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다. 월요일에도 원정 걷기를 자주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이상훈교수의 초청으로 오대천 상류를 친구들과 걷고 그의 주택에서 저녁에 있을 파티에도 참석하는 날이다.(고마운 일이다.) 청량리역에서 느지막하게 9시 22분 KTX 열차를 타고 10시 39분 진부역에 내리니 이교수가 마중 나왔다. 원선생(석주)도 같은 차로 왔다. 3인이 승용차를 타고 다른 4인과 만나기로 한 청국장집으로 갔다. 이른 점심을 하고 월정사로 가서 강따라 걷기를 시작한다고 한다.(초청을 받았으니 내가 결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오히려 편하다.)
음식점 마당에 차를 대고 곧 이어 다른 차가 한 대 더 들어오는데 4인의 동행이 타고 온 차이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최교수, 박교수, 홍교수, 오PD 4인 모두 최고의 지식인 출신이다.(퇴직, 명예교수) 갑자기 지성의 밀도가 한층 높아져 긴장이 된다. 청국장백반에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월정사 주차장으로 갔다.(차 2대에 7인 탑승) 주차장에는 오늘 걷기에 동행할 여성 한 분이 미리 와서 기다리는데 우리보다 한참 젊은 분으로 정선의 한 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근무하는 부부장(성이 부씨)이다. 차 두 대가 나가서 한 대를 걷기가 끝나는 지점에 세워 놓고 와야 하기에 두 대를 보내놓고 한 대가 돌아오기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렸다.
드디어 차가 돌아오고 걷기를 시작할 무렵(12:52), 아침 일찍 상원사에 도착하여 선재길(약 9km)을 걷고 합류하는 시인을 맞아 9인이 되어 움직였다.(이 분들은 오대천 걷기가 세 번째인데 나는 처음 와서 3구간에 참석했다.) 시작하는 곳이 전나무 숲길의 시작이고 흙길을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곳이라 다 들 맨발이 되었다.(나는 신발 고수) 키가 큰 전나무 숲속으로 난 멋진 길이다.(안내문을 보니 이 숲은 광릉과 내소사의 전나무 숲과 더불어 한국 3대 전나무 숲에 들어간다고 한다.) 일주문에 거의 다 가서 냇물가로 가서 발을 닦았다. 나도 같이 발을 씻었다. 보기에 얕은 냇물이지만 이 물이 거창한 이름의 오대천이다.
오대천은 북평까지 흘러가서 골지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이 되고 더 아래서 지장천과 합해 동강이 되고, 동강은 영월에서 서강과 합하여 남한강이 되는 스토리이다. 남한강은 영월-단양-제천-충주-여주-양평을 지나며 한참을 흐르다가 양평의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서 드디어 한강이란 제 이름을 갖게 된다.(물론 한강의 모든 지류를 한강이라 부를 수도 있어 오대천도 한강의 일부이겠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한강은 양수리에서 시작하여 임진강을 만나 조강이 되는 김포반도의 북쪽지점까지이다.)
