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6-06-30 06: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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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1878년) | 58세(1910년) |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í i Cornet),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
건축분야에서 신의 영역에 도달한 위대한 자
모든 건축가의 롤모델이자 대부
스페인[1]의 천재 건축가. 또 다르게 표현하면 21세기인 지금도 바르셀로나를 먹여살리는 건축가. 일반적인 천재와는 다르게 생전에 이미 대성공한 건축가로서 스페인의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며, 또한 스페인 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본명은 카탈루냐어식으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지만 에스파냐어식인 '안토니오 가우디'로도 알려져 있다.
1852년 레우스(Reus)에서 태어났으며, 부친과 모친은 주물 장인 집안이었다.[2] 전기에 따르면 애늙은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3]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하는데 그꿈은 그의 사후 함께 복원을 꿈꾸었던 친구인 토다가 이뤄낸다[4] 한살위인 둘째형 프란체스코[5]와의 관계는 각별했는데 건장했던 그가 몸이 약했던 가우디를 많이 업고다녔다고... 훗날 이 프란체스코의 존재와 이른 죽음이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된다. 성적도 좋지못하고 몸도 허약했던 가우디는 어느날 한 우수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실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게 그가 건축가의 길을 걷게된 큰 계기였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건축사 자격을 딴 후[6]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서 그의 나이 25살,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당시 본격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면서 수입도 늘게되고 허약했던 몸도 많이 건강해졌다는데 혈기왕성한 청춘의 시기다보니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놀러다녔다고.[7] [8]
1888년 카사 비센스[9]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10]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11]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12]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장례식, 1926년 6월 12일 |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13]한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14] [15]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1918년부터는 평생 동안 설계한 '성 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하고[16] 1926년 6월 7일 성당에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38호 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운전사는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기며 그를 길 옆에서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으나 꾀죄죄하게 입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4번째 운전사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거부당해 할 수 없이 빈민들이나 치료받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 신분을 증명할 게 없어 이 병원에서도 방치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이름을 말하자 비로소 병원 관계자들이 경악하여 가우디의 친구들과 친척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 그대로 남았고 결국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를 죽게 만든 38호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 택시 운전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 가족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ANTONIUS GAUDI | 안토니 가우디 |
세상을 떠나고 불과 10년이 지난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성 가족 대성당의 지하묘지가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고 가우디의 무덤도 훼손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우디의 제자 리카르도 오피소가 간신히 막았다. 그렇지만 몇 달 뒤 경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말았다. 무덤 안에 무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나마 관뚜껑까지 뜯겨나가는 참극은 면했지만 무덤은 파헤쳐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대가 1939년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무덤을 다시 봉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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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파사드에 설치된 조각상 |
2000년대 초엽에는 성자로 시복할 것을 건의하는 운동이 있기도 하였다. 성 가족 대성당의 수난의 파사드 부분을 맡은 수비라치는 이미 가우디를 성자로 간주하여 조각 사이에 가우디의 옆모습을 본따 끼워 넣어 두었다. 하지만 당시 가우디의 친구들은 고인이 보면 비웃을 일이라면서 이런 걸 불쾌하게 여겼고 후손들도 반기지 않고 있다.
매우 아름답고 전통과는 단단히 거리가 먼 건축작품과는 별개로 가우디는 말 그대로 골수 보수 가톨릭 교도였으며 스페인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다 보이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우디 그 자신의 건축스타일은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보다는 치밀한 전통 계승과 일화의 해석, 우의와 의뢰인을 절대적으로 위하는 방식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의뢰인들이 원해서 그런 형태로 지은 것이다. 사실 의뢰주의 면면을 보면 거의 자본가나 귀족층이었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만큼 그 역시 보수주의자이긴 했지만 카탈루냐 지역주의자였으며 스스로도 카탈루냐 밖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거대한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한다. 어렸을적부터 영향을 받아왔던 것일지도.
또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다.
