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가 구성한 조선 후기 문화사
조 성 산
1. 머리말
2. 소론, 강화학파, 정인보
3. 조선후기문화사서술의기준과내용
4. 전통의 재구성과 근대와의 접점
5. 맺음말
1. 머리말
1930년대조선학운동과더불어조선에대한연구가부흥을이루면서
다양한조선에대한담론들이등장하였다. 이는이후현대에까지영향을
끼쳐국학연구의기틀을마련하였음에재론의여지가없을것이다. 당시
이루어진국학연구에대해서는많은연구가그동안있어왔다. 본연구에
서다루게될 에대해서도적지않은연구가있었다 (1893~1950) . 鄭寅普 1)1)
이논문은2007년도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
수행된 연구임. (KRF-2007-361-AL001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 그간이루어진정인보관련주요연구들은다음과같다. 이상호, 「한국근대양명학
의철학적특징-박은식과정인보를중심으로-」 陽明學 20, 2008; 김영봉, 「위당
정인보의묘도문자에나타난시대의식」 東方學志 141, 2008;한정길, 「정인보의
양명학관에대한연구」 東方學志 141, 2008;이만열, 「위당정인보의한국고대
사인식」 東方學志 141, 2008;최재목, 「鄭寅普‘陽明學’ 형성의地形圖」 東方學
472 역사와 담론 제56집
이연구들을통하여정인보의다양한면모들이밝혀졌다.하지만정인보의
한국문화사연구의사상적기원, 즉그가國學을연구한학문적배경에대
해서는연구가상대적으로소략한편이다. 정인보는전통학문의입장에서
한국문화사연구를했다는측면에서, 당대한국문화사연구의다양한층위
들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사상적기원으로서章炳麟(1869~1936)의國學思想과2)2)동아시아陽
明學의영향관계등이논의되었다.3)3)특히, 일본양명학과國學연구는그
에게분명중요한영향을끼쳤을것이라고생각된다. 이연구성과들이章
炳麟,梁啓超(1873~1929)등에게영향을주고, 다시그들의사유가조선에
영향을끼쳤다는점에서근대 동아시아사상계에있어서일본양명학과국
학의영향력을간과할수없다. 더욱이그의사상적기반이양명학인이상,
일본 양명학은 그에게 중요한 시사점들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4)4)하지만
志 143, 2008a;최재목, 「金台俊의‘鄭寅普論’을통해본解放前爲堂鄭寅普에대
한評價」 陽明學 20, 2008b; 신현승, 「정인보의눈에비친중국명말청초기의지
식인」 동서철학연구 48, 2008; 최재목, 「정인보陽明學演論에나타난王龍溪이
해」 陽明學 16, 2006;최재목, 「정인보의양명학이해- 양명학연론 에나타난황
종희및명유학안이해를중심으로-」 양명학 17, 2006;안장리, 「인문학적사유를
바탕으로한장르변형글쓰기-鄭寅普의 唐陵君遺事徵 -」 東方學志 130, 2005;
이상호, 「정인보實心論의양명좌파적특징」 양명학 15, 2005;이황직, 「위당정
인보의유교개혁주의사상」 韓國思想史學 20, 2003; 심경호, 「강화학과담원정
인보」 어문연구 107, 2000; 이상호, 「정인보의얼사관」 동양철학 12, 2000;최
영성, 「일제시기반식민사학의전개-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백남운을중심
으로」 한국사상과문화 9, 2000;정진석, 「정인보의언론을통한민족정신고취」
어문연구 107, 2000;남궁효, 「정인보의조선학이론에관한연구」 실학사상연
구 8, 1996;이완재, 「정인보의한국사인식」 韓國思想史學 4․5합집, 1993;박성
수, 「爲堂鄭寅普의檀君文化論」 東洋學 18, 1988; 민영규, 「爲堂鄭寅普先生의
行狀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 實學原始」 東方學志 13, 1972.
2) 민영규, 앞의 논문(1972), 6쪽.
3) 최재목, 앞의 논문(2008a).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73
그이전에정인보에게끼친소론계학문의영향관계에 대해서는세밀한연
구가부족한실정이다. 정인보에게는다양한영역에서江華學派를비롯한
少論國學연구의학문적성과들이전제되어있었다. 이점은그간크게주
목받지 못한 듯하다.
소론계 국학연구, 일본 양명학·국학, 장병린·양계초등에영향받으면
서정인보의한국문화사연구의기본틀이마련되었다고볼수있다. 본
글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조선후기 소론계 국학연구의 학문적 성과들과
정인보의문화사 연구를대비시켜 봄으로써정인보가 어떠한과정에서 한
국문화사연구를 진행시켜나갈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단서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본글에서는연구범위를구체화하여정인보가구성한‘조선후기문화
사’를중심으로논의를서술하고자한다. 조선후기문화사는정인보에게있
어서각별한것이었다.정인보는漢學을기본으로성장하였고그렇게볼때
어떠한의미에서는 그자신이 조선후기 문화사 속에 참여하는입장이었다.
물론그는여타한학자와는다른면모가있었고,이때문에그는근대에
한학자로서나름의성공적인역할을할수있었다.그렇다면한학자이면서
도한학자를벗어난면모들은어디에기원한것인가. 특히‘東萊鄭氏’라는
소론계명문가문의후예였던그가‘전통’에서벗어나근대를사유할수있
었던것은어떠한이유였는가. 그가구성한‘조선후기문화사’는이에대한
부분적인대답을줄수있으리라고생각한다. 그의사상적원천이었던조
선후기문화사는그에게많은영감을주었다. 본글은정인보가구성한조
선후기 문화사를 통하여전통학문과 근대학문사이에서 어떠한 접점을 찾
고자했던그의사유를조명해보고자한다. 이는전통과근대가어떻게서
로관계할수있었는가에대한대답이될수있을것이며, 초기이루어진
한국문화사연구의 한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도 유효한 시각을 줄 수 있을
것이다.5)5)
4)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재목, 앞의 논문(2008a), 91~92쪽 참조.
474 역사와 담론 제56집
정인보는東萊鄭氏로서이가문은鄭光弼(1462~1538)이래로서울의명
문대가로이어져왔다.鄭太和(1602~1673)등많은재상들을배출하면서동
래정씨는조선후기대표적인명문가문으로서인식되었다. 이동래정씨가
문은나름의가학적전통을가지고있었다. 그것은國故硏究와文獻學이었
다.6)6)서울에서 오랫동안 세거하였고 많은 고위 재상들을 배출함으로써 동
래정씨는국가의文獻·典章에대하여많은부분을알고있었고, 이는이
가문의특장으로인식되었다.이러한학문적성과를보여주는대표적인경
우가鄭東愈(1744~1808)의 晝永編 , 鄭允容(1792~1865)의 字類註解 ,
鄭元容(1783~1873)의 袖香編 과같은저작들이다.7)7)이저작들은동래정
씨의 학문적 특징들을 잘 보여주었다.8)8)
5) 중세의학문과근대의학문은다른목적과관심속에서진행되었다. 하지만그사
이에는일정하게접점을갖는것도있었다. 정인보의경우는이러한접점의가능성
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6)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6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五「書晝永編後」
6쪽, “始吾家世居漢城之好賢坊先翼憲長子曰參議君自是傳子孫曾爲先生考九世之
宗席累公之後雖以先生蔭仕未貴而見聞包括朝野家多賜書秘牒稀籍典章制度州郡利
害中外之故交隣接遠 咸有貳騰 自少得博綜”
7) 정원용의저작들에대해서는허경진, 정원용관련저술해제집 ,보고사, 2009참조.
8) <鄭寅普의 家系圖>( 韓國系行譜 地(寶庫社, 1992, 1047~1055쪽 참조)
鄭太和―鄭載岱―鄭勗先―鄭錫命―鄭元淳―鄭東愈
鄭載嵩
鄭載岳 鄭任先 鄭錫命 鄭啓淳 鄭東晩 鄭元容 鄭基年 鄭黙朝 鄭寅普(系) 鄭信朝 鄭誾朝 鄭寅普(出) 鄭有淳 鄭東逸 鄭允容 鄭基雨 鄭萬朝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75
이러한 학적 배경에서 정인보는동래정씨의 문헌학적 가학을 전수 받을
수있었다.9)9)특히정동유에게서보이는소론 학문의 정체성은정인보의학
문형성과 조선후기 문화사 구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예로정인보는東亞日報에연재한「朝鮮古書解題」에정동유의 晝永編
을한항목으로설정하여실었다.정동유에게는소론계일반에서나타나듯
이國力, 國俗, 國土에대해서적극적으로사유하는인식들이보였다.10)10)이
것은정인보가國學이념을발전시키는데커다란역할을하였으리라고생
각한다. 여기에그의 가문이 가졌던조선의典章·制度·文獻에대한연구
와 사유들은 그가 구성한 국학의 문헌학적 기초를 마련했음은 물론이다.
소론에게서보였던國學연구는정인보가생각한민족주의적국학과는
차이를갖는것이었다. 조선후기소론계국학연구가결과적으로근대민
족주의로나아갈수있는단서들을상당부분가지고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그대로일치하는것은아니었다. 소론계국학연구는원래는그들이
독특하게해석한‘上古的中華主義’ 문제와긴밀한관련성을갖는것이었
다.11)11)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국민국가 관념과 친연성을 가졌던
것은, 소론계국학연구와경세학이古代史와富國强兵의의미들을강조하
고사회적관계설정에있어서도君臣之義를강조하는것과긴밀하게결합
하였기 때문이다.12)12)그것은근대국민국가가강조하였던富國强兵과國民
9) 당대에鄭萬朝(1858~1936)또한이러한동래정씨가학과긴밀한관련성을갖는다.