일주문에 도착했다.(13:30) 일주문 위 현판 글씨의 내용과 체가 특이하다. 보통이면 “오대산월정사”라고 썼을 터인데 “월정사대가람”이라고 한자로 써 있다. 탄허스님의 글씨이다. 탄허스님(1913~1983)은 이곳 상원사에서 출가하여 월정사 조실, 오대산연수원 원장을 역임하였는데 동양고전연구로 유명하며 팔만대장경의 현대역 작업에 몰두하여 한글대장경을 간행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64년부터 7년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불교계의 거물임에 틀림없지만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그러다가 오늘 그의 글씨를 만나게 되었다.(뒤의 동림선원에도 그가 쓴 편액이 있다.) 월정사 현판의 여섯 글자는 단순하고 힘이 있다고 느꼈는데 “월”자와 “정”자가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선재길과 같은 분리식으로 찻길을 따르지 않고 강변을 따라가도록 길이 따로 잘 조성되어 있었다. 성보박물관과 왕조실록•의궤박물관 앞에서 우측으로 꺾어 강을 향하는 곳에 조정래작가의 문학관(집필실)이 있었다. 1층 한옥 건물로 담이 닞아 밖에서 건물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어져 있었는데 인기척은 없는 듯했다. 여기부터 오대산 자연명상마을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설명에 들어가 본다.(각 실에 명상하는 방을 두고 디지털 기기는 못 쓴다고 하는데 한 번 묵어보고 싶은 곳이다.)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인근,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 명상마을이다. 현대인에게 휴식과 치유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2018년 문을 열었다. 오대산 자연명상마을은 ‘옴뷔(OMV)’라고도 부르는데, ‘오대산(Odaesan), 명상(Meditation), 마을(Village)’의 줄임말이다. 약 99,170㎡ 대지에 들어선 마을은 숙박시설, 문화체험시설, 정원과 숲길 등을 갖췄다. 2층 목재 건물 숙소는 디지털 디톡스(디지털 단식)가 원칙이다. 객실에 TV와 냉장고가 없고 인터넷도 통하지 않는 대신, 편백나무로 지은 명상실을 별도 조성했다. 투숙객에게는 하루 두 번의 명상 프로그램(오전 명상·저녁 요가)과 조식, 석식이 무료 제공된다. 문화체험시설은 오직 쉼에 주력한다. 육송으로 지은 전통한옥이자 매일 명상과 요가 프로그램이 열리는 ‘동림선원’, 자연식 밥상을 차리는 식당 ‘수피다’, 한국문학의 거장 조정래 작가가 명예촌장으로 거주하면서 인문학의 지혜를 나누는 ‘조정래 문학관’ 등이 그 예다. 주목나무로 만든 미로 정원인 ‘깨달음의 정원’, 고요한 소나무 숲길인 ‘바람의 빛깔 길’ 등 평창의 자연 속에서 명상할 수 있는 정원과 숲길도 여럿 있다.
다리를 건너 강 건너에 한옥으로 잘 지어진 동림선원의 뜰까지 가보았다. 가운데에 동림선원이란 초서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에 두 개의 초서로 쓰인 편액이 있는데 하나는 대도무문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는데 다른 하나가 읽기에 어렵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탄허스님의 글씨를 검색해서 그 편액의 네 글자가 향상일로(向上一路)임을 알 수 있었고 이 건물에 걸린 세 개의 편액 모두 탄허스님의 글씨라고 편하게 추측할 수 있었는데, 낙관의 서명 글자를 보니 탄허가 아닌 듯하여 다시 의문에 휩싸인다.(어렵다.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언가?)
동림선원에도 인기척이 없다. 좋은 시설들을 놀리고 있는 것인가?(영어로는 이러한 공회전을 아이들idle이라고 하여 게으르다는 뜻도 있으니 그 표현이 딱 맞는 듯하다) 동림선원은 월정사 경내 밖에 있어 스님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명상과 요가 프로그램을 돌리는 곳이라고 위에 쓰여 있으니 코로나도 끝나가는 지금 쯤 사람들이 운집하여 이 좋은 경치 가운데 지어진 기와집을 드나들며 선禪이고 學학이고 부지런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의 노파심인지, 사정이 있겠으나 이렇게 훌륭한 시설이 아이들링하며 낮잠 자고 있는 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동림선원에서 돌아 나와 다리를 건너고 우측으로 꺾어 강의 동안으로 남하한다. 명상마을의 숙박시설을 지나는데 조성한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곧 키가 큰 소나무들이 있는 곳을 지나고 단지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길 우측으로 연두색 투시형 철망이 강으로의 접근을 막고 있다. 오대천이 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15층 쯤 되는 흰색의 높은 호텔이 시야에 나타났다. 오대산호텔에서 개명한 켄싱턴호텔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없는 요지에 자리잡았는데 그 설계는 별게 없다. 좀 더 볼품 있게 설계했어야 하지 않았을는지.
