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2차·3차 소송 항소심 선고 예정
5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대법원 승소 시민 보고대회 개최
원고 및 일본 지원단체 관계자 참석...사죄 배상 그날 위해 결의 다져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미쓰비시중공업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지난 달 29일 대법원에서 승소한 가운데, 2차, 3차 소송 원고들의 항소심 판결도 잇따라 선고될 예정이다.
광주고등법원 제2민사부(최인규 부장판사)는 오는 5일(수) 오후 2시 204호 법정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심선애(沈善愛.1930년생)·양영수(梁榮洙.1929년생)·김재림(金在林.1930년생) 할머니와 1944년 일본 나고야로 끌려갔다 대지진으로 사망한 고 오길애(吳吉愛) 씨 유족 오철석(吳哲錫.1936년생) 등 4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사건을 선고할 예정이다. (사건번호: 광주고등법원 2017 나 13822 양영수 외 3명)
※원고 2명(김재림할머니, 유족 오철석) 참석 예정. 병환 중에 있는 심선애, 양영수 할머니는 원고를 대신해 가족 참석예정
광주지방법원 민사11부는 지난해 8월11일 미쓰비시 측에 심선애·양영수 할머니에 각 1억 원, 김재림 할머니에 1억2000만 원, 오철석 할아버지에 1억50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또한 광주지방법원 항소부는 오는 14일 303호 법정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영옥 할머니(金英玉.1932년생)와 1944년 일본 나고야로 끌려갔다 대지진으로 사망한 고 최정례(崔貞禮) 씨의 유족 이경자(李敬子.1943년생) 등 2명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사건을 선고할 예정이다. (사건번호: 광주지방법원 2017나59993 이경자 외 1명)
지난해 8월 8일 1심에선 미쓰비시 측에 김영옥 할머니에 1억2000만 원, 유족인 이경자 할머니에 325만여 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고 판결한 바 있다.
한편, 오는 5일 광주고등법원 판결 직후에는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이날 판결 결과에 따른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며,
저녁 7시부터는 광주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대건문화관에서 소송에 참여한 원고와 일본 시민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관계자, 시민과 학생 등이 참여한 가운데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대법원 승소 시민 보고대회’ 행사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날 대법원 승소 시민 보고대회에서는 일본 소송으로부터는 19년, 한국 내 소송으로부터는 6년여 만에 대법원 최종 승소를 이끌어 낸 역사적 의미를 살피는 한편, 대법원 판결 이후 반발하고 있는 미쓰비시 측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한 결의를 다질 예정이다. (☎문의: 062-365-0815)
<첨부자료>
◯ 2차 소송 원고들 사연
◯ 2차 소송 1심 판결문
◯ 대법원 승소 시민 보고대회 – 웹 포스터
2018년 12월 3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이국언·안영숙·김정희)
<2차 소송 원고들 사연>
■양영수(梁榮洙. 1929.7. 90세. 광주 대성초등학교 1회 졸업. 양로원 생활)
“독립운동에 관여하셨던 아버지는 바깥 일로 늘 집을 비우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머니한테 “아버지 어디 가셨느냐”고 하면 서울에 가셨다고만 했습니다.
5학년 무렵 어느 날 어머니가 솜바지를 싸서 어디 다녀온다고 해서, 몰래 어머니 뒤를 따라가 보니 경찰서 유치장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일본 순사가 항상 아버지 먼저 끌고 가거나 찾아 다녔습니다.
1944년 5월 어느 날, 정신대에 지원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빠는 징용으로 끌려가 집에 없고, 아버지가 늘 쫓겨 다니면서 어머니는 뒷바라지 하시느라 가정 형편도 말이 아닌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일본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를 덜 괴롭힐 것 아니냐. 내가 좀 힘들더라도 집안이 좀 편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순진한 생각에…. 그때 열 네 살이었습니다.”
■오철석(吳哲錫. 1936.11. 83세. 목포 산정초등학교 졸업 故오길애의 유족)
“누님(吳吉愛)은 1944년 12월 7일 지진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데없이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집안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비탄에 빠져 있던 부모님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누님을 빼앗긴 한과 분노 때문에 저는 동경 올림픽을 하던 해 도쿄를 방문해, NHK에서 한국어 통역을 하던 친구와 함께 한일회담 당시 김종필과 오히라가 비밀 회담을 했다는 요정까지 일부러 찾아가보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마주잡고 과거의 잘못을 털고 좋은 관계로 발전해 가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덮고 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심선애(沈善愛. 1930.6. 89세. 광주 수창초등학교 졸업. 요양병원 생활)
“1944년 3월 국민학교 졸업 후 얼마 동안 가사 일을 돕고 있던 중이었는데, 1944년 5월경 주위로부터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출발 당일에서야 부모님께 일본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더니, 집에서는 한 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남달리 저를 예뻐하셨던 할머니는 “다 큰 자식 일본 보내 죽일 셈이냐”며 그 자리에서 혼절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가족한테도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얘기하지만, 일본 갔다 온 사람은 모두 일본군을 상대한 위안부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창피해 말을 할 수 없었고 항상 조심해 왔습니다.”
■김재림(金在林.1930.2. 89세. 화순 능주초등학교 졸업. 요양병원 생활)
“광주역에 나가 보니 같이 가기로 했던 친척 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다음 역이 고향인 화순 능주(和順 綾州)역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늘 보던 고향 역을 지나가려니까 뭔가 잘 못 된 것 같아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고향 화순에 계신 어머니한테 어디 간다는 말 한마디 못 전하고 가게 된 것이 그렇게 죄스러웠습니다. 순천을 거쳐 여수까지 가는 동안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가난이 무엇이기에, 결국 있는 사람은 뒤로 쏙 빠지고 나처럼 없이 사는 사람만 이렇게 당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일본 다녀 온 것을 몇 몇 사람은 알고 있었는데, 도중에 그 소리가 시어머니 될 사람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결혼을 엄청 반대했습니다. 처녀 몸으로 일본 갔다 왔다는데 몸이 온전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본에 다녀 온 사실은 집안 형제간하고 아들과 딸만 알지, 아무리 친한 사람도 지금까지 얘기를 못했습니다. 자꾸 일본군 위안부 생활하다 온 것으로만 생각하니까 아무한테도 그 말을 안 해 왔고 지금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십 다 된 상태에서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일본에까지 데려다 그 고생을 시켰으면, 당연히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잘못했다고 사과도 해야 합니다.”
14가합1463(170811)김재림외3 판결문.pdf
15가단513249(170808)이경자외1 판결문.pdf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2AA475C04AC7811)
첫댓글
내일 2시 항소심 선고 후에 법원 앞에서 (2시20분~2시30분경) 관련 기자회견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많은 취재 바랍니다~^^