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 SHOT] IS가 점령한 팔미라 유적 이 모습 다시 볼 수 있을까 |
| 1 팔미라 전경.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 뒤로 도시의 중앙로인 열주대로(列柱大路)가 보인다. 대로의 주랑에는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2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테트라필론(Tetrapylon). 열주대로 중간의 광장에 장식용으로 세웠다. 3 로마 양식의 고대 원형극장. 옛 모습으로 복원 돼 요즘도 공연을 할 수 있다. IS는 최근 이곳에서 정부군을 도운 시민들을 처형했다. 4 건축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2세기 후반에 건축된 기념문. 열주대로가 30˚ 가량 꺾어지는 지점에 세워져 평면도가 V자 형태를 하고 있다. | |
팔미라(Palmyra) 유적, 이 모습 다시 볼 수 있을까 |
| | | 5 도시 외곽의 귀족들 무덤. 6 팔미라 최후의 영광을 이끌었던 제노비아(240~275) 여왕의 이름이 새겨진 기둥. 둘째줄에 그리스어로 새긴 그녀의 로마식 이름(율리아 아우렐리아 제노비아)이 보인다. 7 날개를 단 신상. 도시의 지배세력이 바뀌었을 때 파괴되었다. 현재도 이런 유적훼손이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 | 팔미라(Palmyra)는 시리아 사막의 고대 도시다. 수도 다마스쿠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다. 메마른 사막에 도시가 번창한 것은 오아시스이기 때문이다. 팔미라는 ‘야자수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오아시스가 없었다면 동부 지중해의 항구도시들과 동방의 페르시아를 잇는 무역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의 실크도 이 도시를 거쳐 로마에 전해졌다.
도시의 주인은 제국의 흥망에 따라 변했다.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그리스 계열의 셀레우코스 왕조, 로마제국이 도시의 역사를 써나갔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로마의 영향권에 편입됐지만 로마와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 사이에서 독립성을 유지했다. 3세기 중반 제노비아 여왕 치세에 판도가 최대한으로 확장됐다. 로마가 혼란한 틈을 타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까지 장악했다. 그러나 로마의 내분을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파괴당하고 다시는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팔미라(Palmyra)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사막에 펼쳐진 폐허는 그리스와 로마, 페르시아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의 보고다. 이곳을 지난 달 이슬람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가 점령했다. 친정부 성향 시민 수백명이 살해당하고 시리아 정부는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수십차례 공습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도 들려온다.
세계의 이목은 팔미라 유적의 안전여부에 집중됐다. IS가 이라크 님루드, 모술의 박물관에서 고대 유적을 파괴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팔미라를 점령한 IS측은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조각상은 파괴하겠지만 유서깊은 건축물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전기와 빵을 공급하며 환심을 사려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결국은 유적을 파괴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고대에 ‘사막의 신부’ 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아름다운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는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2011년에 시작된 시리아 내전과 뒤를 이은 IS의 점령으로 팔미라의 고대 유적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고 있다. 사진은 2008년 고대 로마세계를 여행할 때 촬영했다.
- 중앙선데이 | 제430호 | 사진·글=최정동 기자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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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고대의 벤처 도시 시리아 팔미라 |
| '고대' 팔미라의 대상 행렬 (팔미라<시리아> AP=연합뉴스) | |
고대의 벤처 도시 시리아 팔미라 (Palmyra) |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33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마케도니아 국왕, 이집트 파라오, 페르시아 국왕에 자신이 만든 아시아 국왕까지 겸했다. 아무도 젊은 국왕의 유고를 예견하지 못했으며, 자식도 없었다. 왕비인 중앙아시아 박트리아 공주 록산나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임신하고 있었을 뿐이다. 임종 자리에서 후계자를 묻는 질문에 알렉산드로스는 말했다. “가장 강한 사람에게.”
모호한 발언은 ‘디아도코이(계승자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필사적인 경쟁을 불렀다. 부하 장군인 안티고노스 · 카산드로스 · 프톨레마이오스 · 셀레우코스 · 리사마코스는 왕위를 놓고 40년에 걸쳐 싸웠다. ‘서양판 삼국지’로 부를 만한 ‘디아도코이의 전쟁 (기원전 322~기원전 275)’이다. 영웅담에 합종 · 연횡 · 배신 등 희비극적 요소를 두루 갖춘 서사극의 시대였다. 결국 본토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던 최강자 안티고노스를 제거한 나머지 4명의 디아도코이가 마케도니아 · 이집트 · 시리아 · 트라케 (발칸 동남부와 소아시아 반도 서부)로 나누어 각자 제국을 이뤘다.
그중 셀레우코스 제국(기원전 312~기원전 63)은 지금의 시리아를 중심으로 이라크, 이란, 터키 동부, 아르메니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에 파키스탄 서북부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고대 그리스와 중동, 중앙아시아에 인도 문명까지 용광로에 녹인 ‘헬레니즘 문명 제철소’ 역할을 맡았다. 중요한 것은 제국 동부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박트리아인과 문화적으로 결합해 박트리아-그리스 국가와 문명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북 변경주에 위치한 간다라를 지배했다. 이 지역에서 불교와 그리스 조각문화가 융합돼 나온 간다라 문명은 한국까지 전해졌다. 경주 석굴암이 그 유산의 하나다. 한국의 불교문화는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융합이자 전승일 것이다.
서로 다른 문명권이 합쳐져 셀레우코스 제국이라는 한 나라가 됐으니 교역도 활발해졌다. 타문명권에 대한 호기심은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교역은 고대 세계의 벤처였고, 이는 신흥 무역도시를 만들었다. 대표주자가 시리아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Palmyra)다. 지리적으로 지중해권과 메소포타미아권, 북아프리카권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팔미라는 교역으로 고대의 ‘실리콘밸리’가 됐다. 팔미라는 실크로드의 서부 중계지점이기도 했다. 나중에 로마의 일부가 됐으나 무역은 여전히 번성했다.
이 도시에는 아람인 · 아모리인 · 아랍인이 유대인, 그리스인과 함께 거주했다. 당시 공용어는 아람어였다. 공용어의 존재는 세계화의 증거다. 아람어는 당시 중동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 공영어)‘였다. 유대인들도 바빌론 유수 이후 헤브루어 대신 이 언어를 모국어로 썼다. 예수도 아람어로 말했다고 한다. 멜 깁슨이 2004년 내놓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와 유대인들은 아람어로 말하고, 로마인들은 라틴어로 말한다.
경제적 번영은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으로 이어졌다. 팔미라 유적은 그리스 · 로마 양식에 페르시아 양식을 합친 문화융합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개방성이 만든 고대세계의 세계화다. 그런 곳이 최근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에 점령됐다. 반문명적인 반달리즘를 일삼아온 IS로부터 팔미라를 지키는 데 국제사회가 나서야 한다. 팔미라는 인류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세계화 유산이기 때문이다.
- 중앙선데이 | 제429호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 2015.05.31
팔미라 기둥
팔미라의 원래 이름은 타르모르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근처에 대추야자(palm)가 흔하다는 이유로 팔미라(Palmyra)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게 정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팔미라의 한켠엔 대추야자 나무가 무성합니다.
2007년 발굴됐던 팔미라의 조각상: 낙타를 이끄는 소년과 젊은이의 모습에서 동서양문명이 만나는 무역 중심지였던 팔미라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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