맡아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용구는 영광 사람인데 융희 1년(1907) 기삼연과 함께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통령이 되었다. 그 후 장성, 영광, 고창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흥덕의 안치재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아들 김기봉(金起鳳:40世)을 잃었다. 그 후에 무주싸움에서 총탄에 맞아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각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항전의식을 고취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다.
이 밖에도 호남에서는 김직순(金稷舜:36世)이 고흥의 의병장이 되어 보성, 광양의 의병장 안규홍과 손잡아 수많은 왜병을 섬멸하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김영엽(金泳燁:37世)은 호남창의회맹소를 세우고 의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장성, 순창에서 일어나 공격해 오는 왜병 70여명을 사살하고 백양사에 유진하던 중 내부에 숨어든 반적에 의하여 살해되었고 충청도에서 일어난 의병중에는 민종석 부대가 규모가 컸는데, 김익수(金益洙:38世)는 민종석등 88인과 결의동맹을 맺고 400여명의 의병으로 시작하여 부여, 서천에 이르는 동안 1천명의 의병으로 늘어났고 익산, 군산의 왜병을 무찌르고 돌아오다가 논산에서 체포되었으나 거기서는 탈출하였는데 그 뒤 폭도 대토벌작전에 기어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사망하였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울진의 김용욱(金容旭:39世)이 의병을 창의하여 불영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평해, 영양, 봉화의 의병세력까지 합치니 그 수가 5백이 넘었으며, 축지법을 쓰는 '노랑장군'으로 통하였다. 이듬해에는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 부대와 합세하니 그 수가 더욱 커졌고 무기도 다량 갖추게 되어 청송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안동, 영주, 영양, 울진, 삼척, 강릉까지의 적을 완전 소탕하고 경북 북부와 영동까지의 왜적은 발도 못 붙이게 하여 놓고 태백산맥으로 본진을 옮겨 1921년까지 활동했으니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한 의사였다.
한편 경술국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자헌대부 벼슬에 있던 김영덕(金永悳:37世)과 통사랑 벼슬에 있던 심암 김지수(金志洙:38世)는 학행으로 도천에 올라 처음 벼슬이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 이었으며 중추원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경술국치 후 자택에서 자결을 하여 선비의 지조를 보였다. 광복 후 순국선열의 포장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
김영숙(金永肅:37世)은 경술국치 후 즉각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북로 군정서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 교주 윤세복과 함께 단군의 얼을 심고 이극로와 함께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광복 직전 소련군의 진주로 목단강성 감옥에서 풀려 나와 해방 후에 단군전 봉건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낭산 김익수(金益洙:38世)는 경술국치 직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합방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태백산, 소백산 지대에 잠입하면서 독립자금 거출 활동을 하였다. 이때 국내에서는 의병으로 활동한 광김은 고흥의 김성택(金晟澤:32世)과 김직순(金稷舜:36世)이 왜적과 싸우다가 투옥되고 전사하였고 제주에서는 조설대에서 12동지가 집의계란 조직을 만들어 일제와 싸웠는데 김좌겸(金佐謙:33世)을 비롯하여 김석윤(金錫允:34世), 김석익(金錫翼:34世) 형제와 김병로(金炳潞:35世), 김병구(金炳龜:35世) 종형제 등이 적극성을 띤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읍의 김재규(金在圭:35世)는 경술국치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을 따라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광주의 김영오(金玲午:35世)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김창보의 군막에 들어가 왜적 격멸에 앞장 섰으나 아산전투에서 패전하여 분산되었으나 분통하여 자결하였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나라가 일본에 합병된 후 일제의 삼엄한 무단 통치하에서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부터는 광복단, 조선국권 회복단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지하 운동을 벌렸고, 국외에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대동단결선언서(1917)와 무오 독립선언서(1918)를 발표하였고 일본의 도쿄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1919)를 발표하여 침략자에 대한 민족의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해외 독립 운동자들과 학생들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의암 손병희 등 국내 인사들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것이 1919년의 3·1운동이다.
1919년에 일어난 2·8선언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먼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김마리아(金瑪利亞:36世)는 1906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여자이면서도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 일본에 건너가 히로시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메지로(東京目白)고등여자학원에 유학도중 2·8선언을 주동하였으며, 그 선언문을 국내에 운반하는 책임을 무사히 수행하여 3·1운동의 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직을 맡아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오현주의 배신으로 비밀조직이 탄로 나서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중 병 보석으로 풀려나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대의원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파아크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뉴욕에서는 신학을 수학하고 1932년에 귀국하여서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는 등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쳤다. 이 거룩한 정신은 광산김씨의 피를 이어받은 힘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더 있었다. 김순애(金淳愛:36世) 역시 황해도 장연 사람으로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 후 부산에 있는 초량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몰래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우리 역사를 가르치다가 탄로가 나자 1911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찡(南京)에 있는 중화명덕 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월 김규식과 결혼하여 상하이(上海)로 옮긴 뒤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고 헤이룽장(黑龍江) 국립여자사범학교 학감,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0년에는 백범 김구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배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도 하여 일본정부 대신 및 친일파를 암살할 목적으로 대의용단(大義勇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에는 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34년에는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간부로 활약하다가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그리고 2·8독립선언에 또 한사람의 인물이 더 있었으니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김양수(金良洙:38世)이다. 양수는 해방 후에 이룩된 광산김씨 대종회의 회장직을 여러번 지냈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역임한 분이다.
다음으로 국내에서 3·1운동에 참가한 우리 광김의 투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남 함평의 김기택(金箕澤:34世)과 김재문(金在文:35世)은 문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지방민을 동우너하여 독립만세 집회를 갖고 미리 준비한 대창으로 무장하여 일본 헌병 파견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왜병에 대항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경기 안성에서는 김봉현(金鳳鉉:36世)이 군내 전역에서, 김영주(金永柱:37世)와 김영희(金永凞:37世)는 주로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전북 고창에서는 김영완(金永琓:37世)과 김상수(金相洙:38世), 김용표(金容杓:39世)가 합세하여 고창 장날 만세운동을 지휘하였고 양은 김용준(金容俊:39世)은 보성에서 참가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광복후에는 대종중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김영필(金永弼:37世)은 진안에서 김호현(金浩鉉:36世)은 진동에서 그리고 김영기(金永騏:37世)는 합천(陜川), 김구현(金九鉉:36世)은 의령, 김영창(金永昌:37世)은 안동에서 각기 고장은 다르나 그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이다.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되어 활약한 우리 광김으로는 김익현(金益鉉:36世)과 김영두(金永斗:37世)를 들 수 있는데 두 사람이 공히 경술국치를 당하자 한을 품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김희인(金凞仁:36世)은 3·1만세 운동 때 임시정부에 가담하려고 상하이로 밀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뜻을 못 이룬 이도 있는가 하면, 김 수(金 銖:36世)는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정신을 전달하기 위하여 137명의 유림들만이 서명한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하였고, 김석룡(金碩龍:38世)은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대학을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병인의용단 단장의 요직을 맡고 일제의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으며 순종의 인산때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황포강 입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석방 후 다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해공 신익희, 성재 이시영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환국하여 건국준비 요원으로 활약한 요인이었다.
또한 김현수(金玄洙:38世)는 중국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휘를 받아 왜군 헌병과 밀정들을 저격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환국하여 광복군 국내지대를 조직하여 부사령관을 역임한 독립투사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항일 투쟁을 한 광김의 투사들을 열거한다면 먼저 전북 부안 출신의 김철수(金철洙:38世)와 창수(昌洙) 형제를 들 수 있는데 형인 김철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에도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중국, 인도, 대만에서 온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 반일독립운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투쟁하다가 귀국 후에는 국내에서 3·1운동을 맞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후 강력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적인 방법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화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성재 이동휘 중심의 연해주 한인 사회당과 협력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으니 1921년의 일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집행기구로 개조하여 도산 안창호, 김동삼, 해공 신익희 등 좌우익 애국지사들을 총망라하는 국민대표 회의를 소집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성공을 못 거두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게속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일 정부수립이 안되고 남북 또는 좌우의 분열이 심해지자 실망한 나머지 정치활동을 멀리 하였다. 아우인 김창수는 항일운동을 하던 중 M·L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렀으나 해방 후 3대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된 정치가이다.
한편 우전 김남수(金南洙:38世)는 경술국치 후 한학을 수학하다가 동산 유인식 선생이 주재한 협동학교에서 신문학을 익혔다. 3·1운동 후 신민회에 참여하고 소작조합과 노동조합의 조직에도 참여하면서 경성고무공장의 파업투쟁을 주도하다가 투옥되는 등 일제 타도를 위해서 김준연과도 손잡고 투쟁하였다. 이어서 형평사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양반출신이면서도 천민들의 권익 옹호에 힘을썼다.
같은 지역의 김상한(金相漢: 일명 麟根:34世)은 10대 후반부터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예안의 청년동맹과 신간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나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1931년 7월에 이 조직으로는 진전이 없다고 판단하자 안상윤과 더불어 〈안동콤클럽〉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그 산하조직으로 예안노동직접행동대를 낙동강변에 있는 석빙고와 영낙정을 거점으로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전남 담양 출신의 김제중(金濟中:40世)은 3·1운동을 계기로 상경하여 남부5도(경기, 충청, 강원, 전라, 경상) 대표단 5인중 한사람이 되어 남부 각지를 순회하면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였고 그 후 대동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전남지구를 담당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겪은 독립투사였다.
우당 김용필(金容弼:39世)은 고종 말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한말이었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일제하에는 유지를 이어받아 호적에도 들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3·1운동 후 1924년에 왜인이 동국 18현을 모셔진 사당에 치제하료 하자 엄중히 꾸짖어 치제치 못하게 하니 왜인이 불경죄로 서울에 압송하여 옥고를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3천리 강산에 둘도 없는 선비이며, 18가문 중 제1인자로 백세의 표준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일에(1926)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3·1만세 운동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침체되었던 국내의 민족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때 광김으로서 활동한 투사는 경남 의령출신의 김응현(金應鉉:36世)을 들 수 있다. 3·1운동사의 자료에 의하면 김응현은 3·1만세운동 때는 종형인 김구현(金九鉉)과 의령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복역하였고 다시 6·10만세 운동 때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할 것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1920년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쟁운동에 참가한 이는 아래와 같다.
당시 광주고보 4학년이던 김채중(金采中:40世)은 주동자로 지목되어 퇴학 투옥되었고, 김기수(金麒洙:38世)는 2학년이었는데 참가했으나 퇴학되었고, 김봉수(金鳳洙:38世)는 광주농고 4학년이었는데 농고의 주동자로 참여했다가 퇴학 당하였고, 조카인 김용숙(金容淑:39世)은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나 광주로 내려와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만보산 사건에 교내에서 동맹휴학을 선동하다가 3학년 때 퇴학을 당하였다.
김보석(金寶錫:36世)은 광주 제일고등학교 2학년때 참가했다가 역시 퇴학되고, 김돈수(金燉洙:38世)는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참가하여 투쟁하였다. 이것이 발상지인 광주에서 있었던 사실이고 그 여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때 평북 선천(宣川)에서 김석숭(金碩崇:38世)은 왜경을 구타하여 구속되었고, 동생인 김석호(金碩虎:38世)는 신의주에서 고보사건, 철도 호텔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항일의 용감한 형제가 되었다. 석숭, 석호, 형제가 임시정부의 요인을 지낸 김석룡의 동생이었으니 혁명가의 집이라 우러러 봐야 할 것이다.
8·15 광복
1930년 이후 한국에 있어서 식민지화가 안정되어 가는 것을 기화로 일제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대륙 침략의 야망을 품고 전쟁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 만주침략을 감행하고 우리의 독립군 소탕작전을 벌렸으며,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까지 침략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쟁을 더욱 확대시켜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1941년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민족과 그 문화를 멸살하려하였으며 나아가 한민족을 그들의 전쟁에 앞장서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식민지
정책으로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한민족은 민족 존폐의 위기에서 민족을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학계와 교육계, 종교계와 예술계 등 각 분야에 걸쳐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문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민족은 일제의 통치 기간중 국내외에서 꾸준히 항일 및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으나 우리의 힘만으로 일본을 물리친 것은 아니며 일본이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드디어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8월15일에 드디어 광복을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은 곧 독립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 소 두 나라의 군대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진주하면서 광복의 기쁨은 잠까니었고 다시 남북 분단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제 말기에 우리 광산김씨가 항일 투쟁을 하면서 겪은 고초의 사례를 몇 몇 가지 들어본다면 그 당시 우리나라 안에서 독립투쟁을 한 양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충남 부여출신의 김영기(金永驥:37世)는 도쿄대학 동문화학원 본과를 졸업하고 1932년부터 대구사범학교의 조선어와 한문 교사였는데 정규시간 뿐만 아니라 문예부를 중심으로 '다초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우리 역사를 틈틈이 가르쳐 학생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자각케 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으며 이러한 비밀 독서회 사건이 탄로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그 후 개성에 있는 사립 송도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원로교육자로 대우를 받으면서 대구 시내 여러 중,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포상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영헌(金永憲:37世)은 팔탄과 시초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몽양 여운형 지도하에 독립동지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학생과 그곳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전년인 1944년에는 종로의 광화문 일대에 민족궐기의 전단을 살포하다가 피검되어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광복을 맞아 출옥한 투사이다. 황해도 장연출신의 김필례(金弼禮)는 도쿄(東京)여자학원 고등부를 졸업하고 서울정신여자중학교 교유로 재직하면서 3·1독립운동을 겪었고, 1922년에 그 학교의 교감이 되면서 김활란, 유옥경과 함께 대한여자기독교 청년연합회(Y.W.C.A)를 창립하고 총무가 되어 일제하의 농촌운동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활동에도 힘썼다. 그 후 도미하여 네스칼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대학원을 수료하고 광주 스피아 여중의 교감이 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동교의 교장이 되었고 다시 서울의 정신여중 교장을 거쳐 동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 교육자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전남 강진출신의 김용근(金容根:39世)은 영광군 소재지에 있는 개량서당의 훈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패전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발각되어 복역한 사례들은 모두 교육계에서 있었던 항일 사건들이다.
한편 전북 익산의 김용해(金容海:39世)는 침례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민조의식을 고취하다가 전국 32인 구속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종교계의 항일 사례이고, 충남 청양출신의 김창현(金昌鉉:36世)은 일제의 지원병 강요에 반항을 했고, 전남 화순의 김영남(金永南:37世)은 징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화약고 폭파계획을 세우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징병 거부의 항쟁에 앞장섰다.
그밖에도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헌병대 습격을 기도한 전북 고창의 김영수(金永壽:37世), 조선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된 전남 보성의 김용규(金容圭:39世),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경기 화성의 김선기(金善琪:41世), 창씨개명에 불복하여 계자손십자훈(戒子孫十字訓)을 남긴 김용각(金容珏:39世)등 이렇게 다양하게도 내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일제와 싸운 우리 광김들의 뜨거운 피가 용솟움치는 광산인들의 모습을 보니 정녕 조국의 광복은 이러한 분들이 흘린 피땀과 받은 고초로 이룩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항상 후손들은 자랑스런 광산김씨의 후손임을 잊지말고 새로운 21세기에도 항상 조국을 위해, 그리고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지도자의 위치에서 조국의 횃불이 되어주길 바라는 바이다.
평장동 전경
고려전기의 광산김씨 (태조∼의종)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인심을 얻어 918년 6월 궁예(弓裔) 휘하의 장군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통일왕조를 건설하였다. 왕건은 고구려(高句麗)의 계승자(繼承者)임을 자처하고 북진정책을 써서 청천강(淸川江)까지 국경을 넓혔고 개성(開城)을 서울로 정하여 정권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뜻을 충분히 이루지 못하고 후대제왕(後代諸王)이 지켜야 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놓았다. 2대 혜종(惠宗)때의 외척 왕규(王規)의 난을 정종(定宗)초에야 진정시키고 4대 광종(光宗)의 개혁정치를 통하여 문벌귀족사회가 지속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유교적 정치이념하에 왕권이 안정되고 문치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송나라와의 문물교환이 활발해지고 글안(契丹)침략의 격퇴와 여진(女眞)정벌 등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민심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태평의 그늘에서 점차로 귀족계급의 전제가 심해짐에 따라 나라 안이 어지러워진데다가 태평환락(泰平歡樂)이 극성에 달했던 18대 의종(毅宗: 1146∼1170). 24년에 드디어 무신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들 무인들 사이에 정권쟁탈이 계속되기 시작했다. 우리 광산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통합할 때 3세 길(佶)이 왕건을 도와 민족통일의 왕업을 성공케한 공으로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은 삼중대광 사공을 지냈다.
그리고 최근 학자들의 논문에 의하면 3세 김길께서 중국사서인 책부원구(冊府元龜:중국의 사료집)의 외신부 조공조에 보면 "청태원년(934년) 8월에 고려조의 조공사 김길의 선박이 청주(靑州:지금의 山東省)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이는 김길이 후백제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태조를 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4세 준(峻)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 5세 책(策) 좌복야(정2품)와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오늘날의 장관급), 6세 정준(廷俊) 문하시랑 평장사(정2품), 7세 양감(良鑑), 8세 약온(若溫)과 의원(義元) 등이 대대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워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께서는 문종조에 급제하여 문종 24년(1070)에 간의대부 어사대사(정4품)를 거쳐 태복경일 때 송(宋)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가지고 돌아와 성현의 근원을 닦고 공자의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를 지내니 우리나라에 문묘(文廟)를 시작한 연원(淵源)이 되었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로 추앙받게 되었다.
문종 32년(1078)에는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호부상서(정3품)로서 접반사가 되었고, 문종 35년(1081)에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와 서경유수를 겸하였으며 선종 3년(1086)에 문하시랑 평장사를 거쳐 수태위(정1품)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현재 전북 고창에 있는 화동서원에 철향(주벽으로 모심)되어 있다.동방이학의 종사라 불리운 문안공 김양감의 아들이 두 분 있었는데 맏아들인 김약온(金若溫:8世)은 예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상의국어 봉어(정6품)부터 시작하여 지추밀원사와 참지정사를 거쳐 인종 원년(1122)에 수태부 문하시중 판호부사(종1품)에 까지 이르렀으나 성품이 공손하고 청렴하였으며 뒤에 이자겸이 정권을 휘두르는 그때였지만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남에게 교태를 보이지 않았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다.
문벌 귀족사회가 전개되면서 그 대표적인 문벌은 인주이씨로 문종때부터 인종때까지 80년간 세력을 잡았다. 문벌 귀족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이자겸은 우리 광산김씨의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던 김정준의 외손자이다.이 무렵 우리 광산김씨의 김의원(金義元:8世)은 문안공 양감(良鑑)의 아들로 문종조에 성균시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과 군기주부동정(정8품) 벼슬부터 시작하여 예종 4년(1109)에 병마판관이 되었고, 인종 4년(1126)에 동지추밀원사(종2품)로 발탁되었으나 이자겸의 실각으로 인척이라 하여 양주로 좌천되었고, 인종 10년(1132)에 공부상서 수대호부사를 받으시고 늙어서 집에 돌아오니 호부상서겸 삼사사를 제수하고 금자광록대부(정2품)에 특진으로 가자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으시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마침내 무신들은 의종 24년(1170)에 정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
켜 문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김광중(金光中:9世)은 의종 17년(1163)에 급사중(종4품)으로 있다가 서북면 병마부사(정4품)로 승진되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실지를 회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집을 불사르고 그들을 몰아낸 뒤 그곳을 계속 지키려고 둔전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가 금나라의 항의를 받은 고려 정부명령으로 철수 하였다.
의종 24년(1170)에 간의대부비서감(정4품)과 상서우승(종3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중부의 난 때 몸종 박광승이 밀고하여 살해되게 하였다.
광중의 아들 김 체(金 체:10世)는 순안현령(종5품)이 되었는데 마침 배순석이 군사를 모집하므로 체가 군사를 훈련하여 접응하러 가다가 박광승이 제고사로 온다는 말을듣고 먼저 사람을 보내어울주로 가서 광승의 아비를 체포하고 또 광승을 잡아서 순안에 이르러 광승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체의 다음으로 김 위(金 位:11世)와 김주영(金珠永:11世) 형제가 있었는데 위는 황국인 송나라에서 상서령으로 추봉되었고 주영은 벼슬이 금오위중랑장 동정행대정(정5품)이었고,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상장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위의 아들 김광세(金光世:12世)는 벼슬이 신호위의 중랑장(정5품)인데 황국에서 상서우복야를 추봉받고 신호위의 대장군(종3품)에 추증되었다.
