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의 뜰
핵심용어
¶출27:9-19
9 그가 또 뜰을 만들었으니 남으로 뜰의 남쪽에는 세마포 포장이 백 규빗이라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1 그 북쪽에도 백 규빗이라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2 서쪽에 포장은 쉰 규빗이라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3 동으로 동쪽에도 쉰 규빗이라
14 문 이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요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5 문 저쪽도 그와 같으니 뜰 문 이쪽, 저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씩이요 그 기둥이 셋씩, 받침이 셋씩이라
16 뜰 주위의 포장은 세마포요
17 기둥 받침은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 머리 싸개는 은이며 뜰의 모든 기둥에 은 가름대를 꿰었으며
18 뜰의 휘장 문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짰으니 길이는 스무 규빗이요 너비와 높이는 뜰의 포장과 같이 다섯 규빗이며
19 그 기둥은 넷인데 그 받침 넷은 놋이요 그 갈고리는 은이요 그 머리 싸개와 가름대도 은이며
20 성막 말뚝과 뜰 주위의 말뚝은 모두 놋이더라
성막의 뜰 (1) 출27:9-17, 38:9-20, 40:33
재료의 종류
성막 뜰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지적
첫째로 성막과 기구들과 바깥 뜰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주요 재료들이 쓰여졌음을 알 필요가 있다. 첫째 종류의 재료는 금속 곧 광물질이다. 금과 은과 놋은 다 금속이다.
두 번째 종류의 재료는 식물이다. 조각목과 베실은 다 식물의 생명이다.
세 번째 종류의 재료들은 동물의 생명으로부터 추출된 것들이다. 수양의 가죽이나 수염소의 털과 같은 그러한 재료들은 육축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은 바다 동물로부터 나온다. 동물로부터 취해진 재료들은 다 생명과 관계 있다. 식물의 생명은 생성과 소출과 번성을 위해서 있고, 동물의 생명은 구속을 위해서 있다.
성막 안에서 사용된 주요한 금속은 금과 은과 놋이다. 출애굽기의 기록 순서에 따르면 금이 맨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은 은이요 마지막에 놋이 언급된다. 안에서 바깥쪽으로의 순서도 금, 은, 놋이다. 그러나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으로의 순서는 놋, 은, 금의 순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안에서 밖으로이지만, 우리의 관점은 밖으로부터 안쪽으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순서는 금, 은, 놋이요 우리의 관점에서의 순서는 놋, 은, 금이다.
식물의 생명으로부터 취해진 재료들에 관하여는 맨 처음 언급된 것이 조각목이고 다음이 베실이다. 그러나 성막과 기구들에서 조각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금이나 혹은 놋으로 입혀져 있었다. 물론 베실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의로움과 거룩함
성막과 기구와 바깥 마당을 전체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그 전체 상황이 중요한 두 가지를 말해주는데, 그것은 의로움과 거룩함이다.
어떤 성경 구절들에서는 의로움과 거룩함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4장 24절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 안에서 새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의와 진리와 함께 하는 거룩함을 언급하고 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따르면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완전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로움과 거룩함에 관련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중한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의와 거룩이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의와 거룩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관심하지 않은 채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어왔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새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었다는 것과 이 형상이 의로움과 거룩함에 관련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로움의 의미를 보기 위하여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몇 구절의 말씀을 보기로 하자. 고린도후서 3장 8절과 9절에서 바울은 새 언약의 사역은 영의 사역이요 의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사역은 죽음과 정죄의 사역이다. 죽음은 영과 대비되고, 정죄는 의롭다 함과 대비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새 언약의 사역은 칭의(justification)의 사역이라고 말하지 않고 의(righteousness)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새 언약의 사역은 생명을 위한 영의 사역이요 의롭다함을 위한 의의 사역이다. 우리는 이 사역을 의의 사역이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구약의 사역은 첫째로 죽음의 사역이요 다음으로 정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죄가 먼저이고 죽음은 그것에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죽음을 정죄 전에 언급한다. 신약에서는 생명에 이른 의가 있고, 또한 생명이 의에 이르는 것도 있다.
한면으로는 의가 먼저 나오고 생명이 뒤따르며 다른 한면으로는 생명이 의보다 먼저 나오고 의가 뒤따른다. 그러므로 의와 생명에 관해서 살펴볼 때 거기에는 두 방면이 있다. 생명에 이른 의의 방면이 한방면이고 의에 이른 생명의 방면이 또 하나의 방면이다. 같은 원칙으로, 성경에는 죽음에 이르는 정죄가 있고 또한 죽음이 정죄를 낳는 것도 있다.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올 때 그 죄인은 정죄를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정죄는 죽음을 가져온다. 이것이 한방면이고 다른 한방면은 우리가 죽은 상태에 있고 이러한 상태는 정죄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죄에 이르는 죽음이다. 한방면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정죄가 있고, 또 한방면으로는 정죄에 이르는 죽음이 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두 번째 방면의 입장 위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정죄를 가져오는 죽음의 상태와 상황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 죽음 안에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상황이었으며 그러한 상황의 결과는 정죄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모든 방면을 정죄하셨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옛 창조 안에 계속 살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의 상황 아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 옛 창조는 모두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은 우리 안으로 영을 분배해 준다. 그것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생명 주는 그 영은 의를 낳는다.
한 죄인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었다고 가정해 보자. 즉시로 그는 의롭게 된다. 더 이상 그에게는 정죄가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명에 이르는 의이다. 그렇게 회개한 죄인은 하나님의 의를 받고 의롭게 되며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한방면이다. 이제 그는 생명을 갖게 되었고, 그가 이 생명에 의해서 산다면 그 결과는 의가 될 것이다.
30 이것이 또 한방면으로서 의에 이르는 생명의 방면이다. 새 언약의 사역은 우리로 의롭다 함을 받도록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갈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로운 생활을 살도록 우리를 그러한 상태와 상황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새 언약의 사역이 우리로 의로운 생활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 영을 사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영은 생명을 공급하고 의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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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경은 자주 율법의 의에 관해서 말한다. 율법의 의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에서 우리는 율법 즉 십계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묘사한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 십계명은 두 범주로 되어 있다. 처음 네 계명들이 하나의 범주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들이 다른 범주이다.
33 처음 네 계명들은 하나님과 관계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과 우상이나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 것,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과 주께 속하는 표시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네 계명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처음 네 계명들은 하나님의 거룩에 관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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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마지막 여섯 계명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며, 거짓증거하지 말며, 탐심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명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하고, 살인해서는 안 되며, 간음해서도 안 되고, 도적질해서도 안 되며,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하며, 탐내서도 안 된다.
36 이러한 여섯 계명들은 하나님의 소위에 관련되는데 그것은 의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네 계명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계되고 나중 여섯 계명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계된다.