그는李建昌(1852~1898)과사돈지간이었으며, 다카하시도오루(高橋亨, 1878~
1967)와깊은교우관계를가졌고그의조선유학사연구에도많은영향을준것으
로 알려져 있다.
10) 이에대해서는조성산, 「玄同鄭東愈(1744~1808)와 晝永編 에관한연구」 韓國
人物史硏究 3, 2005, 258~263쪽 참조.
11) 이에대해서는조성산, 「조선후기소론계古代史연구와中華主義의변용」 歷史
學報 202, 2009a, 59~66쪽 참조.
12) 조성산, 같은 논문, 56~59쪽, 76~80쪽 참조.
476 역사와 담론 제56집
道德으로서의忠관념과가깝다는측면에서, ‘국가적’인의미들을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君臣之義는기본적으로군주와의관계를중심으로사회적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근대 국민국가에서의 국가와 국민의 관계와는 의미상
분명한차이를가지고있다.그러나양자사이에는유사성또한적지않다.
특정한대상에대한충성을전제로한다는점에서그러하다. 군주와국가
라는 대상이 명확하게 존재하고 이에 대한 충성 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은
중세군신지의와근대국민국가사이에놓인유사점을보여준다. 즉, 군주
를 비인격적이고 추상화된 국가와 민족으로 변환시키고 신하를 국민으로
변형할때, 전통적인君臣之義관념은동아시아의특수성을견지한국민국
가의忠도덕으로변환될수있었다. 이는일본의경우에서볼수있었듯
이중세적天皇制를가지고근대국민국가의틀을만들어내었던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인보는강화학의학문적세례도함께받았다. 동래정씨가江華
學과관계하는것은정동유를통해서였다.정동유는李匡呂(1720~1783)와
의 만남을 통해서 강화학파의 직접적인영향을 받았다.13)13)이광려와의사제
관계를통해정동유는이광려의친척이었던李匡明의양자李忠翊(1744~
1816),李匡師(1705~1777)의아들李令翊(1740~?),申大羽(1735~1809)의아
들申綽(1760~1828)과도매우가깝게지내게되었다. 특히그가운데이충
익의 후손과 정동유의 동래정씨 가문은 계속 세의를 이어갔다. 李建昇
(1858~1924)이鄭東浚의손자鄭基晩의여식을,李建昌(1852~1898)의아들
李範夏가鄭允容(1792~1865)의손자鄭萬朝(1858~1936)의여식과각각혼인
13)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6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五「書晝永編後」,
6쪽, “幼事李月巖交信齋椒園因及申石泉以遙承於霞谷”이광려에대해서는정양완,
「月巖李匡呂論」 강화학파의문학과사상(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오수경,
「李匡呂의 實學思想과 現實主義 文學世界」 嶠南漢文學 5, 1993 참조.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77
을하였다.14)14)그리고李建芳(1861~1939)은19세기초반재상으로이름높던
鄭元容의증손정인보의스승이되었다. 이건승, 이건창, 이건방은모두이
충익의후손들이었다. 이충익의후손들은 강화학파의핵심을이루었다.
강화학파의 학맥은 계속해서 이 가문들 사이의 혼맥과 사승 관계들을
통해서전래되었다. 정제두후손들은鄭述仁이후鄭文升(1788~1875), 鄭
箕錫, 鄭元夏(1855~1925), 鄭祥燮이강화학을계승해나갔다. 정상섭은洪
承憲(1854~1914)의여식과결혼하였는데홍승헌은소론계학자로서이름
높던洪良浩(1724~1802)의6대후손이며다시洪敬謨(1774~1851)의증손
으로소론가문의명문이었다. 이들가운데이건방의제자정인보가강화
학을학문적으로전수받으면서일제시대朝鮮學운동을전개하고다산학,
강화학, 북학을 후대에 알리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강화학의학문과사상경향은기존 연구들을통해많은 부분 밝혀졌다.15)
15)
14) 조성산, 앞의 논문(2005), 249쪽
15) 정양원, 江華學派의文學과思想(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정양원, 江華
學派의文學과思想(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심경호, 江華學派의文學과
思想(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정양원․심경호, 江華學派의文學과思想(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서경숙, 「初期江華學派의陽明學에關한硏究」, 성균
관대박사학위논문, 2000; 강석중, 「李匡師 文論 硏究」, 서울대석사학위논문,
1991;이완우, 「員嶠李匡師의書藝」 美術史學硏究 190·191, 1991; 이희목, 「영
재이건창의주체적자각과시세계」 한국한문학연구 8, 1985;박준호, 「椒園李
忠翊의生涯와詩」 漢文學硏究 9, 1994; 박준호, 「岱淵李勉伯의生涯와文學」
漢文學硏究 11, 1996; 박광용, 「강화학파의인물과사상」 계간황해문화 10,
1996; 김기승, 「이건창의생애에나타난척사와개화의갈등」 인문과학논총 6,
1998; 심경호, 「19세기말20세기초강화학파의지적고뇌와문학」 語文論集
41, 2000; 박준호, 「江華學派의文學世界에대한一考察」 大東漢文學 14, 2001;
이희목, 「寧齋李建昌의陽明學과文學」 大東漢文學 14, 2001; 구만옥, 「方便子
柳僖(1773~1837)의天文曆法論」 韓國史硏究 113, 2001;김학목, 「李忠翊의椒
園談老 硏究」 인천학연구 2-2호, 2003; 조성산, 앞의 논문(2005).
478 역사와 담론 제56집
성리설과의리명분론에치우치지않고, 民生에필요한여러실용적인학문
분야를연구한이들의학문이적극조명되었다. 이것은중국의양명학전
통과도구분되는것이었다. 중국에서의양명학이심성론에치우쳐자연학
에 소홀한경향을 보였던반면에 강화학파는 심성론에있어서는 양명학을
받아들였지만자연학, 국어학등민생에관련된여러구체적인문제에도
심도깊은연구를병행하였다. 이것은강화학파학풍의중요한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된데에는강화학이 소론으로부터배태되었던 데에서 그원인을
찾을수있을것이다. 皇極經世書 에기초한邵雍象數學과程明道·王陽
明心學을연구하였던花潭學派계열일부가소론화되었고, 이들의학문
전통이강화학파로 전승되면서 위와같은 독특한 학풍을형성한 것이다.16)
16) 정제두가양명학을수용하면서도구체적인사물의세계인천문학과수학을
깊이 연구했고,17)17)위에서볼수있듯이강화학파의인물들이聲韻學, 自然
學, 歷史學등에깊은연구를진행시켰던것에는이러한학문적배경이있
었다. 그러한강화학파의면모들은이들을양명학적틀속에서만이해할
수없음을보여준다. 그들은양명학을통해서내면주체의확립을고민하
16) 邵雍象數學과程明道心學․陽明學은주로北人들에의해서발전되었다.仁祖反正
이후북인이정파로서생명력을잃게되면서그들의학풍은경기지역서인과남인
을중심으로퍼져나갔다. 북인계남인들은북인과남인의사유를융합하면서독특
한학적체계를만들어갔고서인의경우에도漢黨-少論으로이어지는학적계보를
만들어갔다.이점에대해서는정호훈, 朝鮮後期政治思想硏究-17세기北人系南
人을중심으로- , 혜안, 2004;조성산, 조선후기낙론계학풍의형성과전개 , 지
식산업사, 2007, 29~136쪽 참조.
17) 그는 이미 25세 전에 禮樂·數學·百家·諸子·天文·地理 등의 책을 두루 섭렵
하였고한다( 霞谷集 卷11遺事, “其在應擧業之時二十五歲前已通經書及禮樂數
學百家諸子天文地理醫門等書無不該括”). 그가남긴「河洛易象」( 霞谷集 卷20),
「璇元經學通攷」( 霞谷集 卷21) 등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79
고자했고, 또한편에서는주자학적格物致知의문제의식을견지하면서외
재세계에도관심의끈을놓지않았다. 즉陽明學과朱子學의사이에서그
절충점을 찾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8)18)이는 강화학파의 중요한
사상적 특징이라고 할 만하다.19)19)이에대해서정인보는陽明學을말하는
자와改曆을주장하는자가은연히상통하는바가있었다고하였다.20)20)
요컨대, 소론과강화학파는정인보사유형성에중요한배경이었다. 소
론계학풍속에서보이는君臣之義의강조와富國强兵에대한입장은근대
국민국가·민족주의관념과긴밀한관련성을가졌다. 여기에동래정씨가
문의고유한가학인문헌학이첨부되면서조선의문헌·전장·제도에대한
관심이증대되었다. 이것은그의朝鮮學연구로나타날수있었다. 이러한
바탕위에양명학을통한현실인식은중요한방향을설정하였다. 어떠한
전범을부정하고眞心을강조하는양명학적사유는근대라는‘전통과의단
절’ 시대에적절한해결책을제시하였다. 전통이라는전범과단절하면서도
그가한편으로‘전통적’일수있었던것에는양명학이중요한역할을담당
하였다. 양명학의전통으로주자학의전통을단절한다는논의가가능했던
것이다. 소론계학풍속에내재해있었던다양한가능성들이정인보를통
하여 새롭게 발견되고 구현되면서 그의 문화사 연구가 형성될 수 있었다.