주영의 아들 김광존(金光存:12世)은 벼슬이 홍위위의 별장동정(정7품)이었고 이부상서겸 판예부사 상호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광세의 아들 김경량(金鏡亮:13世)은 금오위의 대장군(종3품)이었고, 문하평장(정2품)에 추증되었고, 광존의 아들 김대린(金大鱗:13世)은 금자광록대부(종2품) 예빈경과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고려후기의 광산김씨 (명종∼공민왕)
무인정권이 시작되자 제19대 명종(明宗)이 즉위했다. 그러나 정권은 여전히 무인들의 손에 의하여 전횡(專橫)되었다. 무신들은 약 20여년 정권쟁탈을 계속하다가 최충헌이 집권했는데 그동안 19대 명종, 21대 희종의 2왕이 폐위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23대 고종 등 4왕을 옹립(擁立)하는 등 무인들의 독재정치가 강행되었다. 최씨정권은 글안의 침략이 6차나 계속되는 고금 미증유(未曾有)의 국난을 당하였다. 이 때 우리 민족의 저력(底力)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고 30여년간을 줄기차게 항몽(抗蒙)을 계속한 것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불력(佛力)에 의존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조 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종 45년(1288)에 최씨정권이 타도(打倒)되고 24대 원종(元宗)이 즉위함으로서 친몽정책(親蒙政策)으로 전환되어 원나라에 복속(服屬)되어 신하로서의 충성을 하게 되고 민족의 자존심을 꺽이고 정치는 문란해졌다. 따라서 31대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좌절되어 원에 추종하는 사대부(士大夫)세력과 친명(親明)을 주장하는 신진세력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신진세력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을 계기로 친원파(親元派)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32대 우왕, 33대 창왕을 폐하고 34대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 4년(1392)에 양위(讓位)를 받아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단행하니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하고 이씨왕조(李氏王朝)가 개국(開國)되었다. 이와같이 어지러웠던 고려 후기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지조를 지텼고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도 무게있는 활약을 함으로써 명문으로서의품격을 유지해 왔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광산김씨들도 후손들의 수가 늘어나고 모두가 벼슬길에 올라 벼슬자리가 끊이지 않으니 평자사를 비롯한 여러 고관대작을 배출하게되니 일약 명문으로 자리를 잡게되고 이시기를 기점으로 분파가 되어 5대파의 파조가 생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에 많은 공을 세운 현조(顯祖)는 삼별초(三別抄)의 난에 순절(殉節)한 14세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 설암 김태현(金台鉉:15世)은 김 수(金 須:14世)의 아들로 문정공파의 파조이시다. 태어나면서 용모가 수려하고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다. 충렬왕1년(1275) 15세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사부(운자를 달아 지은 한문 시)의 걸출한 문장에 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충렬왕 32년(1306)에 지도첨의사사로 다시 원나라에 갔을 때 왕과 아들인 충선왕을 이간시키는 도당들의 흉계를 밝히고 돌아와서 충선왕이 복위한 후에는 판삼사사와 중찬등을 거치고 마지막에는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 대제학겸 전리사사(정1품)로 치사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정공 김태현의 부인은 고려왕족인 개성군 대부인 왕씨이다. 부인은 인자하면서 근엄하고 총명하여 가사처리에도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시어머니인 고씨부인을 향년 102세까지 극진히 모셨으며 부군인 문정공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까지 오르게 하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들 넷 모두가 문과에 급제, 국법으로 종신토록 국록을 받게 된 복 받은 부인이었다.
김주정(金周鼎:14世)은 문숙공파 파조이시다. 원종 5년(126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해양부녹사, 이부시랑을 거쳐 충렬왕 2년(1276)에 대부경 좌사의 대부가 되었다. 충렬왕 4년(1278)에는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대가 공물을 받는 것을 없애고, 김방경의 유배를 상소하여 풀어준 공으로 좌부승지(정3품)가 되었다. 충렬왕 7년(1281)에 원나라 세조가 2차 일본 정벌을 계획하자 여원연합군부원수를 지냈고 계속하여 여원연합군으로 일본을 침공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으며 나중에 광정대부 지도첨의사사(정2품)를 지냈으니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 연(金 璉:14世)은 양간공파의 파조이시다. 고종 42년(1255)에 시어사를 시작으로 내시문하록사, 병부시랑, 추밀원부사를 거쳐 형부상서(정3품)에 이르렀다. 충렬왕 1년(1275)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일본을 정벌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였다. 이때 어느날 저녁에 허리에 차고 있던 금어대(관직을 표시하는 황금주머니 모양)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해몽하기를 "몸에 있던 신장이 이미 갔으니 이제 이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로 벼슬길에 물러났다. 충렬왕 17년(1291)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끝내었으니 화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재 화상찬만 남아 있으며 원종 2년(1261)에 발행한 호적이 예안파의 유물관인 숭원각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정조 5년(1781)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전동에 있는 노산사(蘆山祠)에 철향 되었다.
김 규(金 珪:14世)는 낭장공파 파조이시고 낭장동정(정6품) 벼슬을 지냈다.
김 이(金 珥:14世)는 제안 황대전고를 지냈는데 충렬왕 33년(1307)에 광산김씨의 가장 오래된 문서인 광산현제영시서를 지었는데 그 글이 전해지고 있어 더 없이 다행스럽다.
만약 김이가 이때 광산현 제영시서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시조공의 세거지와 우리 광산김씨의 선계 세계를 잃어버릴 뻔도 했으니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김 영(金 英:17世)은 사온직장공파 파조이시고 고려말에 사온서의 직장(종7품)을 지냈으며 조선조에 공조참의(정3품)로 추증되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에 설단하였다.
김 심(金 深:15世)은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충렬왕 때에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와서 낭장(정6품) 벼슬부터 시작하여 밀직부사만호(종2품)를 역임하였다. 그 뒤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을 모시고 나온 공으로 찬성사(종1품)가 되었으며 그의 딸이 원나라의 왕후가 되니 원나라에서 고려의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14년(1327)에 왕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벼슬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화평부원군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 유(金 流:15世)는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문림랑 감찰어사 문하시중수문전 태학사(종1품)를 지냈다.
김사원(金士元:15世)은 양간공 연의 아들로 충렬왕 19년(1293)에 총랑(정4품)으로 김언을 국문할 때 공평한 판결을 내렸으며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첨의찬성사(정2품)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부인은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유(安裕 또는 安珦)의 딸이다.
김사형(金士亨:15世)은 양간공 연의 아들로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종2품) 벼슬을 지냈다.
김 진(金 ? :16世)은 정경공 사원의 아들로 충렬왕 33년(13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祭酒:정3품)로 통례문 부사를 겸하였고 충숙왕조에서는 정당문학(정2품),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거쳐 충혜 왕조에서는 지공거(과거의 총책)로 인재를 가장 많이 봅았고 충숙왕 2년(1333)에 작성한 호적이 있으며 시호는 장영(章榮)이다.
문정공 태현의 아들 4형제는 첫째가 김광식(金光軾:16世)인데 충렬왕 20년(129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총부의랑(정6품)을 지냈으니 그 후손을 의랑공파라 하고, 다음은 김광철(金光轍:16世)인데 충렬왕 31년(1305)에 문과 급제하여 관직이 삼중대광밀직사사(종2품)에 올라 화평군에 봉작되고 시호가 문민(文敏)이므로 그 후손을 문민공파라 이른다. 다음은 김광재(金光載:16世)인데 충선왕 5년(1313)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전리판서(정2품) 및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시호가 문간(文簡)이었으니 그의 후손을 문간공파라 하며, 다음은 김광로(金光輅;16世)인데 충숙왕 4년(1317)에 문과 급제하여 가안부녹사(정8품)를 지냈으니 그 후손을 녹사공파라 한다.
문숙공 주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이가 충숙공 심이고 둘째가 시중공인 유이다. 다시 심에게는 아들을 5형제나 두었는데 김석견(金石堅:16世)은 삼사좌사 상호군과 우정승(종1품)이며 화평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은 화평부원군파라 하며, 김승사(金承嗣:16世)는 충목왕 때 벼슬이 삼사좌사(종1품) 병마도원수를 지냈으니 그 후손은 삼사좌사공파이고, 김승진(金承晉:16世)은 벼슬이 상호군(정3품)을 지냈으므로 상호군파라 하며, 김승로(金承魯:16世)는 벼슬이 예조판서(정2품)을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예조판서공파라 부르며, 김승한(金承漢:16世)은 후사가 없었다.
문숙공 주정의 차자가 시중공인 유인데 유의 아들이 김백간(金伯幹:16世)으로 무후하였고, 다음이 김중간(金仲幹:16世)으로 벼슬이 상호군이며 동지밀직사사(정3품)이므로 그 후손은 밀직사사공파이고 다음인 김윤장(金允臧:16世)은 벼슬이 봉익대부 판도판서 밀직부사(종2품)을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판도판서공파라 부른다.
양간공 김 연(金 璉:14世)의 아들은 정경공 사원, 참지정사 사형이다. 사원에게는 장영공인 진 한사람 뿐이나 진은 아들 5형제가 있다. 아들 김광리(金光利:17世)는 공민왕 1년(1352)에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봉익대부 전리판서(종2품)를 역임했으므로 그 후손은 전리판서공파라 하고, 다음 김영리(金英利:17世)는 신현의 문인으로 삼은과 같이 성리학을 배웠고 공민왕 3년(1354)에 통의대부 판군기감사(정3품)를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판군기감사공파라 부르고, 김성리(金成利:17世)는 벼슬이 판전의사사와 통정원의 사온승(정6품)을 역임하였으므로 그 후손을 사온승공파라 하고, 김안리(金安利:17世)는 벼슬이 대사성을 거쳐 판도판서(종2품)를 역임하였으므로 그 후손을 판도판서공파라 하며, 김천리(金天利:17世)는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을 지냈고 조선조의 개국공신으로 원종공신록에 수록되었는바 그 후손을 밀직부사공파라 부른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이 쇠퇴하자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홍건적은 그러한 반란군의 한 무리였다. 이 홍건적의 난에 활동한 사람으로는 문정공 태현의 손자이며 문간공 김광재의 아들인 김흥조(金興祖:17世)는 수원과 해주의 목사를 지냈으며 중헌대부 군기감에 이르렀을 때 홍건적이 침입하였으니 이 때 임금을 호종하고 남행한 공으로 공신록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18년(1368)에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으로 있던 김 정(金 精:17世)과 더불어 요승 신돈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두 사람 모두 유배도중 몰래 죽엄을 당하였다.
같은 무렵에 문민공 김광철의 아들인 김회조(金懷祖:17世)가 통헌대부 판도판서 해양군에 봉해졌고 그의 동생 김도탁(金都卓:17世)도 광정대부(종2품)로 추증되었다. 김흥조의 아우 김윤조(金胤祖:17世)는 여말에 형과 같이 요승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형은 살해당하고 제주도로 은거하여 제주도의 입도조가 되었다.
녹사공 김광로의 아들이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순조(金順祖:17世)이고, 손자가 삼척부사를 지낸 김 조(金 眺:18世)이고, 증손자가 또한 전라 병마절도사를 김정무(金丁茂:19世)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내었다.
문숙공후로 화평부원군 김석견의 아들이 해양군으로 봉해진 김 수(金 粹:17世)가 있고, 그 아들이 또한 판도판서를 지낸 김조간(金祖?:18世)이고, 상호군 김승진의 아들은 3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적선(金積善:17世)이고 둘째가 문하시중을 지낸 김덕선(金德善:17世)이며 셋째가 경상감사를 지낸 김종선(金從善:17世)이며, 밀직사사 김중간의 맏아들 김덕룡(金德龍:17世)은 사복시사를 지냈고 그의 동생 김덕봉(金德鳳:17世)은 사의벼슬을 거치었으니 모두들 고려말에 우리 가문을 빛낸 이들이다.
김인우(金仁雨:18世)는 전리판서 광리의 아들로 공민왕 10년(1361)의 홍건적의 침입 때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이르렀으나 아우인 갑우(甲雨)의 화로 연좌되어 현 고창인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김갑우(金甲雨:18世)는 공민왕 18년(1369)에 천우위대장군(종3품)으로 명나라 황태자의 천추절(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공민왕 21년(1372)에 대호군(정3품)으로 탐라(제주도)의 공마 50필을 몰고 명나라로 가는 도중 두 필을 잃어 대신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명나라 황제가 대노하여 받아 들이지 않고 공민왕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이던 오극충과 함께 주살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제가 각처로 흩어져 전북과 경남 지방에 세거하게 되었다.
인우의 아우로 갑우 이외에 또 김삼우(金三雨:18世)와 김시우(金時雨:18世) 그리고 익제 이제현의 사위인 창주 김남우(金南雨:18世) 형제가 더 있었는데 삼우는 상서벼슬을 지냈고, 시우는 판사 벼슬을 지냈으며 남우는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갑우의 화로 연좌되어 모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로가 큰 광산김씨로는 김성우(金成雨:17世)를 들 수 있다. 그는 약관 18세에 절충장군(정3품)으로 제수되었고 충정왕 3년(1351)에 도만호겸 전라 충청 양호초토사에 발탁되어 왜구토벌의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전주, 나주, 부령 등 전라지역의 왜구를 무지르고 우왕 6년(1380)에는 진포구의 왜선 5백여척을 함몰시켰으며 임주, 한주, 서주지구에 침입한 왜구도 휩쓸었다. 또 다시 내포지역에 왜구가 침입한다는 급보를 접하고 출전하여 소탕하니 서해안의 도처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40여년에 걸쳐 왜구의 소굴이 된 이 지역을 소탕함에 있어 군둔전을 두고 군마를 자축하고 생포한 왜구는 노예로 삼아 노역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장기간 대비하면서 개선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성계의 등극으로 고려의 운명이 다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불사이군의 절의로 그가 타고 오던 말의 목을 자르고 장군 역시 그 자리에서 자결하니 지금도 충남 보령군의 군드리 모랭이에 조잠이란 마을이 있고 옥마봉, 남서고개에 〈사혁〉이란 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혁이란 김성우장군의 호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 무렵에 김 정(金 鼎:18世) 또한 충청, 전라도의 찰방을 지냈는데 그 때 공로로 추성 보리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중대광 광성군에 봉해졌다. 아들은 약채, 약항, 약시 삼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 때 묘가 실전 되었으나 후손인 김화택(金和澤:32世)이 춘천부사로 있을 때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김종연(金宗衍:18世)은 고려 말기에 벼슬이 상장군(정3품)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정이 권신인 신돈을 죽이기 위해 일을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화를 당하였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신돈이 죽고 난 뒤에 다시 나와 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퇴한 공로가 있다. 공양왕 때에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커가며 국운이 기울어감을 개탄하고 이성계를 살해하려고 도모하다가 또 누설되어 각처로 숨어 다녔는데 부인과 장인을 순군(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니 부인이 울면서 하는 말이 "설사 내 남편이 있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어찌 말 할 수 있으며 지금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데 무엇을 말하겠느냐?"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종연은 곡주 숲 속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굶어서 장차 죽게 되었으니 나를 좀 구해 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죽이라도 끓여 오겠다고 말하고는 내려가서 관가에 고하여 잡혀 죽었다.
사은 김승길(金承吉:19世)은 고려말에 함종현령으로 있으면서 정몽주와 의리를 같이 하다가 정몽주가 죽고 고려가 망하자 :나라가 위태로워도 구하지 못하니 이는 불충이고 친구가 죽어도 조문하지 못한 것은 신의가 없음이라, 이러고서야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설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불사이군하는 절신이 되었으며
아들인 매은 김오행(金五行:20世)에게 "너희도 나의 뜻을 받아들여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유훈을 받들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절의 부자가 되었다.
척약재 김약항(金若恒:19世)은 광성군 정의 둘째 아들로 고려말에 사헌부 집의로 있었는데 이성계와 친교관계에 있었으므로 거사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해 왔는데 신하로서의 절의를 고집하고 응하지는 않았으나 친구와의 정의를 지키면서 그 음모를 고발하지는 않아 성공케 한 소극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하자 처음에는 벼슬길을 사양하였으나 뒤에는 수락하였는데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라는 서적을 맡아보는 관청의 으뜸 벼슬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하정표를 동료들과 함께 지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그 글의 내용이 불공스럽다고 성토하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는 글 지은 사람을 징계한다 하니 공은 피하지 않고 명나라에 찾아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공은 굴하지 않고 의리를 분석하여 조리 있게 대답하니 명나라 황제가 고문에서 풀어주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멈추었으나 마침내 우리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운남성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이태조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광산군으로 봉하고 청백리에도 선정되어 자손에게도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광성군 정의 셋째 아들인 음촌 김약시(金若時:19世)는 고려말에 직제학의 벼슬에 있었으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등극을 하니 처음에는 두문동에 들어 갔다가 다시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의 금광리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을 삼고 살았으며 말을 하지 않고 의관도 괴이하게 갖추고 살았다. 이성계가 등극한 뒤에 거처를 탐문하고 원래 벼승을 주었으나 병을 앓아 앞을 못 본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어도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유언하고 세상을 뜨니 공은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익제 이제현의 외손인 김 유(金 維:19世)는 고려 공민왕조의 중랑장(정5품)으로 이성계와 함께 남정 북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신돈이 정사를 문란하게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군 도진으로 피해 살다가 이성계의 등극으로 괴로움을 또 받자 합천군 영창으로 이거하여 세거하였는데 그 때 사람들이 3은과 같은 절의있는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수산 김자진(金子進:20世)은 고려 말기에 금위시정이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정몽주와 더불어 의리를 같이 했으며 나라가 망하자 나주의 우정산 아래에 살면서 조선의 하늘을 보기도 싫다고 하면서 외출도 않고 여생을 끝낸 두문신도 있었으니 그 절의는 이상으로도 충분히 알 만하다.
아들 김 허(金 虛:20世)는 강호 김숙자의 문인으로 벼슬이 사제감부정이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만리 타국에서 별세하니 한스러워서 효경 상례장을 벽장에 써 붙이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고, 대호군에 추증되었다.
조선전기의 광산김씨 (태조∼연산군)
조선 전기는 1392년(태조 원년)부터 1566년 연산군이 폭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약 115년간이다. 이 기간은 처음에는 조선왕조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골육상잔에 대한 염증이 심하였으나 세종대왕의 선정으로 왕권이 확립되어 점차 조선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다져지고 한편 사회적으로는 양반사회가 성립된 시대였다. 조선조는 유교를 치국의 원리로 삼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하였기 때문에 불교문화는 쇠퇴(衰退)하였지만 성리학이 기반을 굳히고 유교가 발전하였다. 특히 세종조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자인 한글이 창제(創製)되고 각종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다. 세조의 찬위(簒位)로 또 다시 왕실의 존엄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세조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왕권이 회복되고 학문이 발전하였다.
이 무렵 관찰사공 김약채(金若采:19世)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때 문하부의 좌의사로 있으면서 조반의 옥사를 바르게 다스려서 명성을 드높였고,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때 지신사(도승지)로 있었는데 이에 항거했다 하여 외지로 유배도기도 하였다.
조선조 정종 2년(1400)에 문하부의 좌산기 상시(문하부에 속해 있던 간관)로 돌아와 그 때 대사헌이던 권근과 같이 권세가문의 사병 양성하는 폐단을 막았다. 그 해 겨울에 대사헌으로 있다가 태종 2년(1402)에 형조판서로 승진되고 3년 뒤에 충청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임함으로서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잡고 세거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유적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룬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편 연계 김 첨(金 瞻:18世)은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정4품)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학문에 전심하고 경사에 밝아 제자백가로 통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몽주와 친교가 있었다는 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태종이 등극하자 풀려 나와 예문관 제학(종2품)까지 지냈으며 업적으로는 아악을 바로 잡아 궁중의식에 활용하는데 기여하였다. 뒤에 참지의정부사로 있을 때 태종의 처남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와 가까이 하여 왕족간에 이간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파직되는 불운을 겪었다.
또한 김자린(金自麟:18世)은 태조 2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종3품)로 있을 때 관내의 농사짓는 일, 누에치는 일, 세금을 받고 인부를 부리는 일 등을 잘 처리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태종이 왕위를 잇자 개국 초의 혼란은 가시고 정국이 차차 안정되었다.
태종이 왕위를 잇는데 역할을 한 이는 송곡 김계지(金繼志:18世)인데 태조와 태종의 양궁을 내왕하면서 태조의 뜻이 태종으로 가겠끔 하는 회천대업의 공이 있었다. 특히 김계지라는 자신의 이름까지 태조의 뜻을 태종에게 잇게 했다는 계지이고 병조판서 및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정2품)을 지냈다.
계지의 아들 김 재(金 滓:19世) 또한 문과에 급제하고 판군자감사를 거쳐 상호군과 수문전 직제학을 지냈다.
이 무렵에 김문발(金文發:22世)은 도평의 녹사로서 전라도 원수의 부하가 되어 남원, 보성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4품)가 되었다. 순천부사와 경기, 충청, 경상도의 수군 도절제사(종2품)가 되었다가 낙향하여 부용정을 짓고 남전향약과 백녹동규를 본 받아 실행하니 광주(光州)지방의 향약좌목이 되었고 태종 17년(1417)에 황해도 관찰사로 갈 때 계지와 같이 궁온(임금이 내려 주는 술)의 은전도 받았다.
그리고 조선 태종과 사돈관계에 있던 김한로(金漢老:21世)는 양녕대군의 장인으로서 고려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의좌랑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예문관 제학으로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온 일도 있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정2품)과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장차 부원군이 될 뻔도 했는데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정1품)에 추증되고 광산군에 책봉되었다.
또한 삼정 김 방(金 倣:17世)은 전라도 도절제사를 지냈으며 태종의 명령을 받고 전라도 김제에 관개용 저수지인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그 공사의 책임자였으며 김제 고부간에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당시의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김 문(金 問:20世)은 20세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요절하니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17세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었다. 친정의 부모가 개가를 시키려하자 죽기를 맹세코 부모의 명에 따르지 않고 어린 아기를 업고 개경에서 시가가 있는 연산까지 수 백리 길을 낮에는 사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다가 밤에 거둥 하였는데 걸어오는 동안 호랑이가 호위하여 주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논산에 지금도 〈범 넘이 재〉가 있다. 그 때 업고 온 아이가 세종조에 사헌부감찰(정6품)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된 김철산(金鐵山:21世)이다. 허씨부인은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고 요역도 면제되었다. 그의 후손 중 고관대작과 대제학 등의 많은 유현을 배출하였으니 그의 유덕이 더욱 우러러 보인다.
한편 총제공 김 한(金 閑:20世)은 중군도총부 부총재를 지냈으며 형수인 허씨부인과 큰 집을 도왔고 배위는 완산이씨로 익안대군 방의의 따님이다.
김 열(金 閱:20世)은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의 아들로 큰 형님 김문이 21세로 조졸하니 벼슬길을 단념하고 형수인 허씨부인과 어린 조카를 보호하며 훈육에 힘써서 종통과 가업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열은 자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큰 집을 위하여 희생한 표본이며 형조도관 좌랑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하여 호를 퇴촌이라 하였다. 학문이 고매하여 빙옥난고라는 시집이 전하고 합천에 있는 화곡사에 모셔졌다. 공의 묘소가 실전되어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1983년에 후손인 김대중(金大中:40世)의 탐수로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광음리에서 찾아 수호하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건국 초기인 이 시대에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김천리의 맏아들인 김희선(金希善:18世)은 족보에는 강원도관찰사로서 백성을 다스리는데 청백하고 도량이 넓어 선정한고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무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에 발췌된 자료에는 조선조 초기의 명신과 의학자로서 개국원종 공신록에 기록이 보이며 태종 2년(1393)에 전라도 안렴사로 있을 때 각 도에 의학원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였다. 태조 4년(1395)에는 정조사로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의학에 밝아 중요한 의학서적을 저술했다.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그의 아우인 김 무(金 務:18世) 또한 조봉대부로 제용감의 소감(종4품) 벼슬을 지내면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 형제들이 있었다.