37 그분의 본성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그분의 행하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이것은 왜 새 사람이 의와 거룩함에 관하여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나님편에서는 우리에게 먼저 거룩함이 필요하고, 그리고나서 의로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우리에게 먼저 의가 있고나서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에베소서 4장 24절은 우리 편에서 말한 것으로서, 의와 거룩함을 좇아 새 사람을 이룬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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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왕국 안에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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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왕국은 의라고 말한다. 합당한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왕국 생활이며 이러한 왕국은 의이다. 성경에서 의란 십계명의 성취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성경적 근거는 로마서 8장 4절에 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면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는 율법의 성취요 율법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표현이다.
42 이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할 때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신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우상을 갖지 않게 되고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 속한 표시를 갖게 될 것이며 다른 모든 계명들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로운 생활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의와 율법의 성취가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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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의로운 생활을 사는 것은 왕국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생활은 통치받고 조절받는 생활이다. 당신의 매일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왕국 안에서 사는 생활인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매일의 생활은 왕국 안에서의 생활이 아니며 조정받고 통치받고 지배받는 생활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물질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부주의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옳지 못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풀어져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왕국 안에서의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 우리는 정확하지 못한 것을 간증할 수도 있고 탐욕이 있을지도 모른다.
45 결국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 우리의 생활 안에는 통치받는 것도, 조정받는 것도, 규제받는 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의 백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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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당신은 하나님의 왕국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왕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조정과 규제와 통치 아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왕국은 의롭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표현한다. 시편 89편 14절은 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보좌는 의안에서 세워진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왕국이 올 때 의가 충만할 것이라고 말한다.
48 천국에 관한 책인 마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의를 강조하셨다. 주님은 의를 위하여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핍박까지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5, 10). 주님은 또 우리가 맨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49 주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0). 계시록에 의하면 신부는 의로 장식될 것이다(계 19:8). 그녀의 의가 신부의 세마포 의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비된 신부의 나타남은 세마포 즉 의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베드로 후서 3장 13절은 의가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왕국과 통치가 있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의로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의로운 상태는 생명으로부터 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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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오늘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표현인 의가 없고, 생명으로부터 산출되어 하나님에 의해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정죄 아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정죄하시는데, 그 이유는 온 땅이 사망 아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나 사망이 있기 때문에 정죄가 오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과 교회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52 교회는 생명의 영이 충만하고, 이러한 생명의 영은 전혀 의로운 상태와 상황 안에서 산출된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모든 방법과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에 의해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인 의이다. 그러한 의로운 상태는 다음 시대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어린 양의 혼인을 위하여 예비된 신부는 의를 옷입을 것이다.
53 그녀의 외양 전체가 생명의 표현이 될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사망이나 정죄는 전혀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이 생명이요 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는 하나님의 요구가 이행되었고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와 조정과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러한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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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의로우신 하나님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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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밖에서 성막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맨 먼저 세마포를 보게 된다. 세마포는 의를 상징하므로, 이것은 멀리서 성막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의를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막과 바깥뜰의 외양은 세마포, 즉 의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의 외양도 의이다.
58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비된 신부의 외양도 의가 될 것이며 영원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의의 나타남이 있게 될 것이다. 세마포는 식물의 생명으로부터 산출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으로부터 나오는데 이것은 의가 생명으로부터 산출된다는 것을 상징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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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사람들이 교회를 접촉할 때 교회 생활 안에서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고 하나님의 규율과 조정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세마포 즉 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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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성막은 하얀 세마포의 영역 안에 세워졌는데 그것은 곧 의의 영역 안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은 의가 성막의 영역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의의 영역 안에서 그 존재를 갖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 죄 지은 사람을 교회 생활로부터 쫓아내라고 명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의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어지러움이 있을 수 없다.
63 교회는 반드시 의의 영역이어야 한다. 더욱이 의는 교회의 경계이다. 교회 밖에는 혼돈과 무질서와 더러움이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하고 합당한 질서를 가진다. 교회 밖에서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지 않다.
64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영의 통제와 조정 아래 있다. 새 언약의 사역은 영의 사역이며, 믿는이들 안에 그 영을 사역한다. 이 영은 생명 공급을 가져오고 생명 공급은 의를 가져온다. 그럴 때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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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간증
성막의 뜰은 길이가 백 규빗이다. 백 규빗은 이십 개의 기둥들에 의해 이십 개의 구획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므로 바깥뜰의 치수에 있어서, 백(100)이 이십(20)으로 나뉘어져 오(5)가 되므로 우리는 백, 이십, 오라는 숫자를 갖게 된다. 성경에서 오(5)라는 숫자는 책임의 수이다. 백이라는 수는 이십 배의 책임을 뜻한다. 바깥뜰의 폭은 오십 규빗이었고 열 개의 기둥들로 나뉘어져 다섯 규빗으로 된 열개의 구역이 되었다.
바깥뜰은 직사각형의 길이로 되어 있는데 폭 오십 규빗의 두 배인 것이다. 전체 면적은 백 규빗 정방형의 절반이다. 정방형의 절반은 다른 절반이 따라온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궤의 치수는 모두 반 규빗씩의 연합으로 되어 있음). 새 예루살렘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정사각형일 것인데, 그것은 영원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다가올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바깥뜰의 직사각형은 이것을 입증해 준다. 두 절반이 합하여 전체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의 절반으로서 두 번째의 절반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전체의 간증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가 됨
성막의 바깥뜰은 총 육십 구역이었으며 두 방면의 각 이십 구역과 양끝의 열 구역씩으로 되어 있다. 육십은 백 이십의 절반인 수이고 육(6)은 십 이(12)의 절반인 수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육(6)이라는 숫자가 없을 것이며 대신에 십 이(12)라는 숫자가 있을 것이다.
열두 기초, 열 두 문, 열 두 진주, 열 두 달, 열 두 과실 등이 그것이다. 육(6)이라는 수는 사람의 수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 적그리스도의 수는 육육육(666)이 될 것이다.
육십이라는 숫자의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있어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중요한 구절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새 언약의 사역은 우리를 어떤 상태로 만들어 내기 위하여 생명 주는 영이신, 경륜을 거친 삼일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사역한다. 이러한 상태가 의이다.
바깥뜰의 포장은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세마포로 만들어졌다. 세마포는 기둥에 달려 있었고 기둥은 받침대 위에 서 있었다. 사람은 밖에서 세마포를 보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면 번제단을 볼 수 있게 된다. 제단은 놋으로 만들어졌으며 아주 컸다. 단은 길이와 폭이 다섯 규빗 씩이고 높이가 세 규빗이었다.
제단을 덮고 있는 놋은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은 이백 오십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향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을 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기억하게 된다. 바깥뜰에 있는 기둥들과 받침들도 역시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다(27:10).