찔레꽃과 불두화가 활짝 피어 있다. 원색의 장미가 풍요함과 부를 나타낸다면 흰색의 찔레꽃은 서민들의 조촐함과 결핍을 나타내는 듯 느꼈다. 장미는 우리나라꽃이 아니고 외래종이라는 생각에 오늘 같은 야외 트레킹 길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찔레꽃은 그 반대여서 오늘같은 이 길에 잘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장미가 외래종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느낌이 그럴 뿐. 찔레도 장미의 일종이라 여기면 생각이 헛갈릴 수도 있다.)
강 건너편에 3층의 흰색 카페 건물이 있고 그리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있는데 그 옆에는 정자가 하나 있어 거기서 쉬어 가기로 하여 징검다리를 건넜다. 큰 돌들의 윗면을 평평하게 잘 깎아서 촘촘히 늘어놓아서 자연스런 맛은 없었다. 정자 위에 올라가서 잠시 쉬며 와인 한 잔을 따르고 간식을 먹는데 판소리를 하는 오PD가 단가 중 사철가를 구성지게 불러 제치니 분위기가 고조된다. 박수를 쳤다.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였으니 지성 밀도가 높은 건 당연하나 노래 예능으로 표현되는 감성 밀도도 높을 줄은 예상 못하였다. 내 나름 이 분들과 다시 만났을 때 어떻게 예능으로 기여하여 감성 밀도를 평균 이상으로 유지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된다.(이 생각은 걷기를 끝내고 이교수 댁에 가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여흥을 가질 때 판소리를 들으니 더 절실히 다가왔다.)
강을 건너 강의 서안에 있는 정자로 건너 온 이상 계속 서안으로 가기로 한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큰길을 따라가는데 도로공사를 하고 있어 길이 막혀 강으로 내려와서 우회하였다. 다시 큰길로 복귀하였는데 길은 소나무숲을 지나더니 개활지로 나온다. 강 옆으로 경작지가 제법 넓게 펼쳐져 있었다. 길섶에서 붉은 꽃이 핀 해당화가 나타났다. 붉은 찔레꽃이 아닐까 반가워했으나 옆에서 같이 걷던 최교수가 아니라고 일깨워 준다.(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으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있어 언젠가 붉은 찔레꽃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으나 아직 만나지 못 했다. 송가인이 감정을 실어 부르는 찔레꽃 노래를 듣노라면 노래 가사가 지시하는 촌스럽고 도식적인 시골 풍경이 상상된다.)
들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농기계로 밭이랑을 갈거나 스프링클러를 조작하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과수나무가 보이지 않고 아직 빈 땅이 많은데 파를 심어 놓은 곳이 여기저기에 보였다.(어린 당근 묘를 심어놓은 곳도 몇 군데 보였다.) 길의 좌측으로 간평교가 있는 곳을 지나서 드디어 이교수의 차가 주차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16:24) 세 시간 반 정도에 9.58km를 걸었으니 조금 느슨한 진행이다. 그만큼 여유가 있는 여정인 셈이다.
세 사람이 이교수의 승용차에 타고 월정사 주차장에 가서 다시 차 3대를 몰고 올 동안 남은 사람들은 월정삼거리 못 미쳐 있는 작은 로타리의 가장자리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3대의 차가 도착하고 이교수의 집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일반도로로 속사IC까지 간 다음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평창IC를 지나고 면온IC에서 고속도로를 나갔다. 이교수 집은 면온IC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방문하는 전원주택인데 부인이 요리를 뷔페식으로 차려놓고 일행을 반겨준다. 나만 초면으로 첫 소개 인사를 나누었다. 목각 예술을 하는 조각가 한 분(운곡거사)도 합류하여 주인 부부 2인에 손님이 9인으로 모두 11인이 참석한 파티가 열린 셈이었다. 메인으로 고추장에 묻힌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여러 가지 나물이 나와서 맥주와 함께 포식할 수 있었다.(이교수 부인의 맛있는 음식 제공에 감사해야겠다.)