18) 다음과같은정제두의언급도이러한점을잘보여준다.그는陽明學의종지가程
朱學과같은것이라고보았다. 霞谷集 卷1 「答尹明齋書」 壬午, “所謂王氏之說
亦自有本源 雖云不同於程朱 其旨則固是一程朱”
19)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민영규, 앞의 논문(1972), 19~24쪽 참조.
20)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6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九「石泉遺稿記」,
369쪽, “是以言陽明者 與主改曆者 中實隱然而相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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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의지식을근본적으로구성했던것은전통학문인漢學이었다.21)
21) 이러한이유로그가인식한조선후기문화사는중요한의미를갖는다. 왜
냐하면 그가 전통학문을가지면서도 근대적지식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
던것에는그가인식한전통학문이그렇게‘전통적’인것만은아니었다는
것을말해주기때문이다. 조선후기문화사서술의기준과구체적양상을
살펴봄으로써전통과 근대를연결하여 사유하고자 한 그의문화사 서술의
특징들이 밝혀질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1) 黨派 의식의 극복: 蕩平 관념
앞서언급했듯이정인보는강화학파의후예이며,그러한점에서엄격하
게볼때소론당색의계승자였다. 이점은타의에의해서건, 자의에의해서
건그에게일정부분영향을끼칠수밖에없었다.소론계尹煌(1571~1639)
의후손인尹器重은그에게보내는편지에서李建芳이작성한소론강경파
柳鳳輝(1659~1727)의墓文을언급하면서老論의주장을깰수있었음을
기쁜일로생각하였다. 그리고는정인보가이제목으로글을지었다면어
떠했을까언급하였다.22)22)정인보또한羅良佐(1638~1710)의후손羅源學의
21) 다음에서그가전통학문에심취했던모습들을짐작해볼수있다.정인보지음,정
양완옮김, 담원문록상 (태학사, 2006), 「언니(從兄寅昉)께」, 108쪽, “自數月來
讀庸學論語若有所悟乃取泰西諸哲學家學說參量比挈之益有以信吾道之可以建天
地而不悖 質鬼神而無疑”
22) 정인보지음, 정양원옮김, 담원문록상 (태학사, 2006), 「尹器重선생이담원선
생에게 한 서한」, 123~124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81
傳을썼고23)23)글여러곳에서소론적정체성을보였다. 이러한모습은소론
이라는범주에서 결코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던 정인보의 입장을 보여준다.
朝鮮古書解題에서소론계열인물들의저작들이많은부분을차지하는
것도이러한배경과일정한관련이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그의朝鮮古
書解題속에나타난인물들의당색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도표를보면
모두18종의서적가운데소론측인물이7인이며노론은3인, 남인이2인
을차지했다. 이면백, 정동유, 이의봉, 유희, 정제두, 이영익, 이광사는소
론 강화학파로서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가졌던 인물들이었다.
번호 서명 저자 생몰연대 본관 호 당색 비고
1 憨書李勉伯1767~1830 전주 岱淵소론
2 晝永編鄭東愈1744~1808 동래 玄同소론
3 古今釋林李義鳳1733~1801 전주 懶隱소론
4 八道圖 鄭尙驥 1678~1752 하동 農圃子 소북 李瀷문인
5 三圓館散藁金弘任1801~1849
6 文通 柳僖 1773~1837 진주 西坡, 方便子 소론
7 霞谷全書鄭齊斗1649~1736 영일 霞谷소론
8 大東輿地圖金正浩?~? 청도 高山子중인
9 湛軒書洪大容1731~1783 남양 湛軒노론
10 椒園遺藁李令翊?~? 전주 新齋소론
11 擇里志李重煥1690~1752 여주 淸潭남인
12 訓民正音韻解申景濬1712~1781 고령 旅庵소북
13 陰雨備未詳
14 圓嶠集李匡師1705~1777 전주 圓嶠소론
15 沆瀣叢書洪吉周1786~1841 풍산 沆瀣노론
16 疎齋集李頤命1658~1722 전주 疎齋노론
17 武藝圖譜通志 正祖,李德懋 1741~1793 전주 炯菴 서얼
18 藿憂錄李瀷1681~1763 여주 星湖남인
23)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一「羅源學傳」
20쪽.
482 역사와 담론 제56집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그는 당색을 떠난 조선후기 문화사를기획하려
고노력하였다. 이러한배경에는소론학맥에서오랫동안계승되어온蕩
관념이자리하고있었다 탕평론은소론계로부터활발하게제기되었고 . , 平
따라서어느당파보다소론은탕평에대한의식이강했다. 정동유는歐陽
脩(1007~1072)의「朋黨論」,蘇軾(1037~1101)의「續朋黨論」을이어자신의
의견을정리한「續續朋黨論」을통하여당쟁을배격하고탕평론을주장한
바 있었다.24)24) 李建昌은탕평에기반한공정한역사기술을목표로 黨議通
略 을지었다.25)25) 당의통략 은같은소론당파안에서도비판받을정도였
다.26)26)이러한학문배경을전수받은정인보는 조선후기 문화사를서술함에
있어서도 蕩平을 상당 부분 인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蕩平관념은그가조선후기實學史를구성하는데활용되었다.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실학파를 분류하였다.
近世朝鮮學의系派대략三派ㅣ있으니星湖를導師로하고農圃의傳緖까
지아우른一系있고, 李疎齋頤命,金西浦萬重으로부터流衍된一系있고, 霞
谷의學을承受한一系있다. 이三系로말하면或明迹도있고혹潛痕도있으
나諸家의學說을會通하여볼때自然그좇아난바를알수있는것이다. 그
러나三系의趨向이야릇하게도얼없이合하여거의一先生의指授인것같음
은다른緣由가아니라當時朝鮮人의切至한苦悶으로좇아생기는眞正한省
悟 ㅣ 彼此 서로 다를 리 없는 까닭이다.27)27)
24) 鄭東愈, 晝永編 利, 75~76쪽.
25) 李建昌은이곳에서朋黨의폐해를지적하였다. 李建昌, 黨議通略 原論참조.
26) 李建芳, 蘭谷存稿 卷7 「黨議通略跋」, “不悅先生者固疑先生之不能無私而愛先生
者又疑先生之言或近於絀己以伸彼也於此可以見先生之心之公曠然無彼此畛域之分
則又安有所謂黨者哉”
27)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朝鮮古書解題「椒園遺藁」,
28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83
그는근세조선학의계파를세부분으로나누었다. 첫째로李瀷과鄭尙
驥를중심으로하는근기남인그룹, 둘째李頤命과金萬重(1637~1692)을
한파로하는서인-노론그룹,마지막鄭齊斗를계승한소론그룹으로학파
를분류하였다. 이어이들세파가한선생에게서나온것처럼하나의학
문적지향점을가졌음을언급하였다. 지금의관점에서볼때이들세파가
비슷한 입장을 가졌다는 것에는 일정 부분 재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정인보가이들세유파가하나로합치되는것을전망한것은, 그
에게전통적으로내려오던蕩平관념이작용한결과가아니었나생각된다.
정인보는 세 학파에서 어떤 일정한 공유점을 찾고 이를 통하여 진보적인
인물들을 하나로 범주화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정정인보는洪大容과丁若鏞에특히주목하였다.28)28)그가노론 인물홍대
용과 남인 인물 정약용을 개혁파의 두축으로 설정한 것은 조선후기 당파
를넘어새로운 개혁의움직임들이성장하고있었음을 말하고자함과동시
에蕩平관념도상당부분의식한것이었다.이러한사유는正祖가義理蕩
을통하여각당파의의리론속에서어떠한공유점을찾아내려한것과도 平
사실닮아있었다.정인보는노론黃胤錫(1729~1791)과소북鄭喆祚(1730~
1781)의 만남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서술하였다.
덧붙여고질병은黨의사사로움에있었으니무딘칼은날카롭다고하고아
28) 강화학파와정약용과의관계는일찍부터이루어졌다. 申綽(1760~1828)은정약용
과교류하였고李象學(1829~1888)은정약용의학풍을강화학에연결시켰는데젊
어서정약용의 欽欽新書 를익혀거의외다시피했다고한다(李建昌, 明美堂集
卷17 「先府君行狀」). 李建芳은 經世遺表 의서문인「邦禮草本序」를지었다(李建
芳, 蘭谷存稿 卷3 「邦禮草本序」). 이러한것들을계기로정인보는 與猶堂全書
를간행할수있었던것이다. 강화학파는李匡呂가朴趾源과교유하였고(박종채
저, 김윤조옮김, 역주과정록 , 태학사, 1997, 75~76쪽)이상학, 이건방, 정인보
가 다산학과 만나면서 그 학문적 외연을 확장해갔다.