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나옴
놋으로 된 기둥들 위에 하얀 세마포가 걸려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심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밖에서 보는 것은 주로 세마포이다. 그러나 우리가 뜰 안으로 들어올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놋이다.
놋으로 된 제단, 놋으로 된 기둥들, 놋받침들, 이 모든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그분의 의를 산출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전체적으로 조감할 때 바깥뜰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 심판받은 것은 다 의롭게 된다. 교회 생활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하며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행위들과 우리의 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의로울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의 부모님께 의롭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올바르기 원한다면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의 ,즉 하얀 세마포는 놋기둥 위에 걸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락한 사람의 수인 육(6)이라는 숫자에 해당한다. 우리가 무엇이든, 우리가 행한 것이 무엇이든, 무엇을 말하든,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육(6)이라는 숫자이며 모두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 우리에게 관계된 모든 것은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가 좋은 기질을 가졌든 나쁜 기질을 가졌든 그 기질들은 심판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자뿐 아니라 겸손한 사람도 심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순종하는 사람도 불순종하는 사람도 모두 심판받아야 한다.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우리 자신을 놓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둔다면 다른 사람들과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면 우리의 부모나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이나 교회 안의 성도들과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교회 생활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교회생활 안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어렵게 할 것이다. 수다스러워도 어려움을 일으키고 조용해도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빠른 사람이든 느린 사람이든, 교만한 사람이든 겸손한 사람이든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하얀 세마포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세마포는 오직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에만 있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얀 세마포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가? 우리 모두를 포함해서 교회는 심판받아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 심판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얀 세마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세마포는 놋받침에 서 있는 놋기둥 위에 걸려져야만 한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의로운가의 여부는 하나님의 심판에 달려 있다. 바깥뜰에서 놋 위에 걸려 있는 하얀 세마포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하자. 놋이 없이는 세마포를 위한 여지가 없게 되고 세마포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이는 우리가 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면 누구도 의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잘못된 존재일 뿐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타락한 육(6)이라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는 반드시 의의 영역이어야 하며 그 경계(境界)로 의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 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의를 산출하는데, 의는 그분의 거처하시는 영역과 경계인, 하나님의 표현이다.
성막의 뜰 (2) 출애굽기 27:9-19, 38:9-20, 40:33.
Ⅰ.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와 영역을 의미함
바깥뜰은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와 영역을 의미한다. 성막은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할 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 그리스도가 거처하는 곳을 예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는 네 단계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이스라엘 백성, 교회, 새 예루살렘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요, 하나님의 건축이다. 이제 신약에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건축이며 그분의 거하시는 처소이다. 천년 왕국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영원히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건축의 이상」이라는 책은 성경 전체가 건축의 책임을 보여준다. 성경의 처음 두 장인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보게 된다. 창세기 2장은 금과 베델리엄(진주의 일종)과 호마노를 언급한다. 성경의 마지막 두 장인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는 세 종류의 재료들로 만들어진 건축을 보게 된다.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인 두 끝 사이에 하나님의 건축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분의 목적 성취를 위한 영원한 건축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은 첫째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그분의 예비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주요 사역은 건축의 사역이다. 우리는 대부분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창조에는 주의를 기울이나 그분의 건축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 예정, 부르심, 구속, 구원은 다 건축을 위한 것이다. 거듭남까지도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고 계시는 것은 다-복음을 전하는 것, 성도를 가르치는 것, 교회를 세우는 것-그분의 건축 사역의 한 부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러한 활동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요 사역의 한 부분인 건축의 사역인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목적은 그분 자신을 위하여 우주적인 거처를 건축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성막에서 우리는 이러한 건축의 예표와 모형을 보게 된다.
비록 성막이 폭이 십 규빗 길이가 삼십 규빗으로 작았지만 각 방면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그것에 관계된 어떤 것들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사람도 그러한 모형을 창작할 수 없었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성막은 산 위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식양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막의 식양은 하늘에 속한 식양이었다.
하나님의 건축인 성막은 영역과 경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영역과 경계가 바깥뜰이었다. 나는 재산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울타리가 쳐진 집을 좋아한다. 그러한 거처는 명확한 영역과 함께 경계를 갖고 있다. 우리는 계시록으로부터, 새 예루살렘에 백 사십 사 규빗의 성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건축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하시는 처소를 표시하기 위한 벽을 갖고자 하신다.
Ⅱ. 성막뜰의 치수
성막뜰의 길이는 백 규빗이었다. 백(100)이라는 숫자는 십(10)의 열 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완성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왕중 왕, 노래 중의 노래와 같은 표현에 비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가장 좋고 가장 높은 완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뜰의 폭은 오십 규빗이다. 오십은 십(10)의 다섯 배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책임의 완성을 상징한다. 십(10)은 완성의 수이고 오(5)는 책임의 숫자이다. 우리의 손에 다섯 손가락이 없다면 책임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각 손에는 네 손가락에 엄지 손가락 하나가 더하여 있다. 사(4)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 존재를 상징하고 일(1)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사람과 하나님이 합하여 책임을 감당하는 능력이 부여된다. 믿는이들인 우리는 우리에게 더하여진 하나님을 가진 인간 존재이다. 우리의 수는 이제 오(5)라는 숫자이다.
바깥뜰의 면적은 길이 백 규빗에 폭 오십 규빗으로 된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었다.
이 직사각형의 면적은 가로 세로 백 규빗 씩의 정사각형의 절반에 해당된다. 이러한 정방형의 절반이라는 것은 전체 단위인 하나의 절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다른 하나의 절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간증을 의미한다.
그 바깥뜰은 간증이었다. 하나의 절반은 나타났고 다른 하나의 절반은 아직 오지 않았다. 새 예루살렘은 전체로서 완성될 것인데 그것은 정방형이고 직사각형이 아닐 것이다. 물론 우리는 완전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아직 간증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다른 절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완성을 위해 하나의 다른 절반을 필요로 하는 결혼한 부부의 한쪽 절반과 같다.
Ⅲ. 포장
뜰의 포장은 그 경계로서 건축의 표현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의(義)인 그리스도를 상징한다(27:9, 11-12, 14-15).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의의 표현과 경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이다.
세마포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이 의는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요 이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의 것인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건축의 표현이시다.
바깥뜰이 있는 성막이 광야에서 세워질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인 세마포를 볼 수 있었다. 이 표현은 희고 빛나고 깨끗하고 정연했다. 섞인 것이나 더러움이 전혀 없었다. 바깥뜰이 있는 성막은 다 의로운 영역을 묘사했고,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 나타내지는 것을 묘사했으며, 지금은 또한 교회를 통하여 살아 나타내지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오늘날 합당한 표현을 가져야 하는데 그 표현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는 그러한 의의 표현이다. 교회의 경계선은 하나님의 건축의 표현이 되기 위한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그러나 자주 그러한 경계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표현이 부족하다. 그들에게는 의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바울은 새 사람을 말한다. 이 새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의 건축이다. 에베소서 4장 24절을 골로새서 3장 10절과 함께 고찰해 볼 때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에까지 새로와질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두 가지 표현을 갖고 왔는데 그것은 의와 거룩이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새로와졌으며 그것은 의와 거룩의 표현을 가진다.