식사 후 잔디가 깔린 앞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여흥을 가졌다. 이교수가 상주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러주더니 낮에 창을 했던 오PD가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와 행궁견월을 북을 치며 능숙하게 불러주어 흥이 고조되었다. 감성밀도가 최고조에 달하였는데 이어서 시인이 흘러간 팝송 중 하나를 부르는데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하고 갈 시간이 다 되었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흐르는 듯했다. 아쉽지만 자리를 파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승용차 한 대는 4인을 태우고 서울로 갈 예정이고, 시인과 석주, 나 3인은 부부장의 승용차에 타고 평창역을 향하였고 15분 가량 지나서 역에 도착하였다.
평창역에서 떠나는 KTX 열차는 20시 09분인데 역에 도착하니 출발까지 15분 이상 남아서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셈이다. 내가 탈 좌석은 4호차에 있었는데 5호차에 타는 두 사람과 미리 플랫폼에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나는 청량리에서 내리고 두 사람은 서울역에서 하차하기에 이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힘이 세고 빠른 KTX 열차는 맥주 몇 캔에 불콰해진 얼굴을 한 노인을 태우더니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간다. 노인은 4호차 2D 좌석을 찾아서 앉더니 하품을 한번 하고 얼굴에 뜻 모를 미소를 띠운 채 풋잠이 들었다. 지성 밀도에 긴장하고 감성 밀도에 기가 죽은 하루였지만 많이 배우고 느낀 하루였다.
- 후기 -
1. 에너지밀도가 상당한 지역을 걷다.
오대산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과 인문 모두 에너지밀도가 매우 높은 곳이다. 자장이 이곳을 점지하여 5개의 臺에 부처가 상주한다는 보고에 신라의 변방에 위치한 이곳이 영험한 성지로서 신라 영토에 편입되고 신라의 젊은이들은 힘들여 이곳을 사수해야 했다. 부처의 진신사리까지 적멸보궁에 안치함으로써 이곳은 영험한 길지가 되어 오만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 신성시되어 왔다. 상원사와 월정사가 들어서 있고 이 절들은 선과 교에 도통한 고려의 나옹화상이나 현대의 한암, 탄허스님 같은 선지식들이 석주하던 도량이다. 따라서 불교 역사의 밀도가 높다.
현재에는 볼거리로 월정사에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 석조보살좌상이 있고 불교문화재를 관리하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조선은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이 지역에 중요성을 더 부여했는데 이를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역사를 보여주는 왕조실록•의궤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상원사에도 국보가 있는데 국보 제36호인 통일신라시대 동종이 있다.
오대산 일원은 경승지로서의 성가도 높다. 1km에 달하는 500년 수령의 전나무 숲은 걷기 좋은 길로 유명한데 이 숲속에 22기의 부도가 흩어져 존재한다. 국가는 경치가 좋고 생태환경이 우수한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고 금강산을 닮은 소금강이 있고 산꾼들이 꼭 종주하고 싶어하는 우리나라 으뜸 산줄기인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다. 겨울에 비로봉에 올라 본 산악인들은 한국의 산줄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것이다.
빼어난 경치를 보완하는 것은 인문적 상상력이다. 자장이 5臺에서 부처를 보았다는 이야기와 세조가 상원사 가는 길에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설화 등 이적과 상상에 의해 오대산이 가진 에너지는 자연과 인문 간에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러한 명소에 변죽 밖에 울리지 못했지만 10km 정도를 걸어보는 영광을 가졌다.
2. 오대천 상류에서 강의 기울기를 계산해 보다.
휴대전화에서 산길샘 앱으로 GPS 자료를 얻었다. 처음 걷기 시작한 지점에서 길의 고도는 해발 643m이고 걷긱 끝난 지점에서 길의 고도는 552m였다, 전체 거리가 9.58km이므로 경사도(탄젠트 값)는 (643-552)/9580 인데 반올림하여 0.95%가 된다.(러프하게 말해서 강의 경사도가 1%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강변을 걷는 동안 몇 개의 보를 볼 수 있었다.