484 역사와 담론 제56집
름다운것은醜惡하다고하여뛰어난기운은막혀종기가되니사방으로바라
봐야서글플뿐이라네. 인간의窄窄함을어떻게해야던져버릴수있을까!어
떻게해야이시름을잊을수있을것인가?시름은끝이없네. 그러하니다시
술로달랠따름이라네. 그런데정철조와황윤석이서로만나인사할때를보면
어찌 일찍이 한 점의 취한 흔적이 남아 있었던가?29)29)
정인보는 정철조가 당쟁으로 인해 등용되지 못하고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는데 황윤석을 만나서는 하나 술에 취한 흔적 없이 임했던 사실을 서
술하였다.이밖에도정인보는崔鳴吉(1586~1647)뿐만아니라金尙憲(1570
~1652)등斥和派도나름대로평가하려고하였다.30)30)이러한서술들을미루
어보건대, 정인보가조선후기문화사를구성함에있어서탕평관념에대
해서많은부분을의식하고있었음을짐작해볼수있다. 이것은鄭東愈,李
建昌에게서보이는것과같은소론이가졌던탕평관념과무관하지않다고
할 것이다.
2) 國家·國土에 대한 의식
정인보의조선후기문화사연구에서국가, 국토에대한의식은주목된
다. 그는많은부분에서국가의식에대한문제를다루었다. 그가다룬대
부분의조선후기문화사는기본적으로이문제를담고 있었다고해도과언
29)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三「鄭石癡歌」
308쪽.
30)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丙子와朝鮮-今古丙子의
再吟味」(1936年1月1-3日東亞日報), 364쪽, “그때는崔鳴吉같은大臣이있어
死生榮辱은度外로하고오직國家存亡을爲하여事事히自當하였고, 金尙憲의
抗志와吳達濟·尹集·洪翼漢등의赴死가自家의念은털끝만큼이라도섞인것이
아니니 어떻든지 後代의 比는 아니다.”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85
은아니다. 그가운데대표적인것을제시하면다음과같다. 정인보는홍
대용의저작가운데「毉山問答」을높이평가하였는데, 특히다음대목에
주목하였다.
말미에 春秋 의內外之故에대해質言하기를, 孔子는周나라사람이오 春
秋 라는것은주나라역사책이다. 마땅히자신을안으로하고다른사람은밖
으로했다.만약에孔子가九夷에태어났다면尊攘의義로저절로마땅히域外
春秋가있었을것이니이른바毉山問答이라는것이이것이다. …선생을알고
자하는자는마땅히그근본과말단,타인과자신을구분하는것에서구하여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선생의 선생된 所以를 볼 수 있을 것이다.31)31)
정인보는홍대용의「毉山問答」에서타자와구분된‘자기’에대한관념을
발견하고자하였다. 이는域外春秋로서명명되는것으로공자가東夷에거
처하였다면동이를위한 춘추 를만들었을것이며 춘추 의근본정신은
‘內外의구분’에있음을말한것이다.정인보는말미에선생을알고자하는
사람이라면마땅히‘本과末’, ‘남과나’의분변에서찾아야할것이니, 이렇
게해야선생의진면목이드러날것이라고하였다. 「의산문답」이담고있
는 많은 지식과 의미 가운데 정인보가특히이점에 주목했다는 것은 그가
복원하고자 한조선후기 문화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었는가를잘 말해준다.
정인보가발견한홍대용에따르면 春秋 야말로나와남을분변하는근대
민족주의관념의모태가될수있는것이었다.과거문명의고향이었던중
국이이제‘타자’로서의중국으로변화하게되는것이며, 정인보는홍대용
에게서 이러한 점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렇듯이 春秋 의의미를기존과는다르게해석한것에는기존 春秋
해석이‘자신을홀대하고남에게는후해지기를바란다’는비판의식에근원
31)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四「湛軒書目錄
序」, 386쪽.
486 역사와 담론 제56집
하고 있었다. 그가 볼 때, 이는 국가가 약하게 된 이유였다.
儒者들은 春秋 를가지고꾸며서, 그폐단이자신은박하게하고남에게는
후하게하는데에이르렀다. 馴致함이지극해져서허약해져나아가지못하고
閥閱이橫橫하여관록의길이좁혀지고서로軋轢하면서자신들의욕심을채웠
다. 이로말미암아黨禍가날로극심해져서학문이당쟁의도구가되어, 비록
두번이나大難을겪었지만뉘우치지않았으니나라가존재한다는것은단지
이름뿐이었다.32)32)
정인보가보기에,중국을높이고자신을夷狄으로홀대하는기존春秋의
관념은국가가떨쳐일어나지못한이유였다. 그러한측면에서조선의지
식인들이 가졌던 사대의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先輩著書를보면“我大明”이라한것이있다. 허, 大明이우리大明이란말
인가.乙支文德이隋兵을擊殲하였다고上國을犯한罪를말한이가있었으니,
허, 그대로再拜就死하였더면快하더란말인가. 어린애말고천치더러물어보아
도나와남과내나라와敵과는모를理가없건만學問이本心의“아틋”을떠난
지라本心아닌말本心아닌일을하여도한때의울리는“非本心的妄說”을附
隋或唱起함을도리어光彩로안것이다. “我大明”이라한그도그마음은大
明을곧제나라로알았음은아니니라. 乙支文德을非議한이도應敵할때를
當하면그말같이上國이라고乞降하였으리라고생각되지아니한다.그러므로
더 虛僞다. 讀者는 이 말씀을 漫視하지 말라.”33)33)
보라. 仁祖丙子南漢의亂에殉明念이어찌하여敵愾心보다세었던가. “우
리”를모른지라“我와 他”의主客을깨닫지못한것이아닌가. 그래도그때는
一二任事의忠良과輕死의介操가있을뿐더러그亂을지나고隱然한驚省이
32)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四「旅菴全書總
叙」, 396쪽.
33)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陽明學演論, 131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87
有識間에돌아서肅·景·英·正四朝에連해 난宏碩이모두“우리”의 統脈을
哀探하여비록微弱하나마거의弘益의古是를일으킬러니마침내謨家計己의
類에게蕩滅되고말아殘線이僅僅부지한다는것이실상保家의餘工이었더니
라. 最後早飢의丙子에야그條約을締結한大官․副官이그歸趣나알았을지
疑問이요, 大院君누르기에만沒頭한一派도結局은家計다. 若干의吏治와孑
孑한苦心人이있기로서니무슨救助함이있었으랴. 누구나過去를曠觀할때
어찌느낌이없으며깨우침이없을수있으랴. 丙子는그대로丙子다. 朝鮮은
“우리”에게昔日이있었고“악착한저”에서今日에미쳤다. 人間의弘益은身家
의 私를 부시고서야 있다.”34)34)
정인보는사대의식은 사실자신의이익을위한것이었고결국당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35)35) 內外의구분과그를통한‘우리’의확립은정인보에
게있어서중요한과제였다. 소론의시세관은이문제와밀접하게연관되
어있다.우선, 청나라와의협상을통하여조선국가를유지하고자했던입
장, 崇禎연호를사용하지않고明나라의멸망을사실그대로인정하고자
하는경향등은중국에대한의리보다는조선이라는‘우리’가가장소중한
것이라는 정인보가 바라보는 당대 시국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36)
36)
34)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丙子와朝鮮-今古丙子의
再吟味」(1936年 1月 1-3日 東亞日報), 368~369쪽.
35)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歷史的膏盲과吾人의一
大事」(1928年9-10月「靑年」), 275쪽, “그런데黨派도순국의黨派가아니라, 속은
區區한私利를다투는것이면서도겉으로는春秋의大義와孔·孟의聖訓을標榜
하여, 다투면서도貌樣도보고軆面도보고남부끄럽지아니하도록莊嚴한戰爭이
었습니다. 다시말하면彼此의黨爭이란假粧對假粧戰이었습니다.猜忌는公正한
疾惡로나타나고,冷薄은가끔敦厚溫良을옷삼아입어한층더毒螫味를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36) 정인보의스승李建芳또한이문제를다음과같이지적하였다. 李建芳, 蘭谷存
稿 卷2 「答梁信黙書」, “來敎謂碑面當書崇禎紀元後某年夫崇禎者明毅宗之年號也
明亡已久 猶書其號 不誠孰甚焉 蓋其始也亦假義理者爲之 以竊附於春秋之義”
488 역사와 담론 제56집
소론은 줄곧 노론의 지나친 대명의리론에 비판적이었다.37)37)
특히, 앞서언급했듯이소론계가중점을둔‘君臣之義’는모든인간관계
의기본을君臣으로재편한다는측면에서중요하다.사회적구성에는다양
한인간관계가있을수있다. 가족관계, 향촌에서의관계,국가공동체관계
등다양한사회적관계가있지만그가운데소론은 군신관계에상대적으로
많은비중을두려했던것으로보인다. 이는北人에서부터연원하여漢黨
등서울·경기지역서인들을통하여소론에게전해진것으로서, 서인 노론
이仁祖反正과정을통하여가족관계를중시하고華夷之辨의윤리체계를
강조했던것과는대조된다. 이러한君臣관계와家族·中華夷狄관계를놓
고벌어진정치적·사상적갈등은인조반정을거쳐17세기후반漢黨과山
黨의 公義·私義 논쟁에 잘 나타나있다.38)38)
한편,國土에대한관심도주목된다.정인보는鄭尙驥,申景濬, 韓致益의
일을많은부분에서기록하였다. 그는정상기의地圖제작에대해서많은
관심을 표명하였으며,39)39)신경준의「疆界考」와같은저작에도많은부분을
37) 흥미로운것은이러한시각이다소앞선시기이기는하지만노론계로서분류할수
있는兪吉濬(1856~1914)의입장과는다소차이를보였다는점이다.유길준은다음
과같이말했다. 兪吉濬, 西遊見聞 第三編「邦國의權利」 7(景仁文化社, 1967),
91쪽, “人이或時勢에未達며公法에全昧야贈貢國과屬國의分別을不立고贈貢
關係擧야屬邦의地位로自處者도有니誰人이其君을不愛며其國을不尊
리오마時勢의大局에未練야足恭禮度로自保策畧을作緣由라弱小
形勢自量야畏㥘極境에至홈으로奮發性力이不萌고憤怒義氣
自呑니其本을推想則亦忠愛苦心에流出야憫念者가此며敬服자가是로
” 이는노론계의사대주의를나름대로변호하는입장을보여주는것이라고볼여
지가있다. 당시다양한시각차이가존재하였음을보여주는사례라고할것이다.