성막 안에서 하나님의 건축의 표현은 밖으로는 의이고 안으로는 거룩이다. 바깥뜰에 쳐진 세마포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한다. 성막 내부에는 금이 있었고 널판들과 가구들은 금으로 덮여 있었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을 상징한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이고, 의는 하나님의 행사에 관계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은 다 의롭다. 하나님의 행사는 다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 하나님의 행사에 있어서의 표현이다. 반면에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건축인 교회는 오늘날 이러한 두 가지 표현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밖으로의 표현은 의이어야 하고 안의 표현은 거룩이어야 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의 안에서 하나님의 표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는 모든 것이 그분의 거룩한 본성의 표현인 금이어야 한다.
구약의 예표는 말로는 묘사할 수 없는 영적인 것들의 상세한 면을 보여준다. 한 폭의 그림이 많은 말보다 나을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의 얼굴을 묘사하기 위하여 일천 마디의 말을 사용할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적합하게 묘사해 낼 수 없다.
이럴 때에는 얼굴이 나온 사진 한 장을 갖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신약의 책은 어떤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해 낼 수 없다. 그러한 상세한 것들을 보기 위하여 모형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모형 안에서 보게 될 수 있다. 특별히 성막과 그 뜰에 있어서 우리는 밖으로는 의로 나타나고 안으로는 거룩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표현을 볼 수 있다.
A. 세마포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인생을 상징한다. 우리가 나타내는 의의 표현은 그리스도의 인생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포장으로 쳐진 세마포는 고운 것이었다. 그것은 전혀 조잡하거나 거칠지 않았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사신 삶이 섬세했음을 볼 수 있다.
세마포는 또한 꼬아서 짠 것이다. 이것은 고통을 통한 다루심을 상징한다. 그 결과 그것은 풀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서 살아 계셨을 때 고난들을 통하여 다루심을 받았다.
B. 크기
이제 우리는 세마포장의 크기에 이르렀다. 양편 세마포장의 길이는 각 백 규빗씩, 그 뒷편의 폭은 오십 규빗, 문 앞 양편의 세마포장의 길이는 십 오 규빗씩이다. 이것을 합하면 총 이백 팔십 규빗이 된다. 이는 성막의 앙장 열 폭의 길이의 총 합계와 같다(26:1-2).
세마포장의 길이와 성막 위의 앙장 열 폭의 길이의 합계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성막의 바깥뜰의 경계를 만드는 것이 성막의 덮개에 필적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외적 표현 또한 교회의 덮개가 되어야 한다. 이 표현과 덮개는 다 그리스도이다.
더욱이 성막을 덮는 앙장과 바깥뜰을 두르는 세마포장은 다 세마포로 만들어졌다. 단지 차이점은 바깥뜰을 두르는 세마포장에는 색이나 수놓은 것이 없는 데 반하여 성막을 덮는 앙장에는 수가 놓여지고 여러 가지 색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백 팔십은 사십을 일곱 번 곱한 수이다. 성경에서 사십은 시련과 시험의 숫자이며, 칠(7)은 이 세대에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극심한 시련과 시험을 격으셨다. 그분은 어디에서나 시련을 거치셨고 모든 사람에게 시험받으셨다. 그분이 받으신 시험과 시련들은 확실히 충분한 일곱 배의 것으로, 사십의 일곱 배였다.
27장 18절에 따르면 세마포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이다. 우리는 오(5)라는 숫자가 책임을 의미함을 지적했었다. 세마포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점을 본다. 즉 백색의 세마포가 뜻하는 의와 오(5)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책임이다.
의는 결코 책임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의로울 수 없다. 오직 당신은 당신의 책임을 다할 때에만 의롭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 어떤 책임이 있다. 남편이나 아내로서, 부모나 자녀로서, 고용주나 고용인으로서, 심지어 이웃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의로울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의로와지려면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감당하고 그 책임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의이신 하나님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책임을 감당할 때에만 의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의 이웃과 친척들에 대해서나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에 무관심하고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의롭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의를 행치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의이신 하나님의 표현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의를 표현해야 한다.
Ⅳ. 기둥과 기둥받침
A. 놋받침
놋받침(38:29-31)은 하나님의 건축에서 분별의 기초이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 심판받으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이 경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아왔다. 이 경계는 바로 분별이다. 더 나아가 이 분별, 이 경계는 기초-놋받침-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으신 그리스도는 이제 이 분별의 기초이시다.
세마포장은 놋기둥 위에 쳐졌고 기둥은 놋받침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깥뜰에서 놋과 세마포, 즉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는 놋과 하나님의 의를 의미하는 세마포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세마포가 놋으로부터 나옴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산출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표현이 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나온다. 우리의 생활의 모든 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행하는 어떤 것도 의로울 수 없다.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심판받으신 분이다. 놋받침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시다. 우리가 그분으로 인하여 살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과 우리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 행하는 모든 것이 심판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말하는 것이 심판받을 것이고 우리의 태도가 심판받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의도, 생각, 성향-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아야 한다.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심판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한 그리스도가 의의 경계를 분별하는 토대이시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그 결과는 의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심판받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항상 머무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열 때마다 나의 말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어떤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어떤 것을 말하겠지만 이러한 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므로 의로울 것이다.
당신은 한담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말에서 나온다. 가령 내가 한 형제에 대해서 한담할 유혹을 받는다 하자. 만일 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면 나는 한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런 한담 듣기를 즐기는 사람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이 심판은 놋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놋받침으로 암시된다.
결혼한 형제들은 그들의 아내와 대화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하다. 때때로 그들의 말은 너무나 자유로와,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될 것들을 말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다면 그분의 생명 안에 있는 심판하는 요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우리를 두는 요소를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심판하신 그리스도이며 그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심판을 거친 생명이다.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구원받은 이로 어떤 일을 행하지 않게 지켜주는 내적 느낌과 같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이 느낌은 하나의 금지이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다. 주님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금지의 단계에서 심판의 단계로 전진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금지와 심판의 차이점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의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으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의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심판받은 생명도 가지고 있다. 이 심판받은 생명은 의로운 생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건축의 경계와 분별의 기초인 놋받침을 체험하는 것이다.
B. 기둥
11절은, 『그 북편에도 백 규빗이라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라고 말한다. 「은이며」라는 구(句)가 갈고리와 가름대 둘 다를 언급하는 것처럼 「놋이요」라는 구도 받침과 기둥을 다 수식한다. 그러므로 받침과 기둥은 다 놋이다. 애매모호한 번역을 취해 온 어떤 성경교사들은 기둥이 다른 재료인 은이나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은이나 조각목은 그 그림에 맞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영적 의미에도 맞지 않는다.