세종조에 활약한 김 췌(金 萃:20世)는 세종조 초기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상원군사가 되었는데 이 무렵 경상도 성주고을은 아전들이 세력을 부리고 민심이 거칠어져 관청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그 고을을 다스릴 사람을 구하던 중 김췌는 약관의 나이로 뽑혀 세종에게 하직 인사를 드릴 때 "저에게 생살권을 주시면 그 고을을 잘 다스리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므로 그 고을에 부임하여 포악한 무리 수명을 가려내어 처형하니 비로소 수령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아전들을 다스리는데는 흙으로 구워만든 갓끈을 매도록 하여 무거워서 고개를 저절로 굽히게 하는 등 기강을 세우니 한 달도 못되어 진압되었고 백성들도 거친 마음이 부드럽게 바뀌고 어리석음에서 착함으로 바귀었으니 이것이 모두 수령의 덕이라 칭송하게 되었고 뒤에 도승지(정3품)로 추증되었다. 이 이야기는 현지에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김 소(金 遡:20世)는 태종조의 증광시에 급제하였는데 이조, 예조, 병조의 정랑과 군수를 거쳐 대호군을 지낸 뒤 성균관 사성(종3품)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세종께서는 종실의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할 기관인 종학을 설립하였다. 이 종학에서 책임자 격인 종학박사를 겸임한 대학자이고 세조조에서는 좌익공신 3등에 추록되었으며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정2품)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김 청(金 廳:20世)은 태종조의 역과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천추사의 통역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에 승문원사에 임명되었는데 중국황제에게 올리는 글에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는 죄로 경상도 상주에 귀양을 가는 불운을 겪었으나 곧 풀려나서 대호군(종3품)이 되어 지신사 안승선과 더불어 압록강 중류로 흐르는 파저강에서 야인을 토벌하여 성죄하는 방문을 초하여 바쳤다. 문종조에 지중추원사(종2품)에 승진되었고 단종조에는 임금으로부터 비단 한필을 받았으며 세조조에는 좌익공신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만사 김예몽(金禮蒙:21世)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랑을 거쳐 감찰에 제수되었고 144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과거의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다. 문종이 즉위하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찬술에 참여하였고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세조조에는 사은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겸 성균사성이 되었다. 이때 후학들에 대한 교육에 힘써 자주 시험을 보고 제술이 우수한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 뒤 강원관찰사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466년 발영시에 아들 성원과 함께 급제하여 한때 조야의 선망을 받았다. 이어 공조, 예조판서에 올랐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시관이 되어 뽑은 인재가 거의 뒷날 조정의 현직을 차지하여 빙감(氷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예몽에게는 형으로 승훈랑을 지낸 인몽(仁蒙:21世)과 문과를 급제하고 사간원정언과 강화부사를 거쳐 이조참의를 지낸 의몽(義蒙), 그리고 아우로 봉직랑을 지낸 지몽(智蒙)과 통례원 좌통례(정3품)를 거쳐 회양 도호부사를 지낸 신몽(信蒙:21世)이 있었는데 모두가 학문이 높아서 높은 벼슬을 하였는고로 세상에서는 이들 5형제를 5몽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종조 말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광암 김태정(金台鼎:21世)은 재주가 특출하였으나 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3년 동안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고 상을 마쳤으며 과거에는 응하지 않고 오직 학문만 강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니 점필재 김종직이 '강양(江陽:현재의 합천)의 주인'이라고 칭찬하면서 호를 광암이라 지어 주었다.
만취당 김맹권(金孟權:20世)은 세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숙하면서 학업을 닦는 반유로 있었는데 세종대왕께서 원손인 단종을 안고 나와 후일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았는지라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그 날로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토정 이지함과 천휴당 이몽규 같은 명인을 배출하였다.
김치온(金致溫:20世)은 고양현감(종6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수양에게 선위하니 장차 큰 화가 임박하였음을 짐작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흥으로 내려가 사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과 교우하다가 단종의 흉변을 듣고 자탄하되 단종재위시 3정승과 사육신 같이 못 죽은 것이 한이라고 몹시 슬퍼하였다.
오옹 김효종(金孝宗:20世)은 학문이 고매하여 학행으로 벼슬길에 올라 단종조에 사복시정(정3품)에 이르렀는데 수양대군이 인륜대의를 저버리고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로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리고 곧 벼슬을 버리고 사퇴하고 고향인 부여로 은거했다가 단종이 영월에서 비명으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운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해만 뜨면 궁검대에 올라가 동쪽을 향하여 3년간을 통곡하였으며 매월당 김시습과도 도의로 사권 절의신이다.
부여의 청일사에 배향되었다.
세종조에 김 호(金 瑚:21世)는 문과 급제하여 외직으로 함진도안렴사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인 김자중(金自中:22世) 또한 남평현감을 거쳐 사헌부 wq의를 지냈고 추원재에 모셔졌다.
김맹윤(金孟胤:24世)은 벼슬이 한성부참군(정7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병을 핑계삼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 산과 물 좋은 자연을 벗삼아 평생동안 시를 읊으며 방랑을 하니 안평대군의 잔당으로 몰려 영종도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 무렵에 율재 김덕원(金德源:22世)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영천군수에서 이조정랑을 거쳐 춘추관 기주관으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헌부 정령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정3품)에 으르렀으며 세조조에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문치와 대화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였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이를 적개공신이라 부르는데 우리 광산김씨에서 2등 공신으로 3명이 책록되었다.
서석 김국광(金國光:22世)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으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병조판서와 적개공신이 되었다. 세종 때 명재상이던 방촌 황희가 일찍 사람됨을 인정하여 손서로 삼았으니 젊어서부터 출중하였음이 짐작된다. 국광은 세조가 거국적인 지력을 동원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바 그 업적이 뛰어나므로 임금이 "국광에게 힘입어 배운 바 크다"고 칭찬하면서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글을 써 주고 밥까지 떠 먹여 주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예종조에 우의정, 성종조에 좌의정을 거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도 다녀와 좌리공신 1등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에 봉해지고 부조(나라의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리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은전을 받았다.
국광의 아우 서정 김겸광(金謙光:22世)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세조 6년(1460)에 체찰사 신숙주를 따라 건주의 북방 오랑캐 침입을 막는데 공을 세워 군기감정에 임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이르니 형인 국광은 호조판서로 세조의 은총이 두터웠는데 겸광을 보고 세조가 직접 모자를 벗기고 꽃을 꽂아 주며 "그대가 비록 벼슬은 형보다 낮으나 현량한 것은 형 보다 낫다"고 칭찬하면서 술을 구 할 정도로 형제가 모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서 예조판서겸 오위도총관(정2품)이 되었고 성종 즉위에 보필한 공로로 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에 책봉되었으니 청백리에 녹선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겸광의 아우 김정광(金廷光:22世) 또한 벼슬이 제용감 첨정으로 출사하였고 김경광(金景光:22世)은 위로 3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감으로 인해 할머니인 허씨부인과 어머니인 안동김씨의 양대 정경부인의 봉양과 거상을 마치고서야 53세가 되어 겨우 집안 일을 벗어버리고 성종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니 벼슬은 통정대부 군기시정겸 교서관 판교(정3품)를 제수받고 봉직하였으나 연만하였기로 웅지도 펴보지도 못하고 한성 임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백겸(金伯謙:21世)은 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북방의 오랑캐를 소탕하는데 여러번 공을 세워 승진하였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서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원군에 봉해졌으며 절충장군(정3품)에 제수되었다. 황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의 연임 요청을 받아 명성을 얻었고 시호는 양호(襄胡)이다.
김달전(金達全:21世)는 강화도호부사로 재임시 임소에서 병이 위독하자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냈으나 운명하니 특명으로 부물을 하사하였다. 아들인 충목공의 귀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심재 김여석(金礪石:23世)은 수의 아들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고 세조조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니 세조가 영재라 칭찬하고 동궁에게 장차 좋은 보필자가 될 것이라 하였으며 최항을 시켜서 욕심부리지 말고 술을 즐겨 마시지 말며, 교만하지 말라고 '무기욕(毋嗜慾), 무기음(毋嗜飮), 무교긍(毋驕矜), 아홉 자를 쓰게 하고 옥쇄를 눌러 주었다. 벼슬은 검열, 경연관을 역임하고 군자감주부에 올랐으며 성종 10년(1479)에 사예로 있을 때 원수인 윤필상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의 야인을 토벌하였고 도승지 관직을 거쳐 말년에는 형조판서에 승진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김 면(金 沔:22世)은 통례원 판관을 지냈고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천군에 책봉되고 경원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장도(莊悼)이다.
앞에 설명한 좌의정을 지냈던 국광에게는 아들 5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김극뉵(金克?:23世)은 세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대사간(정3품)을 지냈고 광원군으로 봉해졌다. 공의 묘소가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데, 이 터가 한국의 8대 명당의 하나로 산세의 웅장한 기세에 전후좌우, 청룡백호와 현무주작이 기세 등등하게 일대 명기를 이루어 세칭 만대 발복지지로 일화가 있다.
이 묘를 쓴 후 대제학 7분, 상신 3분, 유현 2분, 종묘배향 3분, 왕비가 1분이 나고, 고관대작과 명유석학이 대를 이어 나와 광김이 해동명벌로 지칭되었으니 모두가 대사간 묘 음기의 여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인 김극니(金克?:23世)는 한성좌윤을 지냈으나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직언으로 논박하다가 강화유수로 좌천되었다가 후에 이현의 파당으로 연좌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셋째인 김극수(金克羞:23世)는 충훈부의 경력(經歷:종4품)으로 있었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통하다가 3년 상도 다 못 치르고 임종하였고, 긴극괴(金克愧:23世)는 그 인품이 뛰어나 숙부인 공안공이 장재라고 추천하여 성종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니 손을 잡아 맞으면서 도총부 도사를 임명받고 물러 나와 그 손을 비단으로 싸서 국은을 잊지 않은 이로 유명하였으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도임하여 적병을 토평하고 돌아와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김성원(金性源:22世)은 단종조의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승지로 있을 때 야은 길재의 증직을 탄원하여 허락을 받았고 세조 12년(1466)에는 정2품 이하의 대소 신료들에게 탁영시라는 시험을 보였는데 공이 좋은 성적을 얻은지라 임금이 술과 풍악을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성종조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는데 이 때 김성원은 수찬관으로 있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매산 김석원(金錫元:21世)은 성종조의 저작박사와 사헌부 지평으로서 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승문원 교리로서 서거정, 강희맹과 같이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고 성균관 직강을 거쳤으며 사후에는 고창의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김순성(金順誠:21世)은 세종조에 벼슬길에 오랐는데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 성종의 왕명으로 경국대전을 고쳐 편찬하는데 공선되어서 그 일에 참여하였고 아들인 김 석(金 석:22世)은 성종조에 분과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고, 그의 동생인 김 굉(金 ?:22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정언 벼슬에 들어섰으나 중종조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되어 명나라의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왔고 암행어사로도 함경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기민구제책을 건의하였고 중종 11년(1516)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버금가는 사예로 조광조와 같이 간택되기도 하였다. 사간원의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공정한 처벌과 관기를 바로 잡는데 힘썼고 경상, 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김현뢰(金賢賚:19世)는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을 거쳤는데 성종 2년(1471)에 평장동 유허서를 지어 후세에 전함으로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그 곳을 성역화 하는데 일조하였다.
육행당 김처겸(金處謙:23世)은 성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공부는 하지 않고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하고 정이 넘치며 믿음이 있고 이웃을 돕는다는 효(孝), 우(友), 목(睦), 인(?), 임(任), 휼(恤)의 여섯 가지를 논하고 실천하여 담양지방의 향약으로 정립되어 덕망이 드높아 가문을 빛내었으며 호도 육행당(六行堂)이라 불리었다.
김 감(金?:28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병마절도사, 좌찬성에 이르렀다.
지월당 김극기(金克己:23世)는 중종조에 무과로 급제하여 전라우후를 지낸 후 제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스스로 퇴임하고 귀향하여 지월당이란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경현사에 위패가 모셔졌고 그의 종손자인 양정헌 김 정(金 禎:25世) 또한 의주교수를 지냈으나 육학시경에 전념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후학지도를 하였고, 또한 그의 아들들로 전하여져서 청원정 김언우(金彦瑀:26世)도 도학에 고명하여 성리학 효경독서에 전심하여 청심정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언우의 동생인 칠계 김언거(金彦?:26世) 또한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나 물러나 풍영정을 짓고 후학을 대를 이어 지도하였으니 문장가의 집으로 빛나고 있다.
조선중기의 광산김씨 (중종∼경종)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안정을 되찾은 1506년 9월부터 22대 정조 곧 1799년까지의 약 293년 간이다. 이 시대의 정치적 특징은 실추(失墜)된 왕권을 재정립하고 나아가서는 국력을 신장(伸張)시키고자 노력한 시대였으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점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에 의하여 좌절(挫折)되고 정치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형태를 면치 못하였고 당쟁(黨爭)이 시작되어 정치의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국방을 소홀히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고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이 어김없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간 중 무오, 갑자의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사화란 사림, 즉 선비들이 입은 화를 말한다. 세조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등을 포함하는 인척세력을 훈구파라 하고,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을 사림파라 하는데 이들간의 대립으로 다투다가 사림파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농수 김효로(金孝盧:21世)는 무오사화의 참화를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예안현에 자리잡고 세거하였으니 이 분이 오늘날 예안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는 과거를 일삼지 낭ㅎ고 독서로 임천에서 자적하였으며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아 불천위가 되어 별묘가 있다. 팔순을 넘기고 유택을 정하니 그곳이 마침 고려조에 시중을 지낸 김방경의 지석이 나오는지라 안동김씨인 그의 후손들에게 연락하여 밑자리로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유택을 정하니 양가의 후손들이 서로 고맙다고 두 곳 모두 시제를 지내고 있으니 기이한 현상이려니와 공이 시중공의 7대 외손이 된다. 이조참판(종2품)으로 추증되었고 별묘가 있다.
시기적으로 거의 비슷하나 예안보다 조금 앞서서 안동 구담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은 퇴촌 김열의 증손자이며 세조조에서 벼슬을 하였던 판서인 여석의 동생 담암 김용석(金用石:23世)은 형과 같이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주자의 고사를 모방하여 향약을 설정하고 성균관에 모여 소학을 강의하면서 미풍양속을 진흥시켰다. 이 때의 정치정세로 보아 집권한 간소배들이 미구에 사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므로 가솔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자손들에게도 "성균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라는 교훈을 남겼으니 후손들이 유언대로 학문을 닦으면서도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선생과도 동문 수학한 사이이니 학문의 수준을 알만하며 사후에는 용계서원에 철향되었다.
중종반정의 공신을 정국공신이라 부르는데 청라 김극성(金克成:21世)은 연산조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고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뒤 북평사가 되었다. 홍문관의 헌납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심순문이라는 사람에게 죄를 씌워 죽일 때 군신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부당하다고 말을 못하였다. 공이 혼자 원통하다고 죄상을 아뢰었으나 연산은 듣지 않고 심순문을 처형하였으나 극성의 직언하는 죄는 주지 않았으며 그 용기는 높이 평가되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국공신으로 책록되고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광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공조참판을 지내고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의주목사가 되었을 때 고을이 계속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인의로 무마하며 성심으로 백성을 대하니 1년만에 안정되었다. 그리고 예조판서에 오르고 우참찬, 이조판서에 전보되었을 때 서북도에 소란이 일어나니 공을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하여 평정하게 하였으니 출장입상하는 표본이 되었다. 계모의 상기를 마치고 다시 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찬성(종1품)이 되었을 때 희락당 김안로의 모함으로 정광필로 함께 흥덕으로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된 후 다시 복관되어 우의정(정1품)이 되었으며 부조의 은전까지도 입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앞에 설명되었던 청백리인 겸광의 아들 중 맏이인 김극회(金克恢:23世)는 성종조에 무관으로 출발하여 중종조에는 통정대부까지 증진되면서 여주목사와 장예원 판결사를 지냈고, 둘째인 김극치(金克 :23世)는 학행이 높아서 참릉참봉을 지냈고, 셋째인 김극핍(金克 :23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예조정랑 벼슬에 있었는데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를 충성된 신하들이 간한다 하여 고산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승문원 교감으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종1품)겸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께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할 것을 아뢰어 흉당들의 원한을 사던 중 김안로, 허항 등에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하였으나 김안로의 사사 후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평정(平靜)이다.
넷째인 김극개(金克愷:23世)도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병조정랑, 훈련원첨정, 지평, 사간, 사도시부정을 거쳐 승정원우부승지와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다섯째인 김극제(金克悌:23世)는 성천부사를 지냈고, 여섯째는 김극신(金克愼:23世)이고 막내 김극심(金克心:23世)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중종조에 간신이던 김안로와 우리 광산김씨와는 악연에 있던 사람이 많았는데 운암 김 연(金 緣:22世)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조광조의 왕도정치에 협력하였으며 김안로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냈는데 채무택, 심언광 등이 모의하여 김안로를 다시 등용하려 하니 회재 이언적 선생과 함께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두 달 뒤에 김안로가 다시 쫓겨나니 우부승지로 돌아왔다. 이 때에 중종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간신에게 미움을 당한 줄 모르고 외방으로 멀리 나가서 수고한 일은 내 마음에 불안함이 있다"고 하였다. 다시 좌부승지를 거쳐 강원관찰사(종2품)를 역임하였다.
탁청정 김 유(金 綏:22世)는 연의 동생으로 중종조 생원시에 합격하고 무예에 정통하였기에 무과에 수차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자 문무 양시를 그만 두고 부모 모시기로 하였다. 벼슬길에 나간 형 대신 부모 공양에 최선을 다하였고, 정자를 세우고 빈객을 맞아 즐기었으나 옳지 못한 사람은 즉석에서 꾸짖어 용서가 없었고,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김유가 세운 정자가 탁청정이라 하며 그 현판 글씨가 한석봉의 친필이다. 그 정자가 우람하고 훌륭한 고 건축으로서 잘 보존되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김말문(金末文:23世)은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을 편찬한 김성원의 아들로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중종조에는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토평할 때 종사관이 되어 좋은 계책을 세워 승전하고 돌아오자 황해도 관찰사를 배명받았다. 승정원 동부승지와 형조와 이조참의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에까지 올랐다. 말문에게는 백문(伯文), 성심재 중문(仲文), 숙문(叔文), 계문(季文), 윤문(胤文), 철문(綴文) 등 6분의 형과 아우인 내문(乃文)등 모두 8형제가 있었는데, 연산조에 형님인 윤문, 철문과 아우인 내문과 더불어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는 가문의 영광을 가져왔다. 윤문은 이조정랑이 되고, 철문은 예문관 직제학에 올랐으며, 내문은 사간원의 사간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4형제도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여 8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이들 8형제를 〈8문의 집〉이라 부르고 부러워 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중종 14년(1519)을 보면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장계하기를 "담양부에 사는 사노 박유엄이 그의 아들 박근에게 말하기를 '처주(妻主) 김말문이 조상을 담양 동면 명당 자리에 장사지내고 4형제가 급제하였으니 장차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였고, 그 이웃사람 보린과도 그런 말을 하였다는데, 말이 패란(곧 반역을 뜻함)과 관계되어 놓아 두기 어렵기에 감히 위에 계문하오며,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습니다. 라고 하는 관찰사의 장계를 보아도 당시의 8문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때 서청자 김숭조(金崇祖:22世)는 연산조 별시 문과에 올라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니 청맹고질 이라는 눈병을 빙자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니 처음에는 옛 임금을 위하는 신하의 절의로 좋지 않게 보다가 곧 폭군을 물러나게 한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중종조에 중시 문과에 다시 급제하고 사간원 헌납을 거쳐 나주목사(정3품)를 지냈다.