보는 보아래 지역의 농토에 용수를 공급하는 목적도 있지만 물을 가두고 천천히 흐르게 해서 물이 풍성하게 보이게 하는 경관효과도 있다고 생각된다. 큰 보라고도 볼 수 있는 댐의 경우 이 경관효과는 압도적이다. 예를 들어 보면, 소양호의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수면은 소양댐의 효과이고, 양수리에서 보는 풍부한 물은 팔당댐의 효과이다.
오늘 구간에 서너 개의 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강의 기울기가 1%의 경사만 되어도 물이 너무 빨리 흘러 보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1% 경사이면 강의 길이가 1km만 되어도 고저 차이가 10m나 되므로 보 하나의 높이를 1m로 잡으면 10개의 보가 필요하다? 뭔가 이상하긴 하다.) 느릿느릿 흘러서 보가 필요 없을 것 같은 미시시피강의 경사도는 얼마나 될는지 급 궁금해진다.
3. 대중이 주목하는 장소에는 명품 건물이 필요하다.
강변에 불쑥 솟은 호텔 건물이 보였다. 15층 정도 되는 흰색 건물인데 한 쪽 귀퉁이가 무너져 낮아지고 엘리베이터 탑이 객실 부분과 부조화되어 상상력이 결여된 타작으로 보였다. 오대산 주변의 시골에서는 제법 높고 월정사로 들어가는 큰길가에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건물이므로 더 잘 설계되었더라면 좋을 뻔했다. 명품 건물이 서야 할 곳에 대중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건물이 서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어떤 건물이 지어져야 했을까? 두 개의 예를 들어 볼까 한다.
하나는 독일 퓌센에 1892년 세워진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디즈니랜드에서 베낀 것으로도 유명한 이 성은 물론 산 위에 지어졌기에 평지인 이곳 오대산 입구에 호텔 건물로 적용하려면 변용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신을 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서양건축의 정수이지만 테마파크 건축에서 자주 채택되고 변용되며 세계인 누구나 좋아할 만한 외관이다.
또 하나는 한국 강릉에 있는 씨마크 호텔로 2015년에 구 호텔 자리에 재건축되었다. 국제주의 양식으로 날렵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국제주의 양식은 서양에서 발명되었지만 동서양에서 공히 자주 채택되고 있는 스타일이다.
둘 다 서양이 원류인 건축이지만 다른 디자인으로 한국의 고건축 스타일을 택할 수도 있겠다. 한옥이 고층으로 지어지기엔 힘들다지만 유능한 건축가라면 충분히 좋은 건축물을 설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4. 오대산의 중심 영역에서 강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가다.
이번 걷기는 오대산의 중심에서 점점 밖으로 나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오대산의 최중심은 상원사 위의 적멸보궁이 아닐까 한다. 조선시대 한강의 발원지로 신성시되던 우통수도 강의 입장으로 볼 때 가장 안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중심의 다음 바깥이 상원사이다. 상원사 밖의 월정사도 위계가 상원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선재길로 연결되는데 선재길은 철저히 보도가 상원사 계곡의 물길을 따라서 설계되어 길과 강이 분리되는 외부의 경우와는 다르다.
월정사 경내를 벗어나면 강과 길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분리되며 사찰과 관련된 시설들을 볼 수 있어 더 밖의 다음 영역과는 구별이 된다. 다음 영역은 일반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종교적 색채는 퇴색되며 강과 길의 만남과 헤어짐은 철저히 지형의 생김새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강 옆으로 보도를 낼 수 있는 경우에는 보도가 강의 바로 옆으로 설치되지만 강 바로 옆이 절벽인 경우 등 지형적 요인으로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도보는 강과 헤어져 큰길인 찻길을 따라가게 된다.
위의 에너지이론에 비추어 보면 이 날 걷기는 에너지 밀도가 높은 곳에서 에너지 밀도가 낮은 곳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이다.
5. 지성 밀도는 귀한 것인데 불편하기도 하다.