건축 성향은 카탈로니아 전통 복고주의 + 아르누보 정도로 대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취향과 건축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등 서양 전통 뿐만 아니라 인도, 이집트, 중국, 마야와 잉카, 역사 이전의 석기시대 건축들, 오컬트 신비주의, 심지어 곤충이나 식물등 동물들의 형태에서까지 모티브를 따와 건축물에 반영하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나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기존 서양건축에서 고전건축을 리바이벌할 때 나타나는 엄격한 절차나 규칙이 무시되어 가우디만의 독특한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는데, 이건 사실 탈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우디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재발견되어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주류였던 모더니즘을 벗어난 완전 독자적인 외딴 섬같은 건축이었고, 후대에 계승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가우디의 양식은 가우디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며, 카탈로니아의 전통 건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양식으로 만든 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재 건축가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그러한 독특함 속에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일견 멋으로만 보이는 둥근 천장과 나무 같은 기둥들은 무게, 즉 힘의 흐름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며, 효율적인 구조가 아름다운 구조라는 개념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건축물의 기능 역시 충실하게 설계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한마디로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점에서 진정 천재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게다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무에서도 직접 미장공이나, 타일공을 섭외하고 부르는 등 자신의 건축물이 지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쓰는 건축가로 유명했다.
가우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현란한 색감의 타일아트는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조제프 마리아 주졸(Josep Maria Jujol, 1879~1949)과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가우디 본인은 색을 배합하는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실제로 그와 같이하지 않은 가우디의 작품에는 그러한 타일 장식이 없다.
주졸은 나중에 가우디의 스텝이 아니라 독립된 건축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성가족 대성당 같은 큰 프로젝트는 끝내 맡지 못했고, 대공황의 후폭풍으로 건축 경기가 완전히 시망하는(…) 바람에 1932년을 마지막으로 소규모 건축의뢰조차 받지 못한 채 교회나 주택 같은 자잘한 건물 보수만 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술을 잘 못마시는대신 줄담배를 피웠다는데 골초였던듯하다. 함께 일하던 조각가 로렌소가 연기때문에 모형이 뿌옇게 보인다라고 말했을정도.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는지 41살에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시기에도 담배만은 포기안했다고한다... 그랬던 사람이 50살무렵 친구인 토라스 신부와 함께 담배를 끊었다고하니 사람일은 참 알수가없다.
일하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페피타'[17]라는 여성[18]을 사모한적이 있는데 5년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늘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했다고한다. 한참 만나던 시기 그녀는 이혼조정중이었는데 이혼이 성립된 때에 가우디는 청혼을했으나 페피타의 손엔 이미 다른 남자가 끼워준 약혼반지가 있었다한다... 실연의 충격이 상당했던것인지 이후 기우디가 어떤 사람과도 연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않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듯
데뷔 당시 신인이다보니 어쩌다 들어오는 일이라고는 점포장식이 고작이었다한다. 인맥의 중요성을 느낀 그는 카탈루냐주의 과학적 탐방협회[19]라는 업계 모입에 가입, 협회 임원에도 입후보하며 내키지 않는 집필활동과 행사에도 매번 참여하는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한다. 그 결과 회원중 경제계의 거물들이 그에게 큰 프로젝트를 맡기기 시작하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가로 지명받았으며 카페의 내장 디자인으로 점포 디자인상까지 수상하게된다. 가우디같은 거장도 한때 그런시기가 있었으니 그때도 지금못지않게 인맥이란게 상당히 중요했었던듯...
화끈하게 놀고 일욕심에 바쁘게 지낸 청춘이 간뒤 그 10년동안의 세월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20] 이후 36세부터 그는 경건한 크리스쳔의 길을 걸었다.
그의 주변엔 한때 200여명에 달하는 장인들이 있었다한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물품들이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이셨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듯.
괄호는 건축기간입니다.
카사 비센스(1879~1888)
성가족 대성당(1883~건설 중)[21]
구엘 별장(1884~1887)
구엘 궁전(1886~1889)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1888~1890)
카사 칼베트(1898~1890)
벨예스구아르드(1900~1909)
구엘 공원(1900~1914)
미라예스 농장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6~1910)
구엘 술창고
몬세라트 성지 보수공사
팔마 대성당 보수공사
구엘 성지(성당)(1887~1918)[22]
엘 카프리초 별장(1883~1885)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1893)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1892~1893)
첫댓글 제 마음속의 멘토자 안토니오가우디와 레오나르다빈치...
한 건축가 장례식에 1926년때 저토록 먾은 사람이 모여들까?
조경도 어쩌면 문화와 예술인데
현실에 부딛치면 부딛칠수록 우린 손익계산에만 우선하더이다.
오늘도 그분들의 생각을 되뇌이며 운중동에 갑니다.
'가우디 대성당' 이란 이름으로 현재도 계속 축조중에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가 만연하는 우리가 좀 더 배우고 깨우치 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