김세우(金世愚:23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뛰어난 재질과 방정한 행실로 시대에 아첨하지 아니하여 당시 요로에 있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적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이민(관리와 백성)을 애모하고 뛰어난 공적을 남겼으나 신병을 얻어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자택에서 죽으니 3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성고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산역을 도았으니 인심 얻은 목민관의 표본이며 여지승람의 적성편의 명환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충윤(金忠胤:24世)도 이 무렵에 부호군 벼슬에 있었으나 34세로 요사하니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져서 살기가 어려워졌다. 그의 부인인 한산이씨는 할 수 없이 거느리던 10여명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하여 네보내고 어린 두 아들과 겨우 끼니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하루는 친정 조카인 토정 이지함이 찾아왔다. 마음으로는 반가우나 대접할 음식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빈 도마와 식칼을 내놓으며 하는 말이 "때가 되었는데 점심을 대접할 양식이 없으니 미안하구나!" "그런데 이 도마와 칼은 왜 갖다 놓은 거예요" " 이 집 양반이 대단하니 다른 것은 줄 것 없고 양반이나마 썰어 먹으려무나"고 하였다. 조카인 토정이 하도 기가 막혀 "고모님 생활이 그렇게도 어려우십니까? 내가 고모님을 돕는 길은 고모부의 묘 자리나 제대로 잡아드리는 길 밖에 없으니 금시발복지와 만세번영지 중 어느 곳을 원하십니까? 하니 토정의 고모이자 김충윤의 부인인 한산이씨는 "지금 우리 집 형편으로 금시발복지라야 살지 않겠느냐?"하니 토정이 정해준 자리로 부호군의 묘소를 이장하였더니 그 이듬해에 집에서 내어 보냈던 노비들이 그 동안에 잘 살게 되었는지라 다시 찾아와서 땅을 사주고 재물을 가져와서 가난을 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화와 함께 지금도 부호군의 묘가 있는 논산 양촌의 석서리 고개를 〈토정의 고개〉라 부르고 있다. 이 묘지의 여음인지 자손에 많은 재력가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결국 16세기에 들어와 헝클어지기 시작한 조선조의 봉건질서는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분열과 대립을 격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과 민중의 대립까지 심화시켰다. 비록 사림은 그때마다 큰 타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하여 계속 성장하고 있었으며 16세기 후반에 다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기묘사화 때 피해를 본 김숭로(金崇老:22世)는 당시 은진현감으로 있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주은 김 식(金 軾:22世)은 조광조의 죄가 없으므로 구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금강 11현 중의 한사람이며 돈목재 김기서(金麒瑞:22世)는 연산군의 혼정이 시작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양팽손과 도의로 사귀며 경학을 강론하였고 뒤에 조광조와 도의로 사귄 연고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인 고창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육성하였는데 그 때 건립한 돈목재라는 강학당이 현존하고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자암 김 구(金 絿:24世)는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고 성균관 사성으로 사가독서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중종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임금께서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까지 왔노라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오"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3암(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자암 김구)과 같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는데 13년이나 그곳에 있는 동안 화전별곡이라는 문학작품을 남겼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가 모두 별세하였는지라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며 기절도 하였고 묘역을 떠나지 않고 애통하다가 병들어 타계하였다. 그는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도 높았으며 조선전기의 4대 명필중 한 사람으로 서체가 독특하였는데 그가 살던 서울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구의 종제인 의암 김 강(金 綱:24世)은 기묘사화로 종형이 남해로 귀양가자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10년만에 나라가 평온해지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을 거쳐 외직으로 정선군수로 나가 선정했고 다시 예조정랑을 거쳐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에 승진하면서 춘추관의 편수관(정3품)에 이르렀다.
김신동(金神童:23世)은 중종조의 현량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한림이 되어 3암과 더불어 정론을 주장하면서 선정의 기대사 크더니 사화가 일어나 홍패를 반납하고 오래도록 금고의 형을 입고 두문불출하다가 명종조에 다시 현량과가 복과되자 종부시주부를 거쳤으며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재주가 특출하였음을 말함이다.
평정공 극핍의 아들 김명윤(金明胤:24世)은 중종조 현량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경기 관찰사와 의정부좌찬성(종1품)에 이르렀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김홍윤(金弘胤:24世)은 황해도 관찰사(종2품)를 지냈으며 아우인 시은 김의윤(金懿胤:24世)은 명종조의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곳의 정랑과 사헌부의 지평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광릉에 은거하면서 화담 서경덕과 오묘한 이치를 토론하였다. 을사사화를 당하자 병을 청탁하여 출사하지 않았고 그가 살던 곳을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했다 하여 '염퇴고개'라 불리운다.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재 김극통(金克通:24世)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정통하여 조광조를 찾아가서 같이 강론하였는데 정암이 "남주(지금의 전남 장흥군 남면의 지명)의 높은 선비는 참으로 그대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알만하고 형제가 문장과 도의가 높아 '3통' 또는 '3수사'라 불이었다고 한다. 벼슬은 동몽교관 이었다.
그 외에도 중종조에 벼슬길에 들어선 노계 김경희(金景熹:23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김안로 간당의 농락으로 과제가 위격이라 말썽이 생겨 탈락시키고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에도 연루되니 벼슬길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취석정'이라는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고로 문하생 중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에도 능했고 중종조의 동국필원에도 참여한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성리설'과 '노계집'이 있고 고창의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옥곡 김 기(金 紀:23世)도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고 의정부 사인(정4품)에 이르러 임금을 보필할 대관의 물망에 올랐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졸하니 임금이 친히 지사점시관(호조의 관아)에 명하여 장례를 돌보게 하고 제수를 하사하였다.
김 개(金 鎧:25世)는 중종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들어 섰는데 명종조 정시에 장원 급제하니 가자되어 동부승지(정3품)로 배수되었다가 명종조에 형조와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돈영부사가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도 참석하였는데 당시 고봉 기대승 계열의 학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시흥에 있는 금천농막으로 물러나 분사하였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퇴계 이황, 동고 이준경과 함께 명종임금이 직접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으며 호는 독송정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송월헌 김인경(金仁慶:25世)은 일곱 살 때 중종의 부마로 선발되어 순의대부 광천위가 되었다. 중종 22년(1527)에 옹주의 모후인 경빈 박씨가 궁중 음모인 '작서의 변(쥐를 불에 구워 복숭아나무에 매달아 세자 인종을 저주하는 사건)'에 화를 입어 상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돌아오니 김안로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서 이번에는 서천으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형되자 즉시 석방되어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종실 부마들만 모아 보이는 제술시에서 장원하여 통훈대부로 승진이 되었다. 공의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아우와 우애가 깊었다.
김질충(金質忠:24世)은 명종조에 급제하여 황간 김계휘와 같이 호당에 뽑혔으며 벼슬은 형조좌랑과 지제교를 지냈다.
탄수 김 규(金 규:24世)도 명종조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이조정랑을 거쳐 전한으로 있으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였고 성균관 사성을 거쳐 장악원정에 승진되었다. 선위사로서 동래에 머물러 있을 때 이 무렵 공의 빠른 승진을 시기하는 윤원형 일파의 무고로 투옥되어 경원에 유배되었으나 나중에 풀려 전리로 돌아왔다.
중종조에 김 호(金 浩:22世)는 의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치면서 선정하였고 그의 아들 김우서(金禹瑞:23世)도 문과 급제하여 북병사로 국경수비에 업적이 있고 이 시대에 김 신(金 紳:24世)은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나중에는 관찰사의 소임을 다하여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金允悌:24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전중어사 벼슬을 역임하고 고창, 부안등 10여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다가 을사사화 후 사직하고 향리인 광주에서 환벽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현사들과 도의로 교류하였다.
우리나라 성리학은 조선조에 들어와 16세기에 이르러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회재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며 다른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양 선생이다.
이황의 학통은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등의 제자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의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우리 광산김시로서는 조선의 5부라 일컬음을 받는 문순공 후조당 김부필(金富弼:23世), 읍청정 김부의(金富儀:23世), 산남 김부인(金富仁:23世)과 양정당 김부신(金富信:23世), 설월당 김부륜(金富倫:23世)등 5종반과 내종형제인 봉화금씨의 일휴당 금응협과 면진재 금응훈까지 모두 7인이 퇴계 선생의 고제자로 학덕이 뛰어나 그 당시의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 한 마을은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연유되어 오늘까지도 군자리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김부필(金富弼:23世)은 호가 후조당인데 강원관찰사를 지낸 연의 아들이다. 퇴계의 제자로 학덕이 뛰어나 여러번 벼슬을 제수하여도 모두 사양하니 퇴계 선생이 "후조당 주인은 절조가 굳세어, 임명장을 내려도 반기지 않네, 앉아서 빙설 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 도의 존재를 눈여겨보며 읊조리기만 하네'라는 7언 절구에서 보듯이 벼슬을 탐내지 않고 오직 도학에만 뜻이 있음을 말해 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공의 시호를 제수하였다. 퇴계의 시호가 문순공 인지라 스승과 제자의 시호가 같을 수 있느냐는 시비가 한 말에 있었으나 나라에서는 〈문순공의 문하에 다시 문순공이 나니 어찌 두 가문 모두가 광영이 아니겠는가〉라는 화답으로 시비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도 있다.
안동 와룡 가야에 살던 유일재 김언기(金彦璣:25세)도 이 무렵 퇴계의 제자이다. 명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조부인 담암의 유언대로 벼슬에는 마음이 없었다. 10년 동안이나 도산서원에 가까이 있는 청량산에서 학문을 닦고 하산을 하니 산천초목이 모두 글자로 보였을 정도로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가야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그 덕풍을 듣고 모여든 사람이 수백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비지 남치리, 지헌 정사성, 옥봉 권위, 청신재 박의장, 오봉 신지제, 정곡 권태일 등 그 외에도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 학문 융성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여강동주가 되어 이황이 죽은 후 여강서원을 세우고 퇴계의 주리론을 높이며 유학의 전수에 노력하였다.
김부인(金富仁:23世)은 호가 산남으로 관찰사 연의 아우인 유의 맏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향시에 장원하고 명종조에 무과에 장원하니 문무를 겸비하였고 경상좌도병사와 북병사로 경원에 쳐들어온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사위인데 결혼하게된 경위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오고 있다. 산남공이 어렸을 때 하루는 낙동강에서 잉어를 보고 쫓아가다가 애일당에 이르렀다고 한다. 애일당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정자인데 농암 선생이 산남의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한 것을 보고 맏 따님의 작이라고 점찍어 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론적인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통은 중봉 조헌과 우리 광산김씨의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등 많은 유현으로 계승되어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 도관찰출척사를 지내면서 충청도 논산의 연산 땅에 세거지를 잡은 약채의 아들이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21세의 나이로 요사한 문이며, 그 때 17세의 부인 양천허씨가 열녀로 정려를 받아 조선시대의 부도의 표본이 되었다. 예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상신 서석 김국광은 문의 손자이다.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국광으로 하여금 가도승지라는 직제에도 없는 임시 벼슬까지 겸직케하여 가까이에서 자문케 한 것으로 세조가 어느 만큼 그를 소중히 여겼던가를 짐작케 해 준다. 국광의 아들이 대사간을 지낸 극뉵이고, 극뉵의 증손자가 선조조에 대사헌과 호당에 든 황강 김계휘(金繼輝:26세)이다. 그는 조선조 500년간의 가장 유수한 박학자로 나라 일 마다 그의 생각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을 정도였다. 성리나 예의 뿐만 아니고 산천지리의 자연과 인물 그리고 씨족의 원류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선조 14년(1581)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계변무 교섭 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버낼 때도 황강을 추정사로 보내어서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광국 원종공신에 녹선되었고 경연에 나아가 시강도 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나주의 월정서원에 철향되었다.
사계 김장생(金長生:27世)은 황강 김계휘의 아들로 어릴 때는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덕과 예학을 수학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니 마침내 그를 유학의 종장이요, 예학의 태두라 일컫게 되었다. 김장생은 선조 12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처음 벼슬로 들어와서 여러 관직을 두루 겪어 형조참판을 지냈으나 학문 쪽에 뜻을 더 두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가 위기에도 독전과 군량미 조달 등 임무를 완수하였고 그 와중에도 근사록석의, 상례비요, 경서변의, 의례문해 및 가례집람을 저술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면서 "사계 김장생과 여헌 장현광은 덕이 큰 사람들인데 내 옆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하던 학자였다. 심지어 그를 불러 들이기 위해 직제에도 없던 성균관 사업이라는 새 직제까지 만들어 그를 불러 들인 일도 있었다.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의 영수인 그는 법치보다 예치를 우위에 놓고 법치가 못 다스리는 심성을 예치로 순화하여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사회의 규범을 집대성한데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당대의 조정이나 학자 또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에 관한 질문은 모두 사계에게로 집중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학문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경서와 가례등 저서가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현대에 와서 사계전집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선생 문하에 아들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문묘에 배향된 선정3현을 비롯해 상촌 신흠, 지천 최명길, 계곡 장유, 월당 강석기, 우재 이후원, 백헌 이경석, 기암 정홍명, 유포 구인후, 충익공 신경진 등 많은 문형과 유현, 재사를 배출하여 사림의 종사가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문묘에 종향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돈암서원에 주향을 비롯하여 전국 10여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원공 김장생의 첫 번째 부인은 창년조씨로 은(?)과 신독재 집(集)과 허주 반(槃)을 낳았고, 두 번째 부인은 순천김씨인데 절재 김종서의 7세 손녀이다. 계유정란으로 가정이 몰락하였는데 손자가 종의 기지로 생명을 부지하였으며 그 후손이 어려운 환경에서 신분이 보존되어 왔는데 17세 되던 해 아버지인 증참의 수언이 말하기를 "절재(김종서의 호)의 충성과 절의를 밝히려면 지금 조정의 덕망이 사계 선생보다 높은 분이 없는데 네가 그 집에 들어가면 우리 집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선대의 가승을 가지고 시집와서 아들을 낳은 뒤에 남편인 사계 선생에게 그 가승을 보이니 크게 경탄하였다 하며 후에 효와 열행이 임금에게 상달되어 효열의 정려를 받았고 칙령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장생의 아들 역시 거유인 신독재 김 집(金 集:28世)이다. 판중추부사(종1품)를 지냈고 아버지와 같이 문묘에 종향되었다. 신독재는 18세에 진사가 되고 광해 2년(1610)에 참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한 때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요현감, 임피현령, 지평, 집의, 공조참의를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세웠다. 이때 실각한 영의정이던 낙서 김자점이 청나라에 가서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문책을 받게 되어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했다. 그 후 대사헌을 지냈고 판중추부사(종1품)로 재임중 서거하였다. 부친인 사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그 학문이 송시열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문묘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한 가문에서 역적이 나면 비록 그것이 무고였을 지라도 그 가문은 바로 파멸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의 서동생인 김 고(金 고:28世)가 무고를 받자 집은 아우 반과 더불어 즉일로 대죄를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고에게 망언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아버지와 형들이 모두 어진 사람이므로 특히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풀어 주어 역사적인 특례를 만든 것이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보아도 사계와 신독재 부자는 그의 학문과 덕망 때문에 법 위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학의 종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의롭게 봉사하면서도 벼슬을 사양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했던 성덕군자라는 호칭을 받았고 부여의 부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있는 여러 서원에 철향되었으며 저서로 신독재 전서가 20권이 있다.
두계 김 규(金?:28世)는 현종조에 경학으로 동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다시 자여찰방으로는 부임하였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숙종조에 특명으로 관로에 나오도록 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사은 숙배하고 바로 물러나와 처음에는 황산(지금의 연산) 강상에서 살다가 중년에 논산 두계로 복거하여 청복을 누리며 정훈을 이어받아 효우가 출천하니 중형인 신독재가 칭찬함이 대단하였다.
장생의 3째 아들이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종2품)를 지낸 허주 김 반(金 槃:28世)은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공주로 갔다가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참판에까지 이르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또 왕을 호종하였으며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었다. 정사(인조반정 공신)와 영사(유효립 모반진압 공신) 공신책봉 때에 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 무렵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왕실위주의 국가질서론과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예학이 발달하였다. 예학은 도덕윤리를 기준으로 하는 형식논리를 중시하였고 명분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형식을 중요시 함으로서 관혼상제에 예학이 발달하였는데 예학의 태두라는 사계 김장생의 공로가 크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광산김씨를 일러 예문의 종가라 일컫게 되었다.
족보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족보가 등장하였다 하나 한 종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15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는데 최초의 족보는 세종 5년(1423)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 하나 현존하는 것은 없고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성종 7년(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의 세보로 알려져 있다.
우리 광산김씨도 족보도 비교적 빨리 편찬된 편인데 16세기에 병조참판을 지낸 용계 김지남(金止男:25世)이 당시 영남에 살고 있는 종인들과 같이 족보를 만드니 공의 호를 따서 세칭 용계보라 하나 전해지지 않고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숙종 임금의 국구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서석 김만기(金萬基:30世)가 숙종 3년(1677)에 만든 서석보이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숙종 13년(1687)에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가 이를 보수하여 죽천보를 만들었으나 이것마저 보존치 못하더니 드디어 영조 23년(1747) 지추 김진동(金鎭東:31世)이 다시 족보를 편찬하니 이를 정묘대보라 하고 이 족보가 현존하는 광산김씨 족보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로부터 93년 후인 고종 11년(1874)에 미서 김재현(金在顯:35世)과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이 정묘보를 기준으로 수정하여 고종 13년(1876)에 족보를 다시 발간하니 이것이 병자대보이고 각파의 족보를 만드는데 지금까지도 근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에도 일제하인 1939년에 '장성보'를 그리고 해방후인 1957년에는 '한성보'라는 대동보를 발간하였다.
위에 말한 병자대보가 광산김씨의 족보로는 비교적 잘된 족보이고 오래 되어서 가치 있다고 판단되어 새 천년(2000)을 맞는 기념으로 영인본으로 만들어 다시 배포한 바 있다.
당시에 족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김문서(金文瑞:22世)는 통훈대부로 낙안현령을 지냈으나 그의 묘소가 대천에 있는데 상석 밑에 족보함이라는 석함을 갖출 정도였으니 사후라도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뜻이리라 해석된다.
16세기말 조선은 양산사회가 동서 붕당으로 분열되어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고 국력도 약화되어 갔다. 이때 이웃나라인 일본은 도요토미(豊臣秀吉)에 의하여 100여년 동안 계속되어 온 혼란이 수습되고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부하인 장군들의 관심을 해외로 쏠리게 함으로서 국내의 불평세력을 무마하고 아울러 그의 대륙 침략 야욕을 펴고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선조 25년(1592) 4월13일, '명나라를 치러가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고 핑계하고 20만의 대군을 이글고 부산 앞 바다로 몰려왔으니 이것이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김해로부터 성주, 추풍령을 넘어서 청주로 진격한 왜군을 막기 위해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여 죽으니 이때 광김의 김 일(金 鎰:27世)도 탄금대에서 신립과 같이 전사하였다. 이 때 김민선(金敏善:25世)도 사헌부집의(종3품)로 있었는데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부평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소설옹 김영남(金穎男:25世)도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우도 도사로 있다가 진양군수로 벼슬자리를 옮겼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먼저 동강으로 쳐들어온 왜적을 방어하는 한편 사천에 머물러 있던 적을 소탕하고 수천석의 군량미를 서울로 운반했다. 이듬해 경상우도 감사 학봉 김성일과 우도병사 송암 김면이 모두 왜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중위장으로서 군중을 통솔한 공로로 당상관으로 품계가 올라 수원도호부사가 되었다.
한편 김 감(金 :28世)은 서천군수로 재직시 서해로 침공하는 왜적을 방어하는데 공로를 세워 말년에는 공조참의로 많은 사람 중에 뽑힌 이가 되었는가 하면 그 밖에도 양형재 김택남(金澤南:26世)은 군자감 참봉으로 있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룩하는데 전공을 세웠고 김몽성(金夢成:27世)은 판관으로 있다가 노량대첩에 참여하여 전공은 세웠으나 순절하였고 김덕유(金德宥:31世)는 한산도 대첩때 전공을 세웠으나 전사하자 부인인 장수황씨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이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3대첩에 우리 광김의 선조가 빠짐없이 참전한 모습이 보이니 문장 쪽 뿐만 아니라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는 얼을 증명하는 바라 하겠다.
광김의 김 결(金 潔:27世)은 조헌 문하에서 수학중이었는데 선생의 창의를 도와 청주대첩에 공을 세웠고 청악 김충국(金忠國:28世)도 중봉 조헌을 도와 창의했으며 김희도(金希道:26世)는 조카인 묵은 김응생(金膺生:27世)과 더불어 참전하였으나 일족인 김치원(金致 :28世), 김 헌(金 憲:28世)과 함께 금산에서 7백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한편 조헌이 의병을 모집할 때 오강 김성휘(金成輝:26世)는 많은 재산을 희사하여 의병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일조하였고 집안에 거느리는 노복들을 시켜 많은 군량미를 진지로 보내 독전하여 그 군공으로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직방재 김보원(金輔元:24世)은 조헌의 병막에 참가하였다가 청주전투에서 공로를 세웠고 다시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과 같이 남강에 투신 자살하였고 김기면(金基命:28世)은 희천군수로 재임중 평양성 탈환에 전공을 세웠고 남하하는 적을 쫓아 행주대첩에도 전공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진주성 수성에도 참전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삼계 최경회와 같이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 밖에도 묵암 김대민(金大民:23世), 김신민(金信民:23世), 김광운(金光運:25世)도 진주성 함락 때 묵숨을 다한 이들이다.
경상도 의령에서는 망우당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항상 적은 군사로 적을 무찔렀으며 붉은 옷을 입고 적진을 진격하여 그 용맹스러움이 나는 새와 같이 가벼우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다 하여 천강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이때 절재 김 질(金 質:26世)은 내금위 봉사의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 김성일, 망우당 곽재우와 같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이 되어 진주로 가는 도중 왜병 수십 명을 베고 임곡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왜적에게 포위되어 대적할 수 없음을 미리 알고 편지를 써서 웃옷과 같이 말안장에 얹어 집으로 보내고 곧 바로 칼을 빼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말이 집에 도착하니 부인 박씨는 옷과 신을 무덤에 묻고 초혼장을 지내고 소,대상을 마친 후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참아온 것은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할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고 이르고 곡기를 끊은 지 10일만에 죽으니 모두들 열녀라 하였다.