명예교수이지만 전직 교수이자 박사인 분들이 4인이나 되고 교사, PD, 간호사, 박사후보의 최고 지성인들을 지근에서 보게 되니 지성 밀도가 매우 높아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그 동안 산에 다니는 사람들과만 어울렸기에 지식 밀도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 했는데(지성 밀도가 높은 자리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갑자기 8인의 선지식(덕이 높은 스님을 뜻하지만 여기선 최고의 지성인을 빗대어 말함)을 맞닥뜨리게 되니 긴장이 되고 할 말이 없어진다.
대신 이 기회에 무언가 배워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를 배웠다. 우선 “1전2솔3리5잣”이다. 바늘잎나무의 종류를 구별하기 위해서 필요한 줄임말이라고 한다. 잎의 한 묶음 단위가 몇 가닥의 잎으로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풀어준다고 한다. 한 묶음에 잎이 하나이면 전나무, 둘이면 소나무, 셋이면 리기다 소나무, 다섯이면 잣나무라고 하는데 원선생(석주)이 가르쳐 준 것 같다.
다음은 한자 초서읽기에 “타작읽기”가 있다고 한다. 도리깨로 콩 타작을 할 경우 콩 꼬투리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타격하지 않고 그 주변을 타격하더라도 꼬투리에서 콩알이 튀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인데, 읽기에 난해한 초서의 글자 무리가 나타날 경우 우선 아는 글자들을 근거로 어림짐작으로 읽은 다음 다시 추론을 거듭해서 결국 정확한 읽기를 완성하는 방법을 타작읽기라고 부른단다.(박교수가 가르쳐 줌)
길 가에 노란 꽃이 피었다. 자주 보는 꽃인데 고들빼기라고 한다. 잎이 삼각형이다. 최교수께서 고들빼기와 씀바귀의 다름을 설명해 주었다. 꽃은 둘 다 노랗고 비슷한 모양이어서 꽃만으로는 구별이 힘들어서 잎을 보아야 한다. 씀바귀 잎은 길고 톱니형이다. 마침 길가에서 두 식물이 한 자리에 자라고 있는 곳이 있어서 둘을 비교해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식인들과 같이 회동하는 것이 배우는 것은 많지만 긴장이 되어 불편할 수도 있으니 자주 이런 자리에 끼면 안 될 것 같다. 혼자 다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인 왈, “소인은 홀로 있으면 일을 저지른다”고 하였으니 어쩔 것인가? 혼자 있으려면 군자가 되어야 행동거지가 올바르게 될 수 있다는데 군자의 길인 듯 쉬울 손가?
6. 감성 밀도를 기르자.
이 그룹의 지성 밀도가 높은 것은 참석한 분들의 학력을 볼 때 익히 짐작할 수 있었으나 감성 밀도까지 높을 줄은 생각 못 했었다. 걷기하는 중 정자에서, 식사 후 이 교수댁 마당에서 이교수, 오PD, 두 분의 판소리를 들으며 예술적 감각과 수준도 높은 것을 알았다. 목공예를 하는 은곡거사(저녁 식사에만 참석)는 미술적 감각은 당연히 갖고 있고 판소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분들도 오고가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그들의 예술에 대한 애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 재주 없이 듣기만 하는 나를 점검해 보았다. 무얼 갖고 이 분들과 같이 어울려 예술에 다가간다? 팝송이나 불러 볼까?
7. 오대산이 주는 상상력
오대산의 변죽만 울려 본 간단한 걷기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 거리를 몰고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100% 정교하고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때 사람들은 공부가 부족하다고 한다. 오대산에 발을 들이면 우후죽순으로 떠오르는 상념의 하나하나를 더 음미해 보고 내게 주는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선 더 공부해야 하고, 여러 번 이곳에 와서 피드백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대산은 신라 때나 지금이나 변방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우수한 불교문화가 존재하고 관광이 흥성함은 뛰어난 자연환경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뛰어난 자연환경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감시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겠다. 같이 한 선지식들도 환경 이슈에 민감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