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
최윤덕(崔閏德)은
무장가문 출신이었다.아버지도 교려말 장수로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이 컸다.
어려서 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쏴 소에게 꼴 먹이려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잡아왔을 정도다.
아버지를 따라
여러차례 전공을 세우고 1410년 무과에
급제했다.
1419년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로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했다.
파저강 야인 정벌의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된후 <<무관으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감으로서
탁월한 자질을 일찍 알아보고
임금에게 적극 추천한 사람은당시 대언(代言= 지금의 수석 비서관)
김종서(金宗瑞)였다.
최윤덕은
이후 좌의정에 이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임명된다.
영중추원사는
오늘날의 원수에 해당하는 무관최고위직으로
세종이 그를 위해파격적으로 신설한 자리였다.
세종은
그가 죽기 얼마전 원로대신에 대한
최고의 영우로 궤장(机杖= 팔을 기대는 도구와 지팡이)을
하사 하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공평청렴했으며 근면검소하여 여가에는
묵은밭에 농사를 지었다.
한번은
평안도 변방에 부임했을 때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준 일도 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의지하기를 << 長城 >> 같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 최윤덕은
조선초기의 장상으로 우리나라 군사(軍史)에 길이 빛나는 정렬공 최윤덕 장군은 여진족을 토벌하여 북방변경을 개척하고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당시 국방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며,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권세나 세태에 초연한 참다운 무관이었다.
최윤덕의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경남 창원에서 무관인 부친 승추부사 양장공
최운해(崔雲海)와 모친 창원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군은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양수척(楊水尺)의 집에서 자랐으며,
대학자 권근 밑에서 학문을 닦아 1394년 (태조3년)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1396년 부친을 따라
영해 반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전공을 세워 1400년 (정종2년)
훈련원 부사직에 제수되었으며,
1403년(태종3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부친의 상중임에도 기복(起復 : 3년 시묘를
끝내지 못하고 왕의 부름을 받음)의 명을 받을 정도로 변방방어에
있어 왕의 신임을 받았다.
1410년 무과에 급제한 이후
우군동지총제 (右軍同知摠制) · 절제사 (節制使) ·
영길도도순문찰리사 (永吉道都巡問察理使) · 우군총제 (右軍摠制)가 되었고,
1419년 (세종 원년)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삼군도절제사 (三軍都節制使)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출병 15일 만에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후 공조판서 · 평안도절제사 · 판좌군도총제부사 (判左軍都摠制府事)를 지냈고, 병조판서· 판중군도총제부사
(判中軍都摠制府事) · 삼도도순무사 (三道都巡撫使)를
역임하 면서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1433년(세종15년)에는
북벌을 총지휘하여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본인의
사직소(辭職疏)에도 불구하고 무신으로서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435년
좌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使)에 전임되었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앞서
왜국의 침략을 예견하였고 나라가 평안할 때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축성(築城)의 필요성을 왕께 진언하여 압록강 부근의 4군을 개척하였으며,
하삼도(下三道)의 왜구 침략에 대비한 군사 요충지에 성을 쌓는 등
축성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 쌓는 일에 노력하였다.
최윤덕 장상은
조선초기 안정된 기반위에서 우리 문화의 황금기가 개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출처]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
[출처]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
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