전라도 광주의 김덕령(金德齡:31世)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명령을 받고 형인 덕홍(德弘:31世)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니 6천여명이나 모였다. 고경명과도 연합하여 잔라도로 침입한 왜적을 무력화 시켰으며 익호장군의 호를 받고 모악 '권율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진해, 고성지방에 상륙하는 왜군을 물리쳤고 홍의장군 곽재우와도 협력하여 곳을 가리지 않고 왜군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의병장이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가 전쟁터에서는 항상 철퇴 2개를 허리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었다니 팔도에서는 그를 신장이라 불렀고 왜군들은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왜장 카토오가 그 명성을 듣고 화공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오게 하여 보고는 "정말 장군이다"라고 감탄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조 30년(1596)에 흥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역적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 순찰사 신경행의 무고로 큰 지혜와 용맹을 펴보지도 못하고 6차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춘산화연곡〉이라는 글을 남기고 29세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운명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왜병들은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부터 양호(전라 충청도)는 걱정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덕령장군은 사후에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의열사에 제향되었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도 받고 최근에는 광주 시내 중앙에 충장로라 명명된 거리가 있고 무등산에 충장사를 지어 그 일대를 성역화하고 추모하고 있다. 동생인 덕보(德普:31世)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니 이들 형제는 충절 3형제로서 의열사에 같이 배향되었다. 충장공의 부인인 흥양이씨 또한 여장부로서 부군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친정어머니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고 정유재란 때는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하다가 왜적의 위협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크게 꾸짖으며 절벽 아래로 투신 순절하였으니 그 석벽에 이 내용이 각자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김덕휴(金德休:31世)는 임진왜란에 훈련원 주부로 종형 김덕령 장군을 따라 항상 군중에 있으면서 많은 협조를 하다가 장군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면서 적진에 돌격하여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서하당 김성원(金成遠:30世)은 하서 김인후의 문인이며 선조조에 효행으로 침랑(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에 제원찰방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으로서 군량미를 조달하여 의병들을 도왔고 종질인 김덕령 장군에게도 군량과 병기를 조달해 주었다. 정유재란때에는 노모를 업고 동보 모후산으로 갔다가 왜적을 만나 모녀가 같이 희생되었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의 막하에서 활약한 김득종(金得宗:25世)과 김 각(金 珏:27世)이 있었는데 득종은 용강현령 김숙진(金叔珍:20世)의 후예로 제봉 고경명과 같이 금산에서 순절하였고 각은 고경명 막하에서 종사하다가 정략 장군이 되었다. 이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을 한 곳에 묻은 무덤이 칠백의총으로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으며 지금도 후손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또한 만취당 권율 원수의 막부에서 활약한 김 온(金 :26世)은 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을 세웠으나 계모와 동생 김 갑(金 :26世)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진중에서 전해 듣고는 놀라서 병을 얻으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충주에서는 김시척(金時 :25世), 김시성(金時省:25世) 형제가 난동하는 왜군에 잡혀가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3모자가 함께 적의 칼날에 참혹하게 죽으니 나라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왕명으로 삼강행실록에 수록케 하고 정려를 내렸다.
한편 경상도 안동의 근시재 김 해(金 垓:24世)는 왜란이 일어나자 안동 유림의 추대를 받아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고 종형인 김 기(金 圻:24世)가 정재장겸 소모사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낙금헌 이정백과 금역당 배용길을 좌우부장으로 삼고 출전을 하니 종제인 설애 김 강(金 堈:24世)과 극재 김 평(金 坪:24世) 형제와 족손인 도봉 김득렴(金得 :26世)과 쌍벽당 김언구(金彦球:25世)의 손자인 김백웅(金伯熊:27世) 또한 이에 따랐으니 순식간에 수만명의 의병이 모여들어 경상좌도 의진이 편성되었다.
이 때 유림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니 굳건한 충의로 뭉쳤기에 함창의 당교전투와 예천의 용궁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특히 당교 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순찰사였던 몽촌 김수에게 바치니 '전도내 의병중 첫째라'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예천 송구천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많은 적병과 적장까지도 죽인 큰 전과를 올리고 이듬해 5월에는 밀양으로 내려가는 적군을 추격하다가 경주의 진중에서 전사하니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호는 근시재이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그가 남긴 향병일기에는 의병으로 활약한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갈봉 김득연(金得硏:26世)은 서애 유성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청취헌 김득의(金得議:26世)와 같이 창의하여 의창을 설치하니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장무덕(張懋德)이 크게 감탄하여 그의 덕행과 충의를 칭찬하며 영천과 경주사이에 공의 인품과 공적을 찬양하는 비를 세우려고 까지 했으나 명군이 퇴각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후에는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저서로 갈봉문집 2권과 한글로 된 〈지수정가〉와 〈산중잡곡〉이 전해지고 있다.
그 동생인 만취헌 김득숙(金得숙:26世) 또한 백담 구봉령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나 영남좌우도 선비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었는데 나중에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를 제치고 수위에 뽑히는 재주를 가져 대성할 것을 기약했으나 요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득의의 아들 김광원(金光源:27世)은 호가 석당인데 학행과 문장이 사우들 중 뛰어나 향천에 올랐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은거하며 영재를 육성하고 사림을 계도하여 유풍을 진작하니 문하에서 훌륭한 명사,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나왔으며 담암공부터 아들 손자까지 진사가 계속나와 7대 진사집, 문한가로 명성이 높다.
황해도에서는 4형제 의병장으로 소문난 김만수(金萬壽:26世)가 동생 천수(千壽:26世), 백수(百壽:26世), 구수(九壽:26世)와 함께 봉산에서 의병 9백명을 모아 대장이 되었으며 장단에서 일어난 유극량의 군사와 합세하여 임진강에서 북상하는 왜적과 싸웠지만 처음에는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우인 백수가 전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남은 두 아우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황해도 일대의 적을 추격하니 이번에는 적을 많이 격파하였다. 특히 부차벌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여기서는 도총부 도사이던 아들 광협(光鋏:27世)을 잃는 불행을 또 겪었다. 선조 26년(1593)에는 진도군수에 임명되어 한산도의 통제사 이순신 군대와 광주의 의병대장 김덕령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급해 주었다. 왜란이 끝나고도 시기하는 자들 때문에 공록을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어 봉산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이때 전라도 고창에서는 김 계(金 繼:24世)와 김 위(金 緯:23世)등 6형제가 모두 나서서 의병을 모집하고 장성현감을 지냈던 오봉 김제민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벼슬이 부장과 병절교위가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해남에서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리고 왜란이 평정된 뒤에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장성에서는 백곡 김홍우(金弘宇:24世)와 모남 김광우(金光宇:24世), 양촌 김덕우(金德宇:24世)의 3형제와 만옹 김기수(金麒壽:24世), 국재 김성진(金聲振:24世)등 한 집안과 서석 김언욱(金彦 :27世), 김언희(金彦希:27世) 형제등 많은 광김의 뜻 있는 이들이 남문에서 창의하고 역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고창과 장성은 물론 직산, 용인, 소사 등지로 옮기며서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렸고 군량미를 모아 행재소와 강화도로 보내는 등 그 공적이 매우 컸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나주의 죽헌 김 부(金 溥:27世)는 훈련원정으로 남원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일심재 김 명(金 溟:27世) 또한 의병으로 참전하였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였으나 쉬지 못하고 적의 침입이 우려되어 형수와 조카 그리고 자기 가솔을 이끌고 피난 중 적에게 잡히어 처참하게 살해되었으니 이를 본 부인과 형수가 분격하여 강물에 투신 자살 하였다.
이 때 살아남은 아들의 나이 15세였는데 그 어머니가 투신 자살한 곳에 여막을 짓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하여 6년 목을 추가하니 나라에서는 이 두 형제 내외의 충절과 아들의 효도를 기리기 위하여 한 집에서 3강을 다 지켰다는 일문삼강의 정려를 내렸다. 지금도 오산 창의사에는 당시의 의병으로 궐기한 사람들의 공이 현저하다 하여 72위의 공신을 배향하고 있는데 이중 우리 광산김씨가 13위로 앞에 설명한 모든 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서석 김언욱(金彦 :27世)에게는 맏형으로 김언익(金彦益:27世)이 있었는데 선무랑(종6품)이었고 언욱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중 왜란이 일어나 전국을 짓밟으니 장성으로 달려가 동생 창영 김언희(金彦希:27世)와 함께 군량미 수십석과 유지들 80여명과 같이 의거를 도모하였다. 언욱은 어가를 따라 호종한 공로로 선무원종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의정부좌참찬(정2품)에 증직되어 구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언희는 전란 중 군량미 조달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명나라 지원군이 남하할 때 의병 6백여명과 함께 진주로 가서 고종후(고경명의 아들)장군 휘하에 들어가 육박혈전 하다가 운명하니 장예원정(정3품)에 증직되었다.
도천 김윤국(金潤國:25世)는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고 임진왜란때는 관양관으로 영천군수를 지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의 접반관이 되었고 선산부사에 승진되었으며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김은휘(金殷輝:26世)는 선조 15년(1582)에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아전들이 올리는 회계장부를 살펴보고 어느 물건은 얼마가 남아 있고 아무 물건은 얼마가 모자란다고 지적하니 아전들이 처음에는 불복했으나 정산한 결과 모두 처음 지적과 같으니 그 때부터 아전들이 두려워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왜란이 일어나자 익위를 제수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체찰사인 송강 정철과 함께 군무를 계획하여 여러번 군공을 세우는 등 이대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느나 뒤에 사헌부 감찰과 형조정랑을 거쳐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입휘(金立輝:26世)는 지혜가 총명하여 경학에 밝아 일천으로 함열현감을 거쳐 장예원 사의를 지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고 그의 아우인 김공휘(金公輝:26世)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전과 예학을 강구하였고 파주목사를 지냈다. 선조조에 율곡의 추천으로 찰방 벼슬을 비롯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고 정여립의 난을 토평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후에도 아산 현감을 비롯하여 파주 목사까지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치적이 현저하였고 사후에는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위의 계휘, 은휘, 입휘, 공휘 4형제를 가르켜 황강4파라 한다.
지천 김공희(金公喜:28世)는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종사관, 영광군수,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기양사에 철향되었다.
임란 직전에 무과에 급제하였던 금은 김수연(金壽淵:24世)은 정유재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세부득하여 아들인 사은 김몽룡(金夢龍:25世)등 4형제와 같이 순절하였고 부인과 자부까지도 뒤따라 순절하였으니 7명의 한가족이 몰살하는 참변을 당하였다. 뒤에 예조에서 충·효·열행을 장계하여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밖에도 순절한 집과 각 지역에서 의분에 못 이겨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기록이 많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 일일이 다 나타내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여길 뿐이다.
선조 8년(1575)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감정문제로 벌어진 동서의 분당이 그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더니 북인들끼리 또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서 당파싸움이 드디어 왕위계승 문제와 엉키어서 광해군의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우리 광산김씨에서도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그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위할 때 폐모 불가론을 이론적으로 논책한 이는 용계 김지남(金止男:25世)인데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였다. 지남은 선조조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암행어사로서 관서지방을 두루 살폈고 우리 광산김씨의 최초 족보인 용계보를 만든 주인공으로 이름이 남아 있다. 약산 김위남(金偉男:25世)은 이이첨 등의 간신들이 백관들을 협박하면서 의견을 말하도록 하는 자리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으나 "이 일은 신하된 자로서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반대했으며 그래도 결행을 하니 그 후부터 식음을 전폐하면서 자결하고야 마는 절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김원록(金元祿:25世)도 선조조 식년시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겪다가 선조가 승하하자 통례원 통례로서 태묘에서 선조임금의 3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시는 예를 마치자 광해군으로부터 관복을 하사 받았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부당함을 지적하여 반대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며 인조반정 후에 돈녕부 도정을 제수하였으나 그 때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임금이 위로의 은전을 베풀고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종2품)를 제수하였다.
한편 청파 김효성(金孝誠:27世)은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간신배들을 처형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며 인조반정후에 청주목사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대사헌(종2품)에 추증되었다.
소봉 김대덕(金大德:26世)은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광해조에서는 통정대부로 승차하여 천추절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인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었고 이괄의 난에 임금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한성부 좌윤까지 지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과 같이 적의 포위를 받고 있을 때 척화신들을 적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 상소하여 임금이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하였다. 뒤에 형조참판에 이르렀고 문장과 명필로 당대의 이름이 있었으며 특히 초서와 해서를 잘 써서 국조필원에도 올랐다.
김태우(金泰宇:24世)는 간신배들이 폐비의 일로 청류들에게 화를 입히자 말하기를 "인륜이 무너지는데도 선비가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무엇으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랴"하고 김효성과 더불어 이이첨, 정조, 윤인등 삼적의 머리를 베이고 오리 이원익을 불러드릴 것을 상소했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김태정(金泰廷:24世)과 송고 김태국(金泰國:24世)은 형제인데 형인 태정은 서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판일 때 인성왕후(인종비)의 복제를 기년으로 주장하다가 대세에 몰렸으나 당시 사류들은 정론이라 동조하였고 동생인 태국은 음직으로 고부와 금산군수를 지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공빈김씨(광해군의 생모)를 종묘에 배향함을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조야를 놀라게 하였으니 이렇게 절의가 곧은 형제도 있었다.
김영구(金永耉:28세)는 광해조때 정조, 윤인 등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으로 유폐시켜 폐모론을 주장하니 이때 공이 홍무적과 같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위의 두 사람을 주살 할 것을 주청하였다.
벼슬은 인조때에 전주판관을 지냈다. 이 밖에도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한 이로 추담 김우급(金友伋:26世), 시서 김 선(金 旋:26世)등 여러 사람이 더 있었으니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는 광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찬성하는 쪽이 있었다고 무고 되어 억울한 죽임까지 당한 이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재 여류시인으로 소문난 허난설헌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은 자기와 교류하던 서자 출신인 박응서 등이 계축옥사로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당시의 권신이던 대북파의 관송 이이첨에게 아부하면서 폐모론을 주장하여 왕에게까지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계획을 진행시켰다가 발각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능지처참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약관 22세에 성균관 생원이 된 김상하(金尙夏:27世)는 교산 허균의 역모사건에 가담하였다고 무고되어 국문을 당하였는데 모진 고문에도 불복하고 항변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한 바 있었다. 그의 아들 김종길(金宗吉:28世)은 숙종조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광해조에 벼슬한 쌍오 김질간(金質幹:26世)은 선조조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외직으로 출발하였으나 광해군이 등극하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기주관이 되었고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는 서장관이 되어 중국을 다녀온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시집 쌍오문집 진본이 전해지고 있다. 말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종2품)에 까지 이르렀고 세조의 영정을 영변에서 봉안한 공로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앞에 설명된 김상하와는 당숙질간이다.
덕암 김상양(金尙養:27世)은 광해조 사마시에 합격하여 통훈대부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인조반정의 공로로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광해조에 승정원 주서로 있었던 계암 김 영(金?:24世)은 북인들이 농간을 부림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예안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사표를 수리하지 낭ㅎ고 승정원 일기를 계속 쓰라고 독촉을 하니 부득이 상경은 하였으나 성밖에서 일기를 써서 올리고 돌아왔다. 인조반정 후 그동안 북인들에게 피해를 본 관리들을 승진시켜 높은 벼슬을 제수하면서 복귀토록 종용하였으나 병을 핑계삼아 계속 사양을 하였는데 그 까닭은 전왕이 비록 폭군으로 몰락은 했다 하나 그의 녹을 받은 벼슬아치로 새 왕의 녹을 받지 못하겠다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보인 표본으로 평가되어 숙종조에 도승지(정3품)로 추증되고 순조조에는 양관대제학에 가증되어 문정(文貞)의 시호와 함께 세상에서는 계암선생이라 칭송을 받게 되었다. 영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대를 이어 배출되었으니 그 중에서도 손자인 초당 김 용(金 鏞:26世)과 현손인 지애 김 협(金 협:28世), 6대 손인 일일재 김시찬(金是찬:30世)이 더욱 돋보인다.
귀래정 김효신(金孝信:27世)은 귀성 중군으로 출정하여 반란군과 싸워 숙천에 이르렀을 때 반란군인 강작이란 자가 졸지에 효신을 치니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적의 머리를 베어 원수부에 보내는 전과를 올려 가선대부에 가자되어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고 진무원종훈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김인방(金仁邦:26世)의 공로가 인정되어 진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고 벽류정 김운해(金運海:25世)는 광해조에 무과 급제하여 이괄의 난에 어가를 모시고 공주로 호종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추증하였고 충청도 조방장 일때는 공로가 있어 임금으로부터 말과 갑옷을 하사 받는 특례도 남겼으며 시은 김신길(金愼吉:27世)도 공주로 어가를 호종하는데 공이 있고 송암 김여강(金汝剛:25世)과 호봉당 김곤보(金坤寶:28世)는 의병을 일으켜 병기와 군량미 수송등 일익을 담당한 이들도 있다.
또한 인조조에 벼슬길에 오른 긍구당 김중정(金重鼎:27世)은 청백리로 뽑힌 공안공 김겸광의 5대손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나 이괄의 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진안으로 내려가 와룡암이라는 서재를 짓고 충효사상과 근검정신을 지표로 삼고 후학을 지도하고 산수와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며 세상을 멀리하였다. 긍구당 유고가 있고 와룡암과 긍구당은 건축양식이 특이하여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 왕조에서는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안으로 전후 복구사업에 노력하는 한편 대외정책에서는 명과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에 대하여 중립 외교정책을 썼다. 그것은 중국대륙의 명나라가 점차 쇠퇴해지고 만주의 후금이 크게 강성해지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심산에서 나온 정책이다.
이 때 명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후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여 토벌하였는데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해 왔다. 광해군은 할 수 없이 내촌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고 1만 3천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중국땅 건주위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곧 패전하고 후금에 항복하고 말았는데 이때 김동립(金東立:25世)과 김원복(金元福:25世)도 출전 하였다가 심하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의하여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외교정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정책이 의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하고 후금은 오랑캐의 나라이니 배척해야 한다면서 명에 대하여 친선정책을 폈으니 후금을 배척하는 것이 되어 그들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인조 5년(1627)에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침략하였다가 물러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때 남곡 김정립(金廷立:28世)은 어영 아관으로 강원도 금화에서 적과 싸워 수백을 참하고 적장의 투구와 철갑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김 진(金 搢:26世)은 광해조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언을 지냈고 인조 5년(1627)에 정주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곳 능한산성 싸움에 대장으로 항쟁하였으나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인조 8년(1630)에 송환되어 예안현감이 되었으나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같은 무렵 삼육재 김정망(金廷望:28世)은 사계선생의 문인으로 효우하고 근신함을 가상히 여겨 천거되어 현감에 이르렀는데 손바닥에 효우 두 글자를 써서 항상 실천하였으므로 연산과 은진 두 고을 유생 60여명이 모여 도백에게 맹종(孟宗)과 왕상(王祥)과 같은 효자라고 상신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김여성(金汝聲:25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광해조 계축사화에 연루되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 김장생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에서 세자를 배알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아들 남식을 보내어 나라에 충성을 다하게 하였으니 남한산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 갔음을 듣고서는 북망 통곡하였으며 학행으로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병조호란에 관련된 광산김씨를 살펴보면 ...
이조참판을 지냈던 허주 김 반의 둘째 아들로 창주 김익희(金益熙:29世)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건주위의 청태종이 즉위식을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이 식전에 조선의 사신을 참석시키고자 간계를 썼고 이곽은 참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국내에서는 즉위식에 참석한 이곽 일행을 나라에 오명을 입힌 자라고 여론이 대단하였다. 이윽고 이곽과 나덕헌이 청국 서신 용골대(龍骨大) 등과 같이 귀국하였는데 김익희는 그의 아우 김익겸(金益兼:29世)과 더불어 "이곽, 나덕헌을 죽여 8도에 효수하고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상자에 넣어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야 한다"고 상소를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와 같은 소문을 듣고 객관을 몰래 빠져나가 저희 나라로 도망쳤고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호란 중 창주 김익희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는 독전어사로 싸우면서 척화를 주장하였고 조선조에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양관 대제학을 지내신 분이다.
그의 아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 서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소수의 선비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싸우다가 강화도가 점령됨에 원임대신인 선원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의 남성루에서 자폭 순절하였다.
이 때 형조좌랑으로 있던 만취당 김수남(金秀南)도 함께 분사하였는데 뒤에 승지(정3품)로 추증되었고 강화 충렬사에 익겸 신망과 같이 광김에서 세 사람이 배향되었다. 익겸의 어머니이자 허주공 반의 부인인 연산서씨는 강화도에서 피난 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순절하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충정공 김익겸의 부인 정경부인 해평윤씨는 선조의 사위인 문목공 신지의 손녀로서 부덕을 겸비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신사임당과도 비 길만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강도로 피난했다가 시어머니인 연산서씨와 남편을 여의고 해평윤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잉태중 만삭이었고 큰 아들 만기 역시 다섯 살인 유아였으므로 죽지 못하고 돌아오는 배안에서 둘째인 만중을 출산하였다. 친정으로 돌아와 두 아들을 법도로 가르쳐 소학, 사략, 당시 등을 직접 가르칠 때 공부하는 과정은 지극히 엄격하였다. 항상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남보다 한층 더 노력해야 겨우 남과 같을 것이다"하고 "사람들은 행실이 모자라는 자를 꾸짖을 때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라 하니 너희들은 뼈에 새겨 들어라"하였다. 형제가 허물이 있으면 손수 매를 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너희 형제를 내게 부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너희가 만약 이와같이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너희 아버지를 대하겠느냐? 학문을 하지 않고 살려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스스로 미망인이라 일컫고 종신토록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큰 아들 만기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비로소 잔치와 음악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가문의 경사요 내 한 몸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다"고 했다. 만중 또한 과거에 급제하고 형제가 모두 양관 대제학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웃으며 "네가 이제 지하에 가서라도 너희 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섰다"고 하였다.
정묘호란때 사계 김장생(金長生:27世)은 80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양호 호소사로 임명되었는데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격문을 보고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우리 광김의 화양당 김 현(金 현:27世), 수우당 김성하(金聲夏:26世), 김숙남(金淑南:25世) 등도 이때 응소되어 많은 활약으로 업적을 남겼다.
장흥의 해은 김유신(金有信:27世)은 광해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척화신인 청음 김상헌을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김유신이 정묘호란 때는 임금을 강화섬으로 호종하여 위성원종훈에 책록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우산 안방준과 같이 의병을 모아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여산에 이르니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벽에 대명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청자가 든 글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 아들인 만절당 김후경(金後慶:28世)과 김 오(金 墺:28世)도 장성하였기에 같이 출전하였다가 돌아왔으며 고흥의 모헌 김취지(金就砥:25世)도 안방준의 막하로 의병을 모았다. 이때에 한 집안의 김득선(金得善:24世), 김의정(金義精:24世), 김정일(金精一:24世), 김여호(金汝瑚:24世)와 김덕보(金德普:31世)까지 그 대열에 합세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담양의 죽계 김존경(金存敬:28世)은 사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조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강진현감과 삼척부사로 재임중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현존하며 정묘호란 때는 왕실이 강화도로 파천하고 왕세자가 분조하여 완산으로 남하할 때 호위한 공이 있으나 공훈 기록을 사양하였고 천추사 서장관 및 성절사오 연경을 다녀왔다. 그 후 강원관찰사(종2품)로 선정을 하였으나 노년에는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사우들과 풍류와 독서로 여생을 보내었다.