놋기둥은 하나님의 건축의 분별을 위해 서서 지탱하는 힘이신,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분별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또한 서서 지탱하는 분별의 힘이시다. 그러므로 받침과 기둥은 다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는 영광받으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심판받으신 그리스도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심판받으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분을 다른이들에게, 특히 세상의 이방인들에게 나타내려면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심판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모든 것에서 심판받는다면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의도는 단순히 좋은 행동을 하도록 훈계나 권면의 가르침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중대한 것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낸다면 그분의 생명이 심판받은 생명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분 안에는 심판의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살수록 우리의 일상 생활은 더욱 더 심판받을 것이다. 이 심판은 그분의 표현인 하나님의 의를 산출하는 기초와 지탱하는 힘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C. 육십-기둥과 받침의 수
성막의 뜰에는 총 육십 개의 받침과 육십 개의 기둥이 있다. 양편에 각각 스무 개씩, 뒷편에 열 개, 앞편에 열 개이다(앞편에 있는 것들은 세 개씩 한 조로, 네 개씩 한 조로 배열되어 있음). 여기에서 육십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의에 따라 하나님께 심판받은 육신의 모양을 입은 그리스도를 뜻한다(롬 8:3, 요 3:14). 여기서 육(6)이라는 수는 암시적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사람의 모양 안에서, 사람의 육신의 모양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았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에게 온전히 심판받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은 타락한 육신의 모양을 갖고 계셨으며, 이러한 육신 안에서 심판받으셨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심판받은 생명의 요소이다.
이러한 심판받은 생명 안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은 사람의 육신의 요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의 육체는 심판받아야 하며,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받았다. 그리스도를 살 때 우리는 육신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한다.
육십이라는 수는 육(6)을 포함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육십 개의 기둥과 육십 개의 받침을 더해 본다면 백 이십이라는 수가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육십이 백 이십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100)과 이십의 수에는 육(6)이라는 숫자가 없다. 어떻게 육(6)이라는 수가 포함될 수 있는가? 이것은 받침 위에 기둥이 서 있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중점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받은 생명이 우리를 받침들로 만들고 또한 서서 지탱하는 기둥들로 만들리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둥없는 받침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육(6)이라는 수 안에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받침 없는 기둥들이라면 또한 여전히 육(6)이라는 수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둥과 받침 둘 다라면 우리는 더 이상 육(6)의 수가 아니다. 육십(60)이라는 수는 백 이십이라는 수에 포함되어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 때 그분의 심판받은 생명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로 이끌 것이다. 날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그분의 표현인 하나님의 의를 산출하는 받침과 기둥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훈계를 목적으로 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성경 안의 계시이다. 우리의 구원은 심판받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D. 두 기둥 사이의 면적은 제단의 면적과 같음
두 기둥 사이의 면적은 다섯 규빗 곱하기 다섯 규빗이었다. 이것은 제단의 면적과 같다(27:1). 제단의 면적은 장이 다섯 규빗 광이 다섯 규빗이었다. 마찬가지로 두 기둥 사이의 면적은 광이 다섯 규빗 고가 다섯 규빗이었다. 이것은 기둥들 사이의 면적이 제단의 면적에 일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의의 요구에 일치됨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방형」 구속 때문에 하나님의 「정방형」 의를 소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에 일치한다.
E. 기둥머리, 갈고리, 가름대
기둥머리, 갈고리, 가름대는 모두 다 은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나옴을 의미한다. 받침과 기둥은 놋이었으나 기둥머리, 기둥의 꼭대기는 은으로 입혔고 갈고리와 가름대도 은으로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원이 우리의 면류관이요 또한 우리의 붙드는 힘(갈고리)이며 우리의 연결하는 힘이다.
기둥들인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에 의해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단순히 교리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심판받은 생명을 소유할 때에만 우리가 함께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이 생명은 또한 구속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나온 구속을 소유하고 있다. 그 때 이 구속은 우리를 연결하는 힘이 되어 서로 서로를 연결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영광이 되며 우리의 면류관이 되고 우리의 기둥머리가 된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심판받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구속받고, 구속받을 때 연결되고 영광의 면류관을 갖게 된다. 기둥머리는 영광을 상징하고, 갈고리는 붙드는 힘을 상징하며, 가름대는 연결하는 힘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일들과 경륜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면 세상을 향한 교회의 표현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출27장에 있는 모형이 필요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장막 내부 방면을 누리려면 바깥뜰에 있는 세목들을 가져야 한다. 바깥뜰을 거치지 않고서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
먼저 그리스도를 누리고 우리의 의이신 그분을 체험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누리고 거룩함이신 그분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하나님이 먼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삼으시고 그 다음에 우리의 거룩함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 거룩함은 우리의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의가 먼저 오고 그 후에 거룩함이 나온다. 우리가 성막의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의 의의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바깥뜰에서 우리가 지니고 표현하는 것은 세마포이다. 그러나 성막의 널판으로서 우리가 지니고 표현하는 것은 금이다. 우리는 다 금을 포현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세마포를 지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의 내적 표현을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의의 외적 표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 표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나 내적 표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히브리서 12장에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한 까닭이다. 그러한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거룩함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께 연결되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밖으로 의가 필요하고 안으로 거룩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는 밖으로 의의 표현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보고 누리고 흡수하고 그분과 교통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안으로 거룩함의 표현이 필요하다.
성막의 뜰 (3) 출애굽기 27:14-16, 19
문의 외양
첫째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문의 외양에 관한 한 가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구약의 예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그 내용뿐만 아니라 외양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출애굽기의 예표는 두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내용의 면과 외양의 면이다. 예를 들면 번제단은 어떤 외양을 갖고 있다. 더욱이 놋그물, 고리들, 막대기들은 제단의 내용물들이다. 바깥뜰에 관련된 앞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바깥뜰의 내용물과 외양을 보았다.
성막뜰에 있는 문은 일반 건물들의 입구와 같이 특별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건물의 출입구나 문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외양을 가지고 있다. 성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멀리서 성막에 접근할 때 그는 바깥뜰에 있는 문을 볼 것이다.
이 출입문에는 하나님의 건축의 외양을 대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성막과 뜰에 대해 받는 첫 인상은 문과 문 양편에 드리워져 있는 세마포장이었다.
뜰 전면의 외양을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면에는 길이 오십 규빗에 열 개의 기둥이 있었다. 문 양쪽에는 장이 십 오 규빗씩의 세마포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출애굽기 27장 14절과 15절은, 『문 이편을 위하여 포장이 십 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문 저편을 위하여도 포장이 십 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절은 문과 문 양쪽 세마포장에 대해서 기술한다.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성막 앞뜰을 살펴볼 때 삼(3)과 사(4)라는 숫자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문 양편에 각각 세 개씩 기둥들과 받침대가 있었다.
