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 두 수
하이쿠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일 것입니다. 일본의 시이지요.
가끔 촌철살인하는 귀절을 만나는 놀라움이 있지요.
오늘은 부송(蕪村)이라는 작가의 하이쿠 시집 "하이쿠, 열 일곱 자로 된 시"(최충희 역, 박이정)를 읽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만그만한데 절창(絶唱)이 있더군요.
"겨울 바람에
무얼 먹고 사는가
초가 다섯 채"
그러노라니, 예전에 읽었던 "바쇼의 하이쿠 기행1"(마츠오 바쇼 지음, 김정례 역주, 바다출판사)에서 읽었던 하이쿠가 생각이 났습니다. 기행문인데, 읽기 시작하다가 최초로 만난 작품에서 다음의 시를 만납니다.
"오막살이 초가도
주인이 바뀌는 세상이어라.
히나 인형의 집"
저의 여백적기는 이렇게 적혀있더군요. "충격, 더 읽어갈 수 없다. 나는 이 詩에 붙잡히고 말았네."
아마도 IMF이후에 읽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막살이 초가집도 주인이 바뀌는데 -----
《기호의 제국》
롤랑 바르트, 김주환·한은경 공역, 《기호의 제국》(민음사, 1997)을 읽다. 매우 훌륭한 번역! 일본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기행문. 선에 대한 바르트의 선호(選好)를 알 수 있는 문맥들이 집중되어 있다. 주요한 것들 :
1)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깨달음(悟)이다. 깨달음(禪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지식이나 주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강력한(결코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지진과도 같다. 그것은 말의 텅 빈 상태vide de parole다. 이런 말의 텅 빈 상태에서 나의 글쓰기가 이루어진다."(p.12)
2) p.14.에서 오역 하나 : Ch'an의 번역 술어는 撰이 아니라 禪이다. 禪의 중국어 발음의 로마자 표기가 Ch'an이다.
3) "이러한 자세는 모든 기의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텅 비어있는 몸짓인 셈이다. 불교에서 형태는 비어 있다(色卽是空)는 말이 있다 -----."(p.78)
4) "모든 선은 의미의 태만에 대한 전쟁이다. [-----] 불교는 모든 주장은(또한 모든 부정도)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목적은 의미를 차단하는 데 있다. 바로 기호작용의 비밀인 패러다임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pp.86-87)
5) "모든 선은 ----- 하이쿠는 그 문학적 지류에 불과하다 ----- 언어를 중단하기 위한 거대한 수련과정으로 보인다."(p.88)
이러한 그의 선 이해는 적확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다만 더욱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이쿠는 주체도 신(神)도 없는 형이상학을 통해 진술된 것이며, 불교의 무나 선의 깨달음에 상응한다."(p.91)는 관점이다. 하이쿠 역시 언어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 뒤에 부록한 정화열, 〈일본을 텍스트화하는 즐거움〉 역시 매우 좋은 글인데, 정화열 교수는 "선과 깨달음을 기호학에 연관시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p.172)고 말한다.
다시 읽은 《기호의 제국》
롤랑 바르트의 많은 저서 중에서 "가장 쾌락적으로 썼다"고 하는 저서가 "기호의 제국"입니다. 이는 1966년 일본을 여행한 그가, 일본이 기표가 춤추는 나라임을 알고서 자기 나름의 기호학적 관점으로 "일본"이라는 텍스트를 읽은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禪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두번째 읽었는데, 역시 좋은 책이더군요. 처음보다는 훨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하는 제가 읽은 책에 "밑줄 긋기"를 옮겨봅니다.
(김주환, 한은경 옮김, 민음사, 1996.)
1)"글을 쓴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지식이나 주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강력한(결코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지진과도 같다. 그것은 말의 텅 빈 상태 vide de parole 다. 이런 말의 텅 빈 상태에서 나의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의미가 모두 배제되었을 때 선은 나에게 이런 텅 빈 상태의 특질들을 뽑아내 정원이나 몸짓, 집, 꽃꽃이, 얼굴, 폭력에 대해 글을 쓰게 한다."(12)
2)"모든 중앙은 진리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서양 형이상학주의에 다라 우리 도시의 중심부는 늘 꽉차 있다"(p.40) ---- 데리다의 서양 형이상학주의 비판이 생각나는 구절.
3)"그것은 권력을 사방에 퍼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시 전체의 움직임이 중앙을 텅 빈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p.42) --- 空.
4)"모든 선(禪)은 태만에 대한 전쟁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불교는 모든 주장은(또한 모든 부정도)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p.86)
5)"다시 말해서 불교의 목적은 의미를 차단하는 데 있다. 바로 기호작용의 비밀인 패러다임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p. 87)--- 불교의 기호학적 연구 가능성.
6)(하이쿠에서) "제시되는 것이 애매해서, 우리는 그것을 되씹어 볼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공안(즉 그 스승이 제자에게 이야기해는 주는 일화)을 가지고 씨름하는 제자에게 권장되는 일이다. [----] 모든 선은 ---- 하이쿠는 그 문학적 지류에 불과하다. ---- 언어를 중단하기 위한 거대한 수련과정으로 보인다. [----] 이러한 무언의 상태가 곧 해탈이다. 왜냐하면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2차적인 생각(생각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는 것, 즉 잉여적인 기의의 무한한 보충 ---- 언어 자체가 의미의 담지자 겸 모델이 되는 하나의 순환 구조 ---- 은 일종의 넘어서야 할 장벽이기 대문이다. 무언어는 언어의 불완전한 무한성을 깨뜨리는 2차적 사고의 폐기이다."(pp.88-89).
7)"하이쿠는 주체도 신(神)도 없는 형이상학을 통해 진술된 것이며, 불교의 무(無)나 선의 깨달음에 상응한다."(p.91)
이 책 뒤에는 정화열, "일본을 텍스트화하는 즐거움"이라는, 이 책에 대한 뛰어난 논문이 번역되어 있다.
첫댓글 일본불교를 공부하기 전에 쓴 독후감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