또한 이때 어가를 호종한 김득신(金得信:26世)과 김재관(金在寬:27世)이 있었는데 전후에 그 공로로 호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한편 매원 김광계(金光繼:25世)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임진왜란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이던 근시재 해의 아들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는데 청군이 에워싸서 위급함이 알려지자 병대장이 되고 아우인 야일재 김광악(金光岳:25世)을 참모로 삼고 종제인 두문자 김요형(金耀亨:25世)과 조카인 김 초(金 礎:26世)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일으켜 출병을 하였으나 죽령에 이르니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서향 통곡하고 돌아 왔으니 임진, 병자 양난에 부자 의병대장으로 충절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 김자빈(金自빈:27世)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추천으로 종사관이 되어 숙부인 김덕란(金德鸞:26世)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광주(廣州)로 출전 하던 중 번천에서 접전을 하다가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고로 숙질이 같이 화를 당하였다. 논산에 있는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매죽헌 김득남(金得男:28世)은 광해조때 무과 급제하여 인조반정 일으켰을 때는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병자호란때는 철곶첨사로서 세자 일행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송하던 중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같이 가던 선비와 부녀자들이 많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부평에 있는 계양산 밑에 까지 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포로가 되어가던 무리들을 찾았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달아나던 적을 계속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와 무안의 묘충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懿)이다.
봉곡 김동준(金東準:25世)은 광해조 증광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광해군의 폭정 하에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홀로 찾아 뵈었고 정묘호란때는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로 남하하였으며 병자호란에는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는데 척화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호란 후에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황명처사라 자처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쓴 고로 호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죽헌 김 설(金 渫:25世)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고창의 토성산 밑에 송죽을 심고 정자를 지어 영취(永翠)라 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의촌 김남식(金南式:26世)은 신독재의 문인으로 아버지인 송와 김여성(金汝聲:25世)의 명을 받들어 고창에서 김남철(金南哲:26世)과 같이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자가 수백 명에 으르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출전하다가 청주에서 오랑캐의 무리 90여 명을 참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려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했다. 그 후 과거에 뜻을 버리고 정읍의 계령산 아래에 옥산정사란 강학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수백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나라에서 충신의 정려를 받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은 김이성(金履成:27世)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과거를 폐하고 화헌정사를 지어 후진 양성을 했으며 효행이 탁이하여 효자의 정려를 받았으며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할 때 당계 김화준(金華俊:27世)은 충절을 다한 고로 보연(寶硯:벼루)을 하사 받았고 수졸헌 김익제(金益濟:27世)도 어가를 호종하였다가 전쟁이 멎자 향리로 돌아와서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외에도 호종공신으로 더 많은 사람이 기록에 나타나나 일일이 이 자리에 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세한재 김성일(金成一:29世)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아우인 사호 김성구(金成九:29世)와 같이 아버지의 원수인 종놈 김이란 자를 죽이고 관가에 가서 자수하니 인조임금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특사하였다. 성일은 병자호란 때에 군공을 세워 삭주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의 정려를 내렸고 담양에 있는 증암사에 배향되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지은 '형제복수전'이라는 글도 전한다고 한다.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한 우리 광산김씨는 별로 많지는 않으나 미산 김여옥(金汝鈺:27世)은 인조조에 식년시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 정묘호란에는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고 환도 후에 봉교, 전적, 예조와 병조좌랑, 지평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함평현을 수비하다가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였으나 강화가 성립된 뒤에 해산하였다. 이어서 밀양부사, 한성부우윤이 되고 부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효종조에서는 병자호란 때 겪은 굴육을 설욕할 밀명을 받았으며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두 번씩이나 평안도 관찰사를 배수 받아 실천에 옮기려 했으나 불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김익견(金益 :29世)을 북벌의 선봉장으로 쓰려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천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효종이 진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스스로 마음을 굳히고 효종께 사은숙배 하러 갈 즈음에 효종이 승하하므로 북벌은 계획에만 그치고 실천이 안된 허사가 되어버린 사건으로 남았다.
긍구당 김세환(金世煥:29世)은 유일재 김언기(金彦璣:25世) 둘째 아들인 만취헌 김득숙(金得숙:26世)의 증손으로 의지가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경사에도 밝아 창설 권두경, 우헌 류세면 등 유현들과 사귀어 수갑계를 맺어 성현의 경전을 강독하고 임천에서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여 문호를 빛냈다.
김진원(金振遠:27世)은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 경학을 통달하였고 충효의 사적도 많이 읽어 충신열사의 풍토가 있었다. 효행 또한 탁이하여 인조조에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음에 임금이 거듭 부르므로 부득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부임하였다. 숙종조에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고 효자의 정려도 받았다.
또한 효종조에 활약한 이를 더 들어본다면 탁계 김우인(金宇仁:27世)은 진보현감을 지냈고 효종조에 엄선한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문도가 100여 명이 모였는데 문하에 학문을 성취하여 문과 급제자가 10명,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가 40여 명이나 되어 문명을 떨쳤다. 교관임기를 마칠 무렵 동기 문하생이 탁계 동문록을 간행하여 선생의 음덕을 추모하였다.
기오당 김우형(金宇亨:27世)은 효종조 증광시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시독관으로 임금 앞에서 대학을 강론하였고 서장관으로 중국도 다녀온 외교통이며 공조판서를 거쳐 기로소(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이는 곳)에 들어 갔으나 기사환국을 개탄하면서 녹을 받지 않았다. 예서에 능하였다고 하고 저서로는 옥산유고를 남겼으며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숙종 6년(1680)에는 경신대출척이 있었다.
이 때 우리 광김은 7대제학을 배출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인맥을 살펴보면 허주 반의 맏아들 학주 김익열(金益烈:29世)은 인조조에 선공감 가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았으며 그 후에 남원부사(정3품)를 지냈고 둘째인 김익희(金益熙:29世)는 호가 창주인데 남한산성 독전어사로서 척화신으로 이름이 높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정2품)와 양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셋째인 김익겸(金益兼:29世)은 병자호란 때 강화수성에 실패하자 순절하여 광원부원군(정1품)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넷째인 김익훈(金益勳:29世)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 의금부 도사부터 시작하여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가 세워졌고 그 뒤에도 여러 벼슬을 거쳐 경기총융사겸 어영대장을 제수받아 광남군(光南君:정2품)을 봉작받았다. 경신대출척때 남인을 출척했다가 뒤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으니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다섯째인 김익후(金益煦:29世)는 인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정9품)을 지냈고 이조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김익경(金益炅:29世)은 현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종2품)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학덕이 높았으니 그의 자손들이 역사를 빛낸 가문으로서 이때 초석을 다져 놓았다.
익겸의 아들 만기는 뒤에 영의정과 국구가 되었고 만중은 국문학의 대가인 서포로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등을 저술하였다.
서석 김만기(金萬基:30世)는 다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버지인 김익겸을 잃어버리고 어려서부터 숙부인 창주 김익희에게 수학하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효종 3년(1652) 사마시를 거쳤고 그 이듬해에 별시 문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수찬, 정언, 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인 인경왕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정1품)에 승진되었다. 그 후 문곡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공을 세워 보사 1등공신이 되었다. 사후에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석의 아우인 서포 김만중(金萬重:30世)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조에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종 벼슬을 두루 거쳐서 예조판서겸 양관대제학을 지냈는데 숙종 임금께 아뢰기를 장희빈에게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과 남해등지로 유배되었다. 서포는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윤씨부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시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오는 도중 배 위에서 만중을 낳아 길렀다. 그러한 사연이 있는 서포 였기에 유배도중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
서석 만기와 그의 아들인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와 진규의 아들인 건암 김양택(金陽澤:32世)은 어느 문중에서도 드문 3대 대제학을 지냈고 또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과 하정 김영수(金永壽:37世)가 대제학이 되었으니 7대제학 모두가 사계선생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으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이 시대에 활동한 광산김씨로 몇 사람을 더 든다면 오헌 김 총(金 총:26世)은 현종조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를 미롯하여 정랑, 수찬 등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때 시관이 되었는데 시사에 연루되어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왜국의 사신접위사로 동래공관의 임지에서 졸 하였다.
전곡 김익렴(金益廉:29世)은 효종조에 문과 급제하였고 사헌부 집의를 거쳐 사간원 사간과 명사를 겸하니 효종이 기재라 예찬하였으며 종성부사를 지냈고 판서에 추증되었다. 역사 김우화(金愚華:29世)는 숙종조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각 고을의 수령과 부사를 지냈으며 기사환국 때에 중전을 구호하는 장계를 올렸다. 김정봉(金廷鳳:29世)은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평안도 장시도사가 되고 황해도도사, 춘추관 기주관, 봉상시정, 승문원 판교를 지냈다. 입지당 김우철(金愚喆:29世)은 숙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노론 4대신의 신원할 것을 주청하였고 장령을 거쳐 형조참의에 승진하였다.
김자건(金自鍵:27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스승을 따라 도학을 강하였으며 벼슬과 명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인조조에 향천으로 선공감역, 빙고별감을 지냈으며 현종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읊으며 말년을 지냈다.
김자남(金自南:27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자질이 뛰어났는데 벼슬길이 여의치 않아서 인조의 국상 때 초사로 영사전 참봉이 되었다가 사응원 직장, 군자감 주부로 옮겼고 정선 안응현감을 거쳐 예빈시정에 이르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익화(金益華:28世)는 현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창락, 대동찰방, 예조좌랑, 사헌부 감찰을 거쳐 함창, 보령, 강진현감을 지냈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치적이 있어 보령 고을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숙종의 첫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31世) 김씨인데 서석공 김만기의 딸이다. 조선왕조 5백년동안 광산김씨로는 오직 한 분뿐인 왕비였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쉬울 따름이며 뒤를 이은 인현왕후 민씨마저 왕자를 낳지 못하였다.
현종 초기부터 경종 말기까지 약 70년간은 당쟁이 극에 이르렀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보복 또한 처참하였으니 희생이 연속이었다. 이와같이 당쟁이란 이념이 친족이란 혈연도 초월하고 사생결단을 하고 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와중에 만기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오라버니 되는 만구와 김진구(金鎭龜:31世)와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 형제를 먼저 들 수 있다.
형인 진구는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역란을 토제하였으며 호, 병, 예, 형, 공조등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었고 어영대장 수어사도 겸직하였고 숭정대부에 승진하고 광은군(종1품)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아우인 진규는 숙종조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으며 갑술옥사로 복관되어 교리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때 소론으로부터 척신으로서 궁중 출입이 잦아 월권행위가 많다고 탄핵을 받아 사직되었다. 그러나 곧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복관되어 우부승지(정3품)가 되었을 때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숙종 33년(1707)에 병조참판에 이르렀을 때 소론이 집권하니 공은 덕산으로 유배되었다. 4년 뒤에는 다시 양관 대제학으로 복관되고 또 2년 뒤에는 예조판서와 좌참찬(정2품)으로 승좌되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서석이 만들었던 광산김씨의 족보를 증보하여 죽천보를 완성한 주인공이며 거제의 반곡서원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김진화(金鎭華:31世)는 숙종조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은 충주목사를 지냈고 김진일(金鎭一:31世) 또한 현릉령과 사제감의 첨정을 거쳐 한성서윤을 지내다가 경종조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낙향 은거하였다.
한편 진구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위에 말한 거듭되는 정변에 정권도 잡아 보고 또한 반대파로 몰려 고초도 겪은 희비의 양극을 고루 체험한 8택을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맏이인 북헌 김춘택(金春澤:32世)은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이름이 높았는데 훈신의 적장자로 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유배되었다. 유배를 당하였어도 인현왕후 민비를 복위하는데 앞장서서 갑술옥사를 일으켜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로 복관 되었으나 그 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소론의 무고를 당하여 다섯 번이나 영해로 유배되고 세 번이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시와 글씨에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며 종조부인 서포가 지은 한글소설 〈구운몽〉과〈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고종 24년(1887)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충효의 절개를 지킨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정2품)와 광녕군으로 추증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둘째인 척재 김보택(金普澤:32世)은 숙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검열, 정언, 감사를 지냈고 소론의 거두인 약천 남구만 등의 오역을 두둔한 죄를 논박하다가 소론의 미움을 샀으며 경종 2년(1722)에 일어난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벼슬을 추탈 당하였으나 영조 2년(1726)에 복관되고 고종 5년(1868)에 이조판서(정2품)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셋째인 백운헌 김운택(金雲澤:32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참판이었고 신임사화 때 무고로 영변에 유배된 뒤 다시 반역한다는 목호룡의 무고로 장살되었다. 영조 즉위로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넷째인 죽헌 김민택(金民澤:32世)은 숙종조에 별시문과로 급제하여 교리로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신임사화 때 무고로 연루되어 혹형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고 영조 즉위로 신원되어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다섯째인 평재 김조택(金祖澤:32世)은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신임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섯째인 묵헌 김복택(金福澤:32世)은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영휘전 참봉으로 부임하였다가 사퇴하고 귀향했으나 신임여흉들의 무고로 다시 투옥되어 옥중에서 졸한 뒤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일곱째 김정택(金廷澤:32世)ds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위도로 유배되었고, 막내인 만죽당 김연택(金延澤:32世)도 공히 신임사화 때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즉위로 모두 신원되는 동일 운명을 겪은 형제들이다.
또 이 무렵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으로 김만년(金萬年:28世)은 숙종조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포서 별검을 거쳐 남행주서를 역임하였고 문학과 행의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기사환국 때 친우인 이사명은 죽고 공은 온성에 유배되어 죽었는데 이듬해에 복작되었다.
김이수(金以壽:30世)는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전적을 지냈다. 우암이 유배되자 병을 청탁하고 두문자정 하였으며 폐호간서(閉戶看書)를 좌우명으로 삼고 학구에 전념하였다.
김응휘(金應輝:30世)는 장녕전 참봉으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였을 때 여러 날 동안 석고대죄 하여 왕비로 복위할 것을 계정하였고 문행으로도 당세에 명성이 높았다.
미암 김위재(金偉材:33世)는 신임사화로 신지도로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향리인 서산으로 귀환한 후 한강을 건너지 않고 학행에 있어 감역과 부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영조 말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서간 김선재(金善材:33世)는 신임사화 때 정의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상의원 첨정, 한산군수를 역임하였다.
김상현(金尙鉉:28世)은 재주가 뛰어나 정주의 학문에 힘을 기울렸다. 풍류에도 취미가 있어 명소를 다니며 글을 짓고 읊었다. 숙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익상(金翊相:30世)은 숙종조에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용천부사에 승진되고 이어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및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승지에 이르렀다.
오헌 김성택(金聖澤:32世)은 숙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예산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육오당 김영택(金令澤:32世)은 벼슬은 대흥군수였고 사복시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우 김경택(金慶澤:32世) 또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송재 김용택(金龍澤:32世)은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영조 때 신원 되었으며 순조 때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동생인 존오재 김광택(金光澤:32世)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중 신임사화로 여주 우만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원되었고, 그의 아우 김경택(金京澤:32世)도 같이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이술지와 같이 무주로 유배되었다가 21세로 요절하였다.
산천재 김덕재(金德材:33世)는 훈신의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 예에 따라 대호군을 배수하고 신임사화 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졸하였다. 이때 동생들인 행정 성재(聖材:33世), 희암 준재(俊材:3世), 후재(厚材:33世), 대제(大材:33世), 양재(養材:33世), 득재(得材:33世), 낙재(樂材:33世), 명재(命材:33世)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졸와 김중백(金重白:31世)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학문이 성취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신임사화 때 숙부 김일관(金一觀:30世)과 함께 구검 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니 석방되었고 저서로 졸와 유고가 있다.
음오당 김 근(金 瑾:28世)은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세상에 알려져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서 후진양성에 힘썼고 산수를 즐겼는데 인왕산 낭떠러진 언덕 사이에서 성삼문의 신주를 찾아내어 왕에게 품계하여 사육신의 원혼을 위안하는 한편 우암에게 신반실당(神返室堂)의 의미를 물어서 홍주 노은동 옛터에 사우를 세워서 향사케 하였다. 벼슬은 통덕랑을 지냈다.
운성 김재정(金在精:27世)은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우암이 화를 입고 귀양을 가니 양호지방의 유생과 함께 대궐 밖에서 풀어 줄 것을 진정하다가 다 같이 멀리 귀양을 갔다. 동몽교관에 제수되었고 유고가 있다.
칠매당 김 오(金?:30世)는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양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묘 배향 할 것을 제일 먼저 상소하였고 우암 송시열의 무고 때 통탄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글을 올리다가 혹독한 고문 끝에 흉변을 당하였다.
유고가 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소암 김계환(金啓煥:29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좌승지와 대사간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 시대에 같은 혈족이면서 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도 있었으니 소론쪽의 거두인 아계 김일경(金一鏡:31世)이다. 일경은 숙종조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중시에도 거듭 장원급제하여 승지로 있으면서 왕세제(뒤의 영조)의 책봉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이진유, 이명의, 박필몽 등과 함께 목호룡을 시켜 노론 일파가 왕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한 후 노론 4대신을 위시하여 김용택을 잡아 죽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영조 즉위 후에 전일의 무고죄로 목호룡과 함께 잡히어 끝까지 왕에게 불복, 공모자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고 처형당했다. 사후 83년째인 을사보호조약이후 순종 2년(1908)에 신원되어 복작되었으며 저서로 아계유고까지 남겼다.
그 외에도 이 때에 벼슬한 이들이 많았으니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한편 사계의 증존자로 김만균(金萬均:30世)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소청하여 이룩하게 하였고 자신은 승정원의 좌부승지에 올랐다. 둔촌 김만증(金萬增:30世)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교관을 배수하고 세자익위사 벼슬과 안동부사 등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만길(金萬吉:30世)은 현종조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숙종조에 강원,전라 양도의 관찰사를 거치는 동안 훌륭한 치적이 나타나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에 이르렀고 김만재(金萬재:30世)는 숙종조에 참봉으로 있다가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사면되어 부평부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만채(金萬埰:30世)는 대사간과 강원도 관찰사 및 개성유수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졸재 김광수(金光洙:31世)는 숙종조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였다. 경종조에 종제인 김팔화(金八華:31世)와 같이 왕자공 사당 건립 통문을 경향 각지에 보내니 제족들이 성원하여 주었다.
만취당 김낙룡(金洛龍:32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벼슬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에 승진하고 동부승지에 이르렀다가 초산부사로 외직으로 나가 서적을 구입해서 제생을 가르치니 북방풍속이 개선되어 문장의 선비가 많았다.
온재 김진옥(金鎭玉:31世)은 이때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강원관찰사를 지냈고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도와준 보답으로 명나라 황제 3위(태조, 신종, 의종)를 위한 대보단을 비원안에 축단하고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조정 중신들이 그의 의견에 따르게 한 공로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신망(金莘望:31世)은 호가 경희당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인재를 길러낸 바 있었고 김요경(金堯鏡:31世)은 숙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경종조에 평안도 관찰사와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쳤다.
김천여(金天與:30世)는 숙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천안군수를 지냈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김천록(金天祿:30世)은 영조조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학문과 덕행으로 동산서원에 봉향되었으며 김천상(金天相:30世)은 영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개풍군수 재임시에는 실전한 문숙공의 묘소에서 지적을 찾아 봉축하였다.
김진용(金晉鎔:25世)은 제주 입도조 김윤조(金胤祖:17世)의 8세손이며 어모장군 김귀천(金貴泉:21世)의 현손으로 어려서부터 마침 제주에 유배되어온 간옹 이익선생에게 수학하여 인조조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령전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귀향하여 학당을 지어 후학을 지도하니 제주도의 유학발달에 기여하였고 명도암(明道庵)에서 수학하였다. 하여 명도암 선생이라 불리어졌고 향현사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의 아들 김계륭(金繼隆:26世)은 현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고 김계창(金繼敞:26世)은 현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전적을, 조카인 김계흥(金繼興:26世)은 숙종조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김계중(金繼重:26世) 또한 현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을 지내 4인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 유학발달에 기여하였고 가문도 빛내었으며 이때 김계무(金繼武:26世), 김계홍(金繼洪:26世)도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 벼슬을 지냈다.
특히 우리 광산김문의 선조중에는 사계(沙溪), 신독재(愼獨齋) 두 분의 대현(大賢)이 부자간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얻었다. 또한 네분(益熙, 萬基, 萬重, 鎭圭)의 대제학(大提學)과 우의정(右議政: 克成) 한분을 배출했다. 특히 임진, 정유의 양대 왜란에는 만수(萬壽), 4형제와 만수의 아들, 그리고 의병장 덕령장군(德齡將軍)이 분전(奮戰)하여 왜적을 섬멸(殲滅)하는 공을세웠고
병자호란에는 수남(秀男), 득남(得男), 익겸(益兼)이 장렬하게 순절(殉節)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중기야말로 학행(學行)과 절의(節義)와 충효(忠孝) 등에 뛰어난 현조(顯祖)가 많이 나와서 광김(光金)의 문중을 빛내줌으로서 도덕(道德)과 예학(禮學)의 종가(宗家)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후기의 광산김씨 (영조∼대원군)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가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책을 쓰므로서 정국은 다소 안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상과 주장이 받아드려지지 못했고 고식적인 세도정치가 판을 침으로서 서정의 쇄신은 고사하고 탐욕과 부패로 삼정(三政: 田政, 軍政, 還穀)이 문란하고 지방관리의 수탈이 심해서 국정은 어려워지고 민심은 흔들렸다. 선각자들의 실학적인 개혁의 주장은 대세를 움직이지 못하여 과학기술은 도외시되고 말았으니 나라가 발전되지 못하였다.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섭정하여 서정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열강들의 개화사상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민비일파의 정권다툼으로 국내형편은 혼란만을 거듭했다. 따라서 선각자들의 개화의 노력, 독립자강(獨立自彊)의 노력도 허사가 되어 잔악한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어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초래하는 원인이 조성된 시대라고 하겠다.