38) 이에대해서는정만조, 「朝鮮顯宗朝의私義․公義論爭」 韓國學論叢 14, 1991;
정만조, 「17世紀中葉山林勢力(山黨)의國政運營論」 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
國史學論叢 , 1992; 정만조, 「17세기중반漢黨의정치활동과國政運營論」 韓國
文化 23, 1999 참조.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89
할애하여서술하였다.40)40)또한그는李義駿(1738~1798)의 種書庵集 에기
록되어 있는白頭山 定界碑와 관련한 한치익에 대한 행적을 詩로 엮었
다.41)41)백두산정계비와관련된북방영토와國家境界에대한관심은정동유
의 晝永編 에도나와있으며,42)42) 南九萬(1629~1711), 洪良浩, 申景濬, 柳得
恭(1749~1807),李種徽(1731~1797)등소론학맥에서줄곧관심가져온사
안이었다.43)43)남인 역사학과 구분되는 것도 바로 북방 영토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소론역사학이북방의역사를적극조선사속에포섭하고자한
반면에 남인 역사학은 주로 압록강 이남에 조선사를 한정하여 서술하고자
하였다.44)44)남인은 분명한 경계를 갖는 압록강 이남의 사적에만 충실하여
自國史를구성하고자하였고소론은국토와국력을강조하는입장에서북
방 영토와 역사에 많은관심을가졌던것으로 보인다.45)45)국가와 국토에 대
한관심은자연스럽게國防과武備에대한관념으로도이어졌다. 미상의
저자가쓴 陰雨備 의해제에서보이는것처럼정인보는武備에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46)
46)
39)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四「農圃問答序」,
400쪽.
40)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四「旅庵全書總
序」, 390쪽.
41)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二「記韓致益事」,
180쪽.
42) 鄭東愈, 晝永編 貞, 54쪽, “兩國定界何等重事而彼則水陸千里之程不憚胼胝我
人則安坐一處 惟其命是從”
43) 조선후기지식인들의변경의식에대해서는조광, 「朝鮮後期의邊境意識」 白山學
報 16, 1974 참조.
44) 남인계는반도의역사공동체체험을중요시했고소론계는북방계즉만주의역사
공동체체험을중시했다는지적이있었다. 이에대해서는다음논문들이참조된
다.박광용, 앞의논문(1997), 86쪽;이만열, 「朝鮮後期의渤海史認識」 한우근박
사정년기념사학논총 , 1981, 457~460쪽.
45)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성산, 앞의 논문(2009), 73~80쪽 참조.
490 역사와 담론 제56집
3) 소론계 心學과 陽明學의 계승
정인보는 주지하듯이 조선후기 양명학파의 존재를 강조하고 이들을 가
장귀한존재로서설정하였다. 「양명학연론」에서崔鳴吉(1586~1647)로부
터張維(1587~1638),鄭齊斗에이르는조선후기양명학파의계보를서술하
였다. 정인보는그들이양명학자체에집착했다기보다는자신들의眞心에
충실했다고하였고이것이조선후기양명학파의중요한특징이라고서술하
였다. 정인보가파악하기에조선후기양명학은주자학의부족한것을채운
다는문제의식으로부터출발했던것이다. 따라서중국양명학을고집하고
그것과 일치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은 이를 잘 말해준다.
霞谷의陽明學이正系의淵源이있다함보다는차라리그時代의反動이라
함이옳을것이다. 霞谷의遺著ㅣ王學闡明以外는대개天文曆算이니이것만
보아도實計로써虛度를改하고明驗으로써懸論을斥하는그心事ㅣ隱映하
며, 가끔가끔正音을가지고古經의疑難處를訓釋함을보아차차高品이있는
學者의心懷, 邦族文化를慨想하는根本精神에로回向함을미루어알수있나
니李疎齋頤命의數學과,좀後輩로申旅菴景濬의訓民正音硏究ㅣ다한氣流
의 振作으로 볼 것이다.47)47)
양명학은 주자학의 부족한 것들을 채우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정인보의
주장에주목할필요가있다.양명학과상수학은중국에서는서로어울리는
사유체계가아니었다.하지만조선에서는주자학에서결여된두가지측면
이라는 점에서 서로 접합될 수 있었다.
46)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朝鮮古書解題「陰雨備」,
35쪽.
47)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朝鮮古書解題「霞谷全書」
18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91
이러한양명학의문제는17세기邵雍象數學과함께진행된心學연구
의전통과깊은관련성을가졌다. 북인들을중심으로진행된이러한연구
경향은근기지역서인과남인들에게전파되었고이것이漢黨을거쳐강화
학파로 이어져갔다.48)48)이계보는정이천과주희를 존중하는흐름과는구별
되었고邵雍, 程明道를존중하면서이어졌다. 이들계파는소옹상수학과
정명도심학에주목하였고주로소론학맥을통하여계승되었다. 이것은
중국과는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4) 소론계 古代史·訓民正音 연구의 계승
정인보는古代史연구와訓民正音에깊은관심을가졌다.그의고대사와
훈민정음연구는소론계를중심으로전승되어온전통적인학술경향과도상
당부분일치하고있었다. 소론계에서는李種徽, 柳得恭을중심으로한북
방고대사연구와崔錫鼎(1646~1715), 李匡師, 申景濬, 鄭東愈, 柳僖등을
중심으로진행되어온훈민정음을중심으로한國學연구경향이있었다.
이러한지적 흐름은 직·간접적으로정인보에게영향을끼쳤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방면의연구,즉자국역사와자국언어에대한연구는근대국
민국가와민족주의가가장역점을두었던두가지주제라는점에서도중요
하다.
정인보는그의저작 朝鮮史硏究 를통하여고대사연구를진행하였다.
바로 앞서 지적하였듯이 고대사 연구는 소론 학풍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
다. 특히북방지역에대한관심은소론계만의특징이었다. 조선후기소론
계고대사연구는조선이갖는中華의연원을고대사에까지확장하려는것
으로서정인보의목적과는물론차이가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조선의
48) 이에 대해서는 각주 16) 참조.
492 역사와 담론 제56집
문화적기원을古代에까지확장하여조선의역사공동체를시간과공간적으
로오랜연원을갖는단일한실체로서만들고자했다는점은공통된다. 정
인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은高族이어서그문화가심원하다. 따라서북으로는부여와고구려, 남
으로는신라와백제, 그 중간에不耐濊·沃沮·挹婁의 屬이모두줄기와가지
가서로이어져있어, 그말을상고하면같고, 그풍속을살펴도크게다른바
가없다. 미루어王儉夫婁의처음까지올라가도그유래가분명하다. 衛滿이
도적질하였다해도遼海를낌에그쳤고, 漢武帝가遠方을招來했을때도, 肅愼
은조공하지않았다. 이른바眞番·臨屯·樂浪·玄菟는그 땅이 요컨대 衛氏의
옛 거점에 불과했던 것이다.49)49)
정인보는조선은오랜 민족이며그 안에서 존재했던 나라들도대동소이
한문화를가진하나의나라라고보았다. 그과정에서외국인‘중국’과의
경계를분명히하였다.그가고대사속에서중국과의투쟁을강조하였다던
가,50)50) 樂浪의遺跡들을“모두가터무니없는거짓”이라고부정하려고했던
것도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51)51)그는고대와 지금은하나의 역사공동체라
는 전제하에 민족적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는 낙랑의 유적을 인정하고자
하지않았던것이다.이러한모습은소론이고대사에주목하면서고대로부
터이어지는조선의역사공동체를구성하려는것과흡사한구조를갖는것
이었다.
그러한 차원에서정인보는유교문화의전통조차조선적인 것으로 만들
49)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三「正誣論下」,
291쪽.
50) 이만열, 앞의 논문(2008), 16~28쪽.