더욱이 양편 각각의 장이 십 오 규빗의 세마포장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삼(3) 곱하기 오(5)로 구성되는 십 오(15)라는 수는 삼일 하나님의 요구에 합하는 그리스도에 의해 산출된 책임을 상징한다. 양편에 각각 세 기둥들과 세 받침대들이 있다는 사실은 기초가 되는 것과 세워지는 것이 다 삼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문의 양편은 간증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둘이라는 숫자가 간증의 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문 자체는 장이 이십 규빗이었다. 거기에는 열고 들어가기 위한 네 개의 출입 장소가 있었고 네 개의 기둥과 받침대가 있었다. 여기서 이십(20)이라는 수는 사(4) 곱하기 오(5)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피조물인 사람을 위하여 책임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 개의 기둥과 네 개의 받침대로 된 네 개의 출입 장소는 문이 이 땅의 네 끝에서부터 사람을 향하여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27:2, 4 참조). 청색은 하늘에 속한 것을 상징하고, 자색은 왕권을, 홍색은 구속의 일을, 가늘게 꼰 세마포는 고르고 균형잡힌 것과 사람의 강한 생명을, 수를 놓는 것은 성령의 조성하는 역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3)과 사(4)라는 수를 강조하고 있다. 각 방면에 셋의 세 조-세 기둥과 세 받침대와 세 공간-가 있다. 문에는 기둥이 넷, 받침이 넷, 출입 장소가 넷이 있다.
그림을 해석함
나는 이제 이 그림을 당신에게 묻겠다. 출입구가 있는 성막 전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상 그것을 해석하는 데 고도의 숙련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영적인 알파벳과 같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넷은 피조물을 상징하고 셋은 부활 안의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삼(3)이라는 수와 함께 두 방면은 간증을 상징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피조물을 상징하는 사(4)라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각 방면에서 삼(3)이라는 수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중앙에서 볼 수 있는 사(4)라는 수는 피조물인 사람을 상징한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이 사람에 의해 간증되거나 사람이 간증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깥뜰의 전면의 모양은 사람이 간증으로서 삼일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제 우리가 간증으로서 간증하는 삼일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됨을 보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 안에 계시고 우리가 간증으로서 표현하는 삼일 하나님은 더 이상 삼(3)이라는 수 자체가 아니라 사(4)가 있는 삼, 곧 삼이 사와 연합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 안에서 간증으로서의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할 바 없이 여기서의 주요한 숫자는 삼이고 사(4)는 종속되는 수이다. 사람과 함께 하는 하나님,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간증으로 표현하고 있는 분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그림들이 성막 문의 전면에 묘사되는가를 보기 위하여 더 전진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하여 요한복음 16장 8절-11절은 도움이 된다. 실제의 영을 말하는 데 있어서 이 구절들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려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라고 말한다.
물론 요한복음 16장은 14장과 15장의 연속이며 또한 17장으로 이어진다. 이 네 장은 함께 나아간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장들에 대하여 합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 구절들이 간증으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장들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된 삼일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의 이 부분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씀하신다. 이 셋은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이들은 삼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온전케 되었다(요 17:23). 그러므로 이 장들에서 우리는 사람과 연합된 삼일 하나님과 간증으로서의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복음의 기본 원칙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하여 더 깊은 체험을 갖고 있다면 복음을 그렇게 얕은 방법으로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듣는이로 하여금 회개하고 간증이신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도록, 사람과 연합된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회개하여 주 예수를 믿으려 합니까? 당신은 구주이신 그분을 이제 영접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회개하여 주 예수 안에서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려면 당신은 반드시 간증이신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바로 이를 위함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목적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막 뜰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기본 원칙이다.
요한복음 15장부터 17장에 따르면 주 예수님을 믿는 조건과 상황들이 있어야만 그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했을 때 이러한 조건이나 상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것이 결핍되었으므로 우리는 되돌아가서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기에 배웠어야 할 그러한 공과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메시지에서 나는 실질적으로 복음의 기본 원칙들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복음의 이해가 너무 심오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것은 전혀 심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 깊은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 세대의 복음 전파가 얕기 때문이다. 그러한 복음 전파는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새 신자는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몇 년 동안의 초등학교 교육에서의 변화는 어린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어떤 것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내가 고학년이 되어도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저학년에서 알게 된다. 오늘날의 많은 복음 전파는 너무 얕고, 복음에 대한 매우 표면적인 이해를 줄 뿐이다. 새로 회심한 사람들은 단지 복음의 기초만을 알 뿐이다. 만약 당신이 복음에 관하여 어떤 것을 좀 더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너무 깊어서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 전파는 단지 사람들에게 영적인 기초만을 전해준다. 그러나 성경 안에 나타난 복음전파는 영적 내용 전체를 포함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 생활해 온 많은 사람들이 모든 내용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깊이 있는 것들의 의미를 모른다.
기본적인 복음은 성막 뜰의 문에 의하여 상징된 것들을 포함한다. 그것들을 복음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라. 무엇 때문에 죄인들이 회개해야 하며 주 예수를 믿어야 하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목적을 위해서 그분은 그 일들을 행하셔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을 때 그러한 말을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그러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겠다. 이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의 유일한 기업은 건축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그분의 건축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목적
오늘 하나님의 건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건축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과 구속은 그분의 건축인 교회 안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특별한 강조점이 아니라 성경이 강조하는 강조점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것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려고 도우려 하셨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어느 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리스도를 아는 목적은 우리가 교회 안으로 건축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일으키고 건축하기 위해서 몇천 명이 구원받은 것을 본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었고, 아담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고, 이제는 몸 안에서 합당한 지체로 건축되기 위하여 성숙한 아들이 되도록 영을 좇아 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과로 로마서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지방 교회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 목표이요 또한 하나님의 복음의 목표이다. 바울에 의하면 로마서 전체가 하나님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니님의 건축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렀고 또한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왔다.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과 연합된 삼일 하나님을 간증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오늘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이러한 관념은 깊은 것이 아니라 처음 시작에 배워야 하는 영적 기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 왔다.
하나님의 구원의 알파벳
오십여 년 전에 나는 헬라어 알파벳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을 잘 배우지 못했다. 예를 들면 헬라어 문자 감마(γ)를 배우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영어 알파벳 와이(y)와 비슷했다. 또한 영어 알파벳 대문자(Y)는 헬라어 대문자 윕실론(Υ)과 좀 비슷했다.
오늘날 많은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알파벳을, 내가 오래 전에 헬라어 알파벳의 한 부분을 배운 것같이 배워 오고 있다. 한면으로 그들은 헬라어 문자를 좀 아는 사람들 같다.