영조시대의 활동한 우리 광김의 인물로는 먼저 계헌 김 계(金 계:30世)가 있는데 영조4년(1728)에 이인좌가 모반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반군들이 안의를 점령하자 이 때 합천의 조성좌가 밤에 군수 이정필을 찾아와 협박 할 때 힘이 장사인 김계는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고 별군을 구성하여 반군 일당을 소탕한 공로로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인좌의 난에 김수견(金壽堅:31世)은 반란이 일어나자 종군하여 적의 괴수를 사로잡은 공으로 판관에 추증되었으며 수운재 김지원(金智元:29世)과 김도원(金道元:29世) 형제 또한 의병참모로서 예안 의병대장인 이수겸을 보좌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은 임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근시재의 5대 손이므로 이 집을 가르켜 임진, 정묘, 병자, 무신의 '4란의 창의 가문' 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때 적암 김동준(金東俊:28世)은 경종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정랑이었고 기주관으로 일할 때 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거상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을 못하고 소모사 백화재 황익재에게 서신으로 적을 섬멸할 방략을 제시하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며 그대로 적용하여 적을 토평하여 원종일등훈에 녹훈되고 유고가 있다.
그 밖에도 이인좌 난에 창의한 광김으로는 덕헌 김천환(金天煥:29世)은 예천에서 졸와 김치장(金致章:32世)과 서호 김 박(金 撲:31世)은 안동에서 김경화(金慶華:32世)는 호남에서 창의했고 그 밖에도 더 있었으니 광산김씨는 언제나 군주를 옹호하는 충절의 길을 걸어왔음을 증명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계 없으나 영조시대에 활동한 현조들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김양택(金陽澤:32世)의 호는 건암이니 영조조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헌납, 보덕을 거쳐 영의정(정1품)에 까지 올랐다. 그가 홍문관 부수찬(종6품)으로 있을 때 당시 좌의정이던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받아 산청현감으로 좌천된 일도 있는 것을 보아 꼿꼿한 광김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영돈영부사(정1품)로 타계하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사구재 김원택(金元澤:32世)은 영조조에 감역을 비롯하여 시평과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판결사, 동돈녕, 한성판윤에 승진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직하 김상복(金相福:33世)도 영조조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검열, 사서, 정랑, 보덕, 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배수되었는데 영상이 된 처음 자리에서 왕실을 바로잡고 의리를 밝힐 것을 아뢰니 왕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파직을 명했고 그래도 쌓인 포부를 다시 진언하니 삭직을 당하여 공주로 유배될 정도로 절의가 굳었다. 순조조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근와 김 희(金 憙:34世)는 영조조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조에 규장각 직제학, 대사성, 경기도관찰사, 이조참의를 지냈고 우의정을 지냈으며 동지사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 갔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이길헌 김기성(金箕性:34世)은 장헌세자의 딸과 결혼하여 광은부위가 되었는데 문장이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고 정조 때 동지정사로 연경으로 떠날 때 〈어제노행시〉를 하사받았다.
퇴어자 김진상(金鎭商:31世)은 숙종조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으로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설서, 수찬, 지평을 지내다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이조정랑, 부제학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과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영조 13년(1737)에는 평장동에 시조공의 유허비를 세울 때 동국필언에 올라 있는 명필이었기에 그 비문을 썼다. 유고가 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김광윤(金光胤:31世)은 영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귀성도부호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묵와 김화택(金和澤:32世)은 영조조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설서, 승지를 거쳐 춘천, 곡산부사등 외직을 나갔으나 양친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하여 상소하니 임금도 감동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였다. 춘천부사로 재직 시에는 실전했던 선조 광성군 김 정(金 鼎:18世)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였다.
김화중(金和中:32世)도 이 무렵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석당 김상정(金相定:33世)도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김하재(金夏材:33世)는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로서 이 시대에 강원도 관찰사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낸 바 있는데 이재학의 무고로 화를 입었으나 융희 1년에 신원되었다.
육인재 김광국(金光國:32世)은 생원시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학식이 해박하고 문장이 좋아 눌은 이광정, 강좌 권만과 더불어 사귀니 영성군 박문수 어사가 공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고 유고가 있다.
김광호(金光虎:32世)는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한성참군, 선전관, 주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 때 조정의론이 분열되어 권간의 농간에 대해 김진상, 홍보석, 송환기 제현과 함께 소장을 올리니 4대신과 같이 무고하였다는 죄로 삭직되었다. 그 후 성균전적을 거쳐 삼례찰방으로 나갔을 때 사창을 털어 구제하니 군민이 거사비를 세웠고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사직하였다.
병자호란에 창의한 신성 임향조 김 봉(金 鳳:26世)의 증손자인 석포 김복수(金復壽:29世)는 어려서부터 탁이한 자질과 총명 영오하여 큰 재목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나주괘서의 변' '사도세자의 참사' 등 시국이 혼란함을 한탄하고 산 언덕에 '석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경서와 사기를 탐독하였으며 수직으로 가선이었다.
김종태(金宗台:30世)는 영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다. 서장관으로 중국도 다녀왔고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삼우재 김 윤(金 鈗:32世)은 영조조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이 높고 성리학을 탐구하여 유고가 있다.
연암 김상익(金相翊:33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통신종사를 거쳐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지도에 유배되어 졸하였는데 정조조에 신원되고 순조 때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봉 김홍구(金鴻九:32世)는 눌은 이광정의 문인이다. 천품이 총명하고 재예를 겸하였으니 스승이 공을 평하되 "침착하고 단정하며 참다운 군자"라 극찬하였다. 선대 유지를 계승하여 임하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였고 도의로 사귀고 학문을 강론해 유고가 있다.
복재 김두추(金斗秋:34世)는 경사에 밝았고 영천군수로 재임시 선정을 펴 치적이 나타났고 부정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관안군에 봉해졌다.
정조조 때 김명헌(金命獻:27世)은 제주에 살면서 학문 익히기를 즐겼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마침 어사 심락수가 베푼 과장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 81세였기에 특별히 급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벼슬길에 부임할 수 없음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명하기를 '제주 대정현의 유생 김명헌은 다음 해 급제자로 숙배케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별세하니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김효건(金孝建:31世)은 정조조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사간원 대사간과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조임금이 공의 단정한 풍모와 굳은 지조를 칭찬하여 상까지 내렸다 하니 그의 임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만림 김범구(金範九:32世)는 대사간 류정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성취하였고 덕행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동암 류장원, 반구재 권성제 제공과 도의로 사귀고 서당을 개설해 후진 육성에 힘썼고, 낭옹 김열택(金說澤:32世)은 별천으로 현릉 참봉과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정조 후기에 특명으로 승자하여 교자를 내렸으나 그래도 부임치 않았다.
취석당 김상구(金象九:32世)는 영조조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정조 17년(1793)에 실시한 도산별시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문제가 생겨 파방되고 말았다. 공의 재주를 아껴 왕이 자석으로 만든 벼류와 옥책띠를 하사하고 빈흥록을 간행할 것을 명 받아 실행 하였으며 유고가 있고 반와 김성응(金聲應:30世)은 정조 식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은 도사였으며 독실한 행실, 깊은 학문, 넓은 지식으로 향당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유고가 있다.
과재 김정묵(金正默:34世)은 경학으로 천망되어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사림의 천거로 사헌부 지평 겸 경연관,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선산 아래에서 두문하고 성리학에 전심해 그 밝은 식견과 문장 및 덕행이 뛰어나 당시 사림의 사표가 되었고, 구봉 김우택(金禹澤:32世)은 예학에 정통해 향천에 올랐다. 4례의 32편과 음사합록과 거가예의 등 각 1권이 가장되어 있고 예론 변설 1권이 세상에 알려져 예학의 대가로 통칭되었으며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기상(金箕象:34世)은 영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주재 김기응(金箕應:34世)은 학문이 성취하여 생원시를 거쳐 수령을 지내다가 황주목사에 이르렀고 점안재 김기헌(金箕憲:34世) 또한 같은 시대에 홍릉 참봉으로 출사하였다가 함평, 밀양, 충주 등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인일정 김성은(金性 :30世)은 정조 10년(1786)에 평장동 왕자공의 유허에 사우를 짓는 책임을 맡았고 정조 21년(1797)에는 문안공 양감의 위에 시조공의 위패를 봉설하고 서원강당 중수기를 썼다. 순조 3년(1803)에는 임진왜란 때 장성남문에 창의한 곳에 비를 세웠고 순조 26년(1826)에는 유림의 발의로 노산사를 창건하는 등 그 외에도 많은 문사일을 하였다. 동국문헌록, 삼강록을 편저하였고 성리변론, 태극해설 등을 저술하였으며 유고가 있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 수(金 燧:32世)는 재질은 경륜을 쌓았고 효우에 돈독하였으며 족조인 김성은과 더불어 장영공 진( ), 전리판서공 광리(光利)의 묘소를 풍덕, 망포 응봉하에서 비로소 찾아 수호하였고 저서로 동유록 및 풍천일기가 있다.
김상순(金相順:33世)은 순조조에 벼슬이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면서 국가에 충성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하 김기서(金箕書:34世)는 정조조에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고 순조조에 감역을 제수하였으되 또 나가지 아니하니 그 때 공론이 공을 경연관으로 뽑아야 한다 하니 부득이 나가 시직, 부수, 위수를 거쳐 청도군수로 선정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조야에 중망을 박았고 김효수(金孝秀:31世)는 정조조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김재삼(金在三:35世)은 학행이 높아 음사로 직장, 현령, 선산부사를 거쳐 형조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붕당의 폐단을 없애려고 탕평책을 썼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파당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과 사도세자 사건 등의 격동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난국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타계하여 지속적으로 이끌고 나가 성공하고 안정기에 들어서자 재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니 이곳이 이른바 실학이다.
우리 광김에서도 실학 쪽에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다. 암당 김도혁(金道赫:34世)은 노암 정필규 문하에서 경서를 독실히 탐구하여 오경중의 하나인 서경의 한편을 주해하였고 선기옥형(오늘날의 천구의)도 만들었다. 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구조(직각을 낀 삼각형의 짧은 변이 구, 긴변이 조)와 천문과 산수를 분명히 알게 하였고 저서로 오행심성도와 암당유고가 있다.
김기승(金箕昇:34世)은 영조조 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안군수를 지냈고 황주진영 병마동지절제사겸(종4품) 대구중군을 지냈고 수원북문을 건축하는데 참가하여 활동한 공로로 정조 임금으로부터 어주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이 무렵에 김기은(金箕殷:34世)은 정조조에 춘장대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사인, 대사성, 승지를 거쳐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또한 기기재 김상연(金尙 :30世)은 효성이 지극하고 숭조정신이 투철하였으며 대학, 중용, 상례비요 등 학문을 연마하여 학행으로 유명하였고 용양위 부호군을 거쳐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제수받았으며 논산에 있는 휴정서원에 배행되었다.
소산 김도손(金道孫:34世)은 시례고가의 법통을 이어받아 학문이 깊었고 필법 또한 정묘 간결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였다.
우리 광김에서 외척의 세도정치 시대에 활동한 이가 잘 나타나지를 않는다.
위암 김상악(金相岳:33世)은 순조 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에 부담을 느끼고 벼슬길에서 영달할 것을 단념하고 관악산에 들어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근세의 역학을 총망라한 저서로 산천역설 12권과 위암시록 3권을 편찬했다. 그 후 정조의 명을 받아 홍릉 참봉을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임명되었다.
세도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광김은 정부의 요직에 있던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개화기의 주역을 담당하지 못했음이 아쉽다. 벼슬길에 있었던 사람을 구태여 찾는다면 철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종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던 김영목(金永穆:37世)이 있고 호조참판을 거쳐 형조와 예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을 받은 김영철(金永哲:37世)등이 있으나 정도를 걷고 덕행을 쌓는데 주력했고 매국적 행동을 한 분이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번포 김재창(金在昌:35世)은 정조조에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순조조에 부수찬, 승지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초천 김상휴(金相休:33世)는 순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지와 이조판서겸 예문관 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많아 기로소에 들어갔다.
김낙수(金樂壽:33世)도 이때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과 이조참판을 지냈는가 하면 김재전(金在田:35世)은 순조조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외직으로 봉산, 안변부사를 거쳤고 내직으로 사간원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에 으르렀다.
순조조에 활약한 광김의 인사를 찾는다면 김재원(金在元:35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승계하여 의주 부윤에 이르렀다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김기순(金箕순:34世)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릉 참봉을 첫 벼슬로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에 임명되자 나가지 않았고 재임중 치적이 현저해 왕이 교서를 내려 우부승지에 특진시켰다.
평암 김상면(金相勉:33世)은 문과 급제하여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가주서, 성균관 전적, 장령을 거쳐 금산 현감으로 나갔다가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 등 여러 요직을 거쳐서 철종조에 형조참의에 까지 승진되었다.
귀산 김성관(金星觀:33世)은 순조조에 생원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명민하며 위엄이 있었으며 강직하여 공의 앞에서 함부로 비리를 행하지 못하였다. 선조의 유훈을 지켜 임천에서 자연을 벗하며 구도 수학하였고, 김재성(金在成:35世)은 순조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 벼슬을 시작으로 각급 관작을 거쳐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김종범(金宗範:30世)은 학문이 높아 음사로 간성, 해주, 연안 등 각 고을의 수령으로 선정하다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김공현(金公鉉:36世)은 순조조 식년시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김득현(金得鉉:36世)은 효력부위와 용양위 부사맹을 거쳐 돈녕부도정을 역임하고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는 등 그 외에도 여러분이 있었다.
이어서 헌종, 철종시대에 활약한 인사를 더 찾는다면 김재청(金在淸:35世)은 헌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대사성과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가 하면 김기주(金基周:35世)는 순조조에 벼슬길에 올라 헌종조에 동부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까지 승진하였으나 그 직위를 탐하는 자들이 있어 춘천부사로 자원하여 내려앉는 겸손을 발휘한 바도 있다.
미서 김재현(金在顯:35世)은 철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을 거쳐 이조판서에 까지 이르렀으며 김수현(金壽鉉:36世)도 이 무렵에 같은 이조판서를 거쳤고, 김기현(金琦鉉:36世)은 호조참판을 지냈고 광석 김태현(金台鉉:36世) 또한 이조참판을 같은 시대에 지냈으니 광김의 내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서계 김재찬(金在燦:35世)은 강고 류심춘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호를 서계라 하였고 사림의 중망으로 좌수가 되었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저서로 태극도설, 서명연주, 퇴소유요, 해동명현록, 서계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여기에서 좌수란 향청의 으뜸 벼슬로 자문하는 직책인데 그 고을의 향사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사가 천거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는데 주로 평민신분에서 맡아 향리를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성들에게 정령을 전달하고 민정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유독 안동과 울산좌수 만은 평민이 아니고 양반계층에서 담당하는 전통이 있었으니 위에 말한 서계 재찬의 조부 만오헌 김성열(金星說:33世)과 선친 애오헌 김도진(金趙振:34世)도 도학과 사류의 추앙을 받아 안동좌수를 역임하였으니 세간에서는 이 집을 3대 좌수집이라 칭송하였다.
석하 김기석(金箕晳:34世)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여 현종조에 선치 수령으로 형조참의에 승진되니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고, 정와 김 증(金 증:31世)은 헌종 증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율봉 찰방과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는데 재임중 청검하여 이름이 높았고 유고가 있다.
외암 김도명(金道明:34世)은 강고 류심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에 깊이 젖었고 예설을 정초하여 향폐를 구하고 여씨 향약을 만들어 시국폐단을 논하였고 후학 장려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외암 문집이 전해진다.
하서 김응규(金應奎:37世)는 헌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인품이 고매하고 의표가 단정하였으며 경사에 밝아 사림의 추증을 받았고 하서 유고가 있다.
정암 김의표(金儀表:34世)는 헌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비롯하여 이조정랑까지 역임하다가 외직으로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사헌부 장령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까지 승진되었고, 김재헌(金在獻:35世)도 이때 벼슬길에 올라 금성군수를 지내었다.
김우현(金佑鉉:36世)은 헌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와 목사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김오현(金五鉉:36世)은 고종조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마였으며, 목사를 거쳐 돈녕도정과 가선에 올랐다.
19세기의 중엽부터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 년간 게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정치기강이 무너졌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은 철종조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조의 참의와 대사간을 거쳤고 고종조에 들어와서 형조참판과 성균관의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좌빈객,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고, 어주까지 하사받았으며 말년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까지 오른 우뚝 솟은 인물이다.
김재성(金在聖:35世)은 천성이 호방하였고 춘추와 병서를 탐독 정통하였으며, 기력이 과인하여 궁술에 능했으며 무과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김증현(金曾鉉:36世)은 생원시에 합격 출사하여 목사를 지내고 승계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김익현(金翼鉉:36世)은 철종조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비롯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정정에 밝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폈고 부응교를 역임하고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김기문(金箕文:34世)은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을 지내고 병인양요 때 양성 영정을 받들어 승희전에 봉안한 공으로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열관,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계운 김낙현(金洛鉉:36世)은 철종조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림의 일천으로 현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경연관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익수(金翼洙:38世)는 풍도, 언행이 일문의 모범이 되었고 철종조에 무과 급제하여 삼군부 낭청을 거쳐 훈련원정, 도총관과 승지를 지내고 가선대부 반열에 올랐다. 고종말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임금을 사모하는 사군대를 쌓고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서울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남파 김갑교(金甲敎:32世)는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승문원 정자를 지냈다. 이 시대에 같이 과거를 본 청오 김봉상(金鳳相:34世)은 문필과 시화에 탁월하여 당시 영남의 거유였던 방산 허훈과 교류가 돈독하여 드디어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과거에는 관운이 없었는지 두 사람 다같이 번번이 실패하였다. 도산과 문순공 시비(퇴계 이황과 그의 문도인 후조당 김부필이 시호가 같았음으로 일어난 문중 싸움)가 있었는데 예리한 필봉으로 이를 막아 예조로부터 문순공의 문하에서 다시 문순공이 나니 그 어찌 광명이 아니겠는가(文純之下又出 文純 不可光榮哉)란 비답을 받아 왔으니 문중의 선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여생은 즐거이 후진을 양성하다가 졸하였으니 청오 유고가 있다.
김명수(金命洙:38世)는 음사로 사복시 주부와 여러 요직을 거쳐 목사를 역임하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김직현(金稷鉉:36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관 현감 등 여러 요직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용우(金容愚:34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황산도 찰방과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확재 김학수(金鶴洙:38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 필선, 상례, 전랑을 거쳐 참의, 동부승지를 지내고 예조참판과 우윤, 병조, 형조참판과 좌윤을 역임하고 특진관에 올랐다.
김영로(金永로:37世)는 동몽교관으로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검열에 발탁되고 교리, 선전관을 지내고 사직소를 올리고 하향하였고 계속 교리, 응교, 순천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당 김석상(金奭相:34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갑오경장이후 국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김덕수(金德洙:38世)는 고종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응교, 예조참의을 역임하고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섬계 김영윤(金永胤:37世)은 경학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고 예학에 밝았다. 도산,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안동 향중에서 추중되었고 저서로 섬계유고가 있다. 서운 김귀수(金龜洙:38世)은 고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해 참봉, 세마, 사직을 지내고 고종조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어, 부수찬, 부응교, 정언, 전랑을 거쳐 동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연심당 김영규(金永圭:37世)는 인품이 고매하여 사림의 추증을 받았고 고종조에 동몽교관으로 후진양성에 힘썼고 연심유고가 있으며, 아우인 연서 김영구(金永龜:37世)는 강고 류심춘의 학맥을 이어 실학에 힘쓰고 학부교관으로 후학 장려에 힘스고 인자한 천품으로 기근이 심한 흉년에 인근 동리의 호세를 자담한 선행으로 동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는 '시혜불망비'가 무주군 안성면 중산촌에 세워져 있다.
낙와 김영익(金永翼:37世)은 재예가 절륜하고 총명하여 경서와 사기에 박통하였으며 공명 정대하고 엄정 간결하여 사림에 추중되었고 저서로 낙와유고가 있고, 익와 김영규(金永奎:37世) 또한 경서와 사기에 해박한 식견으로 저술에 힘써 지역사적지 발간에 심혈을 기울여 지역풍토와 인물사 발간에 공헌한 바가 크고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임하에 은거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고 저서로 익와유고가 전해진다.
좌암 김용현(金龍鉉:36世)은 효우가 극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사림의 추천과 도천, 어사천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도학을 강마하고 일생을 보냈으며 유고가 있다.
김영전(金永典:37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고 자헌에 올라 종묘제조가 되었으며 서포 김영관(金永寬:37世)은 고종때 효릉참봉을 지냈는데 시조공 설단시 단비건립 등 종사에 공헌이 크다.
조선말기의 광산김씨 (고종∼8·15광복까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지 10년만에 물러나고 왕비를 중심으로 민비세력이 집권하면서 대외 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적극적으로 조선에 접근해 와서 마침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삼아 강화도 조약을 고종 13년(1876)에 체결하니 이것이 외국과 처음 체결한 조약이 된다. 이를 계기로 개화정책을 쓰게 되었는데 이어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나라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게 되었으나 모두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시대에 활약한 우리 광산김씨로는 7대제학 중 마지막 대제학을 지낸 하정 김영수(金永壽:37世)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영수는 고종 7년(1870)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초기의 벼슬이 합천군수를 거쳤는데 그 때 선정을 한 고로 지금도 합천읍 영창리에 선정비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 규장각의 요직을 거쳐 병조판서에 재직중 임오군란을 맞아 진압한 공로로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거쳐 정1품인 보국에 까지 승자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건국 후에는 장례원경, 의정부참정을 지냈다.