51)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三「正誣論上」,
264~283쪽 참조.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93
고자하였다. 그는孝와三年喪도조선고유의풍속임을강조하였던것이
다. 그는“大連小連의居喪이이미孔子의推尊을받았거니와夫餘時代
遺跡으로만보더라도孝에對하여特殊한國俗을이루었으니三年의喪은
우리固有한禮요漢土人에게배워온것이아니다.”라고하였다.52)52)이는
유학적배경을가지면서도중국으로부터의정신적독립을주장하였던정인
보가‘유학=중국적사유’라는딜레마에서벗어나기위해서언급한것이라고
생각된다. 흥미로운것은이렇게만들어질유교문화의내재성이조선의
유학적기원을古代로소급하여설명하고자했던소론국학의사유와도상
당부분닮아있었다는점이다. 예컨대, 李種徽(1731~1797)는 東史 를통
해서箕子로부터연원하여고구려-발해등조선역사속에내재된고유한
유교적 전통을 강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정인보는한학자였음에도불구하고訓民正音의가치를인지하고
있었다. 그는鄭澈(1536~1593)의國文學과鄭東愈, 申景濬,柳僖의훈민정
음연구에대해서높이평가하였다.53)53) 金台俊(1905~1949)과같은일부좌
파 계열의지식인으로부터그의 한글에대한 보수적인관점이 비판받기도
했지만,54)54)한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훈민정음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깊이
인지하고있었다는것은여타한학자와대별되는지점이다.전통학문체계
에서훈민정음은眞書와諺文의관계에서그위상이인식되었다. 즉한국
52)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庚寅年種種의故事」
(1950年 朝鮮日報), 370쪽.
53) 소론계의東音인식과訓民正音연구에대해서는김영주, 「少論系學人의言語意
識硏究(Ⅰ)- 正音 연구를중심으로」, 東方漢文學 27, 2004;김동준, 「소론계
학자들의자국어문연구활동과양상」, 민족문학사연구 35, 2007;김양진, 「훈곡
(薰谷) 홍희준(洪羲俊)의「언서훈의설(諺書訓義說)」에대하여」, 어문논집 58,
2008; 조성산, 「조선후기소론계의東音인식과訓民正音연구」 韓國史學報 36,
2009b 참조.
54) 최재목, 앞의 논문(2008b), 101~103쪽 참조.
494 역사와 담론 제56집
어, 중국어와같은자국어․타국어의입장이게재되어있지않았고, 단지진
서와언문이라는언어의‘계층성’ 속에서만인식되었다.55)55)하지만정인보는
이와달랐다. 그는음성언어가민족공동체와긴밀한관련성을갖는다는사
실을 인지하고 있었다.56)56)
이로말미암아지구상의사람들은말로써종족이되니같은聲音을빌릴수
가없음이이와같다. 그러므로문자를만들때에는반드시聲音을바탕으로
하게된다. 심지어중국의六書같은것도많은사물에치달아가지만, 흐름에
따라근원을궁구히하면모두성음에의해서관장된것이다. 이렇지않다면
문자와언어가판연히나뉘어서, 그느낀바를담아오래도록통하게할수가
없을 것이다.57)57)
정인보가훈민정음을 높이평가할수 있었던 배경에는소론 학맥에서부
터이어져온훈민정음연구의전통이있었다고할수있다. 鄭齊斗, 李匡
師, 李忠翊, 申景濬등으로이어진성음학의전통을이어鄭東愈와柳僖가
이미훈민정음이갖는표현의정확성과表意性에주목하는등훈민정음에
55) 이에대해서는 이종묵, 「조선시대 여성과 아동의 한시 향유와 이중언어체계
(Diaglosia)」 震檀學報 104, 2007; 金文京, 「漢字文化圈の文字と生活」 史學
63-3, 1994 참조.
56) 鄭寅普에게보이는이러한음성의강조는章炳麟의영향도있었다고볼수있다.
장병린은‘문자의창조및파생은모두音에의한것’이라고말했다. 장병린의이
러한언급에대해서는梁啓超지음․전인영옮김, 중국근대의지식인:淸代學術槪
論 , 혜안, 2005, 211쪽참조. 장병린의이러한주장은그가속해있었던皖派의
한특징이기도하였는데,환파는小學에서‘因聲求意’를주장하여음성의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장병린은皖派小學의대가였다. 장병린의이러한小學연구에대해
서는小林武, 章炳麟と明治思潮-もう一つの近代 ,硏文出版, 58, 2006, 127~130
쪽 참조.
57)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薝園文錄一「影印訓民正
音序」, 92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95
대한 당대가장 혁신적인인식들을보여주었다는점은58)58)정인보가 빨리훈
민정음의시대적의미들을파악하는데도움을주었을것이다. 그러한학
문적 배경은그가훈민정음에 대하여진보적인인식을 갖는데중요한배경
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인보의학문은전통적인漢學을바탕으로하였음에도불구하고근대
이후에도여전히영향력을발휘하였다. 대부분의전통적인한학자들이근
대 이후 자신의 학문 정체성에 대하여상당부분혼란을 겪었음에도 불구
하고정인보는전통학문의위치와범위,한계를명료히인식하면서자신의
정체성을지킬수있었다. 그럴수있었던것은흥미롭게도그가가졌던
‘전통학문’의결과였다. 앞서언급했듯이그의학문적배경은강화학파이며,
더나아가서는소론, 소북계학문체계와맞닿아있었다. 소론, 소북계학문
체계는蕩平을강조하고君臣之義를강조하며富國强兵을주장하는사유체
계였다. 그리고古學에의관심을통하여조선의정신적기원을古로소급
해보려는사유체계를가지고있었다. 더욱이陽明學연구에서보이듯이어
떠한특정한전범을의식하지않고자신의솔직한眞心을존중하려는입장
도보였다. 역사적전범을古에두고다시眞心을통하여전범에서벗어나
고자 하는이러한사유는근대학문과적절하게결합할 수있는학문이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사유체계는, ‘華夷之辨을중시하여국가적경계를인식하지않으
58) 柳僖, 諺文志 序(한양대학교국학연구원영인본), 1쪽, “鄭丈東愈工格物嘗語不
侫子知諺文妙乎夫以字音傳字音此變彼隨變古叶今韻屢舛宜也若註以諺文傳之
久遠寧失眞爲慮況文章必尙簡奧以簡奧通情莫禁誤看諺文往復萬無一疑子無以
婦女學忽之”
496 역사와 담론 제56집
려하고,古學보다는주자학적질서를더욱존중하려고한서인-노론중심
의사유체계’와는대척점에있었다.전통학문을구성한思潮가운데서인-
노론의 사유체계는 근대 이후 새롭게 형성된 민족적 경계를 분명히 할 것
을요구하는, 그럼으로써古代史에주목하고富國强兵의이념을요구하는
사유체계와맞지않을것임은자명한것이었다. 그러한점에서중세주자
학적체계는종말을고할수밖에없었다. 이와는달리정인보의학문배경
이었던소론계학문체계는근대이후새롭게요구된이념들과긴밀하게결
합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물론 소론의학문체계가 근대의이념과 정확히일치하는것은아니었다.
오히려 근대 이념들이 소론계의 학문체계의특정 요소들을호명했다고 보
는것이적절할것이다.가령, 소론계의고대사연구속에서중요했던것은
中華의箕子와그遺風이었다.59)59)심지어 渤海考 를써서민족주의적입장
을보였다고하는柳得恭조차, 眞德女王의「大唐太平頌」에대하여‘穆穆渢
渢雅頌之音’이라고하기도하였다.60)60)그들에게 중화와중국이 갖는 의미는
이처럼근대적의미에서의자국과타국으로 이야기할수없는영역의것이
었다. 하지만鄭寅普등은檀君을불러냈다.61)61)심지어箕子조차그에게는
殷나라箕子가아닌조선檀君의一系였다.62)62)과거로의 소급은 같았지만
59) 조성산, 앞의 논문(2009a), 59~66쪽.
60) 柳得恭, 三韓詩紀 , “泠菴曰 穆穆渢渢雅頌之音”
61) 정인보의 단군론에 대해서는 이만열, 앞의 논문(2008), 10~16쪽 참조.
62)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4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附言, 275쪽, “箕子가朝鮮
의王이되어檀君의後孫과替代된것이아니요“箕子”두글자가실상檀君以來
系世의王稱인“검한” 音譯의略, 轉으로衛滿의亂이일어나기以前은依然히一
系의그대로라함은旣往에論述한바있었거니와西漢의儒士孟喜가周易明夷의
“箕子之明夷”를注하되“箕子”라함은萬物이바야흐로“茇滋”함이라하여“箕와
茇”의同音임을보였으니漢武置郡하던그때箕의音이茇와같았은즉解夫婁의
“解”와解慕漱의“解”가다“箕”의古音과다른音이아니다…殷의箕子는본디
去處가자세치아니하여그墳墓가여러곳으로傳하는분이라이곳의譯音을利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97
강조했던사건과인물들은구별되는지점들이 있었던것이다.63)63)사실여기
에는중국이자신들을皇帝의후손으로,일본이天照大臣의후손으로서자
신들을만들어가는과정과궤를같이하는것으로서근대國民國家이념의
영향이 포착된다.
이처럼 소론계 국학연구는 근대적 사유와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
지만, 그사이에는분명한결절점도동시에존재하고있었다. 그러한점에
서家學의바탕위에소론, 소북의학문적성과들을계승하여근대의가교
역할을 한 정인보는 양자 사이의간극을 채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
일수밖에없었다. 그간극을채우고자했던지점들, 즉결합의지점들이
어떠한모습으로나타났는가는그의문화사를이해하는데중요하다. 정인
보에게결합의지점들은良知, 眞心,實心을매개로나타났다. 다음은그가
良知의이념을 어떻게근대적 현실에적용하려고애썼는지를보여준다.