그러나 다른 한면으로 그들은 헬라어와 영어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 같다. 영어 소문자 와이(y)를 헬라어 소문자 감마(γ)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그들은 그들 문화의 어떤 방면을 하나님의 구원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헬라어 대문자 에타(Π)를 영어 대문자 에이취(H)와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영어 소문자 피이(p)를 헬라어 소문자 로(ρ)와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문화를 하나님의 구원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알파벳을 철저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의롭다 함, 거듭남, 죄사함에 관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 문화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그들 문화의 어떤 것을 혼합하고 인간 문화와 하나님의 구원을 혼동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어떤 방면을 말할 때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매우 자신 있게 확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어떤 것을 그들의 천연적인 관념과 혼동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침투된 문화적 요소를 갖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헬라어 소문자 뉘(ν)를 영어 소문자 브이(v)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완전한 알파벳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헬라어와 영어의 예를 사용했다.
성막 뜰의 전면에서 보는 것은 사람과 연합된 삼일 하나님을 간증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회개하여 믿고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 건축이 하나님의 건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막 자체와 바깥 뜰을 포함한 성막의 모든 영역은 그분의 택하시고 구속받은 백성과 삼일 하나님의 조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간증인 것이다.
하나님은 간증되어진 분이시요, 우리는 그분을 간증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그것은 간증이요 우리 편에서 그것은 간증을 짊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간증이신 삼일 하나님을 갖는 것은 성막 뜰의 문과 출입문에 의해 예표된다.
어떤 건물의 입구나 문은 그 건물의 목적을 표현해 준다. 예를 들면 은행 입구는 그 건물이 은행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육상 경기장의 입구는 여러 종류의 다른 모양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표시한다. 학교의 입구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원칙과 같이 성막 뜰의 출입구 역시 독특한 모양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과 연합된 삼일 하나님을 간증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알파벳의 이 부분이 우리들에게 인상지워졌다면 이 메시지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놋-기본적인 재료
문의 모양을 살펴보면서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모양을 만드는 데 사용된 기본적인 재료가 무엇인지를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쓰인 기본적인 재료는 놋이다. 성막 뜰을 위한 기둥들과 받침대들은 놋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요한복음 16장 8절은, 실제의 영이 오시면 그분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온전히 심판받아야만 한다. 그는 먼저 심판의 문인 놋문을 통과해야 한다. 기둥에 세마포장이 쳐져 있지만 세마포는 뜰의 기본적인 재료가 아니다. 기본적인 재료는 놋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가지고 있든, 무엇을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든 그러한 것들이 다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악한 일들뿐 아니라 선한 일들까지도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한 행동도, 악한 행동도 다 심판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천연적인 미움이나 사랑, 또는 자랑과 겸손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놋문을 통과하는 것은 공항에서 검문대를 통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가졌든, 무엇을 하든 우리 위에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해야 하고 심판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회개했을 때 이것에 관해서 어떤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심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으며 나의 존재와 행동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과 능력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 그 결과 나는 나의 천연적인 생명이나 능력의 좋은 방면을 소위 교회 생활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심판을 통과하지 않은 많은 세상적인 것들을 교회 생활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은 놋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기본 재료로 하여 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막 바깥 뜰의 문은 놋문이고 심판의 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심판을 철저히 체험하지 않았다면 이제 우리는 이러한 공과를 배우고 놋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가짐
바깥 뜰의 표현은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세마포이다. 심판이 있은 후에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특성이나 밖의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며, 이것이 복음의 기본적 진리이다. 복음 전파를 할 때 우리는 이렇게 선포해야 한다. 『죄인들이여! 이 세상 사람들이여! 당신들에게는 심판이 필요하다. 당신에게 관계된 모든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다 심판받았을 때 당신들은 하나님의 의를 지닐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연결될 수 있는가? 출애굽기 27장의 예표에 따르면 그것은 은 갈고리와 가름대에 의해 연결된다. 이것은 구속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나와서, 지탱하며 연결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대적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붙잡을 수 있는가?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오게 된다.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심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구속하신다.
주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누리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필요로 한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심판받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심판하고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다. 사람은 회개할 때마다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게 된다. 이것이 놋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심판하신 모든 것을 구속하시기 때문에 이 구속은 심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의에 연결시킬 것이다. 더욱이 이 구속은 또한 우리 서로서로를 연결시킨다. 성막뜰에 있는 기둥들은 각각 분리되어 세워졌다. 그러나 연결하는 가름대에 의하여 그들은 하나의 단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심판하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구속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구속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에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연결시키고 또한 우리 서로서로를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바깥뜰에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심판과 구속과 의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간증의 표현을 위한 것이다.
놋이 있는 장면
우리의 체험에서 볼 때, 성막 바깥뜰 안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놋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주위를 보면 육십 개의 놋기둥과 육십 개의 놋받침대가 있다. 더욱이 27장 19절은,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고 하신다.
말뚝들은 바깥 마당에서 세마포장을 떠받치기 위한 것이었고 성막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절은 두 조의 말뚝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 조는 성막을 위한 것이고 한 조는 바깥뜰을 위한 것이다. 그 말뚝들까지도 놋으로 만들어졌다. 번제단과 물두멍도 또한 놋으로 입혀졌다. 그러므로 바깥뜰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놋이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놋으로 충만한 장면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깥뜰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건축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져야 한다. 우리의 영리함과 천연적인 능력과 우리의 결백을 말하는 것도 심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둥들과 받침대들에 더하여 바깥마당 안에 있는 기구와 말뚝들도 다 놋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었다. 말뚝은 서서 지탱하는 힘을 상징한다. 이 힘은 놋, 즉 심판의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건축에서 견고한 기초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서서 지탱하는 강건함을 갖고자 한다면 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강하고 견고하기 위해서 우리는 심판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수록 더욱더 견고하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을 견고하게 함
어떤 성도들이 교회 생활 안에 들어와서 짧은 기간이 지난 후 견고함이 없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를 아는가? 그들이 견고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놋말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견고성을 산출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한 성도가 교회 생활 안에 들어오면 들어온 그날로부터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교회 생활 안에서 강하고 견고하게 될 것이다. 심판은 확실히 교회 생활을 견고하게 한다.
어떤 형제나 자매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한다. 특히 지방 교회 안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비평적인 사람들에 의해 자주 정죄를 받는다. 남을 비난하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비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심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심판을 거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의 결점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나의 속에는 나를 심판하는 느낌이 있다. 이러한 속 느낌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오히려 잘못된 것은 나 자신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했으리라 믿는다. 심판받는다는 것은 판단하고 비난하는 우리의 입을 닫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면 어떤 사람에 대하여 비난하는 말이나 판단하는 말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성막 바깥뜰의 광경을 살펴보라. 그것은 놋,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충만한 장면이다. 놋받침, 놋기둥, 놋말뚝, 놋기구 등 놋이 보이는 모든 곳이 심판을 상징한다. 심판이 없이는 경계도, 기초도, 서서 지탱하는 힘도, 견고성도 없게 된다.