한편 김보현(金輔鉉:36世)은 헌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지만 대원군에게 추방되었다. 그러나 민씨일파의 척족으로 곧 이조와 형조판서, 통상당상과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지만 임오군란 때 궐내에 뛰어든 난군들에 의해 선혜청 당상을 지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정 김기석(金箕錫:34世)은 현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다가 정경, 승정원 좌우승지, 병조참의, 형조판서, 의정부 어영대장 총융사, 도통사, 해방사, 좌우포장, 내무독판기기 총관을 거쳤고 외직으로는 수안군수, 안동영장, 신도첨사, 경상좌수사, 수원중군, 강화유수를 거쳐 숭록대부에 승진되었으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출장입상의 표본으로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김진수(金鎭秀:37世)는 담략이 뛰어나 궁마와 무술을 익혀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갑신정변 이후에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분사하니 조정에서는 충절을 가상히 여겨 충무위사과 겸 부장에 추증하였다.
김재은(金在殷:36世)은 고종조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김주현(金疇鉉:36世)은 한말에 갑오경장후의 내무대신을 지낸 바 있다.
동학 농민운동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민의 생활이 더 어려워져 갔으나 정부는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그들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혁을 주장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려는 대규모의 농민운동이 고종 31년(1894)에 일어났으니 이를 가르켜 동학 농민운동이라 한다.
동학의 교리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나섰으니 동학은 밀물처럼 농촌사회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교주 최제우를 잡아 처형하니 기세가 꺾이는 듯 하였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계승하여 그의 노력으로 동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세력중 한 줄기인 동학교도가 전봉준을 앞세워 궐기하니 이것이 동학 농민운동이다.
우리 광산김씨의 일부 김재일(金在一:35世)이 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와 같이 연담 이운규에게서 수학하여 종래의 성리학 차원을 넘어서 유학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여 서경과 역경을 중심으로 정진하였다. 저술로는 역학과 도학 전통을 계승하여 정역쾌를, 그리고 이어서 '정역'이라는 대역서를 완성하여 이 나라 정역의 대가가 되었고 동문중 한 분은 동학의 창시자가 된 셈이다. 또한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로 쳐들어갔을 때 전라감사로 있던 김문현(金文鉉:36世)도 우리 광김이었다. 문현은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병방비장을 시켜 병정 50여명을 출동시켰지만 모두 동학군에게 생포되었으므로 인책 파면 당하고 거제로 유배되었다.
김병돈(金秉暾:33世)은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11년째에 동학의 교도가 난을 일으키니 군관이 되어 초토사인 홍주목사 이승우를 따라 관군을 통솔하여 나가서는 싸워 이기고 돌아와서는 다시 계책을 세워 적군을 무찔러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그의 전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등용코자 하였으나 예산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통정대부 군무참의에 추증되었다.
근대국가 운동과 대한제국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내정 개혁을 실시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조정의 내정개혁에 간섭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되자 그 해에 조선은 도원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 한다.
갑오개혁에서는 홍범 14조에서 그 정신이 나타나 있듯이 정부의 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새로운 관리 임용법과 사법제도도 고치고 신분제도와 도량형도 통일하는 등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으나 일본의 간섭 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 광산김씨로 을미의병에 참가한 이는 충남 논산 출신의 김기수(金冀洙:38世)가 연산지구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수차 교전하여 적을 괴롭혔으나 그 해 12월에 가야곡면 풍덕마을 전투에서 진두 지휘하다가 장열한 전사를 당하니 15세의 젊은 나이였고 경북 봉화의 김도수(金道洙:38世)는 그곳 삼계서원에서 대향회를 개최하여 원근 각향에서 일제 토죄의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그 휘하에서 의병장교로 출정하여 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성재 김재풍(金在豊:35世)은 시해 주동세력에 의해 구성된 내각을 살해함으로서 국모 복수를 하고자 모의하였다. 그는 그의 숙부였던 필동장신이라 불린 어영대장인 우정 김기석 휘하의 군관들을 설득하여 혈맹을 지키기로 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미리 내통해 두었던 시위대장 이진호의 변심으로 대궐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공격을 가해 왔기에 쿠데타는 실패하고 김재풍은 잡히어 무기도형의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유배지에서 풀려 나온 김재풍은 친로파 세력에 의해 허덕이는 국권을 보다 못해 이를 회복코자 다시 정변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사는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경쟁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갑신정변의 실패 후 겨레의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민족운동이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하여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자주 독립운동, 국민의 민족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민권운동,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는 자강개혁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던 고종이 1년만에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연호를 광무라 부르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니 비로소 자주국가의 면모는 갖추게 되었다. 이 때가 고종 34년(1897)인데 광무 1년이라 불렀다.
이 무렵에 활동한 김학수(金學洙:38世)는 고종 12년(187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고종 27년(1890) 함창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동부사로 있었는데 안핵사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고 그 후 감찰을 거쳐 갑오개혁 때 김홍집 내각에 의해 외무참의가 되었다.
김영덕(金永悳:37世)은 고종 14년(187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를 거쳐 동래부사 및 감리서 부산항 통상사무를 거쳐 판서에 이르렀는데 경술국치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고, 김영직(金永直:37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가선대부 직각을 지냈고, 서운 김영운(金永運:37世)은 '효제충신'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실천하였고, 1910년 충정공 묘소를 찾는데 큰 공헌이 있었고 유고가 있다.
계월재 김건수(金建洙:38世)는 국치 때 자중하다가 1929년 평장동 단소 원장 수축시 자력으로 공사를 마쳤고 전곡유사로서 위선하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문학과 행의로 향중에 추증을 받았다.
도계 김철수(金哲洙:38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비서랑을 지냈으며 유고가 있고 그 외에 유물도 다수 있는데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김용원(金容元:39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좌부승지 경주부윤을 지냈다.
김용덕(金容悳:39世)은 고종조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비서랑, 규장각 시제 시독을 거쳐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망국의 한
광무 8년(1904)에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니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독점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일제는 거리낌없이 한국의 내정간섭을 시작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이완용 매국정부를 조직하고 1천만원 차관을 강요함으로써 본격적인 식민지 통치작업에 착수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애국지사들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거나 자결하기도 하였다.
을사 5조약이 체결된 후에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은 청사에 길이 남으려니와 장지연의 한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명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최익현이 일으킨 유생들의 의병진에 김기균(金箕均:34世)과 김재관(金在寬:35世), 김용구(金容求:39世)가 참가하였다.
김기균은 한말 대한제국의 육군부위로 있었는데 면암 최익현이 호남지방에 내려와 창의하니 그 막하에서 의병을 모병하여 순창에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때 세 부족으로 최익현은 잡혀 일본의 대마도로 갔고 공은 총상으로 잡혀 옥고를 치루었고 김재관은 최익현의 의병에 처음부터 그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에는 기삼연의 호남의병 창의대와 합동하여 고창전투에 참가하여 5, 6차 전투를 치루었고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장의 직책을 맡아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용구는 영광 사람인데 융희 1년(1907) 기삼연과 함께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통령이 되었다. 그 후 장성, 영광, 고창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흥덕의 안치재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아들 김기봉(金起鳳:40世)을 잃었다. 그 후에 무주싸움에서 총탄에 맞아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각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항전의식을 고취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다.
이 밖에도 호남에서는 김직순(金稷舜:36世)이 고흥의 의병장이 되어 보성, 광양의 의병장 안규홍과 손잡아 수많은 왜병을 섬멸하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김영엽(金泳燁:37世)은 호남창의회맹소를 세우고 의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장성, 순창에서 일어나 공격해 오는 왜병 70여명을 사살하고 백양사에 유진하던 중 내부에 숨어든 반적에 의하여 살해되었고 충청도에서 일어난 의병중에는 민종석 부대가 규모가 컸는데, 김익수(金益洙:38世)는 민종석등 88인과 결의동맹을 맺고 400여명의 의병으로 시작하여 부여, 서천에 이르는 동안 1천명의 의병으로 늘어났고 익산, 군산의 왜병을 무찌르고 돌아오다가 논산에서 체포되었으나 거기서는 탈출하였는데 그 뒤 폭도 대토벌작전에 기어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사망하였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울진의 김용욱(金容旭:39世)이 의병을 창의하여 불영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평해, 영양, 봉화의 의병세력까지 합치니 그 수가 5백이 넘었으며, 축지법을 쓰는 '노랑장군'으로 통하였다. 이듬해에는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 부대와 합세하니 그 수가 더욱 커졌고 무기도 다량 갖추게 되어 청송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안동, 영주, 영양, 울진, 삼척, 강릉까지의 적을 완전 소탕하고 경북 북부와 영동까지의 왜적은 발도 못 붙이게 하여 놓고 태백산맥으로 본진을 옮겨 1921년까지 활동했으니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한 의사였다.
한편 경술국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자헌대부 벼슬에 있던 김영덕(金永悳:37世)과 통사랑 벼슬에 있던 심암 김지수(金志洙:38世)는 학행으로 도천에 올라 처음 벼슬이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 이었으며 중추원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경술국치 후 자택에서 자결을 하여 선비의 지조를 보였다. 광복 후 순국선열의 포장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
김영숙(金永肅:37世)은 경술국치 후 즉각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북로 군정서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 교주 윤세복과 함께 단군의 얼을 심고 이극로와 함께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광복 직전 소련군의 진주로 목단강성 감옥에서 풀려 나와 해방 후에 단군전 봉건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낭산 김익수(金益洙:38世)는 경술국치 직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합방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태백산, 소백산 지대에 잠입하면서 독립자금 거출 활동을 하였다. 이때 국내에서는 의병으로 활동한 광김은 고흥의 김성택(金晟澤:32世)과 김직순(金稷舜:36世)이 왜적과 싸우다가 투옥되고 전사하였고 제주에서는 조설대에서 12동지가 집의계란 조직을 만들어 일제와 싸웠는데 김좌겸(金佐謙:33世)을 비롯하여 김석윤(金錫允:34世), 김석익(金錫翼:34世) 형제와 김병로(金炳潞:35世), 김병구(金炳龜:35世) 종형제 등이 적극성을 띤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읍의 김재규(金在圭:35世)는 경술국치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을 따라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광주의 김영오(金玲午:35世)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김창보의 군막에 들어가 왜적 격멸에 앞장 섰으나 아산전투에서 패전하여 분산되었으나 분통하여 자결하였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나라가 일본에 합병된 후 일제의 삼엄한 무단 통치하에서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부터는 광복단, 조선국권 회복단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지하 운동을 벌렸고, 국외에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대동단결선언서(1917)와 무오 독립선언서(1918)를 발표하였고 일본의 도쿄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1919)를 발표하여 침략자에 대한 민족의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해외 독립 운동자들과 학생들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의암 손병희 등 국내 인사들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것이 1919년의 3·1운동이다.
1919년에 일어난 2·8선언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먼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김마리아(金瑪利亞:36世)는 1906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여자이면서도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 일본에 건너가 히로시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메지로(東京目白)고등여자학원에 유학도중 2·8선언을 주동하였으며, 그 선언문을 국내에 운반하는 책임을 무사히 수행하여 3·1운동의 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직을 맡아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오현주의 배신으로 비밀조직이 탄로 나서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중 병 보석으로 풀려나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대의원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파아크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뉴욕에서는 신학을 수학하고 1932년에 귀국하여서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는 등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쳤다. 이 거룩한 정신은 광산김씨의 피를 이어받은 힘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더 있었다. 김순애(金淳愛:36世) 역시 황해도 장연 사람으로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 후 부산에 있는 초량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몰래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우리 역사를 가르치다가 탄로가 나자 1911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찡(南京)에 있는 중화명덕 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월 김규식과 결혼하여 상하이(上海)로 옮긴 뒤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고 헤이룽장(黑龍江) 국립여자사범학교 학감,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0년에는 백범 김구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배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도 하여 일본정부 대신 및 친일파를 암살할 목적으로 대의용단(大義勇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에는 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34년에는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간부로 활약하다가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그리고 2·8독립선언에 또 한사람의 인물이 더 있었으니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김양수(金良洙:38世)이다. 양수는 해방 후에 이룩된 광산김씨 대종회의 회장직을 여러번 지냈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역임한 분이다.
다음으로 국내에서 3·1운동에 참가한 우리 광김의 투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남 함평의 김기택(金箕澤:34世)과 김재문(金在文:35世)은 문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지방민을 동우너하여 독립만세 집회를 갖고 미리 준비한 대창으로 무장하여 일본 헌병 파견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왜병에 대항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경기 안성에서는 김봉현(金鳳鉉:36世)이 군내 전역에서, 김영주(金永柱:37世)와 김영희(金永凞:37世)는 주로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전북 고창에서는 김영완(金永琓:37世)과 김상수(金相洙:38世), 김용표(金容杓:39世)가 합세하여 고창 장날 만세운동을 지휘하였고 양은 김용준(金容俊:39世)은 보성에서 참가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광복후에는 대종중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김영필(金永弼:37世)은 진안에서 김호현(金浩鉉:36世)은 진동에서 그리고 김영기(金永騏:37世)는 합천(陜川), 김구현(金九鉉:36世)은 의령, 김영창(金永昌:37世)은 안동에서 각기 고장은 다르나 그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이다.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되어 활약한 우리 광김으로는 김익현(金益鉉:36世)과 김영두(金永斗:37世)를 들 수 있는데 두 사람이 공히 경술국치를 당하자 한을 품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김희인(金凞仁:36世)은 3·1만세 운동 때 임시정부에 가담하려고 상하이로 밀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뜻을 못 이룬 이도 있는가 하면, 김 수(金 銖:36世)는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정신을 전달하기 위하여 137명의 유림들만이 서명한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하였고, 김석룡(金碩龍:38世)은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대학을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병인의용단 단장의 요직을 맡고 일제의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으며 순종의 인산때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황포강 입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석방 후 다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해공 신익희, 성재 이시영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환국하여 건국준비 요원으로 활약한 요인이었다.
또한 김현수(金玄洙:38世)는 중국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휘를 받아 왜군 헌병과 밀정들을 저격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환국하여 광복군 국내지대를 조직하여 부사령관을 역임한 독립투사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항일 투쟁을 한 광김의 투사들을 열거한다면 먼저 전북 부안 출신의 김철수(金철洙:38世)와 창수(昌洙) 형제를 들 수 있는데 형인 김철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에도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중국, 인도, 대만에서 온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 반일독립운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투쟁하다가 귀국 후에는 국내에서 3·1운동을 맞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후 강력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적인 방법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화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성재 이동휘 중심의 연해주 한인 사회당과 협력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으니 1921년의 일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집행기구로 개조하여 도산 안창호, 김동삼, 해공 신익희 등 좌우익 애국지사들을 총망라하는 국민대표 회의를 소집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성공을 못 거두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게속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일 정부수립이 안되고 남북 또는 좌우의 분열이 심해지자 실망한 나머지 정치활동을 멀리 하였다. 아우인 김창수는 항일운동을 하던 중 M·L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렀으나 해방 후 3대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된 정치가이다.
한편 우전 김남수(金南洙:38世)는 경술국치 후 한학을 수학하다가 동산 유인식 선생이 주재한 협동학교에서 신문학을 익혔다. 3·1운동 후 신민회에 참여하고 소작조합과 노동조합의 조직에도 참여하면서 경성고무공장의 파업투쟁을 주도하다가 투옥되는 등 일제 타도를 위해서 김준연과도 손잡고 투쟁하였다. 이어서 형평사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양반출신이면서도 천민들의 권익 옹호에 힘을썼다.
같은 지역의 김상한(金相漢: 일명 麟根:34世)은 10대 후반부터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예안의 청년동맹과 신간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나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1931년 7월에 이 조직으로는 진전이 없다고 판단하자 안상윤과 더불어 〈안동콤클럽〉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그 산하조직으로 예안노동직접행동대를 낙동강변에 있는 석빙고와 영낙정을 거점으로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전남 담양 출신의 김제중(金濟中:40世)은 3·1운동을 계기로 상경하여 남부5도(경기, 충청, 강원, 전라, 경상) 대표단 5인중 한사람이 되어 남부 각지를 순회하면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였고 그 후 대동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전남지구를 담당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겪은 독립투사였다.
우당 김용필(金容弼:39世)은 고종 말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한말이었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일제하에는 유지를 이어받아 호적에도 들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3·1운동 후 1924년에 왜인이 동국 18현을 모셔진 사당에 치제하료 하자 엄중히 꾸짖어 치제치 못하게 하니 왜인이 불경죄로 서울에 압송하여 옥고를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3천리 강산에 둘도 없는 선비이며, 18가문 중 제1인자로 백세의 표준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일에(1926)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3·1만세 운동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침체되었던 국내의 민족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때 광김으로서 활동한 투사는 경남 의령출신의 김응현(金應鉉:36世)을 들 수 있다. 3·1운동사의 자료에 의하면 김응현은 3·1만세운동 때는 종형인 김구현(金九鉉)과 의령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복역하였고 다시 6·10만세 운동 때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할 것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1920년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쟁운동에 참가한 이는 아래와 같다.
당시 광주고보 4학년이던 김채중(金采中:40世)은 주동자로 지목되어 퇴학 투옥되었고, 김기수(金麒洙:38世)는 2학년이었는데 참가했으나 퇴학되었고, 김봉수(金鳳洙:38世)는 광주농고 4학년이었는데 농고의 주동자로 참여했다가 퇴학 당하였고, 조카인 김용숙(金容淑:39世)은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나 광주로 내려와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만보산 사건에 교내에서 동맹휴학을 선동하다가 3학년 때 퇴학을 당하였다.
김보석(金寶錫:36世)은 광주 제일고등학교 2학년때 참가했다가 역시 퇴학되고, 김돈수(金燉洙:38世)는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참가하여 투쟁하였다. 이것이 발상지인 광주에서 있었던 사실이고 그 여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때 평북 선천(宣川)에서 김석숭(金碩崇:38世)은 왜경을 구타하여 구속되었고, 동생인 김석호(金碩虎:38世)는 신의주에서 고보사건, 철도 호텔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항일의 용감한 형제가 되었다. 석숭, 석호, 형제가 임시정부의 요인을 지낸 김석룡의 동생이었으니 혁명가의 집이라 우러러 봐야 할 것이다.
8·15 광복
1930년 이후 한국에 있어서 식민지화가 안정되어 가는 것을 기화로 일제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대륙 침략의 야망을 품고 전쟁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 만주침략을 감행하고 우리의 독립군 소탕작전을 벌렸으며,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까지 침략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쟁을 더욱 확대시켜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1941년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민족과 그 문화를 멸살하려하였으며 나아가 한민족을 그들의 전쟁에 앞장서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식민지
정책으로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한민족은 민족 존폐의 위기에서 민족을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학계와 교육계, 종교계와 예술계 등 각 분야에 걸쳐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문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민족은 일제의 통치 기간중 국내외에서 꾸준히 항일 및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으나 우리의 힘만으로 일본을 물리친 것은 아니며 일본이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드디어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8월15일에 드디어 광복을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은 곧 독립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 소 두 나라의 군대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진주하면서 광복의 기쁨은 잠까니었고 다시 남북 분단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제 말기에 우리 광산김씨가 항일 투쟁을 하면서 겪은 고초의 사례를 몇 몇 가지 들어본다면 그 당시 우리나라 안에서 독립투쟁을 한 양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충남 부여출신의 김영기(金永驥:37世)는 도쿄대학 동문화학원 본과를 졸업하고 1932년부터 대구사범학교의 조선어와 한문 교사였는데 정규시간 뿐만 아니라 문예부를 중심으로 '다초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우리 역사를 틈틈이 가르쳐 학생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자각케 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으며 이러한 비밀 독서회 사건이 탄로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그 후 개성에 있는 사립 송도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원로교육자로 대우를 받으면서 대구 시내 여러 중,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포상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영헌(金永憲:37世)은 팔탄과 시초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몽양 여운형 지도하에 독립동지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학생과 그곳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전년인 1944년에는 종로의 광화문 일대에 민족궐기의 전단을 살포하다가 피검되어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광복을 맞아 출옥한 투사이다. 황해도 장연출신의 김필례(金弼禮)는 도쿄(東京)여자학원 고등부를 졸업하고 서울정신여자중학교 교유로 재직하면서 3·1독립운동을 겪었고, 1922년에 그 학교의 교감이 되면서 김활란, 유옥경과 함께 대한여자기독교 청년연합회(Y.W.C.A)를 창립하고 총무가 되어 일제하의 농촌운동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활동에도 힘썼다. 그 후 도미하여 네스칼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대학원을 수료하고 광주 스피아 여중의 교감이 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동교의 교장이 되었고 다시 서울의 정신여중 교장을 거쳐 동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 교육자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전남 강진출신의 김용근(金容根:39世)은 영광군 소재지에 있는 개량서당의 훈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패전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발각되어 복역한 사례들은 모두 교육계에서 있었던 항일 사건들이다.
한편 전북 익산의 김용해(金容海:39世)는 침례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민조의식을 고취하다가 전국 32인 구속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종교계의 항일 사례이고, 충남 청양출신의 김창현(金昌鉉:36世)은 일제의 지원병 강요에 반항을 했고, 전남 화순의 김영남(金永南:37世)은 징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화약고 폭파계획을 세우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징병 거부의 항쟁에 앞장섰다.
그밖에도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헌병대 습격을 기도한 전북 고창의 김영수(金永壽:37世), 조선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된 전남 보성의 김용규(金容圭:39世),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경기 화성의 김선기(金善琪:41世), 창씨개명에 불복하여 계자손십자훈(戒子孫十字訓)을 남긴 김용각(金容珏:39世)등 이렇게 다양하게도 내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일제와 싸운 우리 광김들의 뜨거운 피가 용솟움치는 광산인들의 모습을 보니 정녕 조국의 광복은 이러한 분들이 흘린 피땀과 받은 고초로 이룩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항상 후손들은 자랑스런 광산김씨의 후손임을 잊지말고 새로운 21세기에도 항상 조국을 위해, 그리고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지도자의 위치에서 조국의 횃불이 되어주길 바라는 바이다.
[출처] 光山金氏 略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