그렇다. 良知곧글씨쓸줄알고곧그림그릴줄알고곧밥지을줄알고
곧옷할줄알고곧科學者의發明을내고곧政治家의方略을낸다는것이
아니다. 해야할것일진대배우는것이곧良知요, 苦心慘淡하게하여야할것
일진대苦心慘淡하게하는것이곧良知다. 이것만으로는별수없을것같지.
그러나쓸줄모르는글씨를가장잘쓰는체하여分明히배워야될줄알지만
창피하게생각하여그대로나간다하자, 배워야될줄안그良知를저버림이
用하여文字의展轉으로내다세움이漢人의遠略的策動의하나도되려니와그때
라고外國愛戴에甘心하는者없을바아니니이러한譯音을奇貨만여겨스스로
殷箕子의遺民됨을自證하려하기도하였을지라彼此얼리는속에歷史의한허리
가 딴 빛을 쓰게까지 된 것이나 마침내 實을 가릴 수는 없다.”
63) 하지만노론은과거로소급해올라가지않았다. 그들에게진정한역사의시작은
朱子學의도입이후였다. 그들이古代史관련역사서적을편찬하지않은것도이
것과무관하지는않을것이다. 서인-노론계의역사서로는고려시대를다룬兪棨
(1607~1664)의 麗史提綱 이거의유일하다.그들은주자학적보편주의자였고, 그
러한 점에서 민족적 경계는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498 역사와 담론 제56집
아닌가. 배워야될줄을알지만驕惰에익은지라귀찮아배울수가있나. 이러
고보면글씨잘쓸날이없다. 이또한배워야될줄안그良知를저버림이
아닌가.글씨는오히려尋常한藝事라그害적으려니와科學者의發明을가지
고보자. 一點의虛僞이에섞이지아니함이이곧良知의光明의비추인것이
니,速譽를求하여草率하거나奇利를貪하여詐巧하거나이것은다그學을破
亡케하는것이요, 草率도나는알되남은모른다하자,詐巧도나는알되남은
모른다하자,速譽는방장앞에爛然하고奇利는곧뒤를따른다. 남다모르는
이것을나홀로만아는바에는結局스스로속히고말지아니할까. 科學이이
에 결단날 것이 아닌가.64)64)
정인보에게양지는근대사회에서도여전히유효한이념이었다. 이는전
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그는양명학에서眞心·實心을이끌어내었다. 이는양명학이의도하는
‘외부가아닌내부에서구한다’는것,즉외부와의단절을통하여가능한것
이었다. 그는‘자기자신’이라는것을내세움으로써‘내·외의구분’을분명
히했다.그렇게볼때, 양명학은외부를단절시킴으로써새로운내부를구
성하는데도움이될수있는이념이었다. “聖人의道가自性에서自足한
것이라바깥事物에求할것이아니라”65)라는65)말은 독립적인 내부와 주체
가 필요했던 정인보에게 중요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정인보가양명학을 통하여眞心·實心을강조하고내마음을강조했던
것은 외재하는어떠한고전적 전범들을무시하고내안에서진실을찾고자
했다는데에서근대에제기된‘전통과의단절’이라는문제의식과통하는바
가많았다. 하지만그러한동시에전통과근대에대한어떠한편견없이
자신의내면을성찰한다는측면에서‘친전통적’인것이될수도있었다. 다
시 말해 양명학은 전통과 근대의 이원적 구분을 넘어서는 어떠한 행동의
64)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陽明學演論, 172~173쪽.
65)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陽明學演論, 119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499
윤리가될수있었다. 그가‘漢學을고수하며전통적인것을유지할수있
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렇게구축된세계관을통하여그는과거의전통을재구성하였다. 그는
實心의원천인내부를강조하기위해서과거전통학문에주목하지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외부에매몰되지않고내부로향하기위해서이러한선택
은필연적이었다. 새롭게창출된‘과거’의전통이그의내부를채웠다.그러
한점에서다시 그의 과거전통은미래적이고현재적일 수있었다. 그가
“過去의美를말함은現下의績을힘쓰게하고자하는期望心도있으려니
와우리의矜務나努力을이러한往事에서한층더솟굴수도있을까하여
서다”66)는66)말은 그의 과거가 갖는 현재적·미래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내부의과거전통은외부와효과적으로맞서기위해서오랜연원
을가지면서단일해져야했다. 즉초시간적인, 초공간적인어떠한요소로
구성되어야 했다. 그것은 정인보에게 오천년의 ‘얼’로 표현되었다.
사람은藐然한七尺의身이라曠劫의時와大塊의空에對하여생각할때누
구나滄海一粟의微微함을自感하리라. 그러나七尺이局限하지못하는것이
있다. “저는저로서”의그“얼”은가깝게一民族으로부터크게全人類내지天
地萬物에이르러一體인것이니… “저는저로서”의그“얼”이寒天星斗와같이
精凝神射하여能히族類와나와의間膜을裂開하여時와空의限制함을받지
아니할것같으면비록藐然한七尺이로되그廣大ㅣ太虛와一般이라風雲,
虹蜿, 雨露, 雪雹의各樣各色이太虛속에무엇이없으랴마는하나라도太虛의
累됨이없는것과같이外物이비록森列交羅하여可喜可愕의變移가千百萬
億의無窮無盡이로되내본디七尺藐軀ㅣ아니라스스로廣大하고恢濶한지
라 저게 모두 浮雲의 變滅함 같아서 絲毫라도 累될 것이 없다.67)67)
66)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庚寅年種種의故事」
(1950年 朝鮮日報), 370쪽.
67)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3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朝鮮史硏究上, 12~13쪽.
500 역사와 담론 제56집
이처럼얼은시간과공간을넘어서존재하는것이었다. 근대국민국가의
중요한 두가지 전제로서대외적으로는국가간의 경계를대내적으로는 평
등한동지애적관계를 들수있다.68)68)이러한 전제를염두에 두고 볼때 얼‘ ’
은 민족간 내외의 경계를 나누고평등한 동지애적 관계를 설정하는 데 유
효한것이었다고할수있다. 특히, 그중에서도후자의평등한동지애적
관계설정문제와결합할여지가많았다. 이는얼이기초하는전통적사유
와 관련성 속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의얼에대한관점은사실양명학을비롯한新儒學과깊은관련성을
가졌던것으로보인다. 신유학은사람과사람사이의동일성을그무엇보
다도강조하는사유체계였다. 그동일성의근원은理와心이었다. 신유학
에의하면, 사람들은理와心의본체가같기에시간과공간을초월하여어
떠한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古人의 理·心과今人의 理·心이
갖는동일성을강조하면서古와今을하나로연결하려는이러한사유는이
미신유학의사유속에서활발히논의되었던것이다. 다음王陽明의말을
살펴보자.
무릇사람이란천지의마음입니다. 천지만물은본래나와한몸이니, 백성
들의곤궁함과고통이어느것인들내몸의절실한아픔이아니겠습니까? 내
몸의아픔을모른다면是非之心이없는사람입니다.시비지심은사려하지않고
도알고, 배우지않고도능한것으로이른바良知입니다. 양지가사람마음에
있는것은성인과어리석은자의구분이없으며, 天下古今이다같습니다. 세
상의군자가오직良知를실현하는데힘쓰기만한다면저절로是非를공유하
고好惡를함께하며, 남을자기와같이보고나라를한집안처럼보아서천지
만물을한몸으로여길수있습니다. 그러면천하가다스려지지않기를구할지
라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69)69)
68) 小林武, 앞의 책(2006), 58쪽.
69) 王陽明, 傳習錄 卷中179조목, “夫人者天地之心天地萬物本吾一體者也生民之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501
천하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나의 마음입니다.70)70)
心을통하여동일성을강조하는양명학은시간과공간을넘어‘우리’라는
관점을만들었다. 이러한사유는보편적인인간성의문제로시작하였지만,
조금만변형시킨다면민족적동일성을강조하는 사유로 전환될 수있었다.