심판과 구속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온다. 구속은 기둥머리에 덮힌 은에 의하여 상징된다. 뜰에 있는 모든 기둥머리들은 은으로 입혀졌다. 은으로 입혀진 이러한 기둥머리들은 영광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면류관이요 자랑이요 영광이 된다. 이것이 놋기둥 꼭대기의 은기둥머리가 의미하는 바이다.
더욱이 거기에는 은갈고리와 은가름대가 있었고 성막의 널판을 세우기 위한 은받침대들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건축의 모든 부분을 서게 하기 위한 견고한 기초가 됨을 상징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리고나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면류관이 되고 지탱하는 힘이 되고 우리의 연결하는 힘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건축의 한 부분으로서 서 있게 하는 우리의 기초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산출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은을 산출하는 놋이다.
놋, 은, 금
놋 다음에 은이 온다. 우리는 금을 가지고 있다. 놋에 의해서 우리는 성막뜰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서 은을 통하여 성소에 들어오며 성소 안, 특별히 지성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금이다. 이것은 신성한 본성이 우리의 분깃이며 누림이며 체험이 됨을 상징한다.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금인데, 그것은 곧 금널판, 금으로 된 기구들, 금으로 된 진설병상, 금등대, 금분향단이다.
지성소 안에는 금으로 된 그룹과 기구들이 있는 금법궤가 있다. 성막 내부의 모든 것은 금이다. 그러므로 놋은 은을 산출하며, 은은 우리에게 금을 가져온다. 이것은 모든 것이 구속받기 위해서 심판을 받아야 한을 의미한다. 구속받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이끌린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목적지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분깃이요 누림이며 체험이다. 일단 우리가 금으로 인도되면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지성소의 깊이를 만지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과 하나 될 필요가 있다.
성막의 뜰 (4) 출애굽기 27:14-16, 19
신성한 본성을 누림
성막과 성막의 뜰에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두 방면이 있다. 밖으로 하나님의 표현은 의이고 이것은 세마포에 의해 상징된다.
안으로 하나님의 표현은 거룩함인데 이것은 금에 의해 상징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의 영역과 분위기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심판의 문을 통과함으로써만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거기에서 우리에게 관계된 모든 것은 심판을 받는다. 그 때에야 우리는 그분의 표현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자격을 갖게 된다.
더욱이 우리는 또한 금, 즉 하나님의 본성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모든 것이신 신성한 본성을 누릴 근거와 방법을 갖게 된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성소와 지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금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한 본성을 누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며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표현은 그분의 행하심과 관련되며 하나님의 내적인 표현은 그분 자신의 어떠함 즉 그분의 존재와 관련된다. 지성소 안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금의 속성이다.
심판을 체험함
나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중요한 것을 깨닫기 원한다.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거쳐야 한다. 심판의 문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 우리가 그분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분의 심판을 통해서이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는 실제의 영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온 세상에 대한 그분의 심판이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소극적인 방법이 아닌, 사람을 구원시키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시행될 것임을 의미한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지는 것이다. 사람은 회개할 때마다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는 것이다. 오직 심판의 체험만이 우리의 영적 생활과 교회 생활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생활
합당한 인간 생활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생명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갖기 위해서 남편이나 아내는 다 항상 심판받는 생명을 살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자신을 항상 의롭다고 주장한다면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게 된다.
별거하고 이혼하는 기본적인 원인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데 있다. 남편이 자신을 의롭다고 느낄 때마다-즉 모든 방면과 모든 것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마다-그는 자동적으로 그의 아내를 정죄할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더 이상 함께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남편은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아내를 정죄하며, 아내는 그녀 자신을 옳게 여기고 남편을 정죄한다. 이러한 것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남편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 안에 아무 선이 없음을 자각하고 그의 선한 뜻마저도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생각해 보라.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머무르게 된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나의 아내가 옳든 그르든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심판아래 머무르는 것이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다 이런 태도를 갖는다면 그들은 서로를 향하여 좋은 감정을 갖게 될 것이고 즐거운 결혼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도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면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신을 의롭게 여길수록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다. 결국 나는 교회 생활을 떠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머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심판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함
우리가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서 표현될 것이다. 이것이 참된 교회 생활이요 참된 결혼 생활이다. 만약 형제나 자매가 기꺼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기를 원한다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그들 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아내도 그녀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면 방문객은 그들의 집에서 하나님의 의의 어떤 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 방문객은 두 자아의 강한 표현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놋과 은과 세마포
성막뜰에 있는 문의 재료는 놋과 은과 세마포이다. 문은 그러한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받침대와 기둥들을 만드는 데 사용된 놋은 기본적인 재료이다. 받침대는 기초를 위한 것이고 기둥은 서 있기 위함이다. 우리는 기둥꼭대기의 기둥머리가 은으로 덮여졌다는 것을 보았다. 그 기둥머리들은 관이었으며, 그것은 구속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 씌웠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을 산출하고 구속은 하나님의 심판에 영광으로 관 씌운다.
더욱이 세마포를 기둥에 치기 위해 사용된 갈고리들은 은이었다. 가름대 또한 은이다. 그러한 갈고리와 가름대에 의해서 기둥들은 서 있을 수 있었고 기둥들은 세마포를 잡아주는 하나의 실체로서 서 있을 수 있었다.
세마포가 하나님의 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어주기 위해 면류관-그리스도의 구속-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건축의 전면이다.
이 건축의 밖에 있는 죄인들이 기쁜 소식과 회개에 대해 들을 때 그들은 실제의 영을 통하여 내적으로 책망을 받는다. 실제의 영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역사하고 그들로 그들의 자아를 정죄하게 한다. 실제의 영은 그들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인도하며, 그들이 실패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어 깨닫게 한다.
타락한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의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롬 3:20). 오히려 모든 옛 창조는 하나님께 심판받고 정죄받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거룩한 심판과 정죄에 복종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구속은 우리에게 관 씌우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연결시킨다. 다른 말로 하면, 구속은 우리가 표현하는 하나님 의를 산출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심판받고 나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는다.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 위에 쳐져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증과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감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심판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그러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간증이 되기 위한 교회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 존재로서 남아 있지만, 심판받고 구속받고 하나님의 의에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표현인 그리스도를 짊어지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간증이신 삼일 하나님을 감당하고 있다.
복음을 알고 체험함
우리가 높은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 자신이 복음의 내용을 알고 체험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성막뜰의 문에 의해 예표된 복음 진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숫자(3)과 사(4)의 의미와 놋, 은, 세마포의 재료와 요소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뜰의 문이 나타내는 삼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연결되어진 분이다. 이러한 연결은 심판과 구속과 칭의의 요소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