특정지역에거주하는민족은같은‘魂’(國魂), ‘心’(朝鮮心), ‘얼’을공유한다
는사유가생성될수있는것이다. ‘세계적관점에서의우리’가아닌‘민족
적관점에서의우리’를제기할때이는충분히가능한문제였다.다음의글
들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지점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개古人의일은즉今人의일이요今人의일은곧自家의일이다. 문자상
의언어는곧일용간에서현재행해지는事理이니단지古人이이미행하여문
자에기록한것이다.지금비록때에있어古今의다름이있고자취에있어文
字事物의분별이있고사람에있어古今智愚의구분이있지만그일과그이치
는 아직 일찍이 조금도 다르지 않음이 없었다.71)71)
사람이氣를얻어서태어나면靈이그것을따른다. 비유하자면달이하늘에
있는데物은각각그분수에따라서그빛을받는것이니江湖와淮海에도이
달이요池沼에도이달이요도랑에도이달이요구덩이에도또한이달인것이
다.72)72)
困苦茶毒孰非疾痛之切於吾身者乎不知吾身之疾痛無是非之心者也是非之心不慮
而知不學而能所謂良知也良知之在人心無間於聖愚天下古今之所同也世之君子
惟務致其良知則自能公是非同好惡視人猶己視國猶家而以天地萬物爲一體求天
下無治 不可得矣”
70) 王陽明, 傳習錄 卷中 181조목, “天下之人心 皆吾之心也”
71) 趙聖期, 拙修齋集 卷6 「答林德涵書」, “盖古人之事卽今人之事事理但古人已行之
而記之於文字今雖時有古今之異跡有文字事物之別人有古今智愚之分而其事其理
則未嘗分毫不同”
72) 鄭齊斗, 霞谷集 卷9 「存言中」, “人得氣以生而靈隨之譬之月在天物各隨其分而
502 역사와 담론 제56집
우리를軀殼에서만찾는지라古人이우리가아니요우리가古人이아니지
한번그“얼”에들어가생각하여보면우리의古人이곧우리다. 그러므로우리
古人의往蹟으로좇아그髓血을接할진대이一段血脈이곧내血脈임을驚悟
할것이요, 過去의卓絶, 奇偉,壯特,貞固함을볼때내속어느곳에든지스며
내린무엇이있음을自信하여우리의群星諸烈의雲旗羽蓋ㅣ발닥발닥하는
이血脈속으로좇아서時降時昇함을몸서리치도록解得할것이다. 그런즉過
去 ㅣ 依然히 살아 있는 것이니 뉘 陳타 往타 하는고?73)73)
첫번째인용문은趙聖期(1638~1689)가말한것으로서그는一理를기
반으로 사람 사이의 동일성을 강조하였다. 다음은 鄭齊斗가明人 王鏊
(1450~1524)의말을빌어동일성을강조한것이다.두사람은논의의초점
은다소다르기는하지만, 함께사람사이에서의일관성·동일성을강조하
였다. 이는각기별개로존재할것같은사회구성원들사이에서어떠한
일관성을부여해주는사유체계였다. 정인보의언설도이러한부분과구조
상흡사한점이발견된다. 단, 理나心이아닌‘얼’을통해서였다. ‘얼’에들
어가생각하여보면‘우리의古人’이곧‘우리’인것이다. 그러한이유로과
거는의연히지금에살아있는것이다. 과거가과거로서끝나지않고지금
의현재성을갖는것은이러한이유때문이었다. 그는이를“過去로되우
리요”라고표현하였다.74)74)여기에서‘시간’을소거하면서과거와지금을하
나로연결하고자한모습을볼수있다. 이러한발상은주자학과양명학
속에서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사유형태로서 모습을 달리하여 동아시아에
퍼져있었다.朴殷植(1859~1925)의다음과같은말도이러한추론을가능케
한다.
受之 江湖淮海此月也 池沼此月也 溝瀆此月也 坑塹亦此月也”
73)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3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朝鮮史硏究上, 28쪽.
74)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3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朝鮮史硏究上, 28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503
大抵一切人類가皆天地의氣를受야身體가피고天地의靈을受야心性이핀故
로曰四海의人의皆吾同胞으至若一祖의孫은血脈關係가有즉相愛의情이尤當親切
바라我大東民族은何鄕의産과何姓의派를물론고均是檀祖의血孫이라誰가吾
의親切兄弟가아니리오75)75)
박은식은모든인류는天地의氣를받아서身體를갖게되고天地의靈
을받아心性이피니四海의사람은모두同胞라고하였다. 이를전제로
一祖의혈맥관계안에있는사람들은서로아끼는정이더욱절절하게되
니우리민족은모두단군의혈손이어서모두형제라고하였다. 그가민족
주의 담론을 설파하기전에논리의 전제로 내건 것은 다름 아닌 신유학의
언설이었다. 전민족이하나의심성을갖고같은형제로서인식되게하는
데에는 이처럼 이전 시대의 보편주의 변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부의 균질화라는 것이 근대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담론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라면 이처럼양명학을 비롯한신유학은 그것에적절하게 대응
할수있는사유로서기능할수있었던것이다. 특히양명학은동일성을
전제로개별성을옹호하는사유였지만, 그것에서개별성의문제를제거할
경우강한동일성을설정할수있었다. 이는국민국가의중요한요소였다.
근대일본에서‘和’나‘一’의言辭가계속해서강조되는것은이러한이유
때문이었다.76)76)하지만정인보가강조한 내부는근대일본의그것과는목적
이달랐다고생각한다. 다음1924년2월13일東亞日報에쓴글은그가전
75) 朴殷植, 白巖朴殷植全集 4 「夢拜金太祖」, 동방미디어, 2002, 140쪽.
76) 明治維新이후일본이유교적인도덕을강조했던것은유교가그들이추구한국민
국가의윤리도덕과상당부분일치했다는것을말해준다.이점에대해서黑住眞은
“과거제도를받아들이지않았던일본유교는메이지가되어서야경우神道의祭祀
와협력해서유교적국가체제를구축하게되었다”고지적하였다. 이에대해서는
黑住眞, 「제5장한학: 글쓰기․생성․권위」 창조된고전 (鈴木登美編, 왕숙영옮
김), 소명출판, 2002, 249쪽 참조.
504 역사와 담론 제56집
망한 내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朝鮮은지금重大한時機에있지아니한가. 人物하나라도내어세울때가
아니며, 團體하나라도힘있게되도록後援해야할때가아닌가? 刑事巡査의
觀法을버리고兄弟相助의觀法을取할때가아닌가?그런데現在의우리는外
人에게對하여서는思想이든지事業이든지阿謏에가까운盲目的尊敬과服從
을가지면서, 自國人의思想이나事業에對하여는다만冷然不顧할뿐아니라
도리어積極的으로吹毛覓疵하여기어코이것을誹謗하고埋葬하고야말려하
니實로本末을顚倒한일이요衰運의朝鮮에서밖에볼수없는現象이다. 朝
鮮人은萬民이一心하여相補相助하더라도支撑하기어려운危境에있거든하
물며些少하고無意味한일로嫉視와爭鬪를일삼을진대이어찌실같은民族
的殘命을제손으로끊으려함이아니랴. 朝鮮이살려할진대爲先永遠의內
訌을 永遠히 埋葬해 버려야 할 것이다.77)77)
그가구상한‘내부’는위에서보듯이통합과격려의의미로규정되었다.
외부에 의해서 폭력적이고수동적인 방식으로포섭되지 않기위하여 내부
를수호한다는의미가강하게작용하고있었던것이다. 여기에반제국주의
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조선후기실학에서사회개혁의욕구를, 탕평에서새로운내부에의의지
를, 양명학을통하여전통과근대를잇는사유의가능성을전망하고자하
였던것은조선후기문화사연구를통하여그가의도했던것이다. 그에게
조선후기문화사는 전통을재구성하는 재료인동시에 근대를교정하는 사
유의기원이었다. 전통학문을한한학자로서근대에성공적으로대응하고
새로운 전망을 내놓을수 있었던것에는 그가 새롭게 해석한 조선후기 문
화사가있었기때문에가능했다. 그것은소론계학풍에연원하고있었지만
그대로의것은아니었다. 정인보자신이개발하고발전시킨것이그안에
77)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永遠의內訌-兄弟的友愛
로 돌아가자」(1924年 2月 13日), 287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505
내재해있었다. 그것은‘민족주의’였다. 조선후기소론계학풍의내용을계
승하면서도이를민족주의적측면에서변형함으로써그의조선후기문화사
가 성립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내부를 위한 과거의 창출이었다.
본 글은 정인보의 방대한 한국문화사 연구 가운데 조선후기 문화사에
주목함으로써그의국학연구가가졌던특징들과면모들을살펴보았다.그
는장병린·양계초, 양명학등근대민족주의사조에상당부분영향을받
아國學연구에전념하였지만그것으로만이야기할수없는소론학문을
중심으로한家學의배경이있었다.그의국학연구를온전히이해하기위
해서는조선후기소론, 소북계학문체계에대한이해가있어야한다. 많은
전통학문을한한학자가운데 유독정인보가성공적으로활약할수있었던
데에는 그의 가학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소론의학문체계는일본의國學만큼은아니었지만국가를강조하는근
대 민족주의 담론과 결합할 수 있는가능성들을 많은부분 가지고있었다.
소론의학문체계는領土의문제를중시하였고君臣之義를강조함으로써국
가질서에대한존중의식을가지고있었다. 또한근대의목적과는다르지만
訓民正音연구도하였으며, 蕩平과같은통합의이념도발전시켰다. 정인
보가漢學者로서성공적으로근대에변화된지적사조에대응할수있었던
것은이러한가학적배경이있었기에가능하였다. 소론계학문전통은그가
중국과 일본의 국학연구 전통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본 글은 소론의 학문 속에서 보였던 근대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단서
들을찾아보고이것이정인보에게어떠한방식으로변형되고계승되었는지
506 역사와 담론 제56집
를살펴보고자하였다. 정인보의입장에서는근대국가형성에가장중요
한요소였던‘민족국가’를기획하고이를통하여독립을쟁취하고자하는
목적이가장컸다고생각한다. 그러하기에나와남을나누는문제에관심
을 기울이지않을 수없었다.78)78)나와 남의경계를명확히함으로써일제로
부터 민족이라는 역사공동체를지켜야 하는명확한 역사적과제가 그에게
는있었던것이다. 이러한모습은그가소론계의국학연구들을변형하는
지점이었다.
[논문접수: 2010. 3. 4, 심사시작: 2010. 3. 11, 심사완료: 2010. 3. 30]
78) 鄭寅普가文一平(1888~1936)에게보내는편지에는이러한모습이특히잘나타나
있다. 鄭寅普, 薝園鄭寅普全集5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薝園文錄四, 「與文
湖巖一平書」, 331쪽.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507
Cultural History of the Latter Half of Chosǒn